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적인 목회관을 비난하면서
탐욕적인 목회관을 비난하면서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탐욕적인 목회관을 비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과 정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한 기독교의 모든 가치 체계가 기독교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행위
들 속에서 현실적으로 반드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위태로운 사태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거절당해 왔고 지금도
그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정신으로 목회 해야 된다는 원칙론이다.
잘 해야 된다. 이왕이면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공할 바에는 더 크게 성공해야 한다라는 주장들이 과연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진짜 잘 한 짓이며 정말 성공적인 사례이며 정말 더 크게 성공한 모범적인 일인지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자.
창세 이후로 다수의 여론은 항상 진리 편이기보다는 진리를 거스르는 가치를 지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근대에 와서 도입된
소위 민주적 의사 결정 방법은 이러한 속성을 적법화 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계시에 귀를
귀울리기 보다는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서 상대방 의견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리의 의견이 바로 진리가 된다
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진리를 창출하는데 온 신경을 다 모으고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러한 행위를 기독교라는 세게 밖에서나 볼 수 있는 세속적 정치 풍토로 돌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제 노회하면서 진리 찾기에 불같은 사명을 가지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노회나 총회하면서
지금보다도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에 접근해 보고자 기존의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혁을 위한 진리 탐구에 신경을 썼
던가? 오히려 현재의 흐르는 여론의 줄기를 찾아 그것을 자기 실세로 전환시켜 보자는 노력이 공공연하고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보다 많은 세력을 지닌 자가 돋보이는 대우를 받는 것도 이때이다.
여기서 심각한 기독교적 가치 체계의 붕괴가 일어난다. 기독교의 가치는 복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가치 운운을
논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복음에 대하여 헌신적인 자세로 관심을 다 쏟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밋밋한 관심만 보이
고 복음과 상관없는 정치에 관심을 더 가진다면 아무리 복음답게, 진리답게, 주님 보시기에 옳은 방향으로, 라는 구호를 외쳐
도 현실을 무시한 공연한 짓거리로 쏘아붙이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동안 보다 현실적으로라는 생각들로 인하여 보
다 복음 적이라는 주장들이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왔던가? 복음을 몰라도 진리를 몰라도 목회나 교회 정치를 잘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에 참된 복음을 외치는 자를 상대적으로 정치적 순교 당하
는 비운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분노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자들이 예수님의 생각을
배격하고 무슨 증인이 된다 말인가?
이상의 주장에서 드러난 것 같이 복음 그 자체가 교회 정치와 반대 위치에 꼭 놓여져서 저 쪽을 정죄하는 기능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복음이 목회 전반적인 면에서 유입되어지는 것을 목회자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적인 사상이 교회 행정과 정치에 깊이 관여해도 과연 일반 교인들이나 대중들이 상식 선에서 기대하는 그 목회 성공이 현실
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대하여 목회자 자신들이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위 현실감과 대중의 다수 여론은 믿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주님의 방법은 도저히 신뢰감이 생겨나지 않는데 이유가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근거
는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의 논문을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목회자들이 선호하는 내용들은 행정 기술과 통치술의 비법
과 사람 다루는 기능에 있다. 물론 군중과 인간 심리를 충분히 연구한 토대 위에 나온 것에 빨리 관심 있는 것도 그 이유이
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식의 목회가 마귀가 목회 하는 것과 꼭 일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마 4:1-4, 16:21-25, 눅 6:20-26, 요 6:60-65, 요일 2:16 참조)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문제는 과연 복음이 무엇
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복음이라 하는가? 복음을 알려면 성급하게 신약 성경으로 곧장 달려가서는 안된다. 우선 구약 성경 전체를 일
목요연하게 흐르는 그 사상에 접해야 한다. 예수님도 구약을 완성하려 오신 것이지 구약에 없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시지 않으
셨다. 모든 개념 형성과 가치는 이미 구약에서 문제 제기가 되어 있고 그 틀이 잡혀 있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는 인간들의
무능과 죄악으로 하지 못한 것뿐이다. 신약 때 와서 예수님이 인간이 못 한 것을 다 이루어 내심으로 복이 믿는 자에게 임하
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일관된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가 6:8에 요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 구절
을 쉽게 풀이하여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아 여호와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는
가?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같이 사랑을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길밖에 무엇이 다 있겠는가?'
이러한 선지자의 사상은 그대로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을 통하여 이어짐이 드러나고 그 사상은 사도 바울과 그리고 마땅히 오
늘날 한국 교회에도 이어져야 하지 않는가? 무엇이 복음인가? 복음을 어떤 식으로 곡해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서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목
회 하는데 왜 그리 무수한 탐욕과 정욕들을 정당화하면서 개입시켜 주려고 애쓰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 목회자가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가? 복음이란 아무에게나 기쁜 소식이 아니다. 오직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
이며 그야말로 정의를 실천하고 싶고 한결같이 사랑을 행하고 싶지만 그리고 조심스레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
었지만 타고난 죄악 때문에 못하다가 그리스도의 영이 오심으로 이제야 제대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된다. 따라서 복음은 결코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정신을 대체하거나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사 비로소 본격적으로 거론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상이 어디로 쏠려 있느냐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목회 하신다면 과연 교회 크기가 문제가 될까? 예수님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교회에
담아 두는 것이다. 정의와 사랑과 겸손을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대로 복음을 이해한 목회자들도 자연 예수님을 본받아
신경을 바로 거기에도 쏟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교인들은 교회가 크면 자기가 투자한(?) 교회를 너무 우상시하고 교회 조직
자체를 숭배하는 탐욕이 생기기 마련이니 목회자들은 그런 교인들의 잘못된 경향을 생각해서 교회가 너무 비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목회자 자신들이 교회 욕심은 욕심이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주장하면
서 오히려 욕심을 부축이고 있으니 그 정신 상태는 필시 복음과 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속 정치술과 행정술에서 나온
것이기에 사탄의 술책과 동일하다. 또 예를 들면 교인들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신앙적 삶보다는 종교적 신비 체험에 약해서
빠지기 쉽다. 이미 그 사실을 교회 역사를 통해 공부한 목회자들은 그런 유혹을 사전에 방지하고서라도 예배당 내의 장식에서
종교적인 감각에 자극이 되는 것은 피해야 되는데 사실상 그 반대로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종교적인 자극을 주어 흥분을 유발
시키려고 하니 이 또한 어찌 사탄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은 성령에 의해 구속 사
역에 필요한 부분으로 절제된 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하나 하나가 간증인 동시에 제대로 된 간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성경 이외의 간증 집회를 많이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계시 전달 방편으로 등장되어 있는 이 현실이
과연 정상적인 목회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잘못된 목회관의 등장 배후에는 목회자 자신의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들에 이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할 의무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았기에
누가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요, 하나
님의 나라를 확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세계 확장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는 그런 사업 식
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인간의 세상적 탐욕을 정죄하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도 승리
와 성공과 물질적 축복과 배부름과 세상 적인 여유와 항상 건강함을 보장하는 수가 태반이며 심지어 자기의 세상 적인 성공
사례를 복음의 성공 사례로 대치하고 있는데 어찌 이것이 복음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짜 복음이며 구원과 상관없는 가
짜 예수를 전하는 것이 된다. 전도라고 했을 때 전달에 강조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진리)의 내용에 강조를 두고 하는 말
이다. 결코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도 도(진리)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전달될 리도 없고 전달되어서도 안된다. 성전은 바로 인간
개개인을 의미한다. 가장 사업 식과 관계없는 것이 복음이고 가장 타격을 받고 왜곡되기 쉽게 전달되는 것도 구원의 복음이
다.
그러므로 상식 선으로 쉽게 생각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며 자기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천국 이외
에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만 알려지게 되어 있는 것이 복음이다.
불신으로 시작하여 불신으로 목회 하면 자연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 그 여파는 목회자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짜 복음을 진짜로 받아 드리고 천국 갈 것이라는 교인들에게는 더욱 심각하다. 어느 복음에 세상
의 부귀영화와 천국을 동시에 주어진다고 되어 있는가? 교회의 크기(흔히 숫적 성장이라고 함)와 천국 건설과 동일하지 않다
고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에는 자신부터 먼저 탐욕적 목회관을 떨쳐 버려야 한다. 교인들에게 본을 깨치는
목회자가 되자!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