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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간과 聖성경신학[신학]

인간과 聖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인간과 聖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로제 카이유와 (Roger Cailloirs)
번 역 : 권은미
출판사 : 문학동네

뭔가 ‘꺼림칙 한 느낌’이 생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느낌이 왜 생기는 것일까?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법제화 된 규칙과 지도자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왠지 ‘꺼림칙 한 것’을 일단 기피하고 보자 는 심적 본능이 교회 관습보다 우선해서 그 사람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류사에 있어 세계의 모든 종족들은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수시로 분류하면서 지내 왔다. 그 내막을 포괄적으로 밝힌 책이 바로 인간과 성(聖)이라는 책이다.

인간은 늘 월등한 힘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온다. 그 힘을 성스러운 것으로 본다면 인간 세계는 부정한 것이요 속된 세상이다. 따라서 속은 그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성과 친숙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싶어 한다. 늘 성스러운 영역을 속된 인간 쪽에서 오히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모든 금기 항목들이 여기서 생긴 것이다. 성을 성스러움 그대로 두면서도 그 성스러움에서 액체처럼 빼낼 수 유익한 힘은 어떤 식으로 장만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속죄 의식을 통해서이다. 은총을 구하는 자는 먼저 신에게 선물, 즉 ‘희생 제물’을 바쳐 선수를 치는 것이다. 희생 제물에 담긴 신학적 의의는 이러하다. 단지 전체를 보전하기 위해 한 부분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표하는 맏물을 바치므로서 전체를 새 은총의 의미로 도로 얻기 위해서이다. 즉 특별한 성스러움을 지닌 어떤 개인이나 최초의 수확물은 그 존재가 지닌 새로움으로 인해서 나머지 소산물에 들어 있는 위험한 힘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이 심은 나무의 과실들을 5년째가 되어서야 그들 자신을 위해 거둬들인다. 처음 3 년 동안의 과실들은 부정 탄 것으로 여겼으며 4년째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쳤다. 이점은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스러운 씨족을 따로 구별하고 그 순수함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대지의 질서가 노화로 인해 파멸되지 않고 계속 젊게 갱신되는 방책이 되기 때문이다. 오른손에 비해서 왼손잡이들은 악마가 깃든 자로 본다. 몇몇 기독교 성자들은 요람에서부터 어머니의 왼쪽 젖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의 중앙은 성스러움이 있어야 될 자리이고 외곽은 악마가 출몰하는 구역이다. 속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는데 있어 여성은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때로는 부정적으로 배척된다. 소녀의 초경혈이 채소밭에 해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용되기도 했다. 반면에 하혈하는 여인이 나무 아래 앉으면 그 나무의 열매는 전부 부정 타서 떨어진다고 믿었다. 마을 사회가 이처럼 양극으로 대립된 상태에서 생명을 기필코 부지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가 회심이나 정화 의식이다. 기독교의 성인전 가운데서도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자가 가장 위대한 성인이 되는데, 이는 신의 은총에 대해서 신도들을 주목시켜 교화시키기 위함뿐만 아니라, 엄청난 잘못으로 표출된 능력들이 전혀 딴 방향으로 새롭게 전이될 때는 또한 엄청난 속죄의 효능을 태풍처럼 몰고 오게 하는 계기도 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이러한 은총과 속죄의 큰 효과를 기대하고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기리는 정기적 축제를 벌리게 되는데, 이 축제는 강렬함과 열정을 주 내용으로 생명 속성의 절정을 표출해 내므로서 성스러운 분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 생명의 열기를 한 데 모으기 위해 새로운 금기 사항이 특별히 추가된다. 단식과 침묵의 시간은, 최종 안식의 때를 맞기 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신과 접촉하는 시간인 일요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긴장해야 한다. 노동은 금지된다. 거룩한 시간이 가져다 준 속박에 스스로 옭아매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주 생성에 필요한 새로운 에너지는 충당되고 더러운 에너지는 폐기시키는 메커니즘이 원활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늘 우주의 파국을 두려워했다. 신에게 제 때 제 때 속죄하고 않고서는 황금시대라는 보상은 주어지지 아니한다. 따라서 정기적인 축제의 시간은 또한 고통이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정지되어야 한다. 씨뿌리고 밭 갈고 추구하는 노동을 금지하므로서 곧 우주의 파국과 혼돈이 주는 고통을 미리 연출해 보이자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 속에 일시적으로 잠김으로, 생명이 주는 신선한 원기와 회복력을 또 다시 고대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우주의 질서를 땅에서 복제시키는 행사이다. 이것은 곧 장래에 대한 예언이 일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손상시켜서는 아니 된다. 생명의 주기의 막아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신화 사회를 뒤로하고 강력한 국가 사회가 등장하므로서 종교란 이제 신비에서 윤리로 변하고 말았고, 집단적인 히스테리에서 개인적인 취향으로 기우려 졌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죽지 않는 본질을, 결국에는 죽게 되는 본질 한가운데 심어 놓음으로서 오히려 자기 죽음을 성스럽게 장식하고 장렬하게 체념한 듯 맞이하려는 용기가 곧 종교심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교계 현실

민중들은 자신의 ‘꺼림칙’에 준해서 신앙생활을 하려 한다. 이 점을 감안해서 목회자들도 덩달아 민중들의 이 ‘꺼림칙 심리’에 승부를 거는 목회를 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목회자를 비난하면 왠지 모르게 저주를 받는다는 ‘꺼림칙 저주관’, 또 십일조 안내고 주일 예배를 빠트리면 왠지 복을 받지 못하고 그 동안 축적된 복도 까먹게 된다는 ‘꺼림칙 축복관’, 또 무단으로 교회를 바꾸면 왠 집안에 우환이 생길 수 있다는 ‘꺼림칙 교회관’ 등 바로 이러한 ‘꺼림칙 목회 방식’이야말로 목사와 교인들이 제대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구실을 한다. 어차피 교인들은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성공에만 정신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교회 생활에 열중하게 만드는 동기는, 민중들이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직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바로 이 ‘꺼림칙 원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이점을 빨리 간파한 목회자일수록 교회 성장은 빨리 이루어진다. 민중들의 순진한 기대치는, 자신을 교회에 몰입하므로서 하루 속히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무의식이 인류를 지금까지 끌어온 사회적 무의식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종교성을 놓치지 않고 정죄한다.

‘주님 사랑하기’, ‘교회 다니기’ 이것은 결코 일치되지 아니한다. ‘주님 사랑하는 자’, ‘신학자’ 이것도 역시 일치되지 아니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주님 사랑하기’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떠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가 번성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즉 교회가 곧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종교, 다른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주님 사랑하기’를 외쳤기 때문에 ‘교회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자들로부터 교회에서 추방당하는 사례가 갈수록 커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교단 사랑하기’ 측으로부터 쫓겨나고,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신학교 사랑하기’를 고수하는 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 단체 사랑하기’ 측으로부터 저주를 되레 받는 사태가 오늘날의 교계 모습이다. 진정 성스러운 분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자신이 결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는 자들 속에 함께 계시다.

첨부파일 : 인간과성.hwp (32.0K), Down:13

관리자(IP:124.♡.84.82)

09-02-20 21:38

인간과 聖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로제 카이유와 (Roger Cailloirs)
번 역 : 권은미
출판사 : 문학동네

뭔가 ‘꺼림칙 한 느낌’이 생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느낌이 왜 생기는 것일까?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법제화 된 규칙과 지도자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왠지 ‘꺼림칙 한 것’을 일단 기피하고 보자 는 심적 본능이 교회 관습보다 우선해서 그 사람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류사에 있어 세계의 모든 종족들은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수시로 분류하면서 지내 왔다. 그 내막을 포괄적으로 밝힌 책이 바로 인간과 성(聖)이라는 책이다.

인간은 늘 월등한 힘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온다. 그 힘을 성스러운 것으로 본다면 인간 세계는 부정한 것이요 속된 세상이다. 따라서 속은 그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성과 친숙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싶어 한다. 늘 성스러운 영역을 속된 인간 쪽에서 오히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모든 금기 항목들이 여기서 생긴 것이다. 성을 성스러움 그대로 두면서도 그 성스러움에서 액체처럼 빼낼 수 유익한 힘은 어떤 식으로 장만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속죄 의식을 통해서이다. 은총을 구하는 자는 먼저 신에게 선물, 즉 ‘희생 제물’을 바쳐 선수를 치는 것이다. 희생 제물에 담긴 신학적 의의는 이러하다. 단지 전체를 보전하기 위해 한 부분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표하는 맏물을 바치므로서 전체를 새 은총의 의미로 도로 얻기 위해서이다. 즉 특별한 성스러움을 지닌 어떤 개인이나 최초의 수확물은 그 존재가 지닌 새로움으로 인해서 나머지 소산물에 들어 있는 위험한 힘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이 심은 나무의 과실들을 5년째가 되어서야 그들 자신을 위해 거둬들인다. 처음 3 년 동안의 과실들은 부정 탄 것으로 여겼으며 4년째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쳤다. 이점은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스러운 씨족을 따로 구별하고 그 순수함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대지의 질서가 노화로 인해 파멸되지 않고 계속 젊게 갱신되는 방책이 되기 때문이다. 오른손에 비해서 왼손잡이들은 악마가 깃든 자로 본다. 몇몇 기독교 성자들은 요람에서부터 어머니의 왼쪽 젖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의 중앙은 성스러움이 있어야 될 자리이고 외곽은 악마가 출몰하는 구역이다. 속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는데 있어 여성은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때로는 부정적으로 배척된다. 소녀의 초경혈이 채소밭에 해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용되기도 했다. 반면에 하혈하는 여인이 나무 아래 앉으면 그 나무의 열매는 전부 부정 타서 떨어진다고 믿었다. 마을 사회가 이처럼 양극으로 대립된 상태에서 생명을 기필코 부지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가 회심이나 정화 의식이다. 기독교의 성인전 가운데서도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자가 가장 위대한 성인이 되는데, 이는 신의 은총에 대해서 신도들을 주목시켜 교화시키기 위함뿐만 아니라, 엄청난 잘못으로 표출된 능력들이 전혀 딴 방향으로 새롭게 전이될 때는 또한 엄청난 속죄의 효능을 태풍처럼 몰고 오게 하는 계기도 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이러한 은총과 속죄의 큰 효과를 기대하고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기리는 정기적 축제를 벌리게 되는데, 이 축제는 강렬함과 열정을 주 내용으로 생명 속성의 절정을 표출해 내므로서 성스러운 분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 생명의 열기를 한 데 모으기 위해 새로운 금기 사항이 특별히 추가된다. 단식과 침묵의 시간은, 최종 안식의 때를 맞기 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신과 접촉하는 시간인 일요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긴장해야 한다. 노동은 금지된다. 거룩한 시간이 가져다 준 속박에 스스로 옭아매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주 생성에 필요한 새로운 에너지는 충당되고 더러운 에너지는 폐기시키는 메커니즘이 원활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늘 우주의 파국을 두려워했다. 신에게 제 때 제 때 속죄하고 않고서는 황금시대라는 보상은 주어지지 아니한다. 따라서 정기적인 축제의 시간은 또한 고통이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정지되어야 한다. 씨뿌리고 밭 갈고 추구하는 노동을 금지하므로서 곧 우주의 파국과 혼돈이 주는 고통을 미리 연출해 보이자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 속에 일시적으로 잠김으로, 생명이 주는 신선한 원기와 회복력을 또 다시 고대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우주의 질서를 땅에서 복제시키는 행사이다. 이것은 곧 장래에 대한 예언이 일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손상시켜서는 아니 된다. 생명의 주기의 막아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신화 사회를 뒤로하고 강력한 국가 사회가 등장하므로서 종교란 이제 신비에서 윤리로 변하고 말았고, 집단적인 히스테리에서 개인적인 취향으로 기우려 졌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죽지 않는 본질을, 결국에는 죽게 되는 본질 한가운데 심어 놓음으로서 오히려 자기 죽음을 성스럽게 장식하고 장렬하게 체념한 듯 맞이하려는 용기가 곧 종교심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교계 현실

민중들은 자신의 ‘꺼림칙’에 준해서 신앙생활을 하려 한다. 이 점을 감안해서 목회자들도 덩달아 민중들의 이 ‘꺼림칙 심리’에 승부를 거는 목회를 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목회자를 비난하면 왠지 모르게 저주를 받는다는 ‘꺼림칙 저주관’, 또 십일조 안내고 주일 예배를 빠트리면 왠지 복을 받지 못하고 그 동안 축적된 복도 까먹게 된다는 ‘꺼림칙 축복관’, 또 무단으로 교회를 바꾸면 왠 집안에 우환이 생길 수 있다는 ‘꺼림칙 교회관’ 등 바로 이러한 ‘꺼림칙 목회 방식’이야말로 목사와 교인들이 제대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구실을 한다. 어차피 교인들은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성공에만 정신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교회 생활에 열중하게 만드는 동기는, 민중들이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직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바로 이 ‘꺼림칙 원리’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이점을 빨리 간파한 목회자일수록 교회 성장은 빨리 이루어진다. 민중들의 순진한 기대치는, 자신을 교회에 몰입하므로서 하루 속히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무의식이 인류를 지금까지 끌어온 사회적 무의식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종교성을 놓치지 않고 정죄한다.

‘주님 사랑하기’, ‘교회 다니기’ 이것은 결코 일치되지 아니한다. ‘주님 사랑하는 자’, ‘신학자’ 이것도 역시 일치되지 아니한다. 성경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주님 사랑하기’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떠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가 번성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즉 교회가 곧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종교, 다른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주님 사랑하기’를 외쳤기 때문에 ‘교회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자들로부터 교회에서 추방당하는 사례가 갈수록 커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교단 사랑하기’ 측으로부터 쫓겨나고,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신학교 사랑하기’를 고수하는 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 단체 사랑하기’ 측으로부터 저주를 되레 받는 사태가 오늘날의 교계 모습이다. 진정 성스러운 분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자신이 결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는 자들 속에 함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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