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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포스트 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성경신학히브리서

포스트 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포스트 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길희성
출판사 : 민음사

이 사회에는 기독교인들만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데서 바라보고 있는 눈들이 있다. 기독교를 보편적 종교의 범주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비치게 될까? 스스로 한계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그 종교학의 잣대에 의해서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가 어떻게 곡해되어 버리느냐를 본 책의 저자로부터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전제 : 모두 다 동등한 종교들이다.

구원이란 단순히 몽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종교를 갖고 있는 자들의 변화된 인격과 삶을 통해서 구원의 실재성과 현실성을 경험하고 확인되어야 한다. 종교의 힘은 우선 그 신자의 변화된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종교들을 명사적으로 따라 분류시키는 것보다 형용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불교적], [그리스도적], [유교적]으로 받아들이면 종래에 생각했던 것보다 서로들 간에 훨씬 많은 가까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종교의 진리성에 충실하면서도 타종교에 대해여 개방적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에 봉사할 수 있는 종교학이 되려면 모두 다 같은 동등성을 갖는 종교이라는 점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신비를 위한 공간은 언제나 남겨져 있어야 한다. 타종교에서도, 기독교가 미처 보지 못한 진리가 포착될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구원하시기 원하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지닌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비도덕적일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복음이 늦게 들어와서 복음을 받아 드릴 기회를 맛보지도 못한 자에게 징벌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위배된다. 오직 그리스도만 이라는 신학보다는 오직 하나님만 이라는 신학으로 바뀌어야 된다. 왜냐하면 결국 존재의 순서상, 인간이 구원된 것은 인간 자신의 공로도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보다 앞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무조건 모든 종교, 모든 종파, 모든 종교 사상들은 다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원시켜 준 사랑이라는 것이, 기독교 테두리 안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대화이다. 서로 각 종교가 갖고 있는 공통적 종교적 표상을 상호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불교의 자비도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표상으로는 같은 차원에 속한다. 자기 부정을 통한 이웃 사랑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깨달음(돈오)이나 기독교의 믿음 같은 것도 인위적인 행위의 개입됨 없이 이루어진 기쁜 소식에 대한 주관적 수납을 말한다. 불교의 대승적 보살의 모습과 기독교의 예수의 모습과 서로 연계할 수 있다. 둘 다 자유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정하며 사신 예수는 곧 불교의 정토 사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몰 지각성

저자는 기독교를 접근 할 때 자신의 '죄악됨'이나 흑은 아담의 '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상정해서 두 존재의 결합을 곧 구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관은 구약 성경에서 계속 이어오는 하나님 심판 행위나 무섭고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진정한 취지를 살려내지 못해 내고 있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신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의 언약 원칙을 이탈해서 나름대로 따로 설정한 것이다. 인간들이 죄로 인해 모든 것이 변질된 이후에 가장 차이나는 점은, 선악과 지식에 기초해서 무엇이든지 사상 체제를 구축한다는데 있다. 즉 이왕 알게 된 선과 악의 지식이나 이것을 이용하여 선한 쪽으로 잘 활용하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선악과를 알게 된 그 자체부터 죄라고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원래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다른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 맺고자 시도하는 것부터 이미 죄악된 마음의 소산이다. 이스라엘에게 진멸당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의 이상적 인간 사회를 구상하지 못해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멸망당한 처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삶 자체가 죄 안에 놓여 있는 고로 자기 딴에, 이미 자기 종교와 자기네들의 메시아로부터 구원과 축복과 사랑의 대상이 받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정신 상태에서 자기네들을 행하여 돌진해 오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이해할 리가 없는 법이다. 단순히 자기네들의 선택적 국가관에 의해 배타성이 강렬한 민족으로만 납득이 될 뿐이다. 문제는 종교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태가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단순지 자신의 기발한 종교성에 매료된 광신자들이 아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자기들조차도 얼마든지 멸망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거룩한 실제의 여호와께서(히브리서 12장 끝 부분) 늘 상주해 계신다는 엄연한 현실성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 배타성과 선택성 사이의 차이점에 어둡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하나님이 자신들만 특별히 선택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편협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지닌 편협성의 투영일 뿐이다"(P 106)

하지만 그 당시 적당한 종교들이 모자라서 이스라엘이 그런 배타적 신을 모시고 국가를 설립했겠는가? 그들은 거룩한 분의 거룩성 때문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최초로 국가로 등장된 것이다. 이점이 인간의 보편적 종교성 안에 담겨 있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상과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잘 섬겨 보자!"가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라는 싸움이다. 이 모든 싸움은 바로 하나님의 무서운 질투심이 개입되어 벌어진 상황이다. 어느 것과도 바뀌지 않는 강한 하나님의 질투심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이다. 하지만 저자가 갖고 있는 하나님 상에는 이 싸움하시는 하나님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 하나님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님 상을 가지고 포용성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자는 식의 종교는 이방적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서로를 '신'으로 추겨 세워주는 바쁜 사이비 신선들의 비실제적 위로만 남무할 뿐이다. 돌아서면 또다시 사랑과 칭찬에 목말라하는 끝없는 굶주림만 요구되는 죄악된 몸인 것을 ….

첨부파일 : 포스트모던사회와열린종교.hwp (32.0K), Down:21

관리자(IP:124.♡.84.82)

09-02-20 17:53

포스트 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길희성
출판사 : 민음사

이 사회에는 기독교인들만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데서 바라보고 있는 눈들이 있다. 기독교를 보편적 종교의 범주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면 어떤 모습으로 비치게 될까? 스스로 한계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그 종교학의 잣대에 의해서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가 어떻게 곡해되어 버리느냐를 본 책의 저자로부터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전제 : 모두 다 동등한 종교들이다.

구원이란 단순히 몽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종교를 갖고 있는 자들의 변화된 인격과 삶을 통해서 구원의 실재성과 현실성을 경험하고 확인되어야 한다. 종교의 힘은 우선 그 신자의 변화된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종교들을 명사적으로 따라 분류시키는 것보다 형용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불교적], [그리스도적], [유교적]으로 받아들이면 종래에 생각했던 것보다 서로들 간에 훨씬 많은 가까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종교의 진리성에 충실하면서도 타종교에 대해여 개방적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에 봉사할 수 있는 종교학이 되려면 모두 다 같은 동등성을 갖는 종교이라는 점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신비를 위한 공간은 언제나 남겨져 있어야 한다. 타종교에서도, 기독교가 미처 보지 못한 진리가 포착될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구원하시기 원하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지닌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비도덕적일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복음이 늦게 들어와서 복음을 받아 드릴 기회를 맛보지도 못한 자에게 징벌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위배된다. 오직 그리스도만 이라는 신학보다는 오직 하나님만 이라는 신학으로 바뀌어야 된다. 왜냐하면 결국 존재의 순서상, 인간이 구원된 것은 인간 자신의 공로도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보다 앞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무조건 모든 종교, 모든 종파, 모든 종교 사상들은 다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원시켜 준 사랑이라는 것이, 기독교 테두리 안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대화이다. 서로 각 종교가 갖고 있는 공통적 종교적 표상을 상호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불교의 자비도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표상으로는 같은 차원에 속한다. 자기 부정을 통한 이웃 사랑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깨달음(돈오)이나 기독교의 믿음 같은 것도 인위적인 행위의 개입됨 없이 이루어진 기쁜 소식에 대한 주관적 수납을 말한다. 불교의 대승적 보살의 모습과 기독교의 예수의 모습과 서로 연계할 수 있다. 둘 다 자유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정하며 사신 예수는 곧 불교의 정토 사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몰 지각성

저자는 기독교를 접근 할 때 자신의 '죄악됨'이나 흑은 아담의 '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상정해서 두 존재의 결합을 곧 구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관은 구약 성경에서 계속 이어오는 하나님 심판 행위나 무섭고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진정한 취지를 살려내지 못해 내고 있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신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의 언약 원칙을 이탈해서 나름대로 따로 설정한 것이다. 인간들이 죄로 인해 모든 것이 변질된 이후에 가장 차이나는 점은, 선악과 지식에 기초해서 무엇이든지 사상 체제를 구축한다는데 있다. 즉 이왕 알게 된 선과 악의 지식이나 이것을 이용하여 선한 쪽으로 잘 활용하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선악과를 알게 된 그 자체부터 죄라고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원래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다른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 맺고자 시도하는 것부터 이미 죄악된 마음의 소산이다. 이스라엘에게 진멸당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의 이상적 인간 사회를 구상하지 못해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멸망당한 처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삶 자체가 죄 안에 놓여 있는 고로 자기 딴에, 이미 자기 종교와 자기네들의 메시아로부터 구원과 축복과 사랑의 대상이 받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정신 상태에서 자기네들을 행하여 돌진해 오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이해할 리가 없는 법이다. 단순히 자기네들의 선택적 국가관에 의해 배타성이 강렬한 민족으로만 납득이 될 뿐이다. 문제는 종교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태가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단순지 자신의 기발한 종교성에 매료된 광신자들이 아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자기들조차도 얼마든지 멸망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거룩한 실제의 여호와께서(히브리서 12장 끝 부분) 늘 상주해 계신다는 엄연한 현실성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 배타성과 선택성 사이의 차이점에 어둡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하나님이 자신들만 특별히 선택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편협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지닌 편협성의 투영일 뿐이다"(P 106)

하지만 그 당시 적당한 종교들이 모자라서 이스라엘이 그런 배타적 신을 모시고 국가를 설립했겠는가? 그들은 거룩한 분의 거룩성 때문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최초로 국가로 등장된 것이다. 이점이 인간의 보편적 종교성 안에 담겨 있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상과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잘 섬겨 보자!"가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라는 싸움이다. 이 모든 싸움은 바로 하나님의 무서운 질투심이 개입되어 벌어진 상황이다. 어느 것과도 바뀌지 않는 강한 하나님의 질투심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이다. 하지만 저자가 갖고 있는 하나님 상에는 이 싸움하시는 하나님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 하나님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님 상을 가지고 포용성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자는 식의 종교는 이방적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서로를 '신'으로 추겨 세워주는 바쁜 사이비 신선들의 비실제적 위로만 남무할 뿐이다. 돌아서면 또다시 사랑과 칭찬에 목말라하는 끝없는 굶주림만 요구되는 죄악된 몸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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