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경합담적 구조로 본 삼손의 수수께끼
언어경합담적 구조로 본 삼손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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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경합담적 구조로 본 삼손의 수수께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세계(1) p 336
언어를 하나의 기호로 보는 것은 인간사회의 가치와 사상들이 특정 기호들에 의해 기성품화 되고 가치와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약속된 언어들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꾸려 나갈려면 갖가지 가치기호들을 적절하게 배열하여 체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도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기호에 대한 개념으로 저자의 뜻을 이해한다.
저자가 글을 남길 때는 어떤 의도가 있다. 그 의도는 이미 독자의 속성을 나름대로 간파한 이후이다. 글을 남긴다는 것은 공격성을 띤 시위요 몸짓이다. 독자가 자신의 글을 통해 사상적으로 변화되기를 요구한다. 저자는 독자의 입장을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글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대비되도록 자신의 견해를 밝혀본다. 여기서 독자의 세계와 저자의 세계가 갈등을 일으킨다. 이 심적인 투쟁은 독자로 하여금 저자가 의도한 방향으로의 '변화'와 '발전'을 기약하는 투쟁이다. 이 투쟁을 급진적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수수께끼의 형식을 도입하는데 그 자체로서 이미 언어세계의 혼란을 초래한다. 언어체계에 대한 공격은 기존의 사상체계에 대한 응징이자 도발행위이다. 수수께끼를 사용하는 측은 반대자가 보기에는 반사회적 저의를 품고 있다. 비논리성을 가지고 기존의 논리를 공박함으로 기존 사회는 재형성된 정신세계를 구축하도록 촉구받는다.
언어경험담이란, 기호전달자와 기호수신자 서로가 공히 이해하는 기존의 '기호'를 사용하면서도 기존의 개념체제로서는 도저히 해독이 되지 않도록 조처함으로써 열등자와 우월자를 가려 그 둘 사이를 경합하고 비교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역설적 진행의 목적은 수신자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시켜 자기 세계를 포기하고 거기서 벗어나도록 강요하는 의도가 있다.
이 주장을 약호 표현하면, 우선 서로 가치가 대립되는 두 대상을 A, B라 하자. 또 i는 열등을, s는 우월을 나타내고, f는 어떤 투입된 사건을 말한다면 경합담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사건 진행에 따라 더 나갈 수도 있다.
때로는 역전 재역전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전달자의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더욱더 의미심장해지고, 반대로 수신자는 자신의 세계가 여러 각도로 판단과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적실해지는 것이다. 만약 그 f가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수수께끼가 이야기 전체 핵심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중요성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사사기 13장 ~16장에 삼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전체 이야기 중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요약해 보면,
(1)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2)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3) 이적이 아니고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 부모
(4) 할례받지 않은 원수의 여인에게 접근하는 삼손
(5) 여자의 민족을 칠 수 있는 구실을 삼기 위해 수수께끼를 던지는 삼손
(6)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나실인의 비밀이 발각되고 계획은 실패로 끝남
(7) 개인적인 정분으로 인해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삼손
(8)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되어 이방여인으로 인해 적들에게 체포됨
(9) 최후로 자기 몸을 드림으로 나실인의 사명을 다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삼손
이런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나실인'이다. '나실인'이 현 이스라엘 상황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나실인'은 모세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다. 민수기 6장에 나실인에 관한 사항이 나와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거룩한 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에 대한 사항이다. 그래서 일반인으로서 거룩한 자의 몸가짐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 나실인의 사명이다. 그러한 이 나실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 어떤 역할과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대해 민수기에서는 제사 제물의 한 몫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즉 서원을 무사히 마친 나실인은 그동안 깎지 않고 자라난 머리털을 거룩한 화목제물의 일부로서 참여했다 (민수기 6:18). 화목제물에 대한 인간의 신체이 일부가 참여되었다는 것은 나실인의 거룩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그 거룩이 유지되는 한 이 세상의 왕으로 행세할 수 있는 나라이며 타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이 모세언약을 기반으로 한 이스라엘의 본질이다.
사사기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모세언약에 의하면 원만한 축복의 상황이 못된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타민족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은 모세언약을 기반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각성을 기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기에 나타난 삼손 이야기는 전달자인 하나남이 수신자인 이스라엘의 정신자세에 대한 경고와 변화를 촉구하는 것에 취지를 두고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의 지배자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모세언약에 근거하여 합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블레셋이 모세언약이 구현하고 있는 당사자인가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사기의 전달자는 이스라엘의 변신을 기대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자세로 살아왔기에 지배권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다스리는 입장이 되고자 하면 반드시 준수해야 될 규칙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 규칙을 위반하였을 때는 언제든지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 이스라엘이 실패의 원인을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모세언약대에 의하면 과연 블레셋은 언제까지고 이 가나안 땅의 지배자로서 합당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행은 다음과 같이 된다.
사상의 우등자이신 하나님 (최고 지배권자): A
사상의 열등자이신 이스라엘 (여호와의 왕 되심을 보여 주기 위해 선택된 민족): B
이스라엘에 대치해서 또 다른 차원에서의 사상의 열등자인 블레셋: C
여기서 사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언어경합담적'인 수수께끼가 등장함으로써 삼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표현된다.
수수께끼 사건만을 중심으로 하면,
삼손 이야기 전체를 표현하면,
과 같다.
수수께끼로 인해서 열등한 자와 우월한 자의 실체가 더욱 부각되므로
수수께끼를 핵심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새로이 밝혀지는 양상은 주도권이 수수께끼를 받는 측에서 수수께끼 자체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 흐름이 수수께끼가 품고 있는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수수께끼에 어떤 힘이 있어 그 힘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식이다.
그러면 여기서 수수께끼가 지닌 전체 이야기 속에서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
수수께끼의 내용을 보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수수께끼는 그 자체로서 解讀(해독)을 막는다. 기존의 논리체계에 장애를 유발시키려고 한다. 논리의 장애란 그들 세계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발생된다. 수수께끼를 해독할 수 있는 체험세계란 수수께끼 제공자만이 경험한 세계 속에 잠재되어 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의한 단독체험을 가졌다. 그것은 삼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삼손은 손에 아무 것도 없이 사자를 찢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인 사자의 사체에서 꿀을 발견하는 희한한 일을 목격했다. 그는 이 두 가지 일을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삼손만 아는 비밀이요 경험의 세계이다. 삼손은 이 경험을 유발시킨 '여호와의 신'의 두 가지 면에서 새로웠다. 하나는 '강함'이고 또 하나는 '단 것'이다. '강함'과 '단 것'은 둘 다 모세언약에서 제시한 축복의 한 형태이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께서 나실인인 자기에게 이 희망적인 상황을 보여줬다고 여겼다. 따라서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모세언약의 축복의 상태로 회귀하는 이스라엘 구원의 중심이 된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가나안 땅의 상태가 바로 자기가 쳐죽인 사자의 시체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강한 적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되는 것이다. 삼손은 거룩한 나실인으로서 구원의 중심이 된 시점에서 자신의 임무가 확정되었다고 여겼다. 그것은 적보다 더 강한 힘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땅에서 발견되는 꿀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힘이 작용하는 현장에서만 찾을 수 있는 꿀이 나실인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충분히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제 삼손은 공격에 나선다. 삼손은 블레셋 중에서 선택한 한 여인을 미끼로 블레셋 전체를 골탕 먹일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특히 수수께끼에 구원의 암호가 들어가 있다는 가설이 성립하는 것은 이 수수께끼에 의해 상과 징벌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원이란 적에 대한 징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삼손이 블레셋에 징벌을 예고하는 수수께끼를 던졌다는 것은 구원의 첫 작업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징벌의 정당성을 수수께끼로 대신하고 있다. 삼손은 단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이 징벌을 명했다는 소명에 기인한다. 삼손은 자신에게 나타난 '여호와 신'에 의한 기적을 그의 구원행각의 시발점으로 삼아 그대로 수수께끼에 옮겨놓고 있다. 수수께끼를 못풀었다는 벌로 블레셋을 징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수께끼 안에는 구원의 정보가 비치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에는 두 개의 난관이 놓여 있다. '삼키는 주체'와 '삼킴을 당하는 것'이 또 하나의 삼키는 주체로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삼키고자 하는 자에게 삼킴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쪽에서 계속해서 삼키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강함'과 '음식의 맛'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을 지어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연관성은 첫 번째 법칙의 조건도 만족하는 것이어야 한다.
수수께끼를 풀려면 삼손의 소명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수수께끼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생물의 생존에 관한 신비가 아니다. 삼손이 완력으로 인해 발생된 비자연적 사건이기에 그야말로 일회적인 '사건'이다. '삼키는 주체' 안에 또 하나의 '삼키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등장이나, '강함'과 '맛'의 연결은 누가 무엇을 행했느냐 에만 해결책이 존재한다. 문제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는 필히 어떤 인격이 개입해야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특별한 인격을 배제하고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니 풀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이 수수께끼에 어떤 인격을 등장시킨다. 삼손의 아내를 개입시켜 결국 문제를 풀 게 되는데 그들이 사용한 인격은 삼손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혈통인 삼손의 처이다. 삼손의 처는 삼손의 인격 속에 흡수되는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블레셋 민족에 속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수수께끼의 풀이과정에 어떤 성격의 인물이 개입되느냐에 따라 그 수수께끼에 의한 징벌과 구원의 성사기능이 결정된다. 그래서 수수께끼의 주도권이 블레셋에 있고 불행히도 삼손은 실패한다. 삼손은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라고 말해 버린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수수께끼의 실상도 아니요 해답도 아니다. 이 수수께끼가 적들에게 논리적 장애를 일으키지 못하고 보편적 자연현상의 하나로 전락하고 만 것은 삼손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을 힘으로 정복하고 지배할 것 같았지만 막상 그는 그의 연약한 여자 하나도 지배하지 못했다.
이 때부터 이 수수께끼는 블레셋 정복에 관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오히려 정복당한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수수께끼가 된다. 왜 이스라엘은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비밀이 담긴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통해서 삼손은 우둔한 자가 되고 블레셋은 현명한 자가 됨을 삼손 이야기는 계속해서 보여준다. 삼손의 우둔함은 힘을 힘으로 맞서려는 우둔함이다. 아직도 수수께끼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이스라엘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그 수수께끼의 실체가 보여진다. 모세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방여인은 사랑하면서도 여호와를 사랑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블레셋을 사자에 비유하고, 나실인은 삼손 자신에게, 그리고 꿀은 이스라엘에 비유하여 힘으로 블레셋을 꺾어 버린다는 발상에 잘못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며 이 수수께끼는 어디에 비유하는가?
그 뒤 삼손은 힘의 근원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된다. 힘을 의지하면서도 힘을 두려워하는 블레셋 민족들에 의해 삼손의 힘은 무장해제 당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요원해지는가? 힘이 없는데도 구원이 가능한가?
애초부터 삼손이 제시한 수수께끼는 모세언약을 근거로 한 수수께끼였다. 나실인으로의 서원의 완성은 곧 그의 머리카락이 잘릴 때이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화목제물에 합류되어 드려질 때에 이스라엘은 거룩이 유지되고 약속의 땅의 지배권도 존속된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요, 모세언약의 완성이다 (민수기 6:18).
그런데 나실인으로서의 삼손의 머리카락은 거룩에 충실한 증표로서의 머리카락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났다는 수치스러운 표징이다 (사사기 16:20). 이제 나실인이 아니라 보통사람화된 것이다 (사사기 16:17). 그렇다면 죽는 날까지 나실인이 된다는 하나님의 사전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사사기 13: 7)
무엇 때문에 삼손이 실패했는가? 삼손은 거룩과 의로서 구원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했고, 자신의 경험을 힘으로 해석해 블레셋에 수수께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은 적들도 동일하게 가진 사고방식이어서 구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삼손은 나실인의 사명을 힘을 의지해서 수행하려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입장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힘의 근원이 잘려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수수께끼의 두 번째 난관이었던 '힘'과 '축복'의 연관성은 힘이 죽은 자리에서 비로소 얻어진다는 축복을 이해할 때만 극복될 수 있다. 힘쓰는 자가 무너진 마당에서도 선택된 나실인의 효능이 마감되지 않는 이유는 그 수수께끼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나실인의 사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사기 13: 7에 보게 되면 삼손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다. 나실인의 사명의 완수는 그의 머리카락으로 보여준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구원의 머리카락이요, 이스라엘에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거룩으로 인정받는 머리카락이다. 그런데 일찍이 삼손은 머리카락이 힘을 양산하는 머리카락으로만 이해했다. 물론 이점이 수수께끼의 첫 번째 난관의 핵심이기도 했다. 두 번째 난관에 대해서는 삼손 자신도 사고의 변화를 가졌다. 힘이 죽어 없어진 자리에서도 과연 축복이 제공되느냐 하는 점을, 힘만 의지했던 기간에는 도무지 깨닫지 못했던 점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의 한계이기도 하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해야 된다는 논리는 블레셋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고체계이다.
삼손이 체포된 뒤 축복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삼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분량만큼이나 구원의 힘이 증가한다는 수학적 계산을 포기했다. 이미 그는 힘의 세계에서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머리카락은 다시 자랐다. 이것은 나실인이라는 선택이 아직도 자기에게 유효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 머리카락의 유효함은 수수께끼의 어떤 부분을 완결짓는 사명인가? 이는 두말 할 것 없이 두 번째 난관에 대한 해답이다. 축복이란 힘의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죽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제공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지금까지 발휘하지 못하게 가리웠던 장애요소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가!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었다. 이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나실인의 임무가 희생과 죄에 대해서 이겨내면서 길러왔던 그 머리카락을 만백성을 위한 희생제물로 제공하는 것이 모세언약이라면 이제 삼손은 언약대로 그의 운명을 발전시켜야 한다. 자라나는 머리카락은 곧 삼손의 목숨을 백성들을 위해 바치라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이미 그 신호탄은 수수께끼 속에서 비춰주었지만 이제야 삼손은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제 힘과는 상관이 없다. 삼손의 자라는 머리카락의 양은 전에 가졌던 힘의 법칙에 의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힘쓰라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에게 순종하여 장렬하게 죽으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럴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신다는 것을 삼손은 알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에서 '순종'이란 새로운 복과 구원의 원리로 등장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형식적인 제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모세언약의 실상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다 (사무엘상 15:22). 순종이란 '붙여주기로' 되어 있는 종족을 하나님이 친히 나가 싸우는데 제발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방해하지 말라는데서 비롯된다. 그저 이스라엘은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순종'이라는 모세언약의 완성을 삼손의 머리카락이 계속 자라나 나실인으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종결지어야 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스라엘 제사의 본질이요, 첫 유월절 밤의 정신이요, 국가 이스라엘 탄생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가 이 정신이 없었기에 나실인으로서의 삼손이 이 정신을 재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삼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힘주시기를 원한다. 삼손이 죽으면서 쓴 힘으로 인해 죽은 적의 숫자가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 적의 수보다 많다고 한다. 삼손의 '살아있음'과 '죽음'의 가치를 예리하게 비교하면서 성경은 삼손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이 점이 삼손 이야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또 모세언약의 핵심이기도 한다.
'어린양의 희생'이 국가 이스라엘을 탄생시켰고, 그 '희생'은 제사제도로 구체화되어지고 그 제사제도와 연관된 인물인 나실인이 등장하여 결국 이스라엘에 축복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는 '어린양의 희생'이라는 상징이 점차 어떤 '인격'으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 내부에 나실인으로서의 삼손은 영원히 중심이 되어 자리잡아야 하는데 그 나실인의 모습은 장차 하나님 모습임을 언약을 통해 미리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삼손의 수수께끼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 있었다. 삼손의 실수와 실패는 당시 이스라엘 전체의 실수와 실패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었다. 나실인으로서의 삼손의 실수와 회복은 언약이 지닌 두 가지 기능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사회의 죄악을 심판하는 기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의 희생으로 다시 회복시켜주는 기능이 바로 언약의 존재 의의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수수께끼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실패와 하나님의 구원의 정신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한 언어경합담적인 성격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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