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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 허구 이론의 연구성경신학[신학]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 허구 이론의 연구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 허구 이론의 연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프랭크 커머드
번 역 : 조초희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신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비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러 문학에 나타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인간들의 시간관을 근원적으로 탐색한 책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시간관이 일반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론과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관이 문학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제도적 종교단체에서 하는 일을, 작가들에 의해서 작품을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혼돈에 도전하여 그 혼란에서 인간을 건져내려는 종교의 본연의 취지가 문학 작가들의 몫이 될 수 있다. 작가들은, 그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실존을 바라본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

그것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자기 기만과 자기 위안성 때문에 발생된다. ‘자기 종말성’을 긍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성을 뛰어넘어 ‘종말성 긍정’ 보다 ‘자기 긍정’ 쪽으로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죽음 이후에는 더 좋은 상태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로 없이 단지 자기기만에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만 자체를 뛰어넘을 만한 나름대로 근거 마련에 나서는 것이 인간들이다. 어떤 식으로 근거를 마련하는가?

그것은 ‘시간’을 가지고 만든다. 종말을 시간의 단절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단절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장시켜 나간다든지 아니면 애초부터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의식화해서 절망에서의 구원을 추구한다. 시간은 무의미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이 두개의 노선이 인류 역사 내내 뚜렷한 윤곽을 내고 달린다. 하나를 역사라고 부른다면 다른 하나는 묵시라고 부를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 둘을 가깝게 연결시켰다. 역사가 끝나는 시점부터 묵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여 때가 가까우니 근신하고 깨어라!” 고 중세 때부터 계속 주장들 해 왔다. 숱한 묵시 시점이 제시되었었다. 서기 195년, 948년, 1000년, 1033년, 1236년, 1367년, 1420년, 1588년, 1666년 등이다.

그 이후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만큼 계속된다. 그러니 이러한 종교계에서부터 불어오는 종말적 분위기 때문에 문학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사는 자들의 실존 자체가 종말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들이다. 문학작품들이 종말론에 편승해서 테마의 배경이 되는 것은 인간들의 고뇌와 구원을 향한 몸부림에 같이 참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계는 종교계의 구원 방법을 따르지 않고, 실전적 구원의 방법을 취했다. 즉 시대가 악하고 정말 역사가 끝나서 종말이 아니라, 인간 각 개인이 현재 처한 고통의 나날에서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어 삶에서 해방되는 그 기간을 밖으로 투영시킨 결과로 보고 있다.

즉 역사라는 시간에서의 구원보다, 삶에 있어 최대의 짐이 되는 육체 덩어리로부터의 해리를 가지고 구원으로 본다. 종말론을 개인적 죽음의 비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찬 겨울에 맞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처럼 늘 위기와 부딪치면서 산다. 작은 것 성공했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더 큰 실패가 들이닥쳐 지금의 작은 성공을 뭉개버릴지 누가 알 것인가!

인간이면 누구나 감지하는 불안과 위기,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리고 종교는 이들을 반길 채비가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상으로 언젠가 탈출을 시켜 주겠다는 보장책이다. 따라서 현재 고통이 극심한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있어 묵시의 세계가 더욱 더 크게 보이고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계에서는 소위 ‘은혜 받았다’ 혹은 ‘참 신심이 깊네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만 종말의 근접함이 주는 평안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은 이러한 종교계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종말을 ‘허구’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허구란 의미 없는 허구가 아니라 의미 있는 허구이다. 즉 종교에서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을 문학에서는 “이제 믿을 것은 허구밖에 없다”로 묘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를,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작이란, 문학에서 나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를 잘 조작해서 현실의 민중들에게 위로만 될 수 있다면 그 잘 조작된 작품이 위대한 작품이다. 신화는 안정의 중개자이고 허구는 변동의 중개자이다. 허구가 없으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퇴행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지탱해주는 공로자이다.

문학이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넣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그래서 덩달아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혼돈,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혼돈을 느끼는 것은, 인간 스스로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문학의 임무는, 인간들의 이러한 노예성을 적확하게 지적해서 그들의 실존을 낱낱이 공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실태 속에서 자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종말이란, 허구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허구를 허구로써 바로 지적할 수 있는 자유는 문학에서만 제공된다. 마지막 때 대변란이 있다고 겁주는 것으로 현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늘 ‘자기 종말’에 떨고 있는 이 인간들의 질환에 대해, 문학은 그 증세를 자아 밖으로 내뱉게 만들므로서 치료케 한다. 그리고 무지가 주는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런 논조가 저자의 의도이다.

평 가

기독교의 설립자가 기독교 스스로라고 한다면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오늘날 교회들이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저주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런 항변할 거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 지탱할 하등의 명령이나 임무를 받은 적이 없다. 교회를 놓고 쥐고 하는 것은 교회나 기독교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1:20에 보면,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되어 있다.

오직 주님께서 교회를 만드시고 허시고 또 세우신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다. 따라서 약속을 모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단지 자연 종교단체일 뿐이다. 개교회의 역사와 존립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의 역사와 존립도 약속에 들어 있지 않다. 약속은 오직 그리스도 몸뿐이다. 저자인 커머드의 논조 속에는 주님의 약속이 들어 있지 않고 단지 인간의 희망만 들어 있다. 물론 완벽하게 맹목적이다.

첨부파일 : 종말의식과인간적시간.hwp (32.0K), Down:21

관리자(IP:124.♡.84.82)

09-02-16 20:41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 허구 이론의 연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프랭크 커머드
번 역 : 조초희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신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비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러 문학에 나타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인간들의 시간관을 근원적으로 탐색한 책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시간관이 일반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론과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관이 문학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제도적 종교단체에서 하는 일을, 작가들에 의해서 작품을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혼돈에 도전하여 그 혼란에서 인간을 건져내려는 종교의 본연의 취지가 문학 작가들의 몫이 될 수 있다. 작가들은, 그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실존을 바라본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

그것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자기 기만과 자기 위안성 때문에 발생된다. ‘자기 종말성’을 긍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성을 뛰어넘어 ‘종말성 긍정’ 보다 ‘자기 긍정’ 쪽으로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죽음 이후에는 더 좋은 상태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로 없이 단지 자기기만에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만 자체를 뛰어넘을 만한 나름대로 근거 마련에 나서는 것이 인간들이다. 어떤 식으로 근거를 마련하는가?

그것은 ‘시간’을 가지고 만든다. 종말을 시간의 단절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단절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장시켜 나간다든지 아니면 애초부터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의식화해서 절망에서의 구원을 추구한다. 시간은 무의미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이 두개의 노선이 인류 역사 내내 뚜렷한 윤곽을 내고 달린다. 하나를 역사라고 부른다면 다른 하나는 묵시라고 부를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 둘을 가깝게 연결시켰다. 역사가 끝나는 시점부터 묵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여 때가 가까우니 근신하고 깨어라!” 고 중세 때부터 계속 주장들 해 왔다. 숱한 묵시 시점이 제시되었었다. 서기 195년, 948년, 1000년, 1033년, 1236년, 1367년, 1420년, 1588년, 1666년 등이다.

그 이후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만큼 계속된다. 그러니 이러한 종교계에서부터 불어오는 종말적 분위기 때문에 문학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사는 자들의 실존 자체가 종말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들이다. 문학작품들이 종말론에 편승해서 테마의 배경이 되는 것은 인간들의 고뇌와 구원을 향한 몸부림에 같이 참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계는 종교계의 구원 방법을 따르지 않고, 실전적 구원의 방법을 취했다. 즉 시대가 악하고 정말 역사가 끝나서 종말이 아니라, 인간 각 개인이 현재 처한 고통의 나날에서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어 삶에서 해방되는 그 기간을 밖으로 투영시킨 결과로 보고 있다.

즉 역사라는 시간에서의 구원보다, 삶에 있어 최대의 짐이 되는 육체 덩어리로부터의 해리를 가지고 구원으로 본다. 종말론을 개인적 죽음의 비유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찬 겨울에 맞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처럼 늘 위기와 부딪치면서 산다. 작은 것 성공했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더 큰 실패가 들이닥쳐 지금의 작은 성공을 뭉개버릴지 누가 알 것인가!

인간이면 누구나 감지하는 불안과 위기,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리고 종교는 이들을 반길 채비가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상으로 언젠가 탈출을 시켜 주겠다는 보장책이다. 따라서 현재 고통이 극심한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있어 묵시의 세계가 더욱 더 크게 보이고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계에서는 소위 ‘은혜 받았다’ 혹은 ‘참 신심이 깊네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만 종말의 근접함이 주는 평안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은 이러한 종교계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종말을 ‘허구’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허구란 의미 없는 허구가 아니라 의미 있는 허구이다. 즉 종교에서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을 문학에서는 “이제 믿을 것은 허구밖에 없다”로 묘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를,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작이란, 문학에서 나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를 잘 조작해서 현실의 민중들에게 위로만 될 수 있다면 그 잘 조작된 작품이 위대한 작품이다. 신화는 안정의 중개자이고 허구는 변동의 중개자이다. 허구가 없으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퇴행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지탱해주는 공로자이다.

문학이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넣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그래서 덩달아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혼돈,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혼돈을 느끼는 것은, 인간 스스로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문학의 임무는, 인간들의 이러한 노예성을 적확하게 지적해서 그들의 실존을 낱낱이 공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실태 속에서 자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종말이란, 허구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허구를 허구로써 바로 지적할 수 있는 자유는 문학에서만 제공된다. 마지막 때 대변란이 있다고 겁주는 것으로 현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늘 ‘자기 종말’에 떨고 있는 이 인간들의 질환에 대해, 문학은 그 증세를 자아 밖으로 내뱉게 만들므로서 치료케 한다. 그리고 무지가 주는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런 논조가 저자의 의도이다.

평 가

기독교의 설립자가 기독교 스스로라고 한다면 저자의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다. 오늘날 교회들이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저주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런 항변할 거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 지탱할 하등의 명령이나 임무를 받은 적이 없다. 교회를 놓고 쥐고 하는 것은 교회나 기독교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1:20에 보면,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되어 있다.

오직 주님께서 교회를 만드시고 허시고 또 세우신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다. 따라서 약속을 모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단지 자연 종교단체일 뿐이다. 개교회의 역사와 존립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의 역사와 존립도 약속에 들어 있지 않다. 약속은 오직 그리스도 몸뿐이다. 저자인 커머드의 논조 속에는 주님의 약속이 들어 있지 않고 단지 인간의 희망만 들어 있다. 물론 완벽하게 맹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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