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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호모 루덴스 :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성경신학마태복음

호모 루덴스 :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호모 루덴스 :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요한 호이징하
번 역 : 김윤수
출판사 : 까치글방

놀이를 통해서 본 인간

본 책은 인간을, '놀이'라는 특수한 세계를 통해서 철저하게 분석해 놓은 책이다.

놀이는 인간의 생리 현상이 아니라 정신의 '과잉' 현상이다. 일상적인 패턴을 유지하다가도 틈만 나면 독립된 자유 영역을 만들어 내곤 한다. 기존의 공간과도 격리되고 시간과도 이탈된 채 나름대로의 진지한 세계에 빠져든다. 그 안에서 모방의 세계가 열린다. "진짜는 아니다" 그러나 진짜인 것처럼 행세해야 하는 법에 모두 복종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믿음'이란, 경험상 납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진실인 '체'를 해야 하는 새로운 놀이의 세계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신과 함께 하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원리이다.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의 제의는 놀이의 일종이다. 신과 함께 하는 축제이다. 자기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상성에 탈피한 새로운 영역을 외딴 데다 장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신과 함께 하는 세계라 규정하고 파격적인 권위와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일단 이 종교 놀이 안에 들어오면 '믿는 것'과 '믿는 체' 하기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 놀이의 형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과 투쟁하는 놀이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기 표현을 위한 놀이이다. 타인과의 투쟁으로서의 놀이는 늘 '이긴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승리자는 타인들보다 한층 신과 밀접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신과 가까운 사이인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게임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놀이에서 상대를 꺾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을 보여주는데 달려 있다. 원래 경제 용어인 '가격'(pretium)이라는 말도, 놀이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을 부르는 온갖 방법들이 일어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주사위나 던지거나 제비를 뽑는 일이다. 운명의 신탁자인 신의 마음을 보다 흐뭇하게 해 주기 위해 선택권을 확보해 드리는 방식이다.

경기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기는 신이 하늘에게 지켜보는 것 가운데 정정당당함을 사회의 전체적 질서로서 자리잡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유용하다. 비겁하게 규율을 어기는 자는 신의 분노를 맞아 패배자 되는 것이 마땅하다. 경기는 곧 신의 공의로운 판단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이상적인 영웅이란, 신사이며 예의바르고 정의를 사랑하는 자이다. 인간들의 이상적인 덕성을 밖으로 표출해 낼 수 있는 자이다. 전쟁을 할 때도 품위를 유지하는 것과 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도, 전쟁이 신의 정의로움을 확인하는 놀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놀이에 참여하는 자들 모두는 보다 영웅적인 자세로 임하려고 애쓴다. 그 중의 하나가 증여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을 무리하게 타인에게 분배해 주므로서 상대로부터 존경심과 명예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서 박애의 근원은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놀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혜'하는 행위가 승리자의 품격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승전, 축하 행렬, 월계관 수여, 이 모든 의식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에게 황제가 마음껏 시혜를 베푸는 장면이다. 누가 보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증여를 감행하는가 시합을 한 것이 고대 민족의 놀이의 진수였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휴머니즘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 정신도 이 놀이 정신을 받아 드려서 자신의 윤리관으로 삼았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있어 서양 예술은, 가발이나 요란스러운 치장으로 표현하는 과장스러운 스타일이 풍미했었던데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해 인간들은 자신의 창의성으로 시합을 걸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놀이로서 예술을 다루었다. 자연에서 얻는 것보다 더 큰 볼륨과 음역까지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악기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자연을 비웃으면 자연과 게임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낭만주의 시대에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가면으로 사용하여 현실에 대해 놀이를 즐기는 방식을 보여준다. 예술이 대단히 진지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조소가 들어 있는 그런 투이다. 실 눈 뜨는 위선의 눈으로 당대를 일상성의 초월하고자 했다.

19세기에 들어 와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이 정확하고 엄밀해져 있었다. 놀이의 허풍성은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다. 실용화가 주류를 이었다. 명예를 위한 '예의 지킴'이 아니라 실용적인 '제 자리 찾아 지키기로'로 돌아섰다.

20세기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포츠 산업은 날로 번창하지만 모든 것이 정확한 기술일 따름이지 놀이가 아니다. 베풀고,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여유 있는 시혜 속에서 풍성한 인간다움을 즐기는 놀이가 더 이상 아니다. 놀이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인 놀이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놀이 자체의 진지함을 놓쳐 버렸다. 전투를 위한 전투가 되어 버렸고 경쟁을 위한 경쟁이 되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 삶의 마당이 놀이화된 셈이다. 놀기 위한 삶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싸우기 위한 정력을 충전하기 위한 놀이로 전락했다.

놀이가 더 이상 인생의 목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피곤한 현대인들이다. 놀 줄 모르는 인간들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단지 기계의 더미에 불과하다. '진실 인 체' 하는 믿음의 여유조차 사라지고 남은 것은 냉혹한 이성뿐이다. 이 냉정한 이성에서는 제대로 '웃어 보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발견되지 못한다.

성도의 본질

성경에 보면, 어린애 같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있다(마태복음 18: 1- 5). 이 말씀은, 힘을 빼고 살아라 는 말씀이다. 힘없는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주님 섬기는 성도의 자세를 잘 말해 줄 수 있는데 그것은 자체적인 힘을 축적하는 식으로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란 분명히 생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낭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인간은 돈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참된 인생이었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도라면, 힘없어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마치 어린애처럼….

첨부파일 : 호모루덴스.hwp (32.0K), Down:22

관리자(IP:124.♡.84.82)

09-02-20 15:28

호모 루덴스 :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요한 호이징하
번 역 : 김윤수
출판사 : 까치글방

놀이를 통해서 본 인간

본 책은 인간을, '놀이'라는 특수한 세계를 통해서 철저하게 분석해 놓은 책이다.

놀이는 인간의 생리 현상이 아니라 정신의 '과잉' 현상이다. 일상적인 패턴을 유지하다가도 틈만 나면 독립된 자유 영역을 만들어 내곤 한다. 기존의 공간과도 격리되고 시간과도 이탈된 채 나름대로의 진지한 세계에 빠져든다. 그 안에서 모방의 세계가 열린다. "진짜는 아니다" 그러나 진짜인 것처럼 행세해야 하는 법에 모두 복종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믿음'이란, 경험상 납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진실인 '체'를 해야 하는 새로운 놀이의 세계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신과 함께 하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원리이다.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의 제의는 놀이의 일종이다. 신과 함께 하는 축제이다. 자기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상성에 탈피한 새로운 영역을 외딴 데다 장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신과 함께 하는 세계라 규정하고 파격적인 권위와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일단 이 종교 놀이 안에 들어오면 '믿는 것'과 '믿는 체' 하기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 놀이의 형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과 투쟁하는 놀이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기 표현을 위한 놀이이다. 타인과의 투쟁으로서의 놀이는 늘 '이긴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승리자는 타인들보다 한층 신과 밀접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신과 가까운 사이인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게임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놀이에서 상대를 꺾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을 보여주는데 달려 있다. 원래 경제 용어인 '가격'(pretium)이라는 말도, 놀이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을 부르는 온갖 방법들이 일어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주사위나 던지거나 제비를 뽑는 일이다. 운명의 신탁자인 신의 마음을 보다 흐뭇하게 해 주기 위해 선택권을 확보해 드리는 방식이다.

경기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기는 신이 하늘에게 지켜보는 것 가운데 정정당당함을 사회의 전체적 질서로서 자리잡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유용하다. 비겁하게 규율을 어기는 자는 신의 분노를 맞아 패배자 되는 것이 마땅하다. 경기는 곧 신의 공의로운 판단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이상적인 영웅이란, 신사이며 예의바르고 정의를 사랑하는 자이다. 인간들의 이상적인 덕성을 밖으로 표출해 낼 수 있는 자이다. 전쟁을 할 때도 품위를 유지하는 것과 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도, 전쟁이 신의 정의로움을 확인하는 놀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놀이에 참여하는 자들 모두는 보다 영웅적인 자세로 임하려고 애쓴다. 그 중의 하나가 증여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을 무리하게 타인에게 분배해 주므로서 상대로부터 존경심과 명예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서 박애의 근원은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놀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혜'하는 행위가 승리자의 품격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승전, 축하 행렬, 월계관 수여, 이 모든 의식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에게 황제가 마음껏 시혜를 베푸는 장면이다. 누가 보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증여를 감행하는가 시합을 한 것이 고대 민족의 놀이의 진수였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휴머니즘의 기초가 된다. 기독교 정신도 이 놀이 정신을 받아 드려서 자신의 윤리관으로 삼았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있어 서양 예술은, 가발이나 요란스러운 치장으로 표현하는 과장스러운 스타일이 풍미했었던데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해 인간들은 자신의 창의성으로 시합을 걸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놀이로서 예술을 다루었다. 자연에서 얻는 것보다 더 큰 볼륨과 음역까지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악기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자연을 비웃으면 자연과 게임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낭만주의 시대에는, 과거의 문화유산을 가면으로 사용하여 현실에 대해 놀이를 즐기는 방식을 보여준다. 예술이 대단히 진지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조소가 들어 있는 그런 투이다. 실 눈 뜨는 위선의 눈으로 당대를 일상성의 초월하고자 했다.

19세기에 들어 와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이 정확하고 엄밀해져 있었다. 놀이의 허풍성은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다. 실용화가 주류를 이었다. 명예를 위한 '예의 지킴'이 아니라 실용적인 '제 자리 찾아 지키기로'로 돌아섰다.

20세기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포츠 산업은 날로 번창하지만 모든 것이 정확한 기술일 따름이지 놀이가 아니다. 베풀고,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여유 있는 시혜 속에서 풍성한 인간다움을 즐기는 놀이가 더 이상 아니다. 놀이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인 놀이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놀이 자체의 진지함을 놓쳐 버렸다. 전투를 위한 전투가 되어 버렸고 경쟁을 위한 경쟁이 되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 삶의 마당이 놀이화된 셈이다. 놀기 위한 삶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싸우기 위한 정력을 충전하기 위한 놀이로 전락했다.

놀이가 더 이상 인생의 목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피곤한 현대인들이다. 놀 줄 모르는 인간들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단지 기계의 더미에 불과하다. '진실 인 체' 하는 믿음의 여유조차 사라지고 남은 것은 냉혹한 이성뿐이다. 이 냉정한 이성에서는 제대로 '웃어 보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발견되지 못한다.

성도의 본질

성경에 보면, 어린애 같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있다(마태복음 18: 1- 5). 이 말씀은, 힘을 빼고 살아라 는 말씀이다. 힘없는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주님 섬기는 성도의 자세를 잘 말해 줄 수 있는데 그것은 자체적인 힘을 축적하는 식으로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란 분명히 생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낭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인간은 돈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참된 인생이었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도라면, 힘없어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마치 어린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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