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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철학과 신학의 허상 : 목회자로서 살펴 본 현대 사상 (머리말)성경신학[철학]

철학과 신학의 허상 : 목회자로서 살펴 본 현대 사상 (머리말)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철학과 신학의 허상

― 목회자로서 살펴 본 현대 사상 ―

머리말

1994년 11월 11일 이 근 호 목사

환상은 뚫어져야 하고 깨어져야 한다.

흔히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반대편에 포진해 있는 과학이나 경험이라는 것도 전부 인간들의 신화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이래나 저래나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인데 거기에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일생을 소모하는 잘못을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미신이든 합리적 사고이든 아니면 성스러운 영적 인품이든 그 바닥에는 탐욕이라는 굵은 뿌리가 단단한 타레를 틀고 있다.

그래서 경건된 신앙심이나 과학적 사고 조차 모두 그 돌뿌리가 바깥으로 잠시 삐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욕심 체제 안에서 모든 인간이 이미 죽었다고 선언했다.(약 1:15)

그런데 이러한 탐욕을 도리어 정당화하고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건설하려는 시도가 곧 인간들의 삶의 행위들이다. 그런데 이 신화가 일거에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심코 시치미만 띠고 있다. 쉴새없이 하늘을 향해 조롱하고 싶어한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한없이 조롱받는 이유는 그 분이 눈치없이 인간들의 적나라한 죄들을 모두 들추어내었기 때문이다. 그 죄값으로 세상을 불바다시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그 가운데 구원될 자는 오직 자신의 긍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이 우주적 약속은 창세 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었으며 후대에 와서 변동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차질없이 이 일을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그런데 이런 사태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기 주체성과 자아성 확립에만 전력을 다한다. 자기만의 왕국, 자기만의 영역을 조금씩이라도 영글어 내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설치고 다닌다. 그러한 작업의 밑사상이 바로 철학이요 신학이요 과학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리시는 확정된 심판과 저주 앞에서 과학과 철학과 신학과 그 모든 인간 활동이 무슨 방어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구한 교회 역사와 전통이 무슨 효과를 줄 수 있단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의 자기 가리움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늘 변신시키면서 살아간다. 속임 행위는 아예 천성으로 자리잡아 버릇이 되었다. 이런 작은 일상적 속임수들이 모여 유구한 세월 안에서 거창한 대 문명과 대 문화를 엮어낸 것이다. 자신들의 용기가 치하되고 자연을 상대로 벌렸던 승리에 대해서 자찬하고 있다.

“아, 하면 된다”,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구나!” 라는 구호를 흘러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인간들은 무척 쇠약해져 있고 심신이 지쳐있다. 왜냐하면 내부의 탐욕이 인간의 용맹성보다 더 자라나 있기 때문이다. 맞상대하고 싶은 거대한 우주보다 못지 않고 더 거대한 세계가 욕심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더 큰 무게의 허무와 무의미의 공포를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 인간들이 뽐내는 지혜나 지식으로도 이 탐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죄는 인간보다 컸다!

여기 소개되는 책들은, 같은 운명에 처한 동료들에 대해 동포애를 발휘하여 힘을 실어주기 위한 책들이다. 위로와 용기외 희망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재창조를 독려하는 저작들이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힘들을 어떻게 하면 희망을 성사시키는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던지는 책들이다. 어쨋던 인류는 살아남아야 되지 않느냐를 절규로서 쓰여진 책들이다. 조직의 힘, 가문의 힘, 그리고 대 우주를 지탱하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인간이 이 우주에서 필히 살아남아야 함을 역설하는 책이다.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춤추고 있는 것은 그 힘에 의지해서 인간들은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바로 이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것이다. 절대적 구원은 오직 그 힘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종교인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거에는 철학과 기성 종교의 교인들이었으나 오늘날에서 있어 과학이야말로 최종적으로 공인받은 보편적 '진리 종교'로 부상했다. 과학은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해결하는 유일한 보편적 종교이다. 이 과학이 옛 신화 정신과 만났다. 그래서 종교가 되었다. 과학이 아닌 것을 믿는 자는 이 시대의 이단들이다. 인간의 양심이나 의지조차도 이 교리 밑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 과학이 현 시대의 규범과 법을 지탱해 주는 기초가 되었다. 이 과학에 사람들은 희망을 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헌납한다. 잘난채 하던 철학도, 진리인채 하며 사변을 논하던 허세마저 과학앞에 허물어지고 되레 과학 쪽으로 곁눈질해가며 치사스러운 호응을 구걸하기에 이른다. 과학적 사고가 모든 사고를 다스리는 이치로 행사하는데 있어 철학과 여타의 학문들이 이제 스스로 발벗고 나선다. 온통 힘으로 가득찬 세계가 참 세계임을 알릴 참이다. 이런 행위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찾고자 한다. 자기 존재의 타당성에 발견하고자 한다.

이들의 노리개가 곧 학문들이다. 학문 안에서 한평생 놀고 싶어하는 자들이 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지 못한다. 주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참담한 죄인인가를 모르고 있다. 동시에 세상도 모른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똑같은 것으로 본다. 존재와 비존재가 상호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원에서는 모든 점이 시작인 동시에 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대립적 인식을 불식하는 것이 최고의 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 가운데 진리 추구에 나서면 이런 결과도 도달될 뿐이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비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치와 진리의 기준으로서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든, 문제 제기를 하든 사물 다루는 식으로 타인과 사회를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 한평생 이런 식으로 살다보니 자기의 죄를 근원적으로 알 수 있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4-59)

왜 인간들은 천기를 알면서도 시대는 분간치 못하게 될까?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세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심판당하게 됨을 알지 못하는 낯선 자아상을 가지고 예수님의 존재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무심하게 예수님 앞에서 철수해 가버린다. 그들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고작 힘없는 십자가 사건으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으로 구축된 인간 세상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조금씩이나마 힘들을 지닌 인간 공동체 품 속이 더 그리운 법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인간상은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6-48)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거지 소경 바디매오와 같은 신세임을 눈치 채야한다. 학문이라는 노리개를 끈질지게 고수할 입장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자립심과 독립심, 그것은 악마로부터 들어온 심성이다.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모든 행위는 자립과 독립을 지탱할 힘에 관한 생산과 소비 행위들이다. 그러다 보니 힘이 되지 못하는 십자가 복음을 이들은 돌아볼 마음조차 품지 않는다. 이들이 왜 십자가를 싫어할까? 그것은 자기 자신들이 십자가에 의해 부정당하고 난자 당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구미에 맞는 사이비 복음을 구상해 낸다.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부축여주는 것들이다. 허구로 가득찬 세계에서 또다시 허구적 복음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흔적과 발자국을 찬양하는 거짓 신학을 다량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철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세계 구역 모퉁이 신학이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간판 걸어놓고 힘의 중심에서 흘려나오는 지푸라기라고 맛보고자 한다.

죄와 악마는 신학마저 자기 선전물로 삼아버린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죄악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최고의 지성과 윤리성과 신비성을 자랑하는 이들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학과 철학이 힘의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아부하고 그렇게해서 삶의 자리를 보장받고자 하는 그 추태가 낱낱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 본 책이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들이다. 모두들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52권의 책들이다. 같이 두어도 서로 섞이지 않을 정도로 독특성을 유지한다. 저자들 나름대로 자기 목숨과도 안 바꿀 정도로 한평생 동안 매달려 이룩해 놓은 역작들이다. 세상이 다 인정하고 역사가 공인해 줄 영광의 면류관과 같은 것들이다. 한 마디, 한 문장마다 세상을 향해 내뱉을 때, 세상은 어두움의 동굴에서 부활한다. 지혜의 사람들로 깨어난다.

이들 저자들은 거대한 세상과 맞서 싸워 조정할 투우사와 같다. 세상의 병든 곳을 찾아서 정확하게 지혜의 창을 꽂는다. 자신들이 아껴 둔 지혜들을 터뜨려서 세계의 진보와 발전들 이룩해 내고자 한다. 그러나 단 하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몽매한다. 신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지혜의 이름으로,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의 이름으로, 운명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걸고 이들은 스스로 인류의 미래가 되고자 한다. 일반 독자들은 위대한 학자들의 통찰력에 경배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찬란한 기독교 서구 문화라는 것이 지금도 무심코 들에 핀 꽃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이들에게는 어두운 진리에 불과하다(마 6:30). 참 성도라면 도리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 5- 6)

첨부파일 : 머리말목회자로서살펴본현대사상.hwp (32.0K), Down:38

관리자(IP:124.♡.84.82)

09-02-16 19:56

철학과 신학의 허상
― 목회자로서 살펴 본 현대 사상 ―

머리말

1994년 11월 11일 이 근 호 목사

환상은 뚫어져야 하고 깨어져야 한다.

흔히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반대편에 포진해 있는 과학이나 경험이라는 것도 전부 인간들의 신화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이래나 저래나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인데 거기에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일생을 소모하는 잘못을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미신이든 합리적 사고이든 아니면 성스러운 영적 인품이든 그 바닥에는 탐욕이라는 굵은 뿌리가 단단한 타레를 틀고 있다.

그래서 경건된 신앙심이나 과학적 사고 조차 모두 그 돌뿌리가 바깥으로 잠시 삐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욕심 체제 안에서 모든 인간이 이미 죽었다고 선언했다.(약 1:15)

그런데 이러한 탐욕을 도리어 정당화하고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건설하려는 시도가 곧 인간들의 삶의 행위들이다. 그런데 이 신화가 일거에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심코 시치미만 띠고 있다. 쉴새없이 하늘을 향해 조롱하고 싶어한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한없이 조롱받는 이유는 그 분이 눈치없이 인간들의 적나라한 죄들을 모두 들추어내었기 때문이다. 그 죄값으로 세상을 불바다시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그 가운데 구원될 자는 오직 자신의 긍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이 우주적 약속은 창세 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었으며 후대에 와서 변동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차질없이 이 일을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그런데 이런 사태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기 주체성과 자아성 확립에만 전력을 다한다. 자기만의 왕국, 자기만의 영역을 조금씩이라도 영글어 내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설치고 다닌다. 그러한 작업의 밑사상이 바로 철학이요 신학이요 과학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리시는 확정된 심판과 저주 앞에서 과학과 철학과 신학과 그 모든 인간 활동이 무슨 방어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구한 교회 역사와 전통이 무슨 효과를 줄 수 있단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의 자기 가리움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늘 변신시키면서 살아간다. 속임 행위는 아예 천성으로 자리잡아 버릇이 되었다. 이런 작은 일상적 속임수들이 모여 유구한 세월 안에서 거창한 대 문명과 대 문화를 엮어낸 것이다. 자신들의 용기가 치하되고 자연을 상대로 벌렸던 승리에 대해서 자찬하고 있다.

“아, 하면 된다”,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구나!” 라는 구호를 흘러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인간들은 무척 쇠약해져 있고 심신이 지쳐있다. 왜냐하면 내부의 탐욕이 인간의 용맹성보다 더 자라나 있기 때문이다. 맞상대하고 싶은 거대한 우주보다 못지 않고 더 거대한 세계가 욕심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더 큰 무게의 허무와 무의미의 공포를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 인간들이 뽐내는 지혜나 지식으로도 이 탐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죄는 인간보다 컸다!

여기 소개되는 책들은, 같은 운명에 처한 동료들에 대해 동포애를 발휘하여 힘을 실어주기 위한 책들이다. 위로와 용기외 희망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재창조를 독려하는 저작들이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힘들을 어떻게 하면 희망을 성사시키는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던지는 책들이다. 어쨋던 인류는 살아남아야 되지 않느냐를 절규로서 쓰여진 책들이다. 조직의 힘, 가문의 힘, 그리고 대 우주를 지탱하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인간이 이 우주에서 필히 살아남아야 함을 역설하는 책이다.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춤추고 있는 것은 그 힘에 의지해서 인간들은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바로 이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것이다. 절대적 구원은 오직 그 힘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종교인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거에는 철학과 기성 종교의 교인들이었으나 오늘날에서 있어 과학이야말로 최종적으로 공인받은 보편적 '진리 종교'로 부상했다. 과학은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해결하는 유일한 보편적 종교이다. 이 과학이 옛 신화 정신과 만났다. 그래서 종교가 되었다. 과학이 아닌 것을 믿는 자는 이 시대의 이단들이다. 인간의 양심이나 의지조차도 이 교리 밑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 과학이 현 시대의 규범과 법을 지탱해 주는 기초가 되었다. 이 과학에 사람들은 희망을 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헌납한다. 잘난채 하던 철학도, 진리인채 하며 사변을 논하던 허세마저 과학앞에 허물어지고 되레 과학 쪽으로 곁눈질해가며 치사스러운 호응을 구걸하기에 이른다. 과학적 사고가 모든 사고를 다스리는 이치로 행사하는데 있어 철학과 여타의 학문들이 이제 스스로 발벗고 나선다. 온통 힘으로 가득찬 세계가 참 세계임을 알릴 참이다. 이런 행위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찾고자 한다. 자기 존재의 타당성에 발견하고자 한다.

이들의 노리개가 곧 학문들이다. 학문 안에서 한평생 놀고 싶어하는 자들이 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지 못한다. 주님의 시선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참담한 죄인인가를 모르고 있다. 동시에 세상도 모른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똑같은 것으로 본다. 존재와 비존재가 상호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원에서는 모든 점이 시작인 동시에 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대립적 인식을 불식하는 것이 최고의 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 가운데 진리 추구에 나서면 이런 결과도 도달될 뿐이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비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치와 진리의 기준으로서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든, 문제 제기를 하든 사물 다루는 식으로 타인과 사회를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 한평생 이런 식으로 살다보니 자기의 죄를 근원적으로 알 수 있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4-59)

왜 인간들은 천기를 알면서도 시대는 분간치 못하게 될까?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세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심판당하게 됨을 알지 못하는 낯선 자아상을 가지고 예수님의 존재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무심하게 예수님 앞에서 철수해 가버린다. 그들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고작 힘없는 십자가 사건으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으로 구축된 인간 세상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조금씩이나마 힘들을 지닌 인간 공동체 품 속이 더 그리운 법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인간상은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6-48)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거지 소경 바디매오와 같은 신세임을 눈치 채야한다. 학문이라는 노리개를 끈질지게 고수할 입장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자립심과 독립심, 그것은 악마로부터 들어온 심성이다.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모든 행위는 자립과 독립을 지탱할 힘에 관한 생산과 소비 행위들이다. 그러다 보니 힘이 되지 못하는 십자가 복음을 이들은 돌아볼 마음조차 품지 않는다. 이들이 왜 십자가를 싫어할까? 그것은 자기 자신들이 십자가에 의해 부정당하고 난자 당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구미에 맞는 사이비 복음을 구상해 낸다.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부축여주는 것들이다. 허구로 가득찬 세계에서 또다시 허구적 복음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흔적과 발자국을 찬양하는 거짓 신학을 다량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철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세계 구역 모퉁이 신학이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간판 걸어놓고 힘의 중심에서 흘려나오는 지푸라기라고 맛보고자 한다.

죄와 악마는 신학마저 자기 선전물로 삼아버린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죄악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최고의 지성과 윤리성과 신비성을 자랑하는 이들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학과 철학이 힘의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아부하고 그렇게해서 삶의 자리를 보장받고자 하는 그 추태가 낱낱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 본 책이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들이다. 모두들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52권의 책들이다. 같이 두어도 서로 섞이지 않을 정도로 독특성을 유지한다. 저자들 나름대로 자기 목숨과도 안 바꿀 정도로 한평생 동안 매달려 이룩해 놓은 역작들이다. 세상이 다 인정하고 역사가 공인해 줄 영광의 면류관과 같은 것들이다. 한 마디, 한 문장마다 세상을 향해 내뱉을 때, 세상은 어두움의 동굴에서 부활한다. 지혜의 사람들로 깨어난다.

이들 저자들은 거대한 세상과 맞서 싸워 조정할 투우사와 같다. 세상의 병든 곳을 찾아서 정확하게 지혜의 창을 꽂는다. 자신들이 아껴 둔 지혜들을 터뜨려서 세계의 진보와 발전들 이룩해 내고자 한다. 그러나 단 하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몽매한다. 신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지혜의 이름으로,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의 이름으로, 운명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걸고 이들은 스스로 인류의 미래가 되고자 한다. 일반 독자들은 위대한 학자들의 통찰력에 경배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찬란한 기독교 서구 문화라는 것이 지금도 무심코 들에 핀 꽃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이들에게는 어두운 진리에 불과하다(마 6:30). 참 성도라면 도리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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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경신학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를 읽고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40 성경신학 언어경합담적 구조로 본 삼손의 수수께끼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39 성경신학 ex) 철학과 신학의 허상 (우리교회목록) (완성) [철학] 최고관리자 06-11-27
38 성경신학 ex) 성경신학 2 (우리교회목록) (완성)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11-27
37 성경신학 ex) 성경신학 1 (우리교회목록) (완성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6-11-27
36 성경신학 ex) 성경신학의 세계 (1)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11-27
35 성경신학 ex)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목차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34 성경신학 ex)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2 목차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33 성경신학 ex)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1 목차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32 성경신학 하나님 약속의 형성단계에 대하여 역대하 최고관리자 06-11-27
31 성경신학 성경신학적으로 본 예정론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30 성경신학 유대 묵시문학에 대하여 역대하 최고관리자 06-11-27
29 성경신학 조직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신앙인의 자세 - 최고관리자 06-11-27
28 성경신학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역대하 최고관리자 06-11-2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