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예술 : 聖과 美의 境界에 대한 現象學的 理解
종교와 예술 : 聖과 美의 境界에 대한 現象學的 理解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종교와 예술 : 聖과 美의 境界에 대한 現象學的 理解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게라두스 반 데어 레우 (Geradus van der Leeuw)
번 역 : 윤이흠
출판사 : 열화당
이 책은 [성과 미의 경계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거룩과 아름다움이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면에서 과연 차이가 보이느냐 하는 점을 저자는 착안하고 있다. 서로의 동기가 다르니깐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행위의 동기와 예술 행위의 동기가 결국에는 동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최고를 향한 추구와 집념은 어떤 형태로도 인간의 열정의 몸짓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표현해 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열정의 몸짓은 항상 현실을 초월하고 초극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순응적 기질을 감출 길 없다. 이것을 저자는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원시 시절의 예술적 형상은 늘 종교의 표현이다. 신을 묘사하는데 있어 왕의 얼굴이 사용된다. 그리고 그림에 있어서도 원근법이 없는 이유는,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이기에 인간이 자연과 독립해서 별도로 자연의 가치를 논할 그런 원근법의 시대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림 기법이다. 그래서 원시인은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자연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인들이 죽은 왕의 모습을 다른 이보다 두 배나 크게 그리는 것과 같은 예이다.
종교는 이처럼 인간 자체의 해탈과 구원을 위해 자연물을 이용은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이상의 것을 구현하기 위해 비자연적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예를 들면, 원시종교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 제조는 전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원시인들은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신을 묘사하는데 있어 현재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자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즉 비인간적인 형태와 반인간적인 형태로 자연물을 변형시키는 것이 오히려 신을 경외스럽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자연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만 그릴 수 있는 것이 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신앙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도 오히려 흉한 것을 더 찾게 한다. 성스러움을 단순히 아름다움과 비교되고 경쟁되는 관계에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초월적인 것으로 상대조차 안 되는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에서 여로보암의 황소는 여호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 신을 위하여 준비된 텅 빈 옥좌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분명히 법궤는 형상을 지니지만 오히려 그 상징하는 바는 빈 권좌이다(민수기 10:35-37). 또 초기 그리스 미술에서, 사람들이 반드시 옷을 입고 등장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그리스 미술에서 인간이 나체로 등장되는 경우는 보편적인 추세가 아니라 특별한 경우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그 그리스 문화를 이어서 중세에 들어오면, 인간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한 자아 발견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 이상의 신의 대용물이나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자연, 그리고 신과 대치되는 위치에 인간을 독자적으로 세워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독립선언이다.
이제부터는 인간들이 임의로 자연을 보는데도 인간을 위한 예술 작업이 시작된다. 성스러운 종교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신봉하는 예술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신을 묘사하고 경외하되 뒤틀려진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정돈된 미적 감정을 최고로 발휘한 그 지점에 있는 신이다. 그러니 사실상 인간화된 신이다. 신을 섬기는지 아니라 미를 섬기는지 분간이 안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는 여기에 반발하여 조각뿐 아니라 그림까지 폐기하기를 명령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의 형상을 본 게 아니라 다만 신의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는 것이다(신명기 4:12). 신의 형상은 여기서 다시 음성으로 넘어간다. 음악이 종교의식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은 안 되지만 들려지는 것은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미 독립선언을 마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성스러움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예술, 그 자체가 종교적이고 말았다. 예술가는 예술, 그 자체를 신봉하는 신자들이다. 예술, 그 자체가 거룩이다. 종교에 봉사하는 예술이라는 관습을 벗어 던져 버렸다. 이러한 예술계의 저항에 대해서 종교는 화합의 손길을 내민다. 하나님이 창조작업의 조화를 예술가는 묘사하므로 신에게 영광 돌릴 수 있다고 설득하려 든다. 그리고 이 화해의 손짓은 저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절대자가 있는 그곳에서 종교와 예술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미의 형이상학과 미를 그 자체를 예배하려 하는 예술인들을 포섭하여 종교와 화해하기를 저자는 종용하고 있으면서 글을 맺고 있다. 미적 경험은 얼마든지 종교적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와 예술, 양편이 서로 대립하지 말고 신의 성스러움에 같이 참여하는 임무를 지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술도 궁극적으로 신의 형태, 이른바 창조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희망을 가져본다.
평 가
본 책은 종교와 예술은 결국 하나로 대체해서 말할 수 있음을 증명한 책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인간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야망과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는 야심은 원래 한 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서로가 서로를 종으로 삼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성스러움 경배하는데 양쪽 다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는 심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 쪽에서 보면 종교라는 것도 예술작업의 일종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결국 정돈된 인간 정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종교활동과 참여도 사실은 자신의 심정을 안정되게 가져가려는 본능의 소산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가 추구하는 질서 추구와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이 재물의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선 경제적인 욕구가 충당되고 안정된 사회질서가 유지되면 그런 배부른 상태에서 그 안정성을 기초로 하여 심미적이고 유미적인 본성이 활동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종교로 이어지고 이것 또한 예술행위의 일부가 된다. 고대인들의 예술감각이란, 우선 경제적이고 공리적인 것이 변형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자기 노동과 수고를 통해 스스로 자기 영광으로 회수하려는 본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기 수고에 대한 영광성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기 공로에 대한 자기 찬양이다. 자기가 세운 예배당을 보고 자축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요 예술 행각이기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결국 배부른 자나 혹은 가난을 미화하려는 자의 오락 단체로 이미 선을 넘고 있다. 복음을 이해 못하고 종교적 친목 단체로 변신한 교회 안에는 인간들의 경쟁적 자기 공로 전시장 구실을 톡톡히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바로 이런 현장에 십자가라는 폭탄을 터트려 그들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촉구하는 회개의 말씀이다.
첨부파일 : 종교와예술.hwp (32.0K), Down:21
관리자(IP:124.♡.84.82)
09-02-16 15:37
종교와 예술 : 聖과 美의 境界에 대한 現象學的 理解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게라두스 반 데어 레우 (Geradus van der Leeuw)
번 역 : 윤이흠
출판사 : 열화당
이 책은 [성과 미의 경계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거룩과 아름다움이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면에서 과연 차이가 보이느냐 하는 점을 저자는 착안하고 있다. 서로의 동기가 다르니깐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행위의 동기와 예술 행위의 동기가 결국에는 동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최고를 향한 추구와 집념은 어떤 형태로도 인간의 열정의 몸짓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표현해 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열정의 몸짓은 항상 현실을 초월하고 초극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순응적 기질을 감출 길 없다. 이것을 저자는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원시 시절의 예술적 형상은 늘 종교의 표현이다. 신을 묘사하는데 있어 왕의 얼굴이 사용된다. 그리고 그림에 있어서도 원근법이 없는 이유는,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이기에 인간이 자연과 독립해서 별도로 자연의 가치를 논할 그런 원근법의 시대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림 기법이다. 그래서 원시인은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자연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인들이 죽은 왕의 모습을 다른 이보다 두 배나 크게 그리는 것과 같은 예이다.
종교는 이처럼 인간 자체의 해탈과 구원을 위해 자연물을 이용은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이상의 것을 구현하기 위해 비자연적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예를 들면, 원시종교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 제조는 전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원시인들은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신을 묘사하는데 있어 현재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자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즉 비인간적인 형태와 반인간적인 형태로 자연물을 변형시키는 것이 오히려 신을 경외스럽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자연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만 그릴 수 있는 것이 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신앙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도 오히려 흉한 것을 더 찾게 한다. 성스러움을 단순히 아름다움과 비교되고 경쟁되는 관계에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초월적인 것으로 상대조차 안 되는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에서 여로보암의 황소는 여호와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 신을 위하여 준비된 텅 빈 옥좌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분명히 법궤는 형상을 지니지만 오히려 그 상징하는 바는 빈 권좌이다(민수기 10:35-37). 또 초기 그리스 미술에서, 사람들이 반드시 옷을 입고 등장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그리스 미술에서 인간이 나체로 등장되는 경우는 보편적인 추세가 아니라 특별한 경우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그 그리스 문화를 이어서 중세에 들어오면, 인간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한 자아 발견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 이상의 신의 대용물이나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자연, 그리고 신과 대치되는 위치에 인간을 독자적으로 세워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독립선언이다.
이제부터는 인간들이 임의로 자연을 보는데도 인간을 위한 예술 작업이 시작된다. 성스러운 종교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신봉하는 예술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신을 묘사하고 경외하되 뒤틀려진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정돈된 미적 감정을 최고로 발휘한 그 지점에 있는 신이다. 그러니 사실상 인간화된 신이다. 신을 섬기는지 아니라 미를 섬기는지 분간이 안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는 여기에 반발하여 조각뿐 아니라 그림까지 폐기하기를 명령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의 형상을 본 게 아니라 다만 신의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는 것이다(신명기 4:12). 신의 형상은 여기서 다시 음성으로 넘어간다. 음악이 종교의식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은 안 되지만 들려지는 것은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미 독립선언을 마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성스러움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예술, 그 자체가 종교적이고 말았다. 예술가는 예술, 그 자체를 신봉하는 신자들이다. 예술, 그 자체가 거룩이다. 종교에 봉사하는 예술이라는 관습을 벗어 던져 버렸다. 이러한 예술계의 저항에 대해서 종교는 화합의 손길을 내민다. 하나님이 창조작업의 조화를 예술가는 묘사하므로 신에게 영광 돌릴 수 있다고 설득하려 든다. 그리고 이 화해의 손짓은 저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절대자가 있는 그곳에서 종교와 예술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미의 형이상학과 미를 그 자체를 예배하려 하는 예술인들을 포섭하여 종교와 화해하기를 저자는 종용하고 있으면서 글을 맺고 있다. 미적 경험은 얼마든지 종교적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와 예술, 양편이 서로 대립하지 말고 신의 성스러움에 같이 참여하는 임무를 지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술도 궁극적으로 신의 형태, 이른바 창조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희망을 가져본다.
평 가
본 책은 종교와 예술은 결국 하나로 대체해서 말할 수 있음을 증명한 책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인간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야망과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는 야심은 원래 한 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서로가 서로를 종으로 삼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성스러움 경배하는데 양쪽 다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는 심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 쪽에서 보면 종교라는 것도 예술작업의 일종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결국 정돈된 인간 정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종교활동과 참여도 사실은 자신의 심정을 안정되게 가져가려는 본능의 소산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가 추구하는 질서 추구와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이 재물의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선 경제적인 욕구가 충당되고 안정된 사회질서가 유지되면 그런 배부른 상태에서 그 안정성을 기초로 하여 심미적이고 유미적인 본성이 활동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종교로 이어지고 이것 또한 예술행위의 일부가 된다. 고대인들의 예술감각이란, 우선 경제적이고 공리적인 것이 변형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자기 노동과 수고를 통해 스스로 자기 영광으로 회수하려는 본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기 수고에 대한 영광성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기 공로에 대한 자기 찬양이다. 자기가 세운 예배당을 보고 자축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요 예술 행각이기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결국 배부른 자나 혹은 가난을 미화하려는 자의 오락 단체로 이미 선을 넘고 있다. 복음을 이해 못하고 종교적 친목 단체로 변신한 교회 안에는 인간들의 경쟁적 자기 공로 전시장 구실을 톡톡히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바로 이런 현장에 십자가라는 폭탄을 터트려 그들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촉구하는 회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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