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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나를 따르라성경신학요한복음

나를 따르라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나를 따르라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라즈니쉬
번 역 : 류시화
출판사 : 청하 출판사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와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예수적이다. 이는 불교가 반붓다적이고 자아나교가 반마하비라적인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라는 틀로는 조직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이런 말로 자기 책을 시작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예수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왜 예수는 종교라는 틀로서 조직될 수 없는 본질을 가져야만 하는가? 저자는, 요한복음 1장 및 복음서 여러 대목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우선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린 사람이 나타났으나 이들을 그를 믿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기다림 그 자체를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이 사람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다림에 매달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곧 기다림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나타나자 미래가 사라지고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람 예수가 나타나 그들의 희망과 염원과 미래를 없애 버리려 하고 있었다."(p 20)

유대인들은 예수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전통이냐 아니면 예수이냐 이다. 전통은 진리와 마주칠 때마다 갈등이 생겨나고 충돌을 일으킨다. 예수는, 모세와 자신을 비교했고 율법과 대비가 되는 은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사는 새로운 법칙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은혜 위의 은혜이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저 인간 사회 안에서의 게임의 규칙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끝나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회개하라'는 말은, 자기 본래의 얼굴로 신 앞에 서기 위해 돌아오라는 말이다. 예수가 받은 물세례는 회개한 자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세례였다. 왜냐하면 하늘이 열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존재 전체는 신과 연결되어 있다. 존재가 신과 연결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신에게 대답해야 한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참된 제자라면 그 명령에 응답해야만 한다. 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예수의 현존을 느낀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좇아갈 수 있었다. 현존이 우선이고 증명은 나중이다.

예수는 교리를 가르치려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저 신뢰만을 주려고 하셨다. 신뢰가 모든 병을 치료한다. 인간의 마음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그 당시 복음서를 쓰던 사람들은 훗날에 그 복음서가 거짓되고 꾸며낸 것으로 여겨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열린 죄인들 이외는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죄인이란 죄 이외에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 앞에서 자신을 구태여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이 광경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타락이었다. 기실 아무도 바리새인을 타락시키지 않았다. 바리새인 자신이 자기를 타락시킨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왔소. 나는 희생을 원하지 않소. 나는 자비를 베풀 것이오" 그러나 소위 의인들은 그의 부름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인들은 죽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사는 삶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아니다. 자발적인 삶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의 다리(bridge)가 되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 단지 과거의 연속이다. 여기에 예수라는 스승이 등장한다. "조용히 죽으라 내가 그대를 보살피겠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라. 내가 너의 다리가 되어 주마. 그래야 새 인간이 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집도 없고 둥지도 없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만이 인간의 영원한 뿌리요 집이 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모든 헛된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집과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허구를 만들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망각 속으로 신속하게 없어진다. 그러나 가시적인 이 세상을 부정한다고 해서 불가사의한 세계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왜 그런가? 그것은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제자는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린 상태에서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폭력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삶과 생명을 반대하지 아니한다. 예수는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기뻐하라!" 예수는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하였다. "많이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 적게 가진 자는 그 적은 것마저 잃으리라" 그렇다. 영적인 쾌락주의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삶을 사랑한다. 타인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 스스로 불행을 조장하지 말라. 자신에게 행복할 줄 아는 자가 타인의 행복에도 도움이 된다.

종교는 말한다. "삶을 포기하라. 그래야만 너희는 신에게 다가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사랑하라! 그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신을 만나리라" 마시고 즐기는 모습의 예수상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는 적대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에 대해서 너무 많은 투자를 하였다. 값 싼 동정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정심이란 거짓된 사랑일 뿐이다. 동정심을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사람들 속에 다가설 수가 없다.

제자는 즐거움과 환희를 가지고 고통 속에 들어가야 한다. 학식 있는 자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들이 오히려 제자들을 동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되어야 한다. 심지어 '자아'까지. 자아가 죽기 전에 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부활이란 죽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신은 죽음이 들어간 바로 그 문으로부터 나온다. 죽음을 신으로 해석하는 자만이 자신의 죽음도 사랑할 것이다. 제자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승에게 바친 사람을 말한다. 추종자하고는 다르다. 제자는 선택된 사람들이다. 천국의 말씀은 비유로만 나타난다. 이것은 힘보다 침묵이 더 강함을 의미한다. 힘을 가지면 군중들이 몰려오지만 그만큼 하나님은 멀어진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욕망이 되지 않고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경고는 실제적인 일로 나타났다. 십자가 사건 이 후의 군중들 속에는, 예수를 이제 그만 잊기를 원했던 제자들이 숨어들었다. 모든 것이 종결된 것 같다. 예수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은 기적은 나타내었다.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가 맺혔다. 제자들의 가슴속에서 예수는 부활된 것이다. 예수의 모든 비유는 실제가 되었다. 진리가 승리한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적 평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기독교는 이 말을 잘못 해석해 왔다. 그들은 예수만이 신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p 74) 저자의 이러한 곡해가 나타날 수밖에 데는 옛적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된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열망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 모두 다 추방되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혹 구원받는 자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늘에게 제시한 구원 방식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안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아들이 될 권리나 자격도 갖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된 자들 입에서 고백되는 것은 인간이나 참 인간성 회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 아들로, 심판자로 증거 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 이외의 모든 관념은 다 의인화하여서 오직 인간의 자기 초월에만 관심이 가 있다. 그래서 결국 악마나 하나님이라는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쏟아 놓는다.(p 292) 그에게 남은 것은 인간의 자기 해탈과 정신적 만족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첨부파일 : 나를따르라.hwp (32.0K), Down:10

관리자(IP:124.♡.84.82)

09-02-24 01:18

나를 따르라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라즈니쉬
번 역 : 류시화
출판사 : 청하 출판사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와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예수적이다. 이는 불교가 반붓다적이고 자아나교가 반마하비라적인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라는 틀로는 조직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이런 말로 자기 책을 시작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예수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왜 예수는 종교라는 틀로서 조직될 수 없는 본질을 가져야만 하는가? 저자는, 요한복음 1장 및 복음서 여러 대목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우선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린 사람이 나타났으나 이들을 그를 믿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기다림 그 자체를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이 사람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다림에 매달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곧 기다림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나타나자 미래가 사라지고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람 예수가 나타나 그들의 희망과 염원과 미래를 없애 버리려 하고 있었다."(p 20)

유대인들은 예수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전통이냐 아니면 예수이냐 이다. 전통은 진리와 마주칠 때마다 갈등이 생겨나고 충돌을 일으킨다. 예수는, 모세와 자신을 비교했고 율법과 대비가 되는 은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사는 새로운 법칙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은혜 위의 은혜이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저 인간 사회 안에서의 게임의 규칙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끝나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회개하라'는 말은, 자기 본래의 얼굴로 신 앞에 서기 위해 돌아오라는 말이다. 예수가 받은 물세례는 회개한 자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세례였다. 왜냐하면 하늘이 열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존재 전체는 신과 연결되어 있다. 존재가 신과 연결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신에게 대답해야 한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참된 제자라면 그 명령에 응답해야만 한다. 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예수의 현존을 느낀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좇아갈 수 있었다. 현존이 우선이고 증명은 나중이다.

예수는 교리를 가르치려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저 신뢰만을 주려고 하셨다. 신뢰가 모든 병을 치료한다. 인간의 마음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그 당시 복음서를 쓰던 사람들은 훗날에 그 복음서가 거짓되고 꾸며낸 것으로 여겨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열린 죄인들 이외는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죄인이란 죄 이외에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 앞에서 자신을 구태여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이 광경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타락이었다. 기실 아무도 바리새인을 타락시키지 않았다. 바리새인 자신이 자기를 타락시킨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왔소. 나는 희생을 원하지 않소. 나는 자비를 베풀 것이오" 그러나 소위 의인들은 그의 부름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인들은 죽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사는 삶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아니다. 자발적인 삶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의 다리(bridge)가 되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 단지 과거의 연속이다. 여기에 예수라는 스승이 등장한다. "조용히 죽으라 내가 그대를 보살피겠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라. 내가 너의 다리가 되어 주마. 그래야 새 인간이 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집도 없고 둥지도 없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만이 인간의 영원한 뿌리요 집이 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모든 헛된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집과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허구를 만들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망각 속으로 신속하게 없어진다. 그러나 가시적인 이 세상을 부정한다고 해서 불가사의한 세계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왜 그런가? 그것은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제자는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린 상태에서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폭력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삶과 생명을 반대하지 아니한다. 예수는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기뻐하라!" 예수는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하였다. "많이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 적게 가진 자는 그 적은 것마저 잃으리라" 그렇다. 영적인 쾌락주의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삶을 사랑한다. 타인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 스스로 불행을 조장하지 말라. 자신에게 행복할 줄 아는 자가 타인의 행복에도 도움이 된다.

종교는 말한다. "삶을 포기하라. 그래야만 너희는 신에게 다가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사랑하라! 그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신을 만나리라" 마시고 즐기는 모습의 예수상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는 적대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에 대해서 너무 많은 투자를 하였다. 값 싼 동정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정심이란 거짓된 사랑일 뿐이다. 동정심을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사람들 속에 다가설 수가 없다.

제자는 즐거움과 환희를 가지고 고통 속에 들어가야 한다. 학식 있는 자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들이 오히려 제자들을 동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되어야 한다. 심지어 '자아'까지. 자아가 죽기 전에 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부활이란 죽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신은 죽음이 들어간 바로 그 문으로부터 나온다. 죽음을 신으로 해석하는 자만이 자신의 죽음도 사랑할 것이다. 제자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승에게 바친 사람을 말한다. 추종자하고는 다르다. 제자는 선택된 사람들이다. 천국의 말씀은 비유로만 나타난다. 이것은 힘보다 침묵이 더 강함을 의미한다. 힘을 가지면 군중들이 몰려오지만 그만큼 하나님은 멀어진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욕망이 되지 않고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경고는 실제적인 일로 나타났다. 십자가 사건 이 후의 군중들 속에는, 예수를 이제 그만 잊기를 원했던 제자들이 숨어들었다. 모든 것이 종결된 것 같다. 예수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은 기적은 나타내었다.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가 맺혔다. 제자들의 가슴속에서 예수는 부활된 것이다. 예수의 모든 비유는 실제가 되었다. 진리가 승리한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적 평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기독교는 이 말을 잘못 해석해 왔다. 그들은 예수만이 신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p 74) 저자의 이러한 곡해가 나타날 수밖에 데는 옛적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된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열망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 모두 다 추방되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혹 구원받는 자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늘에게 제시한 구원 방식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안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아들이 될 권리나 자격도 갖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된 자들 입에서 고백되는 것은 인간이나 참 인간성 회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 아들로, 심판자로 증거 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 이외의 모든 관념은 다 의인화하여서 오직 인간의 자기 초월에만 관심이 가 있다. 그래서 결국 악마나 하나님이라는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쏟아 놓는다.(p 292) 그에게 남은 것은 인간의 자기 해탈과 정신적 만족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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