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심리학
법의 심리학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법의 심리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윤현섭
출판사 : 학지사
법이 주는 스트레스는 대단하다. 사회 조직이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교회 설교단에서 복음이 아니라 명령 같은 것이 떨어지기 일 수이다. 법의 아류로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명령이 은연중에 교인들에게 압력으로 가해진다. 그리고 이 압력은 종교 노동으로서 전도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게 된다.
본 책은, 인간이 법의 압박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이 심리적인 압박감을 인간 사회는 어떻게 완곡하게 처리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법의식도, 더불어 함께 어울리기를 소원하는 사회의 모성애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균형 감각의 결과가 오늘날 법치국가의 입지이다. 지존의 법을 평형의 사회 윤리로 전환시켜내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떤 심리가 들어 있을까?
법은 인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초월해 있다. 인간은 우주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는 전체이다. 인간보다 더 범위의 우주이기에 우주의 법은 마땅히 인간 위에 군림해야 한다. 인간은 이 초월적 규칙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 법에 복종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다. 그래야지만 우주 속에서의 삶이 질서가 잡히고 평탄함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지켜져야 하는 원칙, 이것이 법이다. 이 우주의 대원칙을 준수하는데서 바로 인간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이 법을 준수할 것인가?
법을 우주의 보편적 법칙으로 인식하는 것은, 피아제와 인헬더의 심리학에 의하면 구체적 조작 논리에 해당된다. 법의 추상화이다. 피아제는 인지 발달 단계를, 전조작기, 구체적 조작기, 형식적 조작기로 나누었는데 점차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데로 나아가게 된다.
인식 상태의 최종 결과는 4가지 범주 안으로 모두 흡수된다. 소위 INRC군이라는 구조이다. I는 동일변환이며, N은 부정변환이며, R은 상호변환이며, C는 상관변환이다. 인간의 그 어떠한 인식도 이 네 가지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가장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인간의 인식은, 부정 변환과 상호 변환의 결합이다. 이것을 평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추상적인 상태에 들어가면 통치자는 도덕으로 민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타율적인 법으로 통치하는 경우가 가능하다. 이것이 부정 변환이다. 민중이 통치자에게 도덕적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민중이 통치자를 도덕으로 다스리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상호변환이다.
여기서 법으로 민중을 압제하려는 압력과, 통치를 안 받으려고 민중들의 도덕적 저항이 서로 대립되게 된다. 이 대립이 원만하게 균형이 맞는 자리에서 법이 집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압력은 해소가 된다. 마치 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공기와 물 사이의 물리적 현상을 그대로 사회에다 옮겨다 놓은 것과 같다.
도덕주의가 우위에 서면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된다. 반면에 법이 강화되면 법 집행자의 탐욕에 의해 민중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법의 바람직한 다스림은 중용의 정신이다. 대립되는 두 개의 세력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우주이지만 그러나 우주는 평형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의 우주로서 유지되고 있다.
우주 안에는 유일무일 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질서는 보존되는 것이 또한 우주의 법칙이다. 추상과 실제의 만남, 이상과 현실의 조우에는 반드시 평형 원칙으로 성립된다. 인간이란 추상과 현실 양면을 다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의 원칙은 결국에는 평형의 원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갈구하는, 자유나 사랑, 선 같은 것이 현실화되는 것도 평형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성의 욕구는 노동이라는 것으로 외부로 표출된다. 이 노동은 곧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노동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 안에서 자아는 자기 상실을 맛본다. 내가 요구하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 마찰이 있음을 안다. 이러한 충돌은 국가라는 보다 더 큰 사회 안으로 흡수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법이 개인의 양심과 가치를 대신하여 질서와 평형을 일구어 나가게 된다. 인간 개개인 갖고 있던 추상적인 우주법은, 헌법이라는 국가의 법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헌법에 신뢰를 가지고 추종하므로서 개개인의 영혼은 안심과 평안을 느낀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원했던 바는 국가법을 통해서 대신 달성해 나갈 수 있다. 이제는 개인만 인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체도 한 인격으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 법 관념을 인간들 각자가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심리적 실험과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얼마든지 검증되어진다. 초월적 법의 실재를 의문을 품고 오직 실용적 가치로만 법을 다루려는 여러 가지 가설들은 실제하고는 맞지 않는 이론들이다.
준법 의식은, 국가가 강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 마음에 들어 있는 법 관념이 언제든지 원하고 있는 바 그 목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의 창조력은 법을 계속 요구하고 또 뱉어내므로서 계속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평 가
설교단에서 법과 명령을 교인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던져 주는 행위는, 교회만이 선한 일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식 때문이다.
교회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되며, 방해되며, 중단되게 되며, 마귀가 승리하게 되며, 모든 구속의 사역이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전혀 복음적이 않다. 성경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 본래의 법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인류는, 선악의 지식을 함부로 따먹어 버린 그 아담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법으로 다져진 상위 조직을 통해서만 일을 추진하려고 한다. 큰 조직이 보다 선하다고 여기는 그 배후에는, 개인의 법 관념보다 집단적 법관념이 훨씬 선과 정의로움의 세계에 흡사하다고 믿고 있는 미신 때문이다.
“전도하라”라는 명령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조직의 이름으로 "전도하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쉽게 사랑의 차원에서 탈선하여 교회법의 차원 안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로서 전도는 세속화되었다.
명령한 목사의 눈치나 살피면서 타율적으로 자기에게 할당된 인원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일반 기업체와 같이 되고 말았다. 전도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삶의 현장과 교회의 현장에서 십자가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라는 것과 관련 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가를 새삼스럽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과 조직의 거대화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서 오직 예수님의 살해당하심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즉 전도란,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기 백성을 새삼스럽게 동참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야 죽으심의 이유를 바로 알고 있는 참된 백성만 구원될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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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2-16 21:57
법의 심리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윤현섭
출판사 : 학지사
법이 주는 스트레스는 대단하다. 사회 조직이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교회 설교단에서 복음이 아니라 명령 같은 것이 떨어지기 일 수이다. 법의 아류로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명령이 은연중에 교인들에게 압력으로 가해진다. 그리고 이 압력은 종교 노동으로서 전도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게 된다.
본 책은, 인간이 법의 압박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이 심리적인 압박감을 인간 사회는 어떻게 완곡하게 처리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법의식도, 더불어 함께 어울리기를 소원하는 사회의 모성애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균형 감각의 결과가 오늘날 법치국가의 입지이다. 지존의 법을 평형의 사회 윤리로 전환시켜내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떤 심리가 들어 있을까?
법은 인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초월해 있다. 인간은 우주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는 전체이다. 인간보다 더 범위의 우주이기에 우주의 법은 마땅히 인간 위에 군림해야 한다. 인간은 이 초월적 규칙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 법에 복종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다. 그래야지만 우주 속에서의 삶이 질서가 잡히고 평탄함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지켜져야 하는 원칙, 이것이 법이다. 이 우주의 대원칙을 준수하는데서 바로 인간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이 법을 준수할 것인가?
법을 우주의 보편적 법칙으로 인식하는 것은, 피아제와 인헬더의 심리학에 의하면 구체적 조작 논리에 해당된다. 법의 추상화이다. 피아제는 인지 발달 단계를, 전조작기, 구체적 조작기, 형식적 조작기로 나누었는데 점차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데로 나아가게 된다.
인식 상태의 최종 결과는 4가지 범주 안으로 모두 흡수된다. 소위 INRC군이라는 구조이다. I는 동일변환이며, N은 부정변환이며, R은 상호변환이며, C는 상관변환이다. 인간의 그 어떠한 인식도 이 네 가지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가장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인간의 인식은, 부정 변환과 상호 변환의 결합이다. 이것을 평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추상적인 상태에 들어가면 통치자는 도덕으로 민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타율적인 법으로 통치하는 경우가 가능하다. 이것이 부정 변환이다. 민중이 통치자에게 도덕적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민중이 통치자를 도덕으로 다스리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상호변환이다.
여기서 법으로 민중을 압제하려는 압력과, 통치를 안 받으려고 민중들의 도덕적 저항이 서로 대립되게 된다. 이 대립이 원만하게 균형이 맞는 자리에서 법이 집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압력은 해소가 된다. 마치 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공기와 물 사이의 물리적 현상을 그대로 사회에다 옮겨다 놓은 것과 같다.
도덕주의가 우위에 서면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된다. 반면에 법이 강화되면 법 집행자의 탐욕에 의해 민중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법의 바람직한 다스림은 중용의 정신이다. 대립되는 두 개의 세력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우주이지만 그러나 우주는 평형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의 우주로서 유지되고 있다.
우주 안에는 유일무일 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질서는 보존되는 것이 또한 우주의 법칙이다. 추상과 실제의 만남, 이상과 현실의 조우에는 반드시 평형 원칙으로 성립된다. 인간이란 추상과 현실 양면을 다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의 원칙은 결국에는 평형의 원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갈구하는, 자유나 사랑, 선 같은 것이 현실화되는 것도 평형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성의 욕구는 노동이라는 것으로 외부로 표출된다. 이 노동은 곧 사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노동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 안에서 자아는 자기 상실을 맛본다. 내가 요구하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 마찰이 있음을 안다. 이러한 충돌은 국가라는 보다 더 큰 사회 안으로 흡수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법이 개인의 양심과 가치를 대신하여 질서와 평형을 일구어 나가게 된다. 인간 개개인 갖고 있던 추상적인 우주법은, 헌법이라는 국가의 법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헌법에 신뢰를 가지고 추종하므로서 개개인의 영혼은 안심과 평안을 느낀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원했던 바는 국가법을 통해서 대신 달성해 나갈 수 있다. 이제는 개인만 인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체도 한 인격으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 법 관념을 인간들 각자가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심리적 실험과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얼마든지 검증되어진다. 초월적 법의 실재를 의문을 품고 오직 실용적 가치로만 법을 다루려는 여러 가지 가설들은 실제하고는 맞지 않는 이론들이다.
준법 의식은, 국가가 강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 마음에 들어 있는 법 관념이 언제든지 원하고 있는 바 그 목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의 창조력은 법을 계속 요구하고 또 뱉어내므로서 계속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평 가
설교단에서 법과 명령을 교인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던져 주는 행위는, 교회만이 선한 일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식 때문이다.
교회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되며, 방해되며, 중단되게 되며, 마귀가 승리하게 되며, 모든 구속의 사역이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전혀 복음적이 않다. 성경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 본래의 법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인류는, 선악의 지식을 함부로 따먹어 버린 그 아담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법으로 다져진 상위 조직을 통해서만 일을 추진하려고 한다. 큰 조직이 보다 선하다고 여기는 그 배후에는, 개인의 법 관념보다 집단적 법관념이 훨씬 선과 정의로움의 세계에 흡사하다고 믿고 있는 미신 때문이다.
“전도하라”라는 명령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조직의 이름으로 "전도하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쉽게 사랑의 차원에서 탈선하여 교회법의 차원 안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로서 전도는 세속화되었다.
명령한 목사의 눈치나 살피면서 타율적으로 자기에게 할당된 인원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일반 기업체와 같이 되고 말았다. 전도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삶의 현장과 교회의 현장에서 십자가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라는 것과 관련 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가를 새삼스럽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과 조직의 거대화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서 오직 예수님의 살해당하심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즉 전도란,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기 백성을 새삼스럽게 동참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야 죽으심의 이유를 바로 알고 있는 참된 백성만 구원될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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