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려진 기독교
뒤틀려진 기독교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뒤틀려진 기독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쟈크 엘룰 (Jacques Ellul)
번 역 : 쟈크 엘룰 번역 위원회
출판사 : 대장간
새로 시작해야 될 문제를, 대충 수리해서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전부 다 틀려 버린 교회는 새로 시작해야 될 교회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실정에 있다. 교회가 잘못된 취지에서 설립되더니 곧장 목회자들이 배출되었고 또한 그들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지닌 채 교계에 진출하면서 지속적으로 잘못된 교회를 설립하는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 한 번이라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접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아니, 복음이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닌다. 왜냐하면 복음은 자기 자신의 화려한 모든 미래의 장밋빛 꿈을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사태가 오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이 원하고 있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 참으로 바르게 목회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발 망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자아성취에 미쳐 있다. 목회를 통한 자아실현을 달성코자 한다. 쟈크 엘룰은, 기독교의 2000년 역사가 이런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철저하게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민중들은 교회에서 완벽하게 달라져 버린 복음만을 접하게 되는 비극 속에 있다. 이 복음에 달라붙어 천국을 간다…?
핍박의 대상으로서 복음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복음이 무너진 첫 번째 계기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빚어졌다. 이교적인 풍물들을 성스럽게 기독교화하겠다고 덤벼들면서 십자가가 파묻혀 버린 것이다. 선교의 성공과 십자가를 맞바꾼 것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 십자가를 팔아 버린 경우가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일단 안정기에 접어든 교회는 소위 거룩한 '자선사업'을 시도했다. 복음의 사회화 달성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사업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이 사업을 보다 활성화시키고 확장하면서도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연계했다. 높은 공직자들과 재산가들이 교회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교세 확장을 위해 적절한 자리 배정 때문이다. 사회와 같이 교회 내에서 계급과 계층이 일게 된 것을 당연했고 그 계급들은 '거룩의 강도(强度)'라는 차원에서 성직 계열을 형성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단 한 명의 참된 기독교인만 있어도 기독교의 실재성을 충분히 입증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때, 기독교인의 개념은 상실된다. 기독교 국가는 우리가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를 교활하게 폐지해 버렸다. 어떤 종교가 그 번창하는 힘 때문에 폐지된 예는 아마 기독교밖에 없을 것이다.”(p. 65)
일단 권력화 된 조직은 계속적으로 민중들을 손아귀에 휘어잡기 위해 적절한 통치 이념이 권력층에서 제시된다. 주된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의 물질화'이다. 즉 인위적으로 눈에 보이고 구분되는 식의 종교 형식들을 풍부하게 제작해서 내어놓았다. 시간적으로 거룩된 날과 속된 날의 구분, 공간적으로 거룩한 장소와 속된 장소와의 구분, 인물로서 거룩한 성직과 평신도와의 구분, 거룩을 눈요깃감으로 바꾼 이런 종교 놀이 기구로서 민중들의 마음을 제도 교회의 숭고성에다 붙들어 매어 놓았다. 마치 강아지 붙들어 놓듯이!
교회의 신성화는 역설적으로 교회의 저질성을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제도교회의 부패에 혐오를 느낀 인사들이 여러 가지로 반발했지만 그들은 복음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신비주의를 수입하여 기도원이나 수도원을 만들었다. 거기에서는 교회의 성찬과 설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신비에 이르는 종교 테크닉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금식, 진을 빼는 춤, 절대적 침묵, 자기 학대술, 심지어 마약까지 이용했다. 기성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역시 같은 권력층에서 흥정을 일삼아 왔던 지배 계층은 봉건 영주들이었다.
그들은 대지주들이다. 그들은 자기 구미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원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부르주아적인 교회인 개신교의 출현이다. 민족 정서에 따라, 프랑스교회, 영국교회, 스웨덴교회, 덴마크교회, 네덜란드교회와 같은 교회들이 제각기의 신앙고백서를 내놓고 각자의 살림살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민족 교회들의 명분도 활발한 식민지 개척 앞에서도 무색해지고 오직 자기네 나라의 경제 부흥과 선진국 진입을 위한 충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녕과 무궁한 영광을 위해 조찬기도회라도 열어 주는 것이, 권력에 기생하려는 교회들의 아첨이요 생존의 법칙이다. 이처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는다는 전제 조건 하에서만 철저한 법의 기관으로 정착되어 이 사회의 일부가 된다. 이제는 사람의 기관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기관은 아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옹호 교회만 있을 뿐이고,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자본주의 옹호하는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어떤 것도 기독교 이상으로 인간을 불쾌하게 하지는 않으며 신약의 교회보다 더 이간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만일 기독교가 바르게 선포된다면 기독교는 수백만의 기독교인도 얻지 못하고 지상에서의 모든 대가와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p 251)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님
저자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의 말을 원용하면서 조그마한 낙관론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낙관이던 비관이든 항상 증명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지 그냥 희망 주는 걸로 그쳐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가 아직도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성도가 기댈 것은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다. 아직 하나의 약속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그 약속 안에서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지금도 꾸준히 전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개혁해서 제대로 된 교회를 그 안에서 영글어 내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방식과 전혀 딴판이다.
교회는 그 누구가 달려들어도 개혁될 수 없는데, 이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이미 따로 계시기 때문이요 개혁이 필요치 않는 완전한 교회를 지금도 계속 붙잡고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거기에 반해 민중의, 민중들에 의한, 민중들을 위한 비복음적 교회는 이 세상이 끝날 까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번창하고 부흥한다. 인간들은, 온 세상을 자신의 날개로 덮어 영원히 홀로 신이 될 때까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민중들을 향하여 아무리 개혁과 반성과 회개를 촉구해도 그렇게 주창하는 주도 세력 역시 개혁되어야 될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민중들의 종교 비젼에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일관된 약속에 의존하는 자만이 진정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신자들이다.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는 이들을 통해 아직도 주님께서 약속대로 일하시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낙관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 7- 8)
첨부파일 : 뒤틀려진기독교.hwp (32.0K), Down:17
관리자(IP:124.♡.84.82)
09-02-20 19:41
뒤틀려진 기독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쟈크 엘룰 (Jacques Ellul)
번 역 : 쟈크 엘룰 번역 위원회
출판사 : 대장간
새로 시작해야 될 문제를, 대충 수리해서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전부 다 틀려 버린 교회는 새로 시작해야 될 교회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실정에 있다. 교회가 잘못된 취지에서 설립되더니 곧장 목회자들이 배출되었고 또한 그들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지닌 채 교계에 진출하면서 지속적으로 잘못된 교회를 설립하는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 한 번이라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접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아니, 복음이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닌다. 왜냐하면 복음은 자기 자신의 화려한 모든 미래의 장밋빛 꿈을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사태가 오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이 원하고 있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 참으로 바르게 목회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발 망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자아성취에 미쳐 있다. 목회를 통한 자아실현을 달성코자 한다. 쟈크 엘룰은, 기독교의 2000년 역사가 이런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철저하게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민중들은 교회에서 완벽하게 달라져 버린 복음만을 접하게 되는 비극 속에 있다. 이 복음에 달라붙어 천국을 간다…?
핍박의 대상으로서 복음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복음이 무너진 첫 번째 계기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빚어졌다. 이교적인 풍물들을 성스럽게 기독교화하겠다고 덤벼들면서 십자가가 파묻혀 버린 것이다. 선교의 성공과 십자가를 맞바꾼 것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 십자가를 팔아 버린 경우가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일단 안정기에 접어든 교회는 소위 거룩한 '자선사업'을 시도했다. 복음의 사회화 달성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사업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이 사업을 보다 활성화시키고 확장하면서도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연계했다. 높은 공직자들과 재산가들이 교회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교세 확장을 위해 적절한 자리 배정 때문이다. 사회와 같이 교회 내에서 계급과 계층이 일게 된 것을 당연했고 그 계급들은 '거룩의 강도(强度)'라는 차원에서 성직 계열을 형성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단 한 명의 참된 기독교인만 있어도 기독교의 실재성을 충분히 입증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때, 기독교인의 개념은 상실된다. 기독교 국가는 우리가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를 교활하게 폐지해 버렸다. 어떤 종교가 그 번창하는 힘 때문에 폐지된 예는 아마 기독교밖에 없을 것이다.”(p. 65)
일단 권력화 된 조직은 계속적으로 민중들을 손아귀에 휘어잡기 위해 적절한 통치 이념이 권력층에서 제시된다. 주된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의 물질화'이다. 즉 인위적으로 눈에 보이고 구분되는 식의 종교 형식들을 풍부하게 제작해서 내어놓았다. 시간적으로 거룩된 날과 속된 날의 구분, 공간적으로 거룩한 장소와 속된 장소와의 구분, 인물로서 거룩한 성직과 평신도와의 구분, 거룩을 눈요깃감으로 바꾼 이런 종교 놀이 기구로서 민중들의 마음을 제도 교회의 숭고성에다 붙들어 매어 놓았다. 마치 강아지 붙들어 놓듯이!
교회의 신성화는 역설적으로 교회의 저질성을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제도교회의 부패에 혐오를 느낀 인사들이 여러 가지로 반발했지만 그들은 복음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신비주의를 수입하여 기도원이나 수도원을 만들었다. 거기에서는 교회의 성찬과 설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신비에 이르는 종교 테크닉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금식, 진을 빼는 춤, 절대적 침묵, 자기 학대술, 심지어 마약까지 이용했다. 기성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역시 같은 권력층에서 흥정을 일삼아 왔던 지배 계층은 봉건 영주들이었다.
그들은 대지주들이다. 그들은 자기 구미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원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부르주아적인 교회인 개신교의 출현이다. 민족 정서에 따라, 프랑스교회, 영국교회, 스웨덴교회, 덴마크교회, 네덜란드교회와 같은 교회들이 제각기의 신앙고백서를 내놓고 각자의 살림살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민족 교회들의 명분도 활발한 식민지 개척 앞에서도 무색해지고 오직 자기네 나라의 경제 부흥과 선진국 진입을 위한 충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녕과 무궁한 영광을 위해 조찬기도회라도 열어 주는 것이, 권력에 기생하려는 교회들의 아첨이요 생존의 법칙이다. 이처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는다는 전제 조건 하에서만 철저한 법의 기관으로 정착되어 이 사회의 일부가 된다. 이제는 사람의 기관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기관은 아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옹호 교회만 있을 뿐이고,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자본주의 옹호하는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어떤 것도 기독교 이상으로 인간을 불쾌하게 하지는 않으며 신약의 교회보다 더 이간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만일 기독교가 바르게 선포된다면 기독교는 수백만의 기독교인도 얻지 못하고 지상에서의 모든 대가와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p 251)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님
저자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의 말을 원용하면서 조그마한 낙관론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낙관이던 비관이든 항상 증명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지 그냥 희망 주는 걸로 그쳐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가 아직도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성도가 기댈 것은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다. 아직 하나의 약속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그 약속 안에서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지금도 꾸준히 전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개혁해서 제대로 된 교회를 그 안에서 영글어 내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방식과 전혀 딴판이다.
교회는 그 누구가 달려들어도 개혁될 수 없는데, 이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이미 따로 계시기 때문이요 개혁이 필요치 않는 완전한 교회를 지금도 계속 붙잡고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거기에 반해 민중의, 민중들에 의한, 민중들을 위한 비복음적 교회는 이 세상이 끝날 까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번창하고 부흥한다. 인간들은, 온 세상을 자신의 날개로 덮어 영원히 홀로 신이 될 때까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민중들을 향하여 아무리 개혁과 반성과 회개를 촉구해도 그렇게 주창하는 주도 세력 역시 개혁되어야 될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민중들의 종교 비젼에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일관된 약속에 의존하는 자만이 진정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신자들이다.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는 이들을 통해 아직도 주님께서 약속대로 일하시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낙관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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