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예수 : 그리스도론의 근본문제
바울과 예수 : 그리스도론의 근본문제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바울과 예수 : 그리스도론의 근본문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에버하르트 융겔 (Eberhard Jngel)
번 역 : 허혁
출판사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고대로부터 인류는 법을 끊임없이 유입시켜 왔다. 법에 대한 친화성은 근절될 수 없었다. 법이 있기에 안심이 되었고 미래를 쪼개면서 개척해 나가는 방법으로는 항상 법이 주장 노릇을 했다.
종교 분야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가 종교는 ‘법 덩어리’였다. 라디오 내부처럼 촘촘한 법의 얼개로 신전을 조립시켜 왔고 종교 조직을 유지해 왔다. 모세가 받은 그 율법도 사람들의 손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만을 위한 은혜의 말씀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종교욕을 채우기 위한 제도 종교 건립에 소모된 소모품으로 전락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 소비된 율법 안에서 처형당했다.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의 본 주인이 살해당한 것이다. 법의 완성태 되시는 분이, 법의 미완성적 입장을 고려해야 된다는 이론에 걸려들어 배척받은 것이다. 즉 아직 세상은 모든 게 미완성이기 때문에 법은 요긴하게 필요하고, 완성된 분이 이러한 사정에 있는 인간 영역에 들어오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오만하고 교만한 도덕적 품성이다. 이 윤리적 사상에 의해서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법에 의해 지탱되는 한 이러한 비극은 반복, 반복 될 것이다. 과연 예수님과 그리고 그분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보았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새로이 나타났다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란다. 반드시 ‘율법 없이’ 이루어지는 의만이 하나님의 의이지 만약 율법과 병행해서 주어지는 의라면 가짜이다 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율법 없이” 대립항 양식을 끝까지 견제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의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심판 기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율법 없는 자에게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율법 있는 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미리 던져 준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심판 작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환경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더나아가서 먼저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 배후에 있는 악의 충만한 권세가 율법을 타고 올라와서 하나님의 의와 상대로 치열한 사투를 벌리는 계기가 된다. 율법이 오기 전에 잠잠히 숨어 있던 죄의 세력이 율법과 접촉되는 순간, 발작하듯이 하나님께 거세게 달려드는 성질을 보이는데 그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것이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진노의 그 날을 준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기 의 세우기’를 겨냥하면서 의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종말의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기 자랑거리를 챙기고 있는 그 인간의 배후에는 악이 조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도 이 악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항상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진노 거리만 잔뜩 쌓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이 떨어졌다. ‘율법 없이’ 주어진 의가 생겨났다고 사도 파울은 외치고 돌아다닌 것이다. 신앙에 의한 이 의도 인간의 마음 결정에 의존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신앙이다.
인간 외부의 기초한 의이기 때문에 '율법 없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없이”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 없이”에 끌어들여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는 속성을 보여준다(고린도후서 5:21). “우리 없이 있는 우리”로 파악되는 존재가 성도의 실존이다. “우리 없이”로 얻어진 의이기에 기존의 인류 계통의 그 어떤 인간이 내보이는 의와도 경쟁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보적인 의이다. 연관성조차 없는 의이다. 일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의 사건도 또한 종말에 반드시 일어나야 될 사건이다. 이 종말적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기적이나 비유 말씀과 연관성을 갖는다. 사도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는 의가 중심 사상이 되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다 같이 종말에 마땅히 일어나야만 하는 사실만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다.
바울 신학에서의 “우리 없이” 또는 “율법 없이”라는 방식이 예수님에게는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 “율법 조직체에서 소외된 자”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관 복음에서는 “병든 자”, “불구자”가 등장하지만 바울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어 있는 자”로 표현된다.
공관 복음에서는 자비의 결과가 ‘치유’의 모습으로 드러내지만 바울 신학에서는 “부활의 새 형상”으로 말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각기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본 책의 제목도 “예수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예수”라고 명명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바울에게 있어 율법이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을 위해서 주어진 것처럼 예수님에게 있어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 당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당시 인간들의 죄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들의 죄와 마주 대하는 자리에서의 말씀이 공관 복음의 주된 말씀들이다. 심판과 병행하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왜 의를 보여주지 못하느냐는 사도 바울식이 아니라, 왜 자기도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면서 들어가려는 자까지 막고 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예수님 식이다.
하늘나라의 상을 거론하면서도 그 당시 유대인의 도식을 깨뜨린다. 상과 전혀 무관한 인물을 상의 자리에 세워 두시는 것이다. 의와 전혀 무관한 인물을 의인의 자리에 세우고 율법과 전혀 무관한 인물을 믿음의 후손 자리에 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적 행동 자체가 그들의 배후 악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심판이 된다. 구원된 자는 예수님과 더불어 역설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들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의로 현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의지이다. 이로서 ‘자기 없이’ 사는 자들이 ‘자기 있음’을 고집 하는 자를 대신해서 영생을 얻게 된다.
평 가
전체적으로 봐서 한국 교회는 엉터리이다. 아직도 율법의 용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종교 조직이나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용 있다고 여기는 모든 율법적 요소들은 다 끌어당기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있음’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있음’으로 통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노력을 벌리고 있다.
율법으로 시작해서 의의 경지를 이루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역설을 모른다. 눈과 귀가 아직 뜨여 있지 않다. 율법이 가미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발생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오히려 자극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으로 불만스러워 하는 자들만이 교회에 남도록 하는 처사밖에 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는 역설적 인물들이 가고 싶은 교회를 남겨 두지 않고 있다. 영적 싸움, 한국 땅에는 아직 사도 바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0)
첨부파일 : 바울과예수.hwp (32.0K), Down:22
관리자(IP:124.♡.84.82)
09-02-17 19:01
바울과 예수 : 그리스도론의 근본문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에버하르트 융겔 (Eberhard Jngel)
번 역 : 허혁
출판사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고대로부터 인류는 법을 끊임없이 유입시켜 왔다. 법에 대한 친화성은 근절될 수 없었다. 법이 있기에 안심이 되었고 미래를 쪼개면서 개척해 나가는 방법으로는 항상 법이 주장 노릇을 했다.
종교 분야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가 종교는 ‘법 덩어리’였다. 라디오 내부처럼 촘촘한 법의 얼개로 신전을 조립시켜 왔고 종교 조직을 유지해 왔다. 모세가 받은 그 율법도 사람들의 손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만을 위한 은혜의 말씀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종교욕을 채우기 위한 제도 종교 건립에 소모된 소모품으로 전락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 소비된 율법 안에서 처형당했다.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의 본 주인이 살해당한 것이다. 법의 완성태 되시는 분이, 법의 미완성적 입장을 고려해야 된다는 이론에 걸려들어 배척받은 것이다. 즉 아직 세상은 모든 게 미완성이기 때문에 법은 요긴하게 필요하고, 완성된 분이 이러한 사정에 있는 인간 영역에 들어오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오만하고 교만한 도덕적 품성이다. 이 윤리적 사상에 의해서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법에 의해 지탱되는 한 이러한 비극은 반복, 반복 될 것이다. 과연 예수님과 그리고 그분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보았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새로이 나타났다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란다. 반드시 ‘율법 없이’ 이루어지는 의만이 하나님의 의이지 만약 율법과 병행해서 주어지는 의라면 가짜이다 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율법 없이” 대립항 양식을 끝까지 견제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의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심판 기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율법 없는 자에게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율법 있는 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미리 던져 준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심판 작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환경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더나아가서 먼저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 배후에 있는 악의 충만한 권세가 율법을 타고 올라와서 하나님의 의와 상대로 치열한 사투를 벌리는 계기가 된다. 율법이 오기 전에 잠잠히 숨어 있던 죄의 세력이 율법과 접촉되는 순간, 발작하듯이 하나님께 거세게 달려드는 성질을 보이는데 그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것이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진노의 그 날을 준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기 의 세우기’를 겨냥하면서 의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종말의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기 자랑거리를 챙기고 있는 그 인간의 배후에는 악이 조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도 이 악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항상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진노 거리만 잔뜩 쌓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이 떨어졌다. ‘율법 없이’ 주어진 의가 생겨났다고 사도 파울은 외치고 돌아다닌 것이다. 신앙에 의한 이 의도 인간의 마음 결정에 의존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신앙이다.
인간 외부의 기초한 의이기 때문에 '율법 없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없이”라는 표현을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 없이”에 끌어들여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는 속성을 보여준다(고린도후서 5:21). “우리 없이 있는 우리”로 파악되는 존재가 성도의 실존이다. “우리 없이”로 얻어진 의이기에 기존의 인류 계통의 그 어떤 인간이 내보이는 의와도 경쟁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보적인 의이다. 연관성조차 없는 의이다. 일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의 사건도 또한 종말에 반드시 일어나야 될 사건이다. 이 종말적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기적이나 비유 말씀과 연관성을 갖는다. 사도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는 의가 중심 사상이 되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다 같이 종말에 마땅히 일어나야만 하는 사실만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다.
바울 신학에서의 “우리 없이” 또는 “율법 없이”라는 방식이 예수님에게는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 “율법 조직체에서 소외된 자”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관 복음에서는 “병든 자”, “불구자”가 등장하지만 바울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어 있는 자”로 표현된다.
공관 복음에서는 자비의 결과가 ‘치유’의 모습으로 드러내지만 바울 신학에서는 “부활의 새 형상”으로 말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각기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본 책의 제목도 “예수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예수”라고 명명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바울에게 있어 율법이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을 위해서 주어진 것처럼 예수님에게 있어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 당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당시 인간들의 죄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들의 죄와 마주 대하는 자리에서의 말씀이 공관 복음의 주된 말씀들이다. 심판과 병행하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왜 의를 보여주지 못하느냐는 사도 바울식이 아니라, 왜 자기도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면서 들어가려는 자까지 막고 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예수님 식이다.
하늘나라의 상을 거론하면서도 그 당시 유대인의 도식을 깨뜨린다. 상과 전혀 무관한 인물을 상의 자리에 세워 두시는 것이다. 의와 전혀 무관한 인물을 의인의 자리에 세우고 율법과 전혀 무관한 인물을 믿음의 후손 자리에 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적 행동 자체가 그들의 배후 악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심판이 된다. 구원된 자는 예수님과 더불어 역설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들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의로 현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의지이다. 이로서 ‘자기 없이’ 사는 자들이 ‘자기 있음’을 고집 하는 자를 대신해서 영생을 얻게 된다.
평 가
전체적으로 봐서 한국 교회는 엉터리이다. 아직도 율법의 용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종교 조직이나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용 있다고 여기는 모든 율법적 요소들은 다 끌어당기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있음’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있음’으로 통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노력을 벌리고 있다.
율법으로 시작해서 의의 경지를 이루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역설을 모른다. 눈과 귀가 아직 뜨여 있지 않다. 율법이 가미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발생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오히려 자극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만으로 불만스러워 하는 자들만이 교회에 남도록 하는 처사밖에 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는 역설적 인물들이 가고 싶은 교회를 남겨 두지 않고 있다. 영적 싸움, 한국 땅에는 아직 사도 바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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