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 신학의 통일성 :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분석
루가 신학의 통일성 :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분석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루가 신학의 통일성 :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분석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로버트 오툴
번 역 : 유철
출판사 : 카톨릭 출판사
성경을 성실하게 대하는 자세는, 자신의 현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신에게 유익 되는 점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펼친다면 성경은 이런 자와 상대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성경이라든지, 목회를 바르기 하기 위하여 성경이 있다는 명제 자체가 성경의 정직성을 상실한 신학들이다. 인간의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들어야 한다. 이럴 때만 성경은 수정알이 된다. 내막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경책이 있을 것이라는 선입감은 교계 전반에 걸쳐 피해를 입히는 황폐하고 음흉한 정신이다. 성경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돌아올 혜택부터 먼저 계산하지 말고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제발 가만 놔두도록 하자.
이런 차원에서 서술된 신학 책을 구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식으로 따 온 별 하나가 있다. 로버트 오툴이 지은 [루가 신학의 통일성]이다. 그가 말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을 들어보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내용이 유사이다. 비록 역사적 재료들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재료가 뿜어내는 계시들은 동일한 뜻을 발현하고 있다. 그 동일한 뜻이 연결되면서 스스로 일관성을 맞추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사역의 원칙도 바로 이 일관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이점을 확인해 주기 방도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바로 붙여 두고서는 상호 곁눈질해 가면서 설명하면서 이루어진다.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사도행전에서는 만유의 주님으로서 영속적인 세계를 주관하고 있음은 사역의 종류와 질의 동일성에서 증명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필히 이루어질 것이 순차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능동태 원형으로 표기되는 동사들이 누가복음에서 주요 자리를 점령하고 있다. 하나님의 강렬한 주도권 행사를 드러내는 단어들인데 ‘이루다’, ‘완성하다’, ‘결정하다’, ‘작정하다’, ‘세우다’, ‘서다’, ‘지시하다’ 등등의 동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이 바라고 원한다고 부르짖는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의지에 따라 차례로 진척된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도 여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들의 의견과 사연들이 파고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예수님도, 하나님 계획을 자신의 선에서 재평가하면서 실행에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가 보내신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도 그 때 그 때마다 말씀의 완성태를 보이게 된다. 선포되는 말씀을 위해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 선포, 스스로가 권능을 발산한다. 그런데 예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말씀 완성에 대해서 의아해 하고 의심하려는 적이 등장되는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전혀 이해 안 되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일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을 배격하는 것은, 약속을 기다리는 유대인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바리새인들은 후에 나타날 오직 성령을 받은 자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들만이 구약과 신약을 무리 없이 이어주는 참 증인들이다. 누가복음에서 유별나게 성전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누가신학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데 참된 백성의 정통성은 성전의 취지가 확연하게 성취되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전, 진정한 제사장은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펼치는 구원의 행동 안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 이방인에게도 돌아간다는 것을 자신의 구원사역에서 확인했어야 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크게 보시고 있다는 점도 발견하시게 된다. 죄인들, 세리들, 여자들, 어린이들, 병든 이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말씀과 구약부터 주어진 약속이 이런 활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계속 이들과 긴밀한 상태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단적인 구원이나 단체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구원이란, 선되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특정 교단이나 특별한 핏줄이라는 조건만으로 단체로 구원되거나 부활이 일어날 수는 없고 순전히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 선포의 역사에 의해서 그 현장에만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개인적 응답이라는 바깥 표현으로 역사에 비치게 된다. “돌아오고”, “받아들이고”, “따라가고”, “깨닫고”, “믿고”, “배척하고” 라는 표현들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반응의 결과로서 “기쁨”, “평화”, “행복합니다”, “찬미”, “영광”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현상이 과연 사도행전까지 지속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이 바로 ‘말씀의 선포’였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오늘’을 만들어 내고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만들어 내면서 선포된다. 즉 말씀 자체가 택한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권능을 토하면서 선포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조차도 규정했던 그 말씀이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정해진 일들을 제 때에 발생시킨다.
이로 인해서 사도들도 예수님이 가진 운명의 길을 답습하게 한다. 고난 뒤의 순교로 끝맺게 한다. 말씀이 사도들을 그렇게 몰아넣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은 이러한 과정을 타넘고 꼭꼭 선포되어 계속 성취의 면모를 보인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권세자를 치시는 그 말씀의 활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은 듣는 사람이요, 당신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요,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누가복음 10:16).
평 가
저자가 정리한 누가신학은 오늘날 전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진위 여부를 묻고 있다. 즉 말씀이 전하는 교회가 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닌 셈이다. 말씀을 전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된 형태이다. 또다시 발생된 유대교 줄기에 불과하다. 교회에 말씀의 주도권을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씀이 오늘, 그 현장에서 새로운 교회를 그 때 그 때마다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과거의 교회를 여지없이 무로 돌리고 말이다. 과거에 한 번 교회 되었었다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씀은 결코 기존 교단이나 교회의 횡포와 협박에 붙들려 있지 않다. 화려한 과거의 경력도, 찬란한 미래의 청사진에도 말씀은 관심 두지 않는다. 오직 말씀이 관심 갖는 것은 자신의 권능뿐이다. ‘오늘’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터져 나온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귀하다. 늘 회개하여 기쁨과 평화 속에서 찬미하는 그들이 참된 ‘지금의 교회’일 따름이다.
첨부파일 : 루가신학의통일성.hwp (32.0K), Down:23
관리자(IP:124.♡.84.82)
09-02-16 22:36
루가 신학의 통일성 :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분석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로버트 오툴
번 역 : 유철
출판사 : 카톨릭 출판사
성경을 성실하게 대하는 자세는, 자신의 현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신에게 유익 되는 점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펼친다면 성경은 이런 자와 상대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성경이라든지, 목회를 바르기 하기 위하여 성경이 있다는 명제 자체가 성경의 정직성을 상실한 신학들이다. 인간의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들어야 한다. 이럴 때만 성경은 수정알이 된다. 내막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경책이 있을 것이라는 선입감은 교계 전반에 걸쳐 피해를 입히는 황폐하고 음흉한 정신이다. 성경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돌아올 혜택부터 먼저 계산하지 말고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제발 가만 놔두도록 하자.
이런 차원에서 서술된 신학 책을 구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런 식으로 따 온 별 하나가 있다. 로버트 오툴이 지은 [루가 신학의 통일성]이다. 그가 말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을 들어보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내용이 유사이다. 비록 역사적 재료들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재료가 뿜어내는 계시들은 동일한 뜻을 발현하고 있다. 그 동일한 뜻이 연결되면서 스스로 일관성을 맞추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사역의 원칙도 바로 이 일관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이점을 확인해 주기 방도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바로 붙여 두고서는 상호 곁눈질해 가면서 설명하면서 이루어진다.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사도행전에서는 만유의 주님으로서 영속적인 세계를 주관하고 있음은 사역의 종류와 질의 동일성에서 증명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필히 이루어질 것이 순차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능동태 원형으로 표기되는 동사들이 누가복음에서 주요 자리를 점령하고 있다. 하나님의 강렬한 주도권 행사를 드러내는 단어들인데 ‘이루다’, ‘완성하다’, ‘결정하다’, ‘작정하다’, ‘세우다’, ‘서다’, ‘지시하다’ 등등의 동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이 바라고 원한다고 부르짖는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의지에 따라 차례로 진척된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도 여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들의 의견과 사연들이 파고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예수님도, 하나님 계획을 자신의 선에서 재평가하면서 실행에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가 보내신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도 그 때 그 때마다 말씀의 완성태를 보이게 된다. 선포되는 말씀을 위해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 선포, 스스로가 권능을 발산한다. 그런데 예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말씀 완성에 대해서 의아해 하고 의심하려는 적이 등장되는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다.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전혀 이해 안 되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일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을 배격하는 것은, 약속을 기다리는 유대인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바리새인들은 후에 나타날 오직 성령을 받은 자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들만이 구약과 신약을 무리 없이 이어주는 참 증인들이다. 누가복음에서 유별나게 성전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누가신학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데 참된 백성의 정통성은 성전의 취지가 확연하게 성취되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전, 진정한 제사장은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펼치는 구원의 행동 안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 이방인에게도 돌아간다는 것을 자신의 구원사역에서 확인했어야 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크게 보시고 있다는 점도 발견하시게 된다. 죄인들, 세리들, 여자들, 어린이들, 병든 이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말씀과 구약부터 주어진 약속이 이런 활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계속 이들과 긴밀한 상태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단적인 구원이나 단체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구원이란, 선되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특정 교단이나 특별한 핏줄이라는 조건만으로 단체로 구원되거나 부활이 일어날 수는 없고 순전히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 선포의 역사에 의해서 그 현장에만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개인적 응답이라는 바깥 표현으로 역사에 비치게 된다. “돌아오고”, “받아들이고”, “따라가고”, “깨닫고”, “믿고”, “배척하고” 라는 표현들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반응의 결과로서 “기쁨”, “평화”, “행복합니다”, “찬미”, “영광”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현상이 과연 사도행전까지 지속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이 바로 ‘말씀의 선포’였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오늘’을 만들어 내고 있고 계속해서 ‘우리’를 만들어 내면서 선포된다. 즉 말씀 자체가 택한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권능을 토하면서 선포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조차도 규정했던 그 말씀이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정해진 일들을 제 때에 발생시킨다.
이로 인해서 사도들도 예수님이 가진 운명의 길을 답습하게 한다. 고난 뒤의 순교로 끝맺게 한다. 말씀이 사도들을 그렇게 몰아넣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은 이러한 과정을 타넘고 꼭꼭 선포되어 계속 성취의 면모를 보인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권세자를 치시는 그 말씀의 활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은 듣는 사람이요, 당신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요,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누가복음 10:16).
평 가
저자가 정리한 누가신학은 오늘날 전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진위 여부를 묻고 있다. 즉 말씀이 전하는 교회가 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닌 셈이다. 말씀을 전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된 형태이다. 또다시 발생된 유대교 줄기에 불과하다. 교회에 말씀의 주도권을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씀이 오늘, 그 현장에서 새로운 교회를 그 때 그 때마다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과거의 교회를 여지없이 무로 돌리고 말이다. 과거에 한 번 교회 되었었다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씀은 결코 기존 교단이나 교회의 횡포와 협박에 붙들려 있지 않다. 화려한 과거의 경력도, 찬란한 미래의 청사진에도 말씀은 관심 두지 않는다. 오직 말씀이 관심 갖는 것은 자신의 권능뿐이다. ‘오늘’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터져 나온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귀하다. 늘 회개하여 기쁨과 평화 속에서 찬미하는 그들이 참된 ‘지금의 교회’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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