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인 종말론
언약적인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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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적인 종말론
1. 들어가는 말
종말론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성경을 대하기 앞서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장래의 일을 앞당겨 알아 대비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이 발동해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기성의 기독교에 관여하
는 어른들이 저지른 고의성 있는 실수의 피해가 의외로 크다는 것을 저는 이 세계에 종사하면서 실감합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종말론이라는 미끼로 청중의 정신을 혼돈시키는 무리들
이 난무합니다. 빨리 목회 성공하고 싶고 기독교계에서 주목을 받고 싶고 그것도 아니면 자기가 하고 있는 개척 교회가 빠른 시간 내에 자립하여 안정권에 들기 위해 일단 사람들을 끌
어 보자는 탐욕의 소산으로 이용된 것이 종말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소위 기독교라는 명함을 지닌 채 짧은 밑천으로 영세적인 출판 사업을 모면하기 위해 증산교나 세기말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일시적으로 자금을 모을 수 있는 책을 펴내다 보니 야사나 연예계의 잡스러운 소식을 실어서 돈벌이 하자는 속물처럼 나온 것이 바로 그런 류이 책들입니다. 예를 들
면 하늘이 열리다, 휴거, 666, 마귀론, 팝계에 나타난 사탄의 전략, 사후의 세계 등 아이들 만화책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책들이 쏟아져 나와 성도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이 이단인 줄도 모르고 시류에 다라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날뛰고 있는가 하면 교인들은 신앙이 아니라 완전히 고상하고 여유 있는 중산층의 정신적 취미 생활로 교회를 왔다갔다
하는 식의 풍조가 점차 번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선교의 접촉점이 된다는 구실 하에 문화 창달에 동원되는 비운을 맞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한 그 일부의 활동
으로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보다 보람있는 여생, 가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교양강좌에 참여하는 식으로 성경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하여
라든지, 비젼있는 인생 구상을 위하여 라는 타이틀 아래 성경 강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개탄해 마지 않는 작태들입니다. 이 모든 비정상적인 풍경은 성경을 너무나도 쉽게
일시적인 감정이나 흥분에 의해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군데 기발한 해석이 생겨나면 그 사상을 전체 성경에 적용시키려는 안일한 태도 때문에 그러합니다. 문자와 문자를
퍼즐 게임 하듯이 끼워 맞추어 보지만 유대교 학자들이 봤으면 실소를 금치 못할 장난들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문자적 연결을 해석하는 것은 유대교 학자들이 형님일 것입니다. 또 어
떤 이들은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해서 하나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실은 마귀지만 본인은 모름)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고 계시 받은 대로 주석을 해 나가
지만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서는 인도의 종교나 불교의 참선을 따라 갈 재간이 있겠습니까? 그 방면에는 그들이 할아버지입니다. 신비주의로 그들을 능가하려는 것은 계룡산 도사들이
웃을 일입니다. 그래서 나온 이단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본인이 여러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1) 제발 성경을 대할 때는 어떤 지적 호기심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코 신기하고 이상한 것, 어떤 기발하고 특출난 것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염두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이 배척 당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2) 성경은 결코 우리가 알고자 하는 물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자기가 직면한 여러 가지 난제와 역경을 극복해 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또 그런 간증 집회를 아주 좋아합니다만 그 유혹과 그 유혹을 수용하는 자신의 마음 속의 충동을 이겨야 합니다. 분명히 이 자리에서 밝혀 두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뜻에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는 제의는 사탄 편에서 제공합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용의가 있는 실존하는 세력입니다. 복음 선포이지
상담의 대상이 아닙니다.
3) 따라서 성경은 항상 하나님 편이지 인간들 편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오늘도 나에게 무슨 좋은 것을 주시려는가 기대하지 마시고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이 나에
게 무슨 책망을 하실 것인가를 기대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7-110
여러분 종말론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까? 성경은 바로 그 종말론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여러분의 오만에 대하여 책망을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은 이렇듯 자신의 죄인 됨과 자신의 부족
함에서 오는 절망과 낙심과 더불어 자신의 종말을 느끼면서 시작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지구의 종말을 알려고 달려들지 마시고 내 자신이 그런 것을 알 자격도 못 되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2. 본 론
종말론의 등장은 현대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 때문에 논의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점재잉들(동서고금을 막론하고)이나 미래학 전공하는 분에게 문의하면 되고,
또 개인적 종말(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원리 강론이나 (통일교 교리책) 심령과학자들에게 물어 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솔로몬 사후에 나타난 선지자들에 의해서 주창되었으며 가장 극심한 때는 막카비 이후 이스라엘의 정체성 마저 붕괴 당한 시기에 나타난
묵시 문학적인 종교 활동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종말론이라고 성경에서 거론하고자 하거든 이 종말론이 유대인들의 종말론이지 결코 이방인들의 말세관하고는 상관없다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외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종말론에 대해서는 컨콜디아사에서 출간한 Jone
Bright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이 좋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 특히 문서 선지자들(성경에 문서로 남겨져 있는 선지자들)은 어떤 종말론을 지니고 있었던가요? 쉽게 말해서 그들은 인류역사를 어떻게 내다 봤던가요?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여호와라는 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민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들었으면 얼마나 조소하겠습니까? 완
전히 자아도취에 빠진 편집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이 점을 자기 민족들에게만 주어지는 고난이라고 자위했습니다마는) 그들
은 그들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는데 그것은 바로 출애굽이라는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증명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 교만한 애굽은 여호와께 완전히 혼났다! 시편106편
보시기 바람) 여호와=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시편 106:47-48) 따라서 종말론이라고 할 때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를 택하여
다수를 복과 저주로 갈라놓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린들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12:1-3) 따라서 이방인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계시 받아 종말의 시기와 상태를
논한다 할지라도 다 헛것이라 말입니다. 관권은 이스라엘이 쥐고 있고 우리(이방인들)가 배워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함께 활동하는 여호와의 약속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
리고성의 라합)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앞에서만 비로소 종말의 바른 의미가 파악되어진 것입니다. 종말이라고 무조건 종말이 아니라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 여하가 역사의 종말을 가름합니다. 그러니까 종말이란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보다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로 이스라엘의 종말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는 매와 몽둥이로 등장한 나라들에 대한 징벌도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 여하
에 따라 종말이 선포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경고
2)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을 시행. 이 시행에 이방인들을 막대기로 사용함
3)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언약 공동체)에 대한 과도한 심판을 가한 것에 심판이 가해짐
4) 최후에 그 와중에 그 상처를 안고 남은 자가 회복됨. 이로써 종말 끝 선지자들은 이러한 절차를 통해 두 가지의 종말론을 제창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종말론이요, 다른 하나는 묵
시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두 가지 바탕과 하나님의 종말 사역의 영역을 소개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종말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냐가에 대한 선지자들의 답
변입니다. 이런 창조가 일어나거든 끝장 난 줄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종말 사역이 진행되는 것이 역사적 차원과 묵시적 차원으로 진행됩니다. (묵시라는 말은 하나님게서 이 다에 역사를 시작하기 이전에 관계 맺었던 존재에 관한 사항에 속한 것을 말합
니다. 역사 이전에 무슨 존재가 있었느냐 하시겟지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이 역사 안에 무슨 사건을 시작했느냐 가 역사의 출발점
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창조 이전에 누가 존재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신관과 충돌됩니다. 하나님이 또는 천사가 언제 존재했는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가 이 땅에 또는 자기
들에게 무슨 사건을 남겼느냐를 통해 하나님과 천사를 파악합니다. 묵시적 차원의 종말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일시적 역사에 대하여 심판을 감행하고 종결짓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비해 역사적 종말이란 역사의 존속에 어떤 존재해야 될 가치와 이유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즉 역사란 결코 불필요한 것도 아니요 공연히 무료한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특히 역사적 종말론에 집착하여 강조한 선지자는 예레미야이고 묵시적 종말론에 강조한 것은 아모스입니다. 역사적 종말을 강조한 예레미야는 특히 다음의 말이 인상에 남게 해 줍
니다. " 저들의 잘못이 곧 나의 잘못입니다." 라는 식의 기도 말입니다.(렘7:14/애가3:1) 그러나 묵시정이 강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범죄한 나를 지면에서 쓸
어 버리리라"(암5:20)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 또는 신약식으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은 결코 희망의 날이 아니라 통곡과 절망의 날입니다.(요엘2:1-3)
그러나 종말론에 있어 제일 중요한 문제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보다 왜 그들이 하나님게 심판 받게 되었나 하는데 있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심판이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스라엘의 역사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하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역사의 의의를 잘 아는 이스라엘은 어느 기준에 의해서 심판의 날, 절망과 저주만의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입
니까.(지금 독자들 중에 이런 옛날 이야기 말고 앞으로 이 지구상에 성경대로 어떤 종류의 재난과 사건이 이어질 것이냐에 조바심이 날 직경인 분이 계십니까? 종말에 나탄날 사건을 안
다고 자기 힘으로 대피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마치 민방위 훈련하듯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어떤 시으로 장식되든지 관계없이 구원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셰퍼드
개가 무섭지만 묶여진 셰퍼드는 소리만 컸지 해가 없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며 무엇인가 하는 점이 궁금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 점입니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도대체 인간과 무슨 약속을 했단 말입니까?
종말이란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약속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생겨난 된 파국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고 또는 언약이 도달하고자 한 그 목표가 완성되어 더 이상 역사가 진행될
이유가 없어져 주어진 것이 종말이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결국 하나가 되는데 그 이유는 언약의 궁극적 완성이 인간들에 대한 심판의 과정이기 때문입니
다. 종말이란 언약이 완성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갖는 요소입니다. 언약이 종말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종말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본질이
밝혀집니다. 언약과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언약에 의하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28:15-68) 반면 순종하면 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28:1-14) 이 모세 언
약의 완성 차원에서 볼 대 과연 여호와의 이 말슴이 곧이 곧대로 시행되었음을 천명할 시기가 주어져야 한다면 그때가 바로 종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말이란 오직 언약이 완전히
실현되는 그 기쁨의 날을 고대하는 자에게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이들이 성도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의 아버지께서 그 나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이런 성도의 관점에서 종말을 생각해 볼 때는 결코 공포의 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세상을 주도해 나아가시는 모습을 통
해서 그분의 일관된 사역에 그저 감탄과 경탄과 영광만 돌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들이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공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언약대
로 하지 말고 좋은 것이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충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비언약적 사고방식이 침입해 있음이 드러납니다. 일종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언약하시기를 최소한 사람은 이 정도는 모여야 되지 않느냐라고 햇다면 작은 수의 성도가 있는 교회가 안절부절하는 것은 옳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약에 포함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언약하시기를 최소한 재산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했다면 가난한 성도들이 안절부절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할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6:8)
만약 성도가 최소한 이 정도는 건강해야 하고 성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나님이 언약했을 때 병을 가진 성도가 안절부절하는 것은 정상입니다만 그러나 그 내용이 언약에 들
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성도에게는 어떤 재앙이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배척과 순교가 없어야 한다고 하나님이 언약하셨다면 예수 이름으로 수난 당하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언약 속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
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우에 계심이라." (벧전4:14/마5:11-12)
하나님의 언약의 하신 내용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수난에 동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16: 24-25)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종말이 이 내용으로 결정된다
면 성도가 통곡하고 가슴을 두드리면서 고대하고 간구해야 하는 것은 건강 달라는 것이나 물질의 축복 달라는 것이나 우리 교회를 큰 교회되게 해 달라는 것이나 방언이나 이적 행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나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롬8:17) 바로 이런 자르이 종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무리들입니
다.
어찌하면 좀 더 편하게 예수 믿고 또 환난 때에 아무런 탈없이 쉽게 넘길 수 있을까? 여기에만 정신을 쏟다보니 "옳지 그 환난의 절차와 진행 상태를 미리 파악해서 빠질 수 있으면 모
면하고 빠져야지!" 그런 비십자가적인 요령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 것도 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벌도 안 받는 방향으로 나가는 묘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찾는 곳
이 종말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곳입니다. "아! 지금 종말 사건이 진행되었구나. 그러면 나는 이 위치에 있으니깐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이런 조치를 취하면 되겠구나."라고 만족
하면서 돌아갑니다. 일종의 종말 상담소를 찾아간 셈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자력으로 환난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 한데는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마태복음 26장에 나오
는 다섯 처녀 이야기를 엄청나게 달리 해석하고 있다. 마치 믿음 또는 성령이라는 기름을 준비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해석이다. 거기에서 말하는
비유는 성도들에게는 미래의 일이 현재에 미리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의 프로그램,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구상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공포로 몰아 넣게 만드는 사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한 그 선언의 의미를 약화시켜 놓고 있습니다.(요한복음19:30/갈라디아서3:10)
이러한 사상의 이면에는 자력으로(자유 의지로)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펠리기우스적 이단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의 보혜사적인 돌보심도 무시됩니다. 결국 자기 잘나서 구원도 받
고 종말의 유혹도 이겨내고 저주로부터도 이겨낸다는 주의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인간 해방운동의 한 일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내용은 너희들이 알아서 이
난리를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참된 교회를 예수님처럼 순교의 길로 인도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기어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3. 결 론
기존의 종말론이 시기와 마지막 때의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으로 빠져 버렸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이야기일까요?
건전한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심이 있어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도식에 집착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유대교적 문자 주의에 빠진 세대주의자들은 종말의 프로그램 짜기
에 바빴고 조직신학자들은 성도가 죽은 후 재림 이전까지 가 있는 곳이 어디냐는 심심풀이 야담 같은 주제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 시기보다
그 본질입니다. 즉 그 나라는 어떤 언약의 법칙 안에서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말은 내가 살아남은 종말로 이해하지 마시고 주님의 언약이 어서 그래로 실현되기를 고대하는 종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골로새서 3:3) 희망이 있다면 죽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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