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 포스트모던 사회문화론
시뮬라시옹 : 포스트모던 사회문화론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시뮬라시옹 : 포스트모던 사회문화론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1929-2007)
번 역 : 하태환
출판사 : 민음사
문명, 이것은 현실을 이상에다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향상시키고 증진해 나가려는 노력은 거의 쉴 새 없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의 와중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실재를 상실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남는 것은 시뮬레이션 된 가상의 껍데기뿐이다.
인간 자신들의 배설한 문명으로 인해, 그 문명이 쳐놓은 비실재의 울타리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실재를 억누르고 덮어 버리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교회라는 것도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삶의 모습과 연결점이 끊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 교회 간판만 걸려 있다고 교회라고 간주하는 그 배후에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문화 활동에 대한 열광적인 자기 긍정과 자기 애착이 들어 있다.
이 문명 활동의 하나로 생긴 것이 교회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를 분석함에 있어 전체적인 문명 분석의 통해서 실시되어야 마땅하다. 저자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모든 문화의 구석구석 분해하고 또 그 파편을 과거 역사에 대조해 보았다. 그리고 모두 다 조작된 것이고 위장된 것임을 발견했다. 실재라고는 전혀 없는 모방체 뿐임을 통고해 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방의 원본이 되는 대상체 조차도 지워 버렸기 때문에 모방체 라기 보다는 실재로서 행세하는 건방진 허상체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그는 어째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이 주장의 오솔길을 따라 가 본다.
인간의 정신 활동은 차원을 증가시키고 그것마저 극복하여 새로운 차원을 형성시키는 것을 지향하면서 속도를 낸다. 현실에 도달할 때까지 써먹었던 차원을 극복하기에 한계에 도달되면 일단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수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스스로 만족하고 그 영광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소위 언어이며 기호이다.
기호에는 종교적 엄숙성이 들어 있으며 윤리와 도덕이 함축되어 있다. 누구든지 이 차원을 깨려는 자는 오만한 자로 인식된다. 감히 절대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의 천장은 사실에 있어 조촐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를 담아 놓는 기존의 언어라는 기호가 이 현대 사회의 모든 다양하고 우발적인 문명들을 제 때에 소화를 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에 혼선이 온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로의 변화의 조짐이 생기면서 언어라는 기호는 과거의 의미를 스스로 박차고 외출을 시도하게 된다. 실재를 지칭하던 기호가 실재와의 괴리 현상을 보이면서 유사성 정도로 머문다. 그리고 이 유사성끼리 결합되어 새로운 기호 체제 분위기를 영글어본다. 그 동안 기존의 기호 체제를 바탕으로 해서 실재 세계의 향상을 위해 분투노력하려는 인간들은 기존의 기초가 허물 허물해 짐을 감지하고 나서는 새로운 기호를 가지고 현대 사회의 현상을 설명해야 될 이유를 갖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 체제는 기존의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속성을 의도적으로 천시하고 구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소위 지우는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다. 전에 신성시되던 기호의 대상체들이 이제는 비신성한 것으로 변해 있다. 계속 신성한 기호가 사용되려면 그 이미지에 합당한 절대적 신성이 이 시대에 나타나야 하는데 더 이상 대상체가 사라진 것이다. 누가 사라지게 했는가? 사실은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신성함을 잃어버릴까 싶어 더욱 더 신성을 강화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생겨 버린 것이다.
즉 강화의 속도를 증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부수적인 증가 요소들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서 각 요소끼리 충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되었고 각자의 신성을 스스로 지키다 보니 이제는 자체적인 방어와 '가로막기' 작용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볼 때 이미지 증가 속력은 감소되었고 정지되었다. 외부로 토해져 나와야 하는 열이 블랙홀처럼 안으로 집결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세력으로부터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대상체가 없어도 스스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군데군데 성운들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것과 같다. 모두 가 다 스스로 신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신성을 증명할 만은 내용은 전혀 없다. 단지 부호(코드) 덩어리로서만 계속 과거의 절대적 요소가 누렸던 영화와 권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권력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 시뮬레이션 속으로 민중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성한 권위를 확보해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또 포르노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성적의 매력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이 형이상학이 되어 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과거로부터 주어진 성적 요소가 마치 지금도 담겨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시뮬레이션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부호(코드)의 덩어리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에 있어서도 코드나 기호에 의해 이루어진다. 코드의 팽창으로 거대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이 거대 시장을 중심으로 물질이 교류된다. 이 물질들은 경제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파생된 실재로만 취급된다. 모든 흐름은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정보의 교환으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러한 거대 시장의 운영이 효과적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에 불과함에도 현대인에게 조금도 아쉬운 점이 없는 이유는 시뮬레이션 자체가 모든 진실을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 가
혹시 현대 사회의 상대화에 대해서 비애와 우수를 느낄 수는 있지만 시뮬레이션 스스로가 이러한 허무의 근원마저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로 변형하여 꿈의 상태를 유지해 준다. 현대인들은 그 안에서 게임 하듯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 오락 게임 중의 하나가 교회이다. 거룩한 시뮬레이션으로서의 교회이다.
참된 거룩은 이미 과거와 함께 매몰되어 버렸고 그 공터에 교회라는 거룩의 시뮬레이션이 새로이 부활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원본조차를 오늘날 교인들은 찾지 않는다. 단지 거룩하고 구원을 보장한다는 시뮬레이션 그 자체로만 만족스럽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천국에 못 갈까 봐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속이고 있는 천국 시뮬레이션인 교회를 그들은 스스로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상 사회에서 성경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고 성전이 있다고 또는 선택되었다고 안심한 국가 이스라엘의 멸망 사실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고 우는 여인을 향해 도리어 너희 딸들을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세운 교회가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첨부파일 : 시뮬라시옹.hwp (30.5K), Down:14
관리자(IP:124.♡.84.82)
09-02-17 17:21
시뮬라시옹 : 포스트모던 사회문화론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1929-2007)
번 역 : 하태환
출판사 : 민음사
문명, 이것은 현실을 이상에다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향상시키고 증진해 나가려는 노력은 거의 쉴 새 없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의 와중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실재를 상실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남는 것은 시뮬레이션 된 가상의 껍데기뿐이다.
인간 자신들의 배설한 문명으로 인해, 그 문명이 쳐놓은 비실재의 울타리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실재를 억누르고 덮어 버리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교회라는 것도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삶의 모습과 연결점이 끊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 교회 간판만 걸려 있다고 교회라고 간주하는 그 배후에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문화 활동에 대한 열광적인 자기 긍정과 자기 애착이 들어 있다.
이 문명 활동의 하나로 생긴 것이 교회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를 분석함에 있어 전체적인 문명 분석의 통해서 실시되어야 마땅하다. 저자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모든 문화의 구석구석 분해하고 또 그 파편을 과거 역사에 대조해 보았다. 그리고 모두 다 조작된 것이고 위장된 것임을 발견했다. 실재라고는 전혀 없는 모방체 뿐임을 통고해 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방의 원본이 되는 대상체 조차도 지워 버렸기 때문에 모방체 라기 보다는 실재로서 행세하는 건방진 허상체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그는 어째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이 주장의 오솔길을 따라 가 본다.
인간의 정신 활동은 차원을 증가시키고 그것마저 극복하여 새로운 차원을 형성시키는 것을 지향하면서 속도를 낸다. 현실에 도달할 때까지 써먹었던 차원을 극복하기에 한계에 도달되면 일단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수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스스로 만족하고 그 영광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소위 언어이며 기호이다.
기호에는 종교적 엄숙성이 들어 있으며 윤리와 도덕이 함축되어 있다. 누구든지 이 차원을 깨려는 자는 오만한 자로 인식된다. 감히 절대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의 천장은 사실에 있어 조촐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를 담아 놓는 기존의 언어라는 기호가 이 현대 사회의 모든 다양하고 우발적인 문명들을 제 때에 소화를 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에 혼선이 온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로의 변화의 조짐이 생기면서 언어라는 기호는 과거의 의미를 스스로 박차고 외출을 시도하게 된다. 실재를 지칭하던 기호가 실재와의 괴리 현상을 보이면서 유사성 정도로 머문다. 그리고 이 유사성끼리 결합되어 새로운 기호 체제 분위기를 영글어본다. 그 동안 기존의 기호 체제를 바탕으로 해서 실재 세계의 향상을 위해 분투노력하려는 인간들은 기존의 기초가 허물 허물해 짐을 감지하고 나서는 새로운 기호를 가지고 현대 사회의 현상을 설명해야 될 이유를 갖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 체제는 기존의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속성을 의도적으로 천시하고 구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소위 지우는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다. 전에 신성시되던 기호의 대상체들이 이제는 비신성한 것으로 변해 있다. 계속 신성한 기호가 사용되려면 그 이미지에 합당한 절대적 신성이 이 시대에 나타나야 하는데 더 이상 대상체가 사라진 것이다. 누가 사라지게 했는가? 사실은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신성함을 잃어버릴까 싶어 더욱 더 신성을 강화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생겨 버린 것이다.
즉 강화의 속도를 증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부수적인 증가 요소들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서 각 요소끼리 충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되었고 각자의 신성을 스스로 지키다 보니 이제는 자체적인 방어와 '가로막기' 작용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볼 때 이미지 증가 속력은 감소되었고 정지되었다. 외부로 토해져 나와야 하는 열이 블랙홀처럼 안으로 집결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세력으로부터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대상체가 없어도 스스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군데군데 성운들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것과 같다. 모두 가 다 스스로 신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신성을 증명할 만은 내용은 전혀 없다. 단지 부호(코드) 덩어리로서만 계속 과거의 절대적 요소가 누렸던 영화와 권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권력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 시뮬레이션 속으로 민중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성한 권위를 확보해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또 포르노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성적의 매력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이 형이상학이 되어 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과거로부터 주어진 성적 요소가 마치 지금도 담겨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시뮬레이션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부호(코드)의 덩어리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에 있어서도 코드나 기호에 의해 이루어진다. 코드의 팽창으로 거대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이 거대 시장을 중심으로 물질이 교류된다. 이 물질들은 경제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파생된 실재로만 취급된다. 모든 흐름은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정보의 교환으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러한 거대 시장의 운영이 효과적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에 불과함에도 현대인에게 조금도 아쉬운 점이 없는 이유는 시뮬레이션 자체가 모든 진실을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 가
혹시 현대 사회의 상대화에 대해서 비애와 우수를 느낄 수는 있지만 시뮬레이션 스스로가 이러한 허무의 근원마저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로 변형하여 꿈의 상태를 유지해 준다. 현대인들은 그 안에서 게임 하듯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 오락 게임 중의 하나가 교회이다. 거룩한 시뮬레이션으로서의 교회이다.
참된 거룩은 이미 과거와 함께 매몰되어 버렸고 그 공터에 교회라는 거룩의 시뮬레이션이 새로이 부활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원본조차를 오늘날 교인들은 찾지 않는다. 단지 거룩하고 구원을 보장한다는 시뮬레이션 그 자체로만 만족스럽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천국에 못 갈까 봐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속이고 있는 천국 시뮬레이션인 교회를 그들은 스스로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상 사회에서 성경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고 성전이 있다고 또는 선택되었다고 안심한 국가 이스라엘의 멸망 사실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고 우는 여인을 향해 도리어 너희 딸들을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세운 교회가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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