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사랑의 역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번 역 : 김영
출판사 : 민음사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이다. 사랑 받지 못하면 병에 들기도 한다. 인간은 왜 사랑을 원하며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는가? 보다 많은 사랑의 행위들을 인류사를 통해 조사해보면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내려질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자기애부터 시작되는 사랑
인간은 욕망은, 자크 라캉이 밝힌 것과 같이 세 가지 단계를 가지고 있다. 허구를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상상계, 그리고 대상을 얻는 상징계, 그 상징에 동일화시킬 수 있는 실재를 찾아 나서는 실재계이다. 사랑의 주체는 늘 결핍된 것이며 사랑이라는 욕망도 그 시초가 나르시즘, 즉 자기애부터 시작이 되는데 자기애란, 절대자와 동일화하기 위해 마련된 빈자리이다. 이 동일화 작업은 소유화로 이루어져 나간다. 누구를 가져야 되겠다는 데서 결핍 의식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의 보편적 원리는 항상 자기 사랑이며 그것이 동성애로 이어진다. 동성애란, 자기와 같이 자기애에 빠진 상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 동성애의 시발이 희랍의 에로스 신화이다. 에로스는, 신성과의 결합을 위해 중재자로서 젊은이의 육체를 가져온다. 흥분된 힘을 사랑하므로서 영혼은 생동감을 얻어 하늘로 나른다. 에로스 사랑이란, 생식 능력을 갈망하므로서 초인이 되려는 노력의 성향이다. 구약 시대의 사랑은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되더라도 인간이라는 중재자를 통해서 은유로서 신의 사랑이 전달된다. 절대로 도달 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분이 흔쾌히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즐거운 금지의 영역 안에서 근본적으로 분리이지만 통합 안에 신의 사랑이 존재한다. 인간의 욕망과 신의 결합이다. 구약 아가서에서 표현된 사랑은, 남편의 지배 아래의 사랑이지만 궁극적으로 신에 의해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종교적 감정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신 플라톤 철학에서의 사랑은, 천한 육체를 배제하므로서 보이지 않는 사물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이다. 응시는 감동을 일으킨다.
사랑은 빛의 확산이며 반사이다. 철저히 나르시스 적으로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 사랑이다. 정신적 공간을 사랑한다. 대상이 따로 없고 자신이 사랑을 내뱉는 주체이기 때문에 결국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몸짓이며 표현이다. 지워질 수 없는 고독안에 있으면서 그 고독을 향유하며 사랑한다. 육적인 성애를 즐길 타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고통은 없는 대신 오직 환각이 주는 황홀에 젖어들 수 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랑은, 희생을 통한 죄악 속으로의 참여이다. 죄를 유발시키는 율법이 은혜의 사랑과 더불어 주어진다. 그리고 실존 안에서 폭발하는 죄와 넘치는 은혜가 상호 상승 작용하며 경쟁하도록 만든다. 죄악에 흠뻑 취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혜는 그 상대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잃게 해서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신자가 소유할 수 있는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을 요구하는 희생을 그리스도는 선물로 준다. 그리스도와의 이 동일화를 사랑이라고 한다. 신약 성경에서의 사랑은 죽음을 극단까지 요구해서 신자로 하여금 나르시즘을 깨도록 한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나르시즘이 기초로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12세기 때, 성 베르나르가 말하는 사랑은, 타자를 향하여 움직이는 충동과 상호 간에 끄는 힘으로 묘사한다. 13세기 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절대 선을 말한다. 자아의 선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로미오와 줄리엣'라는 작품에 나타난 셰익스피어의 사랑은, 일찍 죽었던 아들 햄넷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속죄를 위하여 증오의 법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숭고한 선물이다.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사람을 끝내 죽음으로 처리하여 오히려 그 사랑을 영원한 위치에다 고정시켜 놓고 있다.
관능적인 '기사도의 사랑'이 싹튼 초기부터 일어난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배 바람은, 속세로부터의 벗어난 위대한 신앙의 승리와 여인에 대한 강렬한 성적 충동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한 극복 수단으로 주어졌다. 늘 분리의 상징이자 격리된 영원성을 대변하는 '어머니'의 역할은 '눈물 흘리는 성모'로서 너무나 적절했다. 육체의 분리 때부터 생긴 존재 결핍의 틈에 대해서 마리아는 신의 사랑을 대리하여 잘도 메꾸어 주고 있다.
저자는 결론 짓기를, 이처럼 글쓰기 언어활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곧 나르시즘의 이상화이다. 인간의 사랑은 전부 나르시즘, 즉 자기 애착과 자기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나르시즘은 자라나면서 끊임없이 모방 작업에 들어간다. 자기 존재와 같은 존재를 찾아 그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처럼 살고 싶어 한다. 음유시인의 시 속에서 이 나르시즘은 활짝 꽃이 핀다. 결국 사랑은 존재의 증발로 이어진다. 이 존재의 분실을 감추기 위해 계속 자아를 위장하고 변신하고 때로는 폭력과 관능의 힘으로 자아의 본질을 닮은 상대를 찾아 소유하려고 하는 행위, 이것을 사랑이라고 본다.
성경에서의 사랑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은, 복수하는 작업이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 나타나서는 매일 같이 거룩한 성소 안에서 피를 뿌리며 희생을 요구하는 그 모습에서 질투에 찬 사랑은 극단에 이른다. 용서 없는 심판이 의로운 자의 대리 죽음 안에서 새로운 사랑으로 전환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주어지는 환경이다. 이 환경 밖에서 논의되는 신의 사랑은 곧 인간들의 자위행위가 위장된 것에 불과하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지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랑받을 조건을 그리스도가 대신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 사랑이 자기 행위와 관련될 수 없는가도 안다. 자기 행위로 인해 예수님이 피해자가 되었음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진 용서이지 결코 인간 자기 행위 발산이 될 수 없다. 가해자인 자신이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서 이 용서의 의미만을 주위에 알려주므로서 이웃 사랑의 차원까지 확산된다.
이웃 사랑이란, 주위의 있는 모든 자를 그리스도 앞에서 피해자로, 그리고 심판받을 상대자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속에서 이들은 도리어 핍박과 놀림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들 속에서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원형으로서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마 25:35-40) 그리스도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곧 아직도 하나님이 제시한 이웃 사랑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만으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고난 받는 자가 과연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곧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위해 뭉쳐진 자들 속에서 주님의 사랑은 사라지고 인간들의 자기애만 가득 남아 있을 것이다.
첨부파일 : 사랑의역사.hwp (32.0K), Down:16
관리자(IP:124.♡.84.82)
09-02-20 18:27
사랑의 역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번 역 : 김영
출판사 : 민음사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이다. 사랑 받지 못하면 병에 들기도 한다. 인간은 왜 사랑을 원하며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는가? 보다 많은 사랑의 행위들을 인류사를 통해 조사해보면 여기서부터 사랑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내려질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자기애부터 시작되는 사랑
인간은 욕망은, 자크 라캉이 밝힌 것과 같이 세 가지 단계를 가지고 있다. 허구를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상상계, 그리고 대상을 얻는 상징계, 그 상징에 동일화시킬 수 있는 실재를 찾아 나서는 실재계이다. 사랑의 주체는 늘 결핍된 것이며 사랑이라는 욕망도 그 시초가 나르시즘, 즉 자기애부터 시작이 되는데 자기애란, 절대자와 동일화하기 위해 마련된 빈자리이다. 이 동일화 작업은 소유화로 이루어져 나간다. 누구를 가져야 되겠다는 데서 결핍 의식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의 보편적 원리는 항상 자기 사랑이며 그것이 동성애로 이어진다. 동성애란, 자기와 같이 자기애에 빠진 상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 동성애의 시발이 희랍의 에로스 신화이다. 에로스는, 신성과의 결합을 위해 중재자로서 젊은이의 육체를 가져온다. 흥분된 힘을 사랑하므로서 영혼은 생동감을 얻어 하늘로 나른다. 에로스 사랑이란, 생식 능력을 갈망하므로서 초인이 되려는 노력의 성향이다. 구약 시대의 사랑은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되더라도 인간이라는 중재자를 통해서 은유로서 신의 사랑이 전달된다. 절대로 도달 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분이 흔쾌히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즐거운 금지의 영역 안에서 근본적으로 분리이지만 통합 안에 신의 사랑이 존재한다. 인간의 욕망과 신의 결합이다. 구약 아가서에서 표현된 사랑은, 남편의 지배 아래의 사랑이지만 궁극적으로 신에 의해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종교적 감정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신 플라톤 철학에서의 사랑은, 천한 육체를 배제하므로서 보이지 않는 사물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이다. 응시는 감동을 일으킨다.
사랑은 빛의 확산이며 반사이다. 철저히 나르시스 적으로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 사랑이다. 정신적 공간을 사랑한다. 대상이 따로 없고 자신이 사랑을 내뱉는 주체이기 때문에 결국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몸짓이며 표현이다. 지워질 수 없는 고독안에 있으면서 그 고독을 향유하며 사랑한다. 육적인 성애를 즐길 타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고통은 없는 대신 오직 환각이 주는 황홀에 젖어들 수 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랑은, 희생을 통한 죄악 속으로의 참여이다. 죄를 유발시키는 율법이 은혜의 사랑과 더불어 주어진다. 그리고 실존 안에서 폭발하는 죄와 넘치는 은혜가 상호 상승 작용하며 경쟁하도록 만든다. 죄악에 흠뻑 취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혜는 그 상대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잃게 해서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신자가 소유할 수 있는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을 요구하는 희생을 그리스도는 선물로 준다. 그리스도와의 이 동일화를 사랑이라고 한다. 신약 성경에서의 사랑은 죽음을 극단까지 요구해서 신자로 하여금 나르시즘을 깨도록 한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나르시즘이 기초로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12세기 때, 성 베르나르가 말하는 사랑은, 타자를 향하여 움직이는 충동과 상호 간에 끄는 힘으로 묘사한다. 13세기 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절대 선을 말한다. 자아의 선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로미오와 줄리엣'라는 작품에 나타난 셰익스피어의 사랑은, 일찍 죽었던 아들 햄넷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속죄를 위하여 증오의 법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숭고한 선물이다.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사람을 끝내 죽음으로 처리하여 오히려 그 사랑을 영원한 위치에다 고정시켜 놓고 있다.
관능적인 '기사도의 사랑'이 싹튼 초기부터 일어난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배 바람은, 속세로부터의 벗어난 위대한 신앙의 승리와 여인에 대한 강렬한 성적 충동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한 극복 수단으로 주어졌다. 늘 분리의 상징이자 격리된 영원성을 대변하는 '어머니'의 역할은 '눈물 흘리는 성모'로서 너무나 적절했다. 육체의 분리 때부터 생긴 존재 결핍의 틈에 대해서 마리아는 신의 사랑을 대리하여 잘도 메꾸어 주고 있다.
저자는 결론 짓기를, 이처럼 글쓰기 언어활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곧 나르시즘의 이상화이다. 인간의 사랑은 전부 나르시즘, 즉 자기 애착과 자기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나르시즘은 자라나면서 끊임없이 모방 작업에 들어간다. 자기 존재와 같은 존재를 찾아 그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처럼 살고 싶어 한다. 음유시인의 시 속에서 이 나르시즘은 활짝 꽃이 핀다. 결국 사랑은 존재의 증발로 이어진다. 이 존재의 분실을 감추기 위해 계속 자아를 위장하고 변신하고 때로는 폭력과 관능의 힘으로 자아의 본질을 닮은 상대를 찾아 소유하려고 하는 행위, 이것을 사랑이라고 본다.
성경에서의 사랑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은, 복수하는 작업이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 나타나서는 매일 같이 거룩한 성소 안에서 피를 뿌리며 희생을 요구하는 그 모습에서 질투에 찬 사랑은 극단에 이른다. 용서 없는 심판이 의로운 자의 대리 죽음 안에서 새로운 사랑으로 전환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주어지는 환경이다. 이 환경 밖에서 논의되는 신의 사랑은 곧 인간들의 자위행위가 위장된 것에 불과하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지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랑받을 조건을 그리스도가 대신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 사랑이 자기 행위와 관련될 수 없는가도 안다. 자기 행위로 인해 예수님이 피해자가 되었음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진 용서이지 결코 인간 자기 행위 발산이 될 수 없다. 가해자인 자신이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서 이 용서의 의미만을 주위에 알려주므로서 이웃 사랑의 차원까지 확산된다.
이웃 사랑이란, 주위의 있는 모든 자를 그리스도 앞에서 피해자로, 그리고 심판받을 상대자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속에서 이들은 도리어 핍박과 놀림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들 속에서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원형으로서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마 25:35-40) 그리스도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곧 아직도 하나님이 제시한 이웃 사랑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만으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고난 받는 자가 과연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곧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위해 뭉쳐진 자들 속에서 주님의 사랑은 사라지고 인간들의 자기애만 가득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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