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상징
악의 상징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악의 상징
저 자 : 폴 리꾀르 (Paul Ricoeur:1913-2005)
번 역 : 양명수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악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깊이 있는 고백을 들어야 한다. 심층적 고백은 예로부터 신화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는데 이 언어 속에서 악은 상징으로 구현되어진다. 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단어들은 곧 여러 가지 상징들이다. 이 상징들을 놓치지 않고 조사하게 되면 악을 유발시켜서 올려 보내는 체험들을 수집할 수 있다. 이 악에 상징들을 분류하면 세 가지 단계를 보여 준다. 흠집의 단계, 죄의 단계, 허물의 단계이다.
저자는, 성경을 근거로 해서 고대 히브리인들로부터 내려오는 악에 대한 세 가지 가닥을 잡아 나간다. 이 세 가지는 하나로 단일화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악에 대한 선입감을 배제한 채 현상학적으로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그 상징적 뜻에 솔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더러움을 악으로 여겼다. 뭔가 지저분한 것 자체가 순리에 어긋나는 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살인이 악이 되는 이유는, 땅에 더러운 피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더러움이 전체 질서 균형을 깨뜨렸다. 세상은 항상 정결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는데 피가 그 요소를 훼손한 것이다. 이처럼 더러움이 첨가하면 혼란이 주어진다. 재해의 보복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씻어 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래야지만 자연의 징벌로부터 해제된다. 이사야의 입술도 숯불 가지고 씻는 정결 제의한 한 예이다.
구원은 바로 더러움을 씻는 데서 비롯된다. 징벌에서 오는 두려움은 정결 예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전에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식의 방법은, 적절한 징벌을 자진해서 요청해서 감행해버리는 것이다. 즉 속죄 의식을 동원한다. 미리 징벌을 집행하므로 자기에게 가하므로 말미암아 자연으로부터 오는 보복을 대비한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제물의 피가 더러움을 씻어주므로 모든 게 깨끗한 상태로 돌아선다. 더 이상 공격할 거리가 없어진 셈이다. 따라서 고난의 기간도 찾아오지 않고 평안의 시절이 시작된다.
이로써 정결 의식은 자연 질서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경외심을 말해 준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악은, 위와 같은 흠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죄라고 표현되어지는 악도 있다. 죄란 흠집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겉으로 분명히 정결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주어진다. 흠집이라는 악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명이 안 된다. 보다 근원적인 악이 내장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성경은, 의인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의 형편을 드러낸다. 그것은 곧 계약 관계라는 현실이다. 계약 관계에 있어 악을 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은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사이이기 때문에 만약 깨어졌다고 한다면 그 사이는 무한한 거리에 놓이게 된다. 법규를 지켜서 회복될 관계가 아니다. 오직 무한한 사랑만이 다시 주입되어야 한다. 구약 예언자의 말에 의하면, 계약의 깨어짐은 남편과 음녀의 갈라섬과 같다는 것이다. 도덕법이 이 갭을 메울 수 없다. 율법 위에 살면서 경건성을 지탱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여타의 예언자들의 맹렬한 공격의 표적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남과 자기 사이에 뭔가 없어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허망’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신을 섬기지만 그런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우상에 불과하다. 이 우상 섬김에 대하여 매정한 심판이 가해진다. 이 심판 속에서 그들은 인간의 근원에 접촉된다. 즉 인간은 누군가에 매여 살고 있다는 의식이다. 몇몇이 아니라 모든 인간 전체가 단체로 그 죄의 권세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비로소 파악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 쪽에서 내민 용서뿐이다.
용서를 내미는 것은, 인간들 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다. 그 어떠한 암담한 고난 속에서 용서 쪽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심판의 고난은 이제는 징계의 고난으로 해석된다. 그 와중에서도 ‘돌아섬’, 즉 회개만이 죄라는 악에서부터의 해방이다. 이 용서의 근거는 희생 제물의 희생이다. 흠집의 경우처럼 씻기 위한 피가 아니라 죄인 전체의 생명을 대신하는 피이다. 후기 예언서와 신약 시대에까지 죄의 개념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이 있는 게 아니다. 허물이라는 악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다. 허물이란, 인간의 자유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는 차원이다. 왜 완전하지 못하냐고 따지는 차원이다. 사적으로 악인으로 인간을 몰아 세우는 시도이다. 그 방법은 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완전성을 요구함으로서 실시된다. 죄의 열매가 허물이다. 공동체적인 죄가 개인적인 허물의 형태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단체로 일괄적인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지은 죄를 아들이 담당할 필요 없다. 모든 영혼은 각자 하나님에게만 속해진다(에스겔 18:1-4). 죄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으로 판정되는데 비해, 허물은 많고 적음이라는 양적계량에 따른다. 죄라는 신학적인 악의 개념이, 허물이라는 심리적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공적 개념이 도입된다. 꼼꼼한 윤리 조항이 마련되어 제 구실을 다한다. 실제로 의를 실천해보는 종교이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완벽하게 모든 계명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허물이 된다. 곧 악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위기를 맞이한다. 허물을 유발시키는 완전한 율법이 인간을 극한까지 몰아 세우게 된 것이다. 인간의 출구는 애초부터 저주였다는 것이 신약에 와서야 밝혀졌다. 이런 율법의 상황에서 신앙의 체제로 가는 것은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넘쳐 올라 뒤집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허물에서 해방되는 방법이다. 은혜로 주어지는 의이다. 율법에 계속 매달리는 유대교적인 안목에서는 아무리해도 이런 허물의 실체에 어둡다. 신약에 와서 은혜로 제공되는 의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악의 모든 것은 공개된다. 이점이 저자가 주장하는 결론이다.
평 가
악을 흠과 죄와 허물로 구분 짓는 것은 악의 근원적인 출처를 분산 시켜 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이기에 그 성격도 하나로 통합이 되어야 마땅하다.
구세주가 오직 한 분으로 결정되어진 상태에서 죄악의 개념은, 그 구세주께서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든 구원되어야겠다는 성급한 구원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구세주의 의견에 대드는 의견들이 무언가를 실펴야 악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은 것은 다 뽑힌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5:13).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곧 사탄의 일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23). 인간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은 뭘 하는 게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한복음 6:29). 예수님의 몸, 그 자체가 유일 무일한 포도나무이시다.
여기에는 완전을 향한 팽창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연결 자체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로 남는다. 교회는 선택하신 분의 자의로운 결정의 결과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그 어떤 노동의 개념도 용납되지 아니한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은 악을 구별하신다. 이와 같이 악은 구원론과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론과 중보자의 입장에서 정립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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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2-16 17:04
악의 상징
이 근 호 목사
저 자 : 폴 리꾀르 (Paul Ricoeur:1913-2005)
번 역 : 양명수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악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깊이 있는 고백을 들어야 한다. 심층적 고백은 예로부터 신화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는데 이 언어 속에서 악은 상징으로 구현되어진다. 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단어들은 곧 여러 가지 상징들이다. 이 상징들을 놓치지 않고 조사하게 되면 악을 유발시켜서 올려 보내는 체험들을 수집할 수 있다. 이 악에 상징들을 분류하면 세 가지 단계를 보여 준다. 흠집의 단계, 죄의 단계, 허물의 단계이다.
저자는, 성경을 근거로 해서 고대 히브리인들로부터 내려오는 악에 대한 세 가지 가닥을 잡아 나간다. 이 세 가지는 하나로 단일화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악에 대한 선입감을 배제한 채 현상학적으로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그 상징적 뜻에 솔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더러움을 악으로 여겼다. 뭔가 지저분한 것 자체가 순리에 어긋나는 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살인이 악이 되는 이유는, 땅에 더러운 피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더러움이 전체 질서 균형을 깨뜨렸다. 세상은 항상 정결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는데 피가 그 요소를 훼손한 것이다. 이처럼 더러움이 첨가하면 혼란이 주어진다. 재해의 보복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씻어 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래야지만 자연의 징벌로부터 해제된다. 이사야의 입술도 숯불 가지고 씻는 정결 제의한 한 예이다.
구원은 바로 더러움을 씻는 데서 비롯된다. 징벌에서 오는 두려움은 정결 예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전에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식의 방법은, 적절한 징벌을 자진해서 요청해서 감행해버리는 것이다. 즉 속죄 의식을 동원한다. 미리 징벌을 집행하므로 자기에게 가하므로 말미암아 자연으로부터 오는 보복을 대비한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제물의 피가 더러움을 씻어주므로 모든 게 깨끗한 상태로 돌아선다. 더 이상 공격할 거리가 없어진 셈이다. 따라서 고난의 기간도 찾아오지 않고 평안의 시절이 시작된다.
이로써 정결 의식은 자연 질서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경외심을 말해 준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악은, 위와 같은 흠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죄라고 표현되어지는 악도 있다. 죄란 흠집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겉으로 분명히 정결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주어진다. 흠집이라는 악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명이 안 된다. 보다 근원적인 악이 내장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성경은, 의인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의 형편을 드러낸다. 그것은 곧 계약 관계라는 현실이다. 계약 관계에 있어 악을 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은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사이이기 때문에 만약 깨어졌다고 한다면 그 사이는 무한한 거리에 놓이게 된다. 법규를 지켜서 회복될 관계가 아니다. 오직 무한한 사랑만이 다시 주입되어야 한다. 구약 예언자의 말에 의하면, 계약의 깨어짐은 남편과 음녀의 갈라섬과 같다는 것이다. 도덕법이 이 갭을 메울 수 없다. 율법 위에 살면서 경건성을 지탱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여타의 예언자들의 맹렬한 공격의 표적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남과 자기 사이에 뭔가 없어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허망’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신을 섬기지만 그런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우상에 불과하다. 이 우상 섬김에 대하여 매정한 심판이 가해진다. 이 심판 속에서 그들은 인간의 근원에 접촉된다. 즉 인간은 누군가에 매여 살고 있다는 의식이다. 몇몇이 아니라 모든 인간 전체가 단체로 그 죄의 권세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비로소 파악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 쪽에서 내민 용서뿐이다.
용서를 내미는 것은, 인간들 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다. 그 어떠한 암담한 고난 속에서 용서 쪽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심판의 고난은 이제는 징계의 고난으로 해석된다. 그 와중에서도 ‘돌아섬’, 즉 회개만이 죄라는 악에서부터의 해방이다. 이 용서의 근거는 희생 제물의 희생이다. 흠집의 경우처럼 씻기 위한 피가 아니라 죄인 전체의 생명을 대신하는 피이다. 후기 예언서와 신약 시대에까지 죄의 개념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이 있는 게 아니다. 허물이라는 악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다. 허물이란, 인간의 자유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는 차원이다. 왜 완전하지 못하냐고 따지는 차원이다. 사적으로 악인으로 인간을 몰아 세우는 시도이다. 그 방법은 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완전성을 요구함으로서 실시된다. 죄의 열매가 허물이다. 공동체적인 죄가 개인적인 허물의 형태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단체로 일괄적인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지은 죄를 아들이 담당할 필요 없다. 모든 영혼은 각자 하나님에게만 속해진다(에스겔 18:1-4). 죄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으로 판정되는데 비해, 허물은 많고 적음이라는 양적계량에 따른다. 죄라는 신학적인 악의 개념이, 허물이라는 심리적 개념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공적 개념이 도입된다. 꼼꼼한 윤리 조항이 마련되어 제 구실을 다한다. 실제로 의를 실천해보는 종교이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완벽하게 모든 계명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허물이 된다. 곧 악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은 위기를 맞이한다. 허물을 유발시키는 완전한 율법이 인간을 극한까지 몰아 세우게 된 것이다. 인간의 출구는 애초부터 저주였다는 것이 신약에 와서야 밝혀졌다. 이런 율법의 상황에서 신앙의 체제로 가는 것은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넘쳐 올라 뒤집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허물에서 해방되는 방법이다. 은혜로 주어지는 의이다. 율법에 계속 매달리는 유대교적인 안목에서는 아무리해도 이런 허물의 실체에 어둡다. 신약에 와서 은혜로 제공되는 의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악의 모든 것은 공개된다. 이점이 저자가 주장하는 결론이다.
평 가
악을 흠과 죄와 허물로 구분 짓는 것은 악의 근원적인 출처를 분산 시켜 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이기에 그 성격도 하나로 통합이 되어야 마땅하다.
구세주가 오직 한 분으로 결정되어진 상태에서 죄악의 개념은, 그 구세주께서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든 구원되어야겠다는 성급한 구원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구세주의 의견에 대드는 의견들이 무언가를 실펴야 악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은 것은 다 뽑힌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5:13).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곧 사탄의 일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23). 인간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은 뭘 하는 게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한복음 6:29). 예수님의 몸, 그 자체가 유일 무일한 포도나무이시다.
여기에는 완전을 향한 팽창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연결 자체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로 남는다. 교회는 선택하신 분의 자의로운 결정의 결과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그 어떤 노동의 개념도 용납되지 아니한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은 악을 구별하신다. 이와 같이 악은 구원론과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론과 중보자의 입장에서 정립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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