담론의 공간 : 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담론의 공간 : 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담론의 공간 : 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이정우
출판사 : 민음사
이 책은, 현대 철학의 본 자리를 과거 철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정립을 시도했던 철학자 미셀 푸코의 사상을 소개한 글이다. 과거 철학은 인간 사회에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데서 어느 정도 자체 만족을 얻었다면 오늘날에 와서 철학의 이런 아집은 무너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애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엄청난 위력과 설득력에 탐복하는 시점에서 철학이 이런 과학의 엄청난 업적을 마냥 시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 바른 철학 정립이 요청된다. 즉 자연 과학의 빛나는 실적과 거기에 버금가는 여타 학문들의 과학적 해석들은 기꺼이 수용해서 서로와 서로 간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철학이 떠맡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이 살길이다. 보편적 진리 규명이나 형이상학에 몰두하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마련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성과를 존중해 주고 협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철학으로 변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과거의 철학이 오늘날 시대에서 어떤 한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가?
푸코는 르네상스 이 후를 고전시대로 본다. 르네상스의 언어는 기호가 아닌 상징이었다. 암호처럼 의미를 은근히 숨겨 놓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 시대에 오면 기호가 되는데 이는 언어와 사물이 직접 지시하는 식의 일 대 일 대응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분석 정신이 일어났다. 여기에 어떤 질서가 형성되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를 명백하게 구별하게 된 것이다. 혼합을 배제하고 '동일성/차이성' 체계를 이룬다.
진리란 이제 표를 통해서도 배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일반 문법에서 동사나 명사의 기능은 명확히 도식화되었다. 분절→지시→파생→서술 순서로 배치 능력이 파급된다. 그 밖의 학문인 자연사를 탐구하는 것도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자연물들을 공간 속에 배치하는 구조 작성에 머물렀다. 부를 분석하는 면에 있어 화폐라는 것도 하나의 기호로서 교환 매체적 기능으로만 다루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 드디어 주체 의식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푸코는 근대라고 부른다. 그 동안의 인식의 기반이 흄과 칸트에 의해서 철저하게 검토되었는데 주체 의식의 부각은 지식과 사유를 감싸고 있었던 표상의 공간이 와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보다 치중하는 사고를 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 요소를 가지고 모든 것을 검토한 것이다.
시간 요인이 생명계에 내부적 인자로서 작용됨에 주목하였다. 시간과 인간의 노력과 생산 문제를 서로 연계하기 시작했다. 부의 가치는 이제 토지가 아니라 효율적인 생산에 의해 좌우되기에 경제 주체는 경제인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노동이 관권이다. 언어학에서는 해부학적, 진화론적 사유가 도입된다. 동사들의 어근들은 이제 사물의 기원이 아닌 인간들의 욕구와 과정과 욕구와 의지의 기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언어가 확산된다. 문학도 탄생된다. 실증적인 내용들이 쏟아지고 언어의 분산이 일어나면서 학문의 세계는 전반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제 인간은 유한한 실증성의 담지자이자 동시에 그 실증성의 선험적 근거라는 이중적 역할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의 형성이 근대성의 톤이다. 인간을 분석한다는 것은 곧 표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표상이란 인간 인식의 결과이다. 인간이 왕의 자리에 들어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주체 의식은 불안정하다. 그래서 보다 정교하게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모든 경험을 인간의 신체가 지각하는 지각의 의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험된 자아와 선험적 자아가 뒤성키게 된다. 즉 현상학자가 경험적 사실들은 정지시키고자 하여도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세계와 끊임없이 교차하는 신체와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인간의 유한성 극복을 위한 노력은 역사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헤겔과 하이데거가 이런 주장자들인데, 인간은 시간 안에 버려져 있기에 유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결여되어 있던 것의 완성으로, 충만성의 재건으로서 그 역사를 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마지막 진화체이다. 역사를 인간화하고 인간을 역사화 함으로서 역사 안에 있는 영원한 동일자와 궁극적으로 합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에 대해 여전히 약속 받을 주체상 남겨 놓고 있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실증적 시간이 아닌 존재성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실증적 역사 안에서는 인간이 정초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참 존재성은, 현존재라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부터 도리어 무(無)로의 붕괴를 통해 비로소 회귀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근대적 사고들은 결국 역사철학의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지나지 않게 된다.
푸코는 이 모든 원인을 기존의 언어 체계 자리에 인간이 대신 들어차 들어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규정하고 다시금 담론(언어 소통 체계)세계에서 인간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 놓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구조주의와 관계있다. 즉 현대의 철학은 객관적 선험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의식에 선험적인 특권을 부여하는 철학은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하고 실증적이면서 동시에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면서도 실증과학을 넘어서서 무의식 수준까지 파헤쳤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결과는 주체철학에 대한 타격이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죽음과 욕구 법칙을 실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노동과 언어를 조성하는 가능 조건으로 제시하므로서 이중적 자아성을 와해시켜 버렸다. 이로서 주체철학에 의해 실증적으로 이중화된 자아는 이제 무의식적 인식에 의하면 도리어 타자화(他者化) 된다. 하지만 푸코가 제창한 고고학은 이런 구조주의를 넘어서서 불연속적 역사관을 도입했다. 즉 역사의 나선형적인 모델을 불연속적 계열들의 모델로 치환하므로 역사적 사건을 복수화(復數化)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경험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면서 언어적 담론 체계를 통해서 관계 맺도록 해주는 그러한 숱한 규칙적 공간을 푸코는 상정하고 있다.
주체 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언어의 공간에서 발생된 불연속성과 위상의 차이 남을 고려하지 않는 사고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 담론의 세계에서 '누가' 말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말하는 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푸코의 고고학은 일종의 언어 지상주의이다. 인간은 결국 언어의 문턱 안에 들어와 있고 그 안에서는 언표의 의미를 끊임없이 증폭시킴으로써 의미의 희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욕구와 권력의 놀이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평 가
저자는 나름대로 알고 있는 바를 본 책에서는 전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저자는 不可知論(불가지론)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모두 다 나름대로 안다고 주장하고 또한 세상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틈새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그런 지적인 교만성과 폐쇄성을 폭로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세계관까지….(p 230)
그런데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도 그만한 기준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사고로 봐서 이 시대는 너무나도 복잡성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각자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자기 구획을 정해놓고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도리어 저자가 바라는 사회상이 합치되는 것이 아닌가. 저자에게 현 사회 전복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다면 차라리 과학자에게 모든 철학적 작업을 맡기고 과학적 발전을 고대하면서 관망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시대에 유일하게 인정받는 행동하는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첨부파일 : 담론의공간.hwp (32.0K), Down:14
관리자(IP:124.♡.84.82)
09-02-24 10:25
담론의 공간 : 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이정우
출판사 : 민음사
이 책은, 현대 철학의 본 자리를 과거 철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정립을 시도했던 철학자 미셀 푸코의 사상을 소개한 글이다. 과거 철학은 인간 사회에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데서 어느 정도 자체 만족을 얻었다면 오늘날에 와서 철학의 이런 아집은 무너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애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엄청난 위력과 설득력에 탐복하는 시점에서 철학이 이런 과학의 엄청난 업적을 마냥 시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 바른 철학 정립이 요청된다. 즉 자연 과학의 빛나는 실적과 거기에 버금가는 여타 학문들의 과학적 해석들은 기꺼이 수용해서 서로와 서로 간의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철학이 떠맡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이 살길이다. 보편적 진리 규명이나 형이상학에 몰두하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마련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성과를 존중해 주고 협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철학으로 변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과거의 철학이 오늘날 시대에서 어떤 한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가?
푸코는 르네상스 이 후를 고전시대로 본다. 르네상스의 언어는 기호가 아닌 상징이었다. 암호처럼 의미를 은근히 숨겨 놓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 시대에 오면 기호가 되는데 이는 언어와 사물이 직접 지시하는 식의 일 대 일 대응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분석 정신이 일어났다. 여기에 어떤 질서가 형성되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를 명백하게 구별하게 된 것이다. 혼합을 배제하고 '동일성/차이성' 체계를 이룬다.
진리란 이제 표를 통해서도 배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일반 문법에서 동사나 명사의 기능은 명확히 도식화되었다. 분절→지시→파생→서술 순서로 배치 능력이 파급된다. 그 밖의 학문인 자연사를 탐구하는 것도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자연물들을 공간 속에 배치하는 구조 작성에 머물렀다. 부를 분석하는 면에 있어 화폐라는 것도 하나의 기호로서 교환 매체적 기능으로만 다루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 드디어 주체 의식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푸코는 근대라고 부른다. 그 동안의 인식의 기반이 흄과 칸트에 의해서 철저하게 검토되었는데 주체 의식의 부각은 지식과 사유를 감싸고 있었던 표상의 공간이 와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보다 치중하는 사고를 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 요소를 가지고 모든 것을 검토한 것이다.
시간 요인이 생명계에 내부적 인자로서 작용됨에 주목하였다. 시간과 인간의 노력과 생산 문제를 서로 연계하기 시작했다. 부의 가치는 이제 토지가 아니라 효율적인 생산에 의해 좌우되기에 경제 주체는 경제인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노동이 관권이다. 언어학에서는 해부학적, 진화론적 사유가 도입된다. 동사들의 어근들은 이제 사물의 기원이 아닌 인간들의 욕구와 과정과 욕구와 의지의 기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언어가 확산된다. 문학도 탄생된다. 실증적인 내용들이 쏟아지고 언어의 분산이 일어나면서 학문의 세계는 전반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제 인간은 유한한 실증성의 담지자이자 동시에 그 실증성의 선험적 근거라는 이중적 역할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의 형성이 근대성의 톤이다. 인간을 분석한다는 것은 곧 표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표상이란 인간 인식의 결과이다. 인간이 왕의 자리에 들어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주체 의식은 불안정하다. 그래서 보다 정교하게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모든 경험을 인간의 신체가 지각하는 지각의 의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험된 자아와 선험적 자아가 뒤성키게 된다. 즉 현상학자가 경험적 사실들은 정지시키고자 하여도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세계와 끊임없이 교차하는 신체와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인간의 유한성 극복을 위한 노력은 역사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헤겔과 하이데거가 이런 주장자들인데, 인간은 시간 안에 버려져 있기에 유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결여되어 있던 것의 완성으로, 충만성의 재건으로서 그 역사를 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마지막 진화체이다. 역사를 인간화하고 인간을 역사화 함으로서 역사 안에 있는 영원한 동일자와 궁극적으로 합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에 대해 여전히 약속 받을 주체상 남겨 놓고 있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실증적 시간이 아닌 존재성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실증적 역사 안에서는 인간이 정초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참 존재성은, 현존재라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부터 도리어 무(無)로의 붕괴를 통해 비로소 회귀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근대적 사고들은 결국 역사철학의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지나지 않게 된다.
푸코는 이 모든 원인을 기존의 언어 체계 자리에 인간이 대신 들어차 들어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규정하고 다시금 담론(언어 소통 체계)세계에서 인간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 놓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구조주의와 관계있다. 즉 현대의 철학은 객관적 선험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의식에 선험적인 특권을 부여하는 철학은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하고 실증적이면서 동시에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면서도 실증과학을 넘어서서 무의식 수준까지 파헤쳤다. 이를 통해 드러난 결과는 주체철학에 대한 타격이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죽음과 욕구 법칙을 실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노동과 언어를 조성하는 가능 조건으로 제시하므로서 이중적 자아성을 와해시켜 버렸다. 이로서 주체철학에 의해 실증적으로 이중화된 자아는 이제 무의식적 인식에 의하면 도리어 타자화(他者化) 된다. 하지만 푸코가 제창한 고고학은 이런 구조주의를 넘어서서 불연속적 역사관을 도입했다. 즉 역사의 나선형적인 모델을 불연속적 계열들의 모델로 치환하므로 역사적 사건을 복수화(復數化)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경험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면서 언어적 담론 체계를 통해서 관계 맺도록 해주는 그러한 숱한 규칙적 공간을 푸코는 상정하고 있다.
주체 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언어의 공간에서 발생된 불연속성과 위상의 차이 남을 고려하지 않는 사고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 담론의 세계에서 '누가' 말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말하는 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푸코의 고고학은 일종의 언어 지상주의이다. 인간은 결국 언어의 문턱 안에 들어와 있고 그 안에서는 언표의 의미를 끊임없이 증폭시킴으로써 의미의 희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욕구와 권력의 놀이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평 가
저자는 나름대로 알고 있는 바를 본 책에서는 전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저자는 不可知論(불가지론)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모두 다 나름대로 안다고 주장하고 또한 세상에 대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틈새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그런 지적인 교만성과 폐쇄성을 폭로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세계관까지….(p 230)
그런데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도 그만한 기준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사고로 봐서 이 시대는 너무나도 복잡성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각자의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자기 구획을 정해놓고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도리어 저자가 바라는 사회상이 합치되는 것이 아닌가. 저자에게 현 사회 전복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다면 차라리 과학자에게 모든 철학적 작업을 맡기고 과학적 발전을 고대하면서 관망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시대에 유일하게 인정받는 행동하는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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