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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로마서 강해성경신학로마서

로마서 강해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로마서 강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1968)
번 역 : 조남홍
출판사 : 한들 출판사

본 책의 내용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시킬 때는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위치에서 만나지고 관계되어진다.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은 부정이다. 인간이 내뱉는 모든 것, 신의 존재와 신을 향한 경건성까지 죄로 인하여 왜곡되고 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변질된 하나님이다. 이러한 딜레마가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남을 평가하고 자기를 자기답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사용하겠끔 했다. 그러나 율법의 세계는 이러한 인간의 정죄 기능마저 부정해 버리고 정죄시켜 버린다. 이로서 모든 인간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를 지니지 못한 채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심판의 날을 기준 해서 볼 때에 기쁜 소식이란 딴 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을 인간이 행함으로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을 소개한다. 믿는 자의 표본이라는 아브라함이다. 그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가능성마저 넘어섰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이다. 행함과 무관하게 새로운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인간 긍정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다. 그 약속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과 관계하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세계의 모든 죽음을 지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나라의 유일한 비유로 사용케 하신다.

예수님께서 홀로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심으로 그분이 이제 행할 수 있는 심판은 의의 심판이다. 인간의 육은 철저하게 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인데 이는 영 안에서 성도는 이미 사형을 집행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그 어떤 가능성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영 안에 사는 생활이다. 오직 기다림뿐이다. 영은 성도를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 모습 따라 살게 하신다. 이 고난의 삶은 성도에게 낯선 것이다. 이 고난은 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이스라엘)가 곧 복음을 대적하는 단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진리이다. 이 진리성으로 인해 이 지상에서 에서적인 교회가 있는 반면에 야곱적인 교회가 있다. 야곱적인 교회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에서적인 교회 내에서 사랑에 의해 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진노의 대상이라는 배경으로만 표현된다. 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서 이방인들이 의를 얻는데서 드러난다. 그들은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던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된 것은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성 때문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는, 파탄된 교회 내에 다시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이러한 은혜성은, 교회를, '그리스도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 존재로 평가된다. 따라서 교회 내의 모든 개별적인 사귐은 단일성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반해 또 다른 권세가 교회밖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곧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는 악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정적 역할만을 담당할 뿐이지 선한 교회로서는 그들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세상 권력이란,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죄악된 이 세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교회 내의 사랑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으로 자리 잡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되 자신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위치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특히 이방인의 제사장으로 나선 사도의 마음속에는 새삼스럽게 자기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 하기 위할 따름이다.

책 내용에 대한 평가

이 책이 그 당시나 오늘날 교회에도 늘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은, 흔히 고정 의식으로 단단히 갇혀 있기에 우상이 아닌 것으로 받아드려져 온 영원한 우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즉 인간 자신이 영원한 우상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내는 문화와 종교나 교회라는 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등장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우호적인 단합과 정신적 단결 단계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이 문화 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긍정과 가능성에 대한 찬미가 끊이지 않는다. 물론 형식상 하나님의 영광을 거론하고들 있지만…. 인간들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제일주의로 하여 신과 거래에 나선 것이 인간들의 종교성이었다.

이 인간들의 종교성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봤을 때도 과연 무사하겠는가? 저자는 오직 '사망의 몸'을 유일한 명시적 계시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죽어 가는 주제에 무슨 가치와 의미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저자는 두고두고 하나님 편에서 외치는 자로서 평가받아도 당연한 자이다. 그러나 자기 시대상을 고려하다 보니 핵심 부분에 있어 논리 전개가 치밀하지 못하고 더 깊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면이 엿보인다.

(1) 율법에 의한 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같은 의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같은 의라면 전달 방식에 있어 두 계통으로 나누어서 따로 흘려 온다는 주장이 애초부터 억지가 되어 버리고, 만약 다른 의라면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결론과 맞지 않게 된다.

(2) 믿는 자의 계통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존재성에 관여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여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아브라함의 존재함에 주안점이 있다고 하면 율법과 행위의 대립 논지는 도중에 약화되어 버린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생겨나도록 은혜를 주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믿는 자의 모델 케이스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믿음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행위자의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락된다. 아브라함 존재 자체가 은혜의 산물이 아닐까? 그래야 이삭의 죽음에 참여하는 약속의 내용에 충실한 아브라함 상이 확립될 것이라고 본다.

(3)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전용 해석하는 것이 상당히 무리이다. 차라리 성경대로, 남은 자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더 증가시키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개인이 자기 행함의 의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기를 당부하는 조치인지 아니면 율법이 진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이기 위함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전자의 논리라면, 영의 사람이 되고 부터라도 또다시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둘 수 있지만 후자의 논리라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 로마서강해.hwp (32.0K), Down:30

관리자(IP:124.♡.84.82)

09-02-20 21:03

로마서 강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칼 바르트 (Karl Barth : 1886-1968)
번 역 : 조남홍
출판사 : 한들 출판사

본 책의 내용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시킬 때는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위치에서 만나지고 관계되어진다.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은 부정이다. 인간이 내뱉는 모든 것, 신의 존재와 신을 향한 경건성까지 죄로 인하여 왜곡되고 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변질된 하나님이다. 이러한 딜레마가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남을 평가하고 자기를 자기답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사용하겠끔 했다. 그러나 율법의 세계는 이러한 인간의 정죄 기능마저 부정해 버리고 정죄시켜 버린다. 이로서 모든 인간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를 지니지 못한 채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심판의 날을 기준 해서 볼 때에 기쁜 소식이란 딴 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을 인간이 행함으로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을 소개한다. 믿는 자의 표본이라는 아브라함이다. 그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가능성마저 넘어섰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이다. 행함과 무관하게 새로운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인간 긍정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다. 그 약속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과 관계하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세계의 모든 죽음을 지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나라의 유일한 비유로 사용케 하신다.

예수님께서 홀로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심으로 그분이 이제 행할 수 있는 심판은 의의 심판이다. 인간의 육은 철저하게 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인데 이는 영 안에서 성도는 이미 사형을 집행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그 어떤 가능성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영 안에 사는 생활이다. 오직 기다림뿐이다. 영은 성도를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 모습 따라 살게 하신다. 이 고난의 삶은 성도에게 낯선 것이다. 이 고난은 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이스라엘)가 곧 복음을 대적하는 단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진리이다. 이 진리성으로 인해 이 지상에서 에서적인 교회가 있는 반면에 야곱적인 교회가 있다. 야곱적인 교회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에서적인 교회 내에서 사랑에 의해 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진노의 대상이라는 배경으로만 표현된다. 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서 이방인들이 의를 얻는데서 드러난다. 그들은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던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된 것은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성 때문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는, 파탄된 교회 내에 다시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이러한 은혜성은, 교회를, '그리스도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 존재로 평가된다. 따라서 교회 내의 모든 개별적인 사귐은 단일성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반해 또 다른 권세가 교회밖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곧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는 악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정적 역할만을 담당할 뿐이지 선한 교회로서는 그들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세상 권력이란,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죄악된 이 세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교회 내의 사랑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으로 자리 잡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되 자신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위치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특히 이방인의 제사장으로 나선 사도의 마음속에는 새삼스럽게 자기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 하기 위할 따름이다.

책 내용에 대한 평가

이 책이 그 당시나 오늘날 교회에도 늘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은, 흔히 고정 의식으로 단단히 갇혀 있기에 우상이 아닌 것으로 받아드려져 온 영원한 우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즉 인간 자신이 영원한 우상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내는 문화와 종교나 교회라는 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등장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우호적인 단합과 정신적 단결 단계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이 문화 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긍정과 가능성에 대한 찬미가 끊이지 않는다. 물론 형식상 하나님의 영광을 거론하고들 있지만…. 인간들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제일주의로 하여 신과 거래에 나선 것이 인간들의 종교성이었다.

이 인간들의 종교성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봤을 때도 과연 무사하겠는가? 저자는 오직 '사망의 몸'을 유일한 명시적 계시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죽어 가는 주제에 무슨 가치와 의미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저자는 두고두고 하나님 편에서 외치는 자로서 평가받아도 당연한 자이다. 그러나 자기 시대상을 고려하다 보니 핵심 부분에 있어 논리 전개가 치밀하지 못하고 더 깊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면이 엿보인다.

(1) 율법에 의한 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같은 의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같은 의라면 전달 방식에 있어 두 계통으로 나누어서 따로 흘려 온다는 주장이 애초부터 억지가 되어 버리고, 만약 다른 의라면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결론과 맞지 않게 된다.

(2) 믿는 자의 계통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존재성에 관여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여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아브라함의 존재함에 주안점이 있다고 하면 율법과 행위의 대립 논지는 도중에 약화되어 버린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생겨나도록 은혜를 주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믿는 자의 모델 케이스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믿음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행위자의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락된다. 아브라함 존재 자체가 은혜의 산물이 아닐까? 그래야 이삭의 죽음에 참여하는 약속의 내용에 충실한 아브라함 상이 확립될 것이라고 본다.

(3)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전용 해석하는 것이 상당히 무리이다. 차라리 성경대로, 남은 자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더 증가시키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개인이 자기 행함의 의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기를 당부하는 조치인지 아니면 율법이 진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이기 위함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전자의 논리라면, 영의 사람이 되고 부터라도 또다시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둘 수 있지만 후자의 논리라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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