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 사건과 여호와 전쟁
홍해 사건과 여호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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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사건과 여호와 전쟁
이스라엘이 조성되려고 하는 과정 중 최종 사건은 10번째 재앙인 장자 멸절 사건이며 이 난리 통에서 유월절이라는 의식에서 이스라엘 국가는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로 결성이 되고 난 뒤의 최초 사건은 홍해 전쟁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은 전쟁으로부터 출발된다. 물론 이스라엘 사명의 마무리 전쟁으로 장식된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다. 이기고 또 이겨 최종 승리자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이스라엘은 약속된 자리에 앉게 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하자. 물론 이스라엘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명칭이다. 그리고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을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 성취의 차원에서 '군대'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이 꼭 전사의 형태를 지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종족의 언약에서 원수에 대한 정복이 언약의 성취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홍해사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신기해하는 것은, 어떻게 바다가 다 갈라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다 신기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그 막강한 애굽 군대를 다 이기게 되었나 하는 점이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바닷가 노래에서의 핵심은 우리가 애굽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바닷물을 병기로 삼아 그 바닷물로 애굽 군대를 유인하여 그들의 교만한 세력을 꺾어 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바닷물이 다 갈라졌나 하는 의혹은 여호와라는 신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히브리인들의 고백 속에서 하등의 문제가 될 리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연의 움직임 그 자체를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 성취에 투입하고 있다는 즐거움으로 남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재편성이다. 그리고 자연과 창조질서의 재편성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스라엘 중심체제로 바뀌게 되는 것이며 어느 누구든지 여호와가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 공격하는 국가는 여지없이 파괴된다는 우주적 선언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스라엘 됨' 이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 점하는 비중과 위치는 이스라엘인 본인들에게도 예상 밖이라 오직 감탄과 경의로움속에 찬양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출애굽기 15장의 찬양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단지 전쟁에서의 승리만으로 이스라엘의 본질이 마감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다 최종적인 위상,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물론 여기에 대한 정답은 15:17-18에서 간단하게 나온다. 즉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되고 처소가 되고 친히 다스림을 받는 국가가 되는데 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 거기에 이르게 되며 처소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홍해에서 일어난 일의 평가는 출애굽기 15장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몫인데 이는 그들이 이 일의 유일하고 가장 근접한 목격자들이었으며 경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놀라고 경험한 것에 대하여 감정을 자제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마음으로 찬양되어 터져 나왔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을 노래로서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왜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광야 쪽으로 길을 돌렸는가?(14:1)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가 벌리는 전쟁'의 실상을 똑똑히 목도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부르고 있는 점에 유의해 보자.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군대는 군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군대인 이스라엘을 새로운 양태의 전쟁터로 데려가기 위해 홍해 쪽을 택했다. 홍해를 배후에 두고 마주 오는 애굽의 강력한 마병을 맞서 싸우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전술이다. 그런데 바로 인간들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는 형태의 이 전쟁을 '여호와께서 벌리는 전쟁'의 모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소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홀로 이 지상에서 전쟁을 벌리면 과연 어떤 식으로 전쟁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장로회 신학교의 강사문교수는 그의 논문 [Divine War in the Old Testament and in the Ancient Near East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에서의 신적 전쟁. 1989]에서 홍해바다 사건을 다룬 적이 있는데 거기서 강교수는 홍해사건 이후의 여호와 전쟁과의 차이점을 비교했었다. 여기서 드러난 차이점은, 홍해사건에서 여호와 홀로 전쟁을 하고 사사기의 여호와 전쟁은 인간과 더불어 전쟁하고 다윗의 전쟁에서는 다윗을 앞장세워 배후에 도와주는 형식으로 전쟁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의 변화는 왕 되시는 여호와와 그 백성들 사이의 聖과 俗에서 야기된 괴리가 언약 형태의 변환으로 인해 점차 좁혀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전쟁은 항상 여호와 홀로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증거는 전쟁 이후의 찬양을 통해서 밝혀진다. 오직 여호와께만 영광을! 이것이 찬양들의 핵심이다.(시편 135, 136편 참조)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약 속의 땅에서 배척 당하는 범죄란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적용되는데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애써서 얻어진 은혜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공로를 자기가 흉내를 내는 자기의 노력으로 유사한 결과를 낳으려고 하는 탈 언약적 행위를 두고 말한다. 약속의 땅에서 준수해야 될 모든 종교의식은 지속적으로 , 오직 하나님만이 힘써서 우리가 지금 여기 있게 되었나이다 라는 신앙고백과 관련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홍해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전쟁을 참관케 하느냐 하는 점이다. 또 이스라엘이 전쟁을 끝내고 찬양을 하고 있는 점도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이번 홍해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게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탈취물'에 관한 것이다.(출애급기 15:9) '주를 거스린자'(15:7)를 엎어서 그것을 '주의 거주지가 될 자들'(15:17)의 소유로 전환되는 것은 오직 '주'께서 홀로 용사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여호와 전쟁'에서 보여주는 위치는, 여호와의 승리의 증거물이 되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구원을 보세요.(15:2) 우리의 신인 여호와께서 이렇게 승리했다오! 누구든지 여호와를 거스리는 자는 결국 우리들의 몫이 될 것이오!' 라고 전 세계를 향해 외치게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창세기 15장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 언약을 살펴보자.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숙성될 때까지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서 대기 상태로 있다가 가나안 족 속의 죄악이 징벌의 대상이 될 때, 4대 만에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되어 있다. 열 족속은 창세기 10:15-20에 나와 있는 가나안 후손의 항목과 동일하다. 결국 아브라힘 언약의 지향점은 애굽 정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창세기 9:25-28에 나와있는 바와 같이 노아가 예언한대로 철저한 함 후손에 대한 억압이다. 그들의 죄악이란 함과 가나안이 자기 아버지 노아에 대하여 가졌던 견해 즉 노아 언약에서 흘러 나오는 은혜에 대한 도전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어떤 식으로 도와주게 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상 미지에 속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미지의 일이 홍해사건을 계기로 해서 본격적으로 역사 표면에 등장케 된 것이다.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을 동원시켜서라도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언약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사정없이 여호와이 의해서 분쇄된다.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활동의 목격자로서, 증인으로서 여호와와 동행하게 된다. 오직 여호와의 언약은 여호와 본인에 의해서만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을 널리 선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전리품은 모두 이스라엘에 귀속된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처소가 되고 성전이 된다는 말은(출 15:17-18)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모아진 결과들로 가득 가득 채워진 상태 속에 여호와 자신이 흐뭇해하면서 기거한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 이스라엘 그 자신들도 여호와의 전리품이다.(시편 135:4/ 이사야 43:3/ 예레미야 2:3) 애굽에 있던 그들은 친히 구원하여 자기 백성들로 새로 등단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의 기업이요 나의 상급이다. 그 위에 여호와의 다스림이 성립된다.(출 15:18)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만약 여호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
그러면 끝으로, 왜 여호와께서는 땅이 끊어진 바다로 이스라엘을 몰아 넣었는가? 그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바다와 땅이란 불연속성이다. 창세기 1:10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바다와 땅을 구분하셨다. 바다와 땅의 불연속성에서 이스라엘과 애굽의 불연속성을 도출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분명 바다는 땅을 막고 있다. 존재는 바다에서 끝이 난다. 그런데 그 불연속성이 여호와에 의해서 해소된다. 만약 애굽이 이스라엘을 자기와 같은 류의 나라로 오인한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특수성에 대한 모욕적인 견해이다.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신이 내포하는 의미는 바다와 땅의 불연속성과 단절조차 무시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0의 행위를 스스로 위반하는 것 같이 보이나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 질서의 시발이라고 봐야 한다. 여호와로 인해 새 창조적 사역은 옛 창조를 능가하고 있다. 도저히 상식 선에 이를 수 없는 일을 여호와께서는 벌리면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완전히 격리시킨다. 동시에 옛 질서와 새 질서 사이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연속성을 유지시켜 놓고 있다. 땅 위에서 한정되어 살아야 하는 존재는 앞으로 전개될 새 땅을 건설을 위해 옛 땅의 한계마저 극복된다. 단, 이스라엘이라는 복의 담지자를 통해서만 새 희망을 갖는다. 결코 여호와의 성소는 옛 질서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옛 질서를 붕괴시켜 놓고야 마는 여호와 전쟁활약의 결과로 주어지는 새 질서 위에 건설된다. 왜 옛 질서는 여호와의 창조질서 안에서 붕괴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속에 여호와의 원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원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위해 처음 여호와의 활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세기 2:7에서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흙에서 생령을 지어 내었지만 뱀이 생령되는 아담을 유혹하여 다시 흙으로 되 돌려 놓았다. 그러나 여호와는 흙으로 되돌아가는 아담에게 찾아와서 생명(하와)을 약속했다. 이 약속을 여호와는 여호와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보려는 것이다. 뱀의 후손을 상대로 말이다.(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기는자에게는' 라는 표상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호와 전쟁을 참관하고 난 뒤 이스라엘은 무엇을 배웠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몰고 다니기는 하겠지만 결코 이스라엘의 자기 노력이나 애씀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기 노력과 희생과 은혜로 성취시키신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몰고 다니면서 원하시는 것은 이 여호와의 가능성을 믿어 달라는 것이요 그 은혜성에 모든 생명을 위탁하고 마음놓고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할뿐이다.
사실 믿음이란 세상에서 그리고 인위적으로 양산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불 연속성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노력으로 안되는 것을 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의 행동이 된다.
여호와 전쟁, 어쩌면 이미 인간 내부의 종교성과 종교 테크닉과 종교 본능과도 전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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