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와 문명 : 문명의 위기와 카오스 여신의 부활
카오스와 문명 : 문명의 위기와 카오스 여신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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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와 문명 : 문명의 위기와 카오스 여신의 부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김상일
출판사 : 동아출판사
이 글은 서양 학문에 기초한 지식 체계의 그 한계성에 밝히는 글이다. 질서 중심의 세계관만으로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와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합리적인 질서 세계 안에서만 논하는 지성은, 실제로 발생하는 역설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하고 모순과 헛점이 노출시키고 있다. 이는 그 동안의 서양 학문이 스스로 폐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폐쇄성은 어떤 통로를 통해 활짝 개방될 수 있는가?
저자는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 주목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그 동안 무시했던 그 세계가 도리어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이르게 하는 유일한 지혜의 통로인 것이다. 알→앎→얼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우주 창생의 대 원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 과학에 와서 비로소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과 동양의 지혜와 그리고 종교가 추구했던 그 최종 진리는 애초부터 신화 속에 한 알로서 살아 있었던 거였다. 인류의 처음부터 완전한 이성(理性)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그리워한다. 신과 하나 되는 것이 가장 큰 욕구였다. 이처럼 누구나 신화적이다. 그런데 타락이 일어났다. '신화 길들이기' 나선 것이다. 질서와 무질서를 가르는 자의식이 생겨났다. 문명 시대의 시작이며 동시에 고향을 상실했다.
문명이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됨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동안 인간을 지배하던 신들과 전쟁을 벌리게 된다. 신화 시절을 주역이었던 뱀과 용도 이제는 악마로 간주된다. 신화를 죽이지 않고서는 문명도 없다. 사랑보다 힘과 지식을 선택했다. 여성 문화에서 남성 지배 문화로 바뀐 것도 이 시대이다. 청동기 시절에 정신적 자아의식이 태동한다. 스스로 밝음을 지향했다. 남성이 우두머리와 하늘의 자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카오스(혼돈)와 에로스를 경멸한다.
여기에 시간 이해가 등장했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그전까지의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적 변화에 예속되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현재에 서서 미래까지 예상하게 되었다. 역사는 자연의 변화로부터 분리되었다. 자연에 의존하던 습관은 사라지고 개개인들의 자기 성찰 현상이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공동체 명예를 중요시하는 수치 문화보다는 사적인 책임을 묻는 죄 관념이 강렬해진다.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기준에서의 죄가 아니라 합리적인 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합리적 사고에 따른 자기 반성과 분석 작업을 통해 획일적인 질서 문화를 건설된다. 동시에 그 어떤 무질서도 합리적 세계에서는 용서되지 아니한다. 사회적 공법이 바로 신의 법이 되었다.
인격적 와해 현상도 같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철두철미한 법률을 동원하지만 점점 더 자율에서 타율로 타락의 속도가 강해진다. 자의식과 더불어 죄의식은 더욱 고조되어 간다.
이러한 문명에 불길로서 접목된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이들은 신은 엄격한 율법적 신으로 나타난다. 자아의 독립을 선언해 놓고서는 도리어 법률적인 신 앞에서 철저하게 자아는 학대받고 서 있는 것이다.
본래의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기독교 안에서는 신과 인간은 대립된 존재로 불안한 관계로 만들었다. 사랑의 종교가 합리적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 일어나는 강압감과 죄책감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인간들이 떠 안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는 하늘이 주는 천벌이 무서워 그 반동으로 더욱 더 극단적인 엄격함으로 율법화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본래 정신은 공자와는 달리 같이 카오스적이었다. 하늘과 땅을 항상 대립시킨 것이 공자의 사상이라면 예수의 모든 행적은 참으로 낯설게도 원시적이었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 세상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도리어 신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오고 부터 예수의 생명은 질식당했다.
합리성 있는 문명의 발전이 결코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스트레스와 정신 질환을 가중시키고 있다. 거기에 비해 혼돈스러워 보이는 퍼지(Fuzzy)와 카오스(Chaos) 이론은 인류 생활을 보다 편리하고 인간다움에 가깝게 만든다.
혼돈을 깔보고 학대하면 혼돈으로부터 보복당한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태도를 버리고 관조와 명상과 직관 같은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 자기 죽음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죽음마저 우상화 하지 않도록 또 죽여야 한다.
어느 사람도 전체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또한 귀속되지도 않는 모든 세계로 향하여야 한다. 이것은 얼의 세계이다. 알이 얼이 되고(진화) 다시 얼이 알이 되는(퇴화) 공존하는 세계이어야 한다. 서양 철학은 직선적 역사관을 동원하여 진화라는 한가지 가닥만 고집했다. 그러나 퇴화란 점차로 해체시키고 비우는 과정이다. 성경 창세기를 보더라도 두 가지의 창조와 두 가지의 타락을 함께 싣고 있다. 즉 자연의 타락과 신학적 타락이다. 개벽과 창조, 이것이 이중 구원이다.
이 원리는 비단 종교에서만 제창되는 원리가 아니라 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려는 아집과 애착을 버리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므로서 모든 욕망의 불길을 꺼야 한다. 불행 의식, 소외 의식, 갈등 의식, 분리 의식 이 모든 것은 아직도 자아의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 자의식에서 초자아로 전이되어야한다. 부분 부분이 모여서 모든 것을 이루지만 또한 각 부분이 전체가 된다는 진리를 알게 되면 모든 분쟁과 갈등의 시절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둘이 대립되면 질서가 갖추어져 진리에 도달한 것 같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끼여들어 셋이 되어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혼돈이야말로 행복이 중심터이다. 땅과 하늘이 융화가 되고 신과 인간이 한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명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란다.
저자는 기본 사고는 이렇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께서 인간을 여 남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태어난 것으로 볼 때에) 분리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란다. 인간이 무의식이라는 잠에서 깨어나서 구분 의식이 되고 여기서 선택에 따르는 불안과 영웅을 찾아 그 영웅에게 귀속되고 싶은 소속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불안정성을 해소하려고 인간들은 신을 찾고 그 신의 영원성과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했다. 문명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였다. 남성적인 정신 문화가 여성적인 육체 문화를 지배하면서 처음부터 여성성으로 충만한 자연 세계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문명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간 세계에서 너와 나,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놓은 책임이 객체화로서 등장된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절대적 구분도 용납하지 말고 혼돈 속에서 신도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되어 같이 어우러져 있는 그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주란 본디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과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죄의식은 오직 신으로부터 주어졌고 그 죄의식과 따라 죽음의 공포도 찾아 들었으니 이 차에 현대 문명 속에서 신의 심판하심과 엄위성과 거룩성을 제거하는 것만이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대안이라고 믿고 있다. 어차피 신이라는 것도 초자아가 투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평 가
인간은 해탈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가장 큰 큰 걸림돌이라고 간주되는 신 마저 극단적인 휴머니즘의 형태인 종교 안으로 녹여버림으로서 모든 장애물이 제거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성을 저주하신다. 스스로 구원되려는 모든 노력과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헛 능력으로 드러난다. 정말 중요한 일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신세를 다시 돌아보는 일이다. 그러면 기독교조차 여러 종교 아류임이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린 자만이, 건전하게 보이는 철학과 종교가 넘치는 이 세상이 왜 불바다 되어 지옥으로 화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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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2-16 16:16
카오스와 문명 : 문명의 위기와 카오스 여신의 부활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김상일
출판사 : 동아출판사
이 글은 서양 학문에 기초한 지식 체계의 그 한계성에 밝히는 글이다. 질서 중심의 세계관만으로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와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합리적인 질서 세계 안에서만 논하는 지성은, 실제로 발생하는 역설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하고 모순과 헛점이 노출시키고 있다. 이는 그 동안의 서양 학문이 스스로 폐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폐쇄성은 어떤 통로를 통해 활짝 개방될 수 있는가?
저자는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 주목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그 동안 무시했던 그 세계가 도리어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이르게 하는 유일한 지혜의 통로인 것이다. 알→앎→얼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우주 창생의 대 원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 과학에 와서 비로소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과 동양의 지혜와 그리고 종교가 추구했던 그 최종 진리는 애초부터 신화 속에 한 알로서 살아 있었던 거였다. 인류의 처음부터 완전한 이성(理性)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그리워한다. 신과 하나 되는 것이 가장 큰 욕구였다. 이처럼 누구나 신화적이다. 그런데 타락이 일어났다. '신화 길들이기' 나선 것이다. 질서와 무질서를 가르는 자의식이 생겨났다. 문명 시대의 시작이며 동시에 고향을 상실했다.
문명이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됨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축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동안 인간을 지배하던 신들과 전쟁을 벌리게 된다. 신화 시절을 주역이었던 뱀과 용도 이제는 악마로 간주된다. 신화를 죽이지 않고서는 문명도 없다. 사랑보다 힘과 지식을 선택했다. 여성 문화에서 남성 지배 문화로 바뀐 것도 이 시대이다. 청동기 시절에 정신적 자아의식이 태동한다. 스스로 밝음을 지향했다. 남성이 우두머리와 하늘의 자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카오스(혼돈)와 에로스를 경멸한다.
여기에 시간 이해가 등장했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그전까지의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적 변화에 예속되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현재에 서서 미래까지 예상하게 되었다. 역사는 자연의 변화로부터 분리되었다. 자연에 의존하던 습관은 사라지고 개개인들의 자기 성찰 현상이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에서 일어났다.
공동체 명예를 중요시하는 수치 문화보다는 사적인 책임을 묻는 죄 관념이 강렬해진다.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기준에서의 죄가 아니라 합리적인 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합리적 사고에 따른 자기 반성과 분석 작업을 통해 획일적인 질서 문화를 건설된다. 동시에 그 어떤 무질서도 합리적 세계에서는 용서되지 아니한다. 사회적 공법이 바로 신의 법이 되었다.
인격적 와해 현상도 같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철두철미한 법률을 동원하지만 점점 더 자율에서 타율로 타락의 속도가 강해진다. 자의식과 더불어 죄의식은 더욱 고조되어 간다.
이러한 문명에 불길로서 접목된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이들은 신은 엄격한 율법적 신으로 나타난다. 자아의 독립을 선언해 놓고서는 도리어 법률적인 신 앞에서 철저하게 자아는 학대받고 서 있는 것이다.
본래의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기독교 안에서는 신과 인간은 대립된 존재로 불안한 관계로 만들었다. 사랑의 종교가 합리적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 일어나는 강압감과 죄책감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인간들이 떠 안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는 하늘이 주는 천벌이 무서워 그 반동으로 더욱 더 극단적인 엄격함으로 율법화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본래 정신은 공자와는 달리 같이 카오스적이었다. 하늘과 땅을 항상 대립시킨 것이 공자의 사상이라면 예수의 모든 행적은 참으로 낯설게도 원시적이었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 세상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도리어 신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오고 부터 예수의 생명은 질식당했다.
합리성 있는 문명의 발전이 결코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스트레스와 정신 질환을 가중시키고 있다. 거기에 비해 혼돈스러워 보이는 퍼지(Fuzzy)와 카오스(Chaos) 이론은 인류 생활을 보다 편리하고 인간다움에 가깝게 만든다.
혼돈을 깔보고 학대하면 혼돈으로부터 보복당한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태도를 버리고 관조와 명상과 직관 같은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 자기 죽음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죽음마저 우상화 하지 않도록 또 죽여야 한다.
어느 사람도 전체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또한 귀속되지도 않는 모든 세계로 향하여야 한다. 이것은 얼의 세계이다. 알이 얼이 되고(진화) 다시 얼이 알이 되는(퇴화) 공존하는 세계이어야 한다. 서양 철학은 직선적 역사관을 동원하여 진화라는 한가지 가닥만 고집했다. 그러나 퇴화란 점차로 해체시키고 비우는 과정이다. 성경 창세기를 보더라도 두 가지의 창조와 두 가지의 타락을 함께 싣고 있다. 즉 자연의 타락과 신학적 타락이다. 개벽과 창조, 이것이 이중 구원이다.
이 원리는 비단 종교에서만 제창되는 원리가 아니라 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려는 아집과 애착을 버리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므로서 모든 욕망의 불길을 꺼야 한다. 불행 의식, 소외 의식, 갈등 의식, 분리 의식 이 모든 것은 아직도 자아의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 자의식에서 초자아로 전이되어야한다. 부분 부분이 모여서 모든 것을 이루지만 또한 각 부분이 전체가 된다는 진리를 알게 되면 모든 분쟁과 갈등의 시절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둘이 대립되면 질서가 갖추어져 진리에 도달한 것 같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끼여들어 셋이 되어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혼돈이야말로 행복이 중심터이다. 땅과 하늘이 융화가 되고 신과 인간이 한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명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란다.
저자는 기본 사고는 이렇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께서 인간을 여 남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태어난 것으로 볼 때에) 분리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란다. 인간이 무의식이라는 잠에서 깨어나서 구분 의식이 되고 여기서 선택에 따르는 불안과 영웅을 찾아 그 영웅에게 귀속되고 싶은 소속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불안정성을 해소하려고 인간들은 신을 찾고 그 신의 영원성과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했다. 문명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였다. 남성적인 정신 문화가 여성적인 육체 문화를 지배하면서 처음부터 여성성으로 충만한 자연 세계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문명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간 세계에서 너와 나, 그리고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놓은 책임이 객체화로서 등장된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절대적 구분도 용납하지 말고 혼돈 속에서 신도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되어 같이 어우러져 있는 그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주란 본디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과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죄의식은 오직 신으로부터 주어졌고 그 죄의식과 따라 죽음의 공포도 찾아 들었으니 이 차에 현대 문명 속에서 신의 심판하심과 엄위성과 거룩성을 제거하는 것만이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대안이라고 믿고 있다. 어차피 신이라는 것도 초자아가 투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평 가
인간은 해탈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가장 큰 큰 걸림돌이라고 간주되는 신 마저 극단적인 휴머니즘의 형태인 종교 안으로 녹여버림으로서 모든 장애물이 제거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성을 저주하신다. 스스로 구원되려는 모든 노력과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헛 능력으로 드러난다. 정말 중요한 일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신세를 다시 돌아보는 일이다. 그러면 기독교조차 여러 종교 아류임이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린 자만이, 건전하게 보이는 철학과 종교가 넘치는 이 세상이 왜 불바다 되어 지옥으로 화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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