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인간의 욕망과 그 변형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인간의 욕망과 그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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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인간의 욕망과 그 변형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뽈 디엘 (Paul Diel)
번 역 : 안용철
출판사 : 공동체 출판사
인간은 신화 속에서 잉태된다. 신화 속에서 대화하고 그 신화의 그물에 얽힌 채 살아간다. 신화란, 사회 구성원이 입에서 내뱉은 실타래로 구조를 이룬다. 괴로움과 원한과 욕망과 야심의 실들이 한치의 양보 없이 서로들 속으로 파고든다. 원한 속에 동정심이 있는가 하면은, 애정 속에 경쟁이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 밑 해초 마냥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신화의 구조, 이것은 곧 인간들 무의식의 심연이라고 본 학자가 있으니 이름이 뽈 디엘이다.
그리스 신화란, 단순히 야화 같은 흥미 본위의 전설들이 아니다. 그리스 당시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었고 삶의 룰이었다. 신화 하나 하나에 개인과 사회를 담고 있다. 신화의 혼란스러움은, 개인이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투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알 수 없는 혼란과 혼돈과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도 또한 인간사회이다. 이 알 수 없는 생존의 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불가사의한 실체로 거론되게 된다. 누군가 배후에서 임의대로 휘젓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배후의 신화적 인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안게 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고 임의적인 현상계를 일단 [드러낸 신비작용]으로 간주하고 이 신비로움을 인간들이 이해될 수 있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신화이다.
그래서 신화는 두개의 대립된 세계가 하나 안에 응축되어 있다. 즉 세계의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지각 있는 인간들의 행위가 그것이다. 신비로움에 대처하고 때로는 대결해서 때로는 화친해서 어려운 난관을 극적으로 돌파해나가고 해결해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 이것이 신화이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밤하늘의 유성들처럼 쉴새없이 날아들어오는 사건, 사건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 영웅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초자연적인 공격에 못지않은 인간들의 용기와 과감성과 혜안과 통찰력은, 신화를 인생관으로 삼고 사는 독자들에게 의욕과 희망을 제공한다. 인간도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뽈 디엘은 인간의 본질 속성에서 신성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신화의 출현은,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들므로서 최고 순수 세계의 일원으로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인간 세상을 만들고 동시에 그 만들어진 세계를 파괴하고 심판하려 드는 신의 의지가 오히려 지상에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신적 존재로 분발하도록 촉진하게 된다.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 절대 진리로 작용하게 되어, 그 누구든지 심지어 신이라 할지라도 방해하게 되면 적이 되고 악이 된다. 인간 무의식 깊은 속에서 생수처럼 마를 날 없이 분출되는 욕망의 에너지는 상징의 분수가 되어 지상에서 만개한다. 인간세계를 압도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로서 인간 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신에 활동에 대해서, 인간 본연의 삶의 의욕은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공포 속에서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죽음의 발자국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기절해서는 안된다. 기필코 죽음마저 통과해서 보다 성화 되고 승화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뭔가 반드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대처하는 처세술이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영생의 보검이나 지혜를 알기만 한다면 …….
신화는 수많은 패배와 실패를 부끄러움 없이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의 반복 가운데서 성공의 씨앗은 안에서 서서히 배태하게 된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그 성공의 지혜가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를 보상해주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개선으로 마무리될 것이기에 희망을 잃고 살 수는 없다. 고난 가운데 영광이다. 좌절했기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 일수가 있으나, 주로 교만한 마음, 성급성, 이기주의, 잔학성, 허영심 같은 것이다. 실패는 바로 이런 삐뚤어진 마음들을 교정하는 단계이다. 위대한 영웅으로서 가지지 말아야 될 것을 잘라 버리는 경험들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 안에서 미화된다. 그래서 신화란, 결국 인간 신성화 시도의 증거물이다.
왜 이런 신화가 인류 역사에서 한시도 멈춘 적이 없는가? 그것은 욕망이라는 삶의 에너지가 밖에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으로 해야 될 마땅한 윤리와 도덕의 임무는 사실상 보다 지상에서 오래 생존하기 위한 영웅적 자질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자신을 통제해서 심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런 작은 신으로 달라져서 심판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은 채 도도히 삶을 살고자 하자는 데 있다.
저자는, 신화 속에서 정신장애의 원형을 발견한다.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 의식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욕구와 야망의 화신이 되어 충동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은, 스스로 큰 충돌의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신경질, 신경쇠약, 정신병 이 세단 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도 되지 못한 채 스스로 붕괴해 간다. 그리고 무너지는 자아를 신화 속에 상징으로 남긴다. 한편으로 신에게 대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아들이 되어 영혼만이라도 영웅으로 변신해 보려는 인간의 최후의 바램은, 심리적 투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되어 그 시절에 명명백백 드러나 있는 것이다.
평 가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무엇을 뜻하는가? 소위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저의는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오직 성경의 바탕 위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경을 대했던 수많은 신도들은 그 성경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현재 자기의 괴로운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지혜의 열매를 찾기를 원했다. 또 설교자들에게 그런 쪽으로 요구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설교단에서 복음이 나오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자기들이 찾고자 했던 신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서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 쪽에서 행하신 희생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죄인이 지상에서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외면한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한풀이] 이다. 못 배운 한, 없이 살아온 과거, 남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보란듯이 살고 싶은 욕망을 신께서 빈틈없이 해결해 주기를 고대하고 교회에 출석한다.
만약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민중들은 뭐라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일날 예배에 참석할 용의가 있으며, 십일조를 낼 각오가 되어 있으며, 자기 교회를 키울 봉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자기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다음과 같이 불러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신화의 제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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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2-14 19:43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인간의 욕망과 그 변형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뽈 디엘 (Paul Diel)
번 역 : 안용철
출판사 : 공동체 출판사
인간은 신화 속에서 잉태된다. 신화 속에서 대화하고 그 신화의 그물에 얽힌 채 살아간다. 신화란, 사회 구성원이 입에서 내뱉은 실타래로 구조를 이룬다. 괴로움과 원한과 욕망과 야심의 실들이 한치의 양보 없이 서로들 속으로 파고든다. 원한 속에 동정심이 있는가 하면은, 애정 속에 경쟁이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 밑 해초 마냥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신화의 구조, 이것은 곧 인간들 무의식의 심연이라고 본 학자가 있으니 이름이 뽈 디엘이다.
그리스 신화란, 단순히 야화 같은 흥미 본위의 전설들이 아니다. 그리스 당시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었고 삶의 룰이었다. 신화 하나 하나에 개인과 사회를 담고 있다. 신화의 혼란스러움은, 개인이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투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알 수 없는 혼란과 혼돈과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도 또한 인간사회이다. 이 알 수 없는 생존의 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불가사의한 실체로 거론되게 된다. 누군가 배후에서 임의대로 휘젓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배후의 신화적 인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안게 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고 임의적인 현상계를 일단 [드러낸 신비작용]으로 간주하고 이 신비로움을 인간들이 이해될 수 있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신화이다.
그래서 신화는 두개의 대립된 세계가 하나 안에 응축되어 있다. 즉 세계의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지각 있는 인간들의 행위가 그것이다. 신비로움에 대처하고 때로는 대결해서 때로는 화친해서 어려운 난관을 극적으로 돌파해나가고 해결해 가는 영웅들의 이야기, 이것이 신화이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밤하늘의 유성들처럼 쉴새없이 날아들어오는 사건, 사건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 영웅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초자연적인 공격에 못지않은 인간들의 용기와 과감성과 혜안과 통찰력은, 신화를 인생관으로 삼고 사는 독자들에게 의욕과 희망을 제공한다. 인간도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뽈 디엘은 인간의 본질 속성에서 신성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신화의 출현은,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들므로서 최고 순수 세계의 일원으로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인간 세상을 만들고 동시에 그 만들어진 세계를 파괴하고 심판하려 드는 신의 의지가 오히려 지상에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신적 존재로 분발하도록 촉진하게 된다.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 절대 진리로 작용하게 되어, 그 누구든지 심지어 신이라 할지라도 방해하게 되면 적이 되고 악이 된다. 인간 무의식 깊은 속에서 생수처럼 마를 날 없이 분출되는 욕망의 에너지는 상징의 분수가 되어 지상에서 만개한다. 인간세계를 압도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로서 인간 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신에 활동에 대해서, 인간 본연의 삶의 의욕은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공포 속에서도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죽음의 발자국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기절해서는 안된다. 기필코 죽음마저 통과해서 보다 성화 되고 승화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뭔가 반드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대처하는 처세술이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영생의 보검이나 지혜를 알기만 한다면 …….
신화는 수많은 패배와 실패를 부끄러움 없이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의 반복 가운데서 성공의 씨앗은 안에서 서서히 배태하게 된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그 성공의 지혜가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를 보상해주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개선으로 마무리될 것이기에 희망을 잃고 살 수는 없다. 고난 가운데 영광이다. 좌절했기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 일수가 있으나, 주로 교만한 마음, 성급성, 이기주의, 잔학성, 허영심 같은 것이다. 실패는 바로 이런 삐뚤어진 마음들을 교정하는 단계이다. 위대한 영웅으로서 가지지 말아야 될 것을 잘라 버리는 경험들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 안에서 미화된다. 그래서 신화란, 결국 인간 신성화 시도의 증거물이다.
왜 이런 신화가 인류 역사에서 한시도 멈춘 적이 없는가? 그것은 욕망이라는 삶의 에너지가 밖에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으로 해야 될 마땅한 윤리와 도덕의 임무는 사실상 보다 지상에서 오래 생존하기 위한 영웅적 자질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자신을 통제해서 심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런 작은 신으로 달라져서 심판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은 채 도도히 삶을 살고자 하자는 데 있다.
저자는, 신화 속에서 정신장애의 원형을 발견한다.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 의식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욕구와 야망의 화신이 되어 충동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은, 스스로 큰 충돌의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신경질, 신경쇠약, 정신병 이 세단 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도 되지 못한 채 스스로 붕괴해 간다. 그리고 무너지는 자아를 신화 속에 상징으로 남긴다. 한편으로 신에게 대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아들이 되어 영혼만이라도 영웅으로 변신해 보려는 인간의 최후의 바램은, 심리적 투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되어 그 시절에 명명백백 드러나 있는 것이다.
평 가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무엇을 뜻하는가? 소위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저의는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오직 성경의 바탕 위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경을 대했던 수많은 신도들은 그 성경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현재 자기의 괴로운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지혜의 열매를 찾기를 원했다. 또 설교자들에게 그런 쪽으로 요구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설교단에서 복음이 나오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자기들이 찾고자 했던 신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서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 쪽에서 행하신 희생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죄인이 지상에서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외면한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한풀이] 이다. 못 배운 한, 없이 살아온 과거, 남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보란듯이 살고 싶은 욕망을 신께서 빈틈없이 해결해 주기를 고대하고 교회에 출석한다.
만약 그것만 보장해 준다면 민중들은 뭐라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일날 예배에 참석할 용의가 있으며, 십일조를 낼 각오가 되어 있으며, 자기 교회를 키울 봉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자기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다음과 같이 불러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신화의 제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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