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사상 : 동·서양의 풍부한 신비체험을 분석·정리한
신비사상 : 동·서양의 풍부한 신비체험을 분석·정리한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신비사상 : 동·서양의 풍부한 신비체험을 분석·정리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월터 T. 스테이스
번 역 : 강건기, 정륜
출판사 : 동쪽나라
신비를 사모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널려 있는 현상이다. 종교인뿐 아니라 그 틀을 벗어나서 누구에게나 생겨날 수 있는 체험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신비 사상을 비교하고 사전에 분별력을 갖추므로서, 잘못된 신비 사상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고 부추기는 오류에 대비해야 한다. 본 책은 그 창고 역할을 해 준다.
신비 체험은 모두 같은 것이다. 종교에 따라 특별난 개성을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일자나 완전자를 발견한 체험들이다. 보통 이 체험에는 두 가지 경우를 가지다. 외부 자연물을 관찰해서 느끼는 경우와 내부적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서 생기는 경우이다.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외운다든지 성경 구절을 정한 시간 때마다 묵상하는 것은 내부적 방법이다.
1. 힌두교의 신비 사상
힌두교는 순수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혼재한다. 모든 존재는 각기 그들만의 자아가 있다. 그리고 그 자아들이 곧 '나'이다. 그 많은 다양성 안에서 이처럼 순수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마치 소금 덩어리가 물에 빠졌을 때 비록 소금 덩어리는 다시 꺼낼 수 없으나 모든 물에서 짠맛을 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자아의 의식만 있는 곳에는 모든 개별성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이 있다. 하나의 절대자이다. 그는 가장 깊숙한 곳의 자아이다. 인간의 심중에도 그는 자신의 순수함을 드러낸다. 이 순수함을 통해서 인간은 그 절대적 자아에게 도달될 수 있다. 이럴 때 순수 자아는 우주적 절대자인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
2. 불교의 신비 사상
불교는 전반적으로 붓다라는 사람이 깨쳤던 체험의 산물이다. 붓다는 자신의 체험을 개별적 자아니 혹은 절대자와의 합일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늘 변화하는 의식이 인간 속에 있음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그 의식의 흐름을 이용하여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평화를 구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정된 절대적인 것도 없고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여기는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원리만 있는데 이 원리는 생성과 소멸의 계속 반복될 뿐이다.
3. 도가(道家) 신비 사상
도란, 세계의 심연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창고이고 거기서 만물이 분화되어 나오다. 하지만 도는 텅텅 비어 있는 무(無)의 세계이다. 계속 정숙한 상태를 유지한다. 도는 신보다도 앞선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도 그 빈곳에서 나온 것이다.
4. 플로티누스
신플라톤주의 자이다. 그는 기독교를 알았지만 기독교 신자는 되지 않았다. 우주의 근원은 일자에 두었다. 자아와 같지 않는 일자이다. 세계는 그곳에서 나온 것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세계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일자에서 흘러 배출되어 생성된 것이다(유출). 단계를 가지면서 세상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최초로 유출된 것은 정신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유출된 것은 영혼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하향되어진 그 경로를 따라 상승되어 신과 합일할 수도 있다. 어두운 세계에 홀려서 어두운 영혼으로 있지 말고 일자를 영접하여 자기 대신 일자를 생각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영혼에 빛이 들어온다.
5. 기독교의 신비 사상
이 세상의 물질 속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점과 그리고 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므로서 도덕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와 차이가 난다. 에크하르트는, '영혼 안의 그리스도 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신비 체험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시킨다. 자신의 영혼을 신성이라고 믿었고 이 영혼에서 통일된 삼위 하나님의 신성과 만난다는 것이다. 영혼은 늘 텅 비어 있어야 되고 침묵으로 순수성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루스브뢰크(Ruusbroec)라는 사람은, 최고의 신비의 수준을 '하나님을 보는 사람'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런 수준에서는 개별적 주체성마저 잃어버린다. 체험이 완벽하면, 주관과 객관이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사람은, 훈련이나 수단 없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다. 성 요한이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떠올리는 명상의 방법으로 모든 감각으로 물리치고 영혼 내부를 캄캄하게 만들므로서 합일에 이른다고 한다.
6. 이슬람교의 신비 사상
수피즘으로 대변되는 이슬람의 신비 사상은, 표현 방식에 있어 공격적이고 도발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을 하나님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오 당신이 곧 나이요!"
7. 유대교의 신비 사상
기독교와는 달리 합일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나약성을 극명하게 구분 짓는 것부터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함과 영광과 주관성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8. 현대의 신비 체험
완전한 것을 발견한 순간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그만 두는 체험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비 체험에 대한 성경적 평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고유한 자신만의 존재성을 외부로 계시하게 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어떤 식으로 체험을 표현하든 그 모든 것은 본인만의 함축된 인생역정이며 독자적 세계에 국한된다.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성도의 진위를 구분하는 방법을 등장시킨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을 분류하고 계시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필히 탈락시킨다. 육체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로 귀결시키는 모든 행위들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성령의 일이란,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십자가 지신 예수라는 실제적 한 인물을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 문구를 거론하든지, 어떤 신비적 용어를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에다 모든 원인과 영광을 환원시키지 않는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 결코 아니다. 성령 자신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국한해서 증언하시고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신비체험은 차라리 그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묻어 버리고 부인해 버려야 될 꺼리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22-23)
첨부파일 : 신비사상.hwp (32.0K), Down:15
관리자(IP:124.♡.84.82)
09-02-20 19:17
신비사상 : 동·서양의 풍부한 신비체험을 분석·정리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월터 T. 스테이스
번 역 : 강건기, 정륜
출판사 : 동쪽나라
신비를 사모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널려 있는 현상이다. 종교인뿐 아니라 그 틀을 벗어나서 누구에게나 생겨날 수 있는 체험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신비 사상을 비교하고 사전에 분별력을 갖추므로서, 잘못된 신비 사상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고 부추기는 오류에 대비해야 한다. 본 책은 그 창고 역할을 해 준다.
신비 체험은 모두 같은 것이다. 종교에 따라 특별난 개성을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일자나 완전자를 발견한 체험들이다. 보통 이 체험에는 두 가지 경우를 가지다. 외부 자연물을 관찰해서 느끼는 경우와 내부적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서 생기는 경우이다.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외운다든지 성경 구절을 정한 시간 때마다 묵상하는 것은 내부적 방법이다.
1. 힌두교의 신비 사상
힌두교는 순수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혼재한다. 모든 존재는 각기 그들만의 자아가 있다. 그리고 그 자아들이 곧 '나'이다. 그 많은 다양성 안에서 이처럼 순수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마치 소금 덩어리가 물에 빠졌을 때 비록 소금 덩어리는 다시 꺼낼 수 없으나 모든 물에서 짠맛을 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자아의 의식만 있는 곳에는 모든 개별성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이 있다. 하나의 절대자이다. 그는 가장 깊숙한 곳의 자아이다. 인간의 심중에도 그는 자신의 순수함을 드러낸다. 이 순수함을 통해서 인간은 그 절대적 자아에게 도달될 수 있다. 이럴 때 순수 자아는 우주적 절대자인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
2. 불교의 신비 사상
불교는 전반적으로 붓다라는 사람이 깨쳤던 체험의 산물이다. 붓다는 자신의 체험을 개별적 자아니 혹은 절대자와의 합일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늘 변화하는 의식이 인간 속에 있음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그 의식의 흐름을 이용하여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평화를 구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정된 절대적인 것도 없고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여기는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원리만 있는데 이 원리는 생성과 소멸의 계속 반복될 뿐이다.
3. 도가(道家) 신비 사상
도란, 세계의 심연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창고이고 거기서 만물이 분화되어 나오다. 하지만 도는 텅텅 비어 있는 무(無)의 세계이다. 계속 정숙한 상태를 유지한다. 도는 신보다도 앞선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도 그 빈곳에서 나온 것이다.
4. 플로티누스
신플라톤주의 자이다. 그는 기독교를 알았지만 기독교 신자는 되지 않았다. 우주의 근원은 일자에 두었다. 자아와 같지 않는 일자이다. 세계는 그곳에서 나온 것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세계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일자에서 흘러 배출되어 생성된 것이다(유출). 단계를 가지면서 세상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최초로 유출된 것은 정신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유출된 것은 영혼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하향되어진 그 경로를 따라 상승되어 신과 합일할 수도 있다. 어두운 세계에 홀려서 어두운 영혼으로 있지 말고 일자를 영접하여 자기 대신 일자를 생각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영혼에 빛이 들어온다.
5. 기독교의 신비 사상
이 세상의 물질 속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점과 그리고 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므로서 도덕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와 차이가 난다. 에크하르트는, '영혼 안의 그리스도 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신비 체험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시킨다. 자신의 영혼을 신성이라고 믿었고 이 영혼에서 통일된 삼위 하나님의 신성과 만난다는 것이다. 영혼은 늘 텅 비어 있어야 되고 침묵으로 순수성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루스브뢰크(Ruusbroec)라는 사람은, 최고의 신비의 수준을 '하나님을 보는 사람'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런 수준에서는 개별적 주체성마저 잃어버린다. 체험이 완벽하면, 주관과 객관이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사람은, 훈련이나 수단 없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다. 성 요한이라는 사람은 십자가를 떠올리는 명상의 방법으로 모든 감각으로 물리치고 영혼 내부를 캄캄하게 만들므로서 합일에 이른다고 한다.
6. 이슬람교의 신비 사상
수피즘으로 대변되는 이슬람의 신비 사상은, 표현 방식에 있어 공격적이고 도발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을 하나님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오 당신이 곧 나이요!"
7. 유대교의 신비 사상
기독교와는 달리 합일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나약성을 극명하게 구분 짓는 것부터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함과 영광과 주관성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8. 현대의 신비 체험
완전한 것을 발견한 순간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그만 두는 체험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비 체험에 대한 성경적 평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고유한 자신만의 존재성을 외부로 계시하게 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어떤 식으로 체험을 표현하든 그 모든 것은 본인만의 함축된 인생역정이며 독자적 세계에 국한된다.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성도의 진위를 구분하는 방법을 등장시킨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을 분류하고 계시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필히 탈락시킨다. 육체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로 귀결시키는 모든 행위들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성령의 일이란,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란, 십자가 지신 예수라는 실제적 한 인물을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 문구를 거론하든지, 어떤 신비적 용어를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에다 모든 원인과 영광을 환원시키지 않는 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 결코 아니다. 성령 자신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국한해서 증언하시고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신비체험은 차라리 그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묻어 버리고 부인해 버려야 될 꺼리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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