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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야에서성경신학출애굽기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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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싸움꾼 이스라엘, 누구와 싸우나?
싸움하기 위해 군대로 결성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누구와 붙여 보았느냐?
우리는 출애굽기 13:17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똑바로 광야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이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해서이다. 그렇다면 홍해 길은 전쟁이 없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이와 정 반대이다.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추격을 받아 진퇴양단의 지경에 놓이게 되고 또 17:8에서는 아말렉과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다.
자! 이렇게 되고 보니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을 안 치르면서 약속한 지점(모세가 예전에 여호와를 만났던 그 지점. 출애굽기 3:12)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대판 하게 하는데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기 위해 홍해 쪽으로 길을 택한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전쟁을 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의 힘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힘으로 전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앞으로 하는 전쟁은 단순히 국가의 생존과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세속 전쟁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질서를 여호와만 섬기는 쪽으로 재편성하기 위한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여호와의 취지에 따라 동원되어 홍해 전쟁을 참관한 후 뭔가 새로 인식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세가 들고 사용했던 지팡이에서 보여 지듯이, 우리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에 하등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순전히 여호와가 친히 용사가 되어 적을 물리치는 식으로 전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은 그렇게 수행된다 치고 그렇다면 여호와 전쟁에서 적과 아군이 어떤 식으로 구분되느냐 하는 것이다. 적이 되는 나라와 아군 나라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여호와 전쟁에 동원된 이스라엘은 단순히 열 재앙 이전의 애굽 노동자들의 모임인 이스라엘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열 번째 재앙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의 희생'을 들에 엎고 새롭게 부각된 국가이다. 그런데 왜 '어린양의 희생' 속에 놓여 있어야만 여호와 전쟁에서 아군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점은 홍해를 막 건너고 여호와께서 사전에 모세에게 만나자고 약속한 장소까지 오는 과정 속에서 본질이 드러난다.
여기에 세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모두 원망사건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원망 사건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원망을 해도 탈락자가 없다는 것이다. 뭔가에 의해 보호되고 감싸지고 대체되고 용납되는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유월절의 희생'이 이스라엘 내부에 갖는 의미는 그 '뭔가'의 내용이 된다. 그 증거로, 첫 번째 원망 사건인 마라사건에서 여호와께서는 토를 달아 말씀하시기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가라사대 너희가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15:25 f-26)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사람이 맞은 질병을 안 맞은 이유가 무엇일까? 여호와께서 봐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봐 주어서 질병이 안 떨어졌다고 한다면 이제 와서 (홍해 건넌 후) 새삼스럽게 잘못하면 질병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여호와께서 할 필요가 없다. 이왕 봐 주는 것 계속 봐 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이야기하신다.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안 떨어진다.' 는 식으로 명령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사람이 맞는 질병이 유보된 셈이다. 만약 앞으로 조건이 맞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애굽 사람과 같은 신세가 된다. 그러면 왜 유보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즉 이스라엘은 '치료하는 여호와'를 보여줄 책무를 지닌다. 그 치료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만나기로 한 그 과정에서 세 가지 원망사건이 나오고 그 원망사건이 어떻게 무마되는지를 보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출애굽기 4:1-9에 나오는 세 가지 이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치료하는 여호와 상'은 이미 모세에게 이적으로 계시한 바 있다. 모세의 자기 품속에 넣었다가 끄집어 낸 손이 문둥병 손이 되었지만 다시 품속에 넣었을 때 치료가 되었다. 이 이적에서 우리는 1단계와 2단계로 진행된 것을 보았다. 1단계는 모세의 손이 품에 들어 있다가 나오는 단계이며 2단계는 다시 그 더러운 손을 품속에 넣어 깨끗하게 치료된 손이었다. 이 두 단계를 거쳐 치료가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앞서 행한 이적, 즉 지팡이를 던지고 다시 그 뱀이 된 지팡이를 회수하는 두 단계의 이적 단계와 연관있는 것이다. 뱀에 대한 정복이 근거가 되어 그것이 이스라엘의 치료 효과로 전환된 것이다. 이점은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여호와를 거스르는 자. 15:7'를 멸망하시고 그들의 소유물을 이스라엘의 소유물로 전환한다는 '여호와 전쟁'의 법칙과 일치되는 내용이다.
마땅히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멸망당해야 할 이스라엘이건만 이스라엘은 대신 가정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았다. 그리고 잡았다는 표시로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했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일단 마무리 된 일이 아닌가?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계속적인 '여호와 전쟁의 전사'로 남기기 위해 그 유월절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왜 애굽이 벌을 받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율례와 법도를 세웠다. 의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세운 법도와 율례에 의해 규정된다. 사실 이스라엘도 이 율례와 법도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열 번째 재앙 때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장자도 죽이기 위해서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을 이긴 의로써 이스라엘을 감싸주기로 하였다. 이 행위는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 포함이 된 내용이다.(창 19-29) 그 의가 바로 '흠 없는 어린 양'의 대리 희생이다. 이점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단체적으로 만나기 이전에 이해를 했어야 했다. 무엇이 치료인지 무엇이 용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직접 알라고 한 것이 세 가지 원망사건이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원망할 곳으로 인도한다. 거기에는 쓴 물이 있고 양식도 없고 물도 없고 그곳에는 무장한 아말렉 군대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여호와를 대신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을 이긴 '어린양의 희생'에 동참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그 원망을 용납은 하시되 '치료하는 여호와'의 본질을 보여주는 식으로 용납하고 있다. 이 '치료하는 여호와'의 행위와 '희생'의 정신과 어디서 일치를 보고 있느냐 하면 모세의 지팡이에서 일치가 된다. 반석이 깨어짐은 세가지 원망 사건의 절정이다. 보다 높은 원성보다 깊어진 희생으로 대처하고 있다. 원망의 극단으로 인해 애매한 반석만 깨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터져나온 생수에 관심을 두는게 아니라 반석이 깨어졌다는데 강조점을 둔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을 정복하면서 얻은 그 의(또는 의의 행위)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감싸주기 위해 투입시킨다. 그 의는 '희생'의 형태로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잡게 된다. 사실 원망을 통해서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애굽적이며 애굽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애굽을 定向하고 있다. 그들은 자주 애굽시절을 들먹이며 그리워했다. 그런 이스라엘 속에 새로운 의가 잉태하고 있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여호와께 받을 언약 속에는 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의를 보다 확대시키고 발현시키는 목적으로 개진된다.
그러면 이런 부족한 이스라엘을 데리고 여호와께서는 궁극적으로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그것은 두 번째 원망사건에서 드러난다.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은 어디서 '원망 덮어 줌'이 끝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두 번째 원망 사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식이 없다고 떠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작 여호와께서 내려 준 것은 애굽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 아니라 전혀 낯선 양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체 불명의 양식을 알아보지 못해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불렀다. 이것이 새로운 양식의 이름이 된다. 즉 '만나'라고. 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즐겨 먹던 애굽의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이 '만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디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 어떤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만나가 끊어지는 상태의 질서로 인도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는 질서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는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만나가 하늘에서 끊어지는 사태를 만난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의 의미를 품고있는 그 날에 '안식'을 인식 할 의무를 지닌다. '안식'이란 태초에 천지를 거룩하게 창조하시고 마무리 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래의 흠도 없고 티도 없던 그 상태로 지금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실려는 것이다. 만나를 던져 주면서 말이다. 만나 때문에 잊어버린 안식날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존재의의도 부각된다. 두 번째로 이 만나라는 양식은 백성들의 원망뒤에 나타난 양식이라는 점에서 만나속에서 백성들의 원망과 원성과 불신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만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대들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 된다. 왜 이 범죄 증거물이 필요한가? 이점을 알기위해 이 만나가 든 항아리가 나중에 어디에 보관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출애굽기 16:34에 보면 아론이 그 만나가 든 항아리를 '증거판' 앞에 둔다. 그리고 이 만나는 백성의 범죄로 인해 깨어진 증거판과, 백성들이 아론 제사장에게 대들었던 증거물인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함께 법궤라는 상자속에 안치되는데 그 상자의 뚜껑은 유명한 속죄소이다. 즉 백성의 피를 씻어내는 장소이다. 따라서 속죄소의 그 의미성을 보여주기 위해 백성들의 범죄의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도데체 무엇으로부터 용서인가 말이다! 그것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려는데서 비롯된 원망의 범죄로부터 용서이다. 이렇게 해서 홍해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뭇것도 한 것이 없이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구원되었듯이 이 전쟁의 취지는 다시 이스라엘 내부로 이어져 '의 없음'으로부터 '의 남김'으로 보여진다. 이렇게해서 이스라엘이 '의'의 나라가 되어야지만 죄의 나라를 징벌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쎄서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한 나라로 내 소유의 나라라는 것을 시시때때로 천명하는 언질을 성경속에서 듣게된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그만큼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 하나님의 희생이 의가 되어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과연 이스라엘이 제대로 여호와의 군대로서 자질이 있을까? 그 텍스트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나타난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다. 만약 이번 전쟁에 승리를 하게 된다면 칼 덕분인가 아니면 지팡이 덕분인가? 칼은 인간의 자기 애씀의 표시라면 지팡이는 인간의 노력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홍해 전쟁에서의 무기이다. 전쟁의 우열은 여호수아의 전술과 전혀 상관없이 산 위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세가 산 위에서 들고 있는 지팡이의 높낮이와 현 전쟁의 현황과 비교해 보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아론과 홀이 여호수아 아닌 모세 쪽과 합류했다. 승리가 이스라엘 쪽으로 왔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누구도 알게 되었다. 이번 전쟁은 홍해 전쟁의 다시 재현했음을! 비롯 여호수아가 동원되었다는 점이 다르지만 오히려 여호수아가 직접 적과 마주 싸움으로 여호와 홀로 전쟁을 이기게 했다는 점이 더욱 더 확실하게 한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많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의 공로가 하나님의 홀로 치른 공로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옛날 전쟁시에는 자기 군대의 깃발을 제일 먼저 앞장세우고 진격한다. 자! 이스라엘에서는 무슨 깃발을 앞장세울까? 여호와 닛시 오직 여호와만이 앞장서고 이스라엘은 그 깃대만을 바라보아야 될 군대이다.(17:15-16)
이스라엘의 승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안식의 상태로 접근하는 유일한 순서가 된다. 전쟁없이 안식에 참여될 것이라는 것은 대단한 거짓된 환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과 싸워야 하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노력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그 생활방식과 싸우되 오직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밀어 붙여야만 한다.

사 족:
아침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를 수집할 때 집안 수보다 많이 욕심 내어 가져가도 나중에 썩어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만나의 공급이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 공로(?)라든지 애씀이 아니라 공짜로 내리는 것이기에 소유의 차이가 없어야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은혜의 질의 양에 의해서 무시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나가 끊어지는 안식의 세계에서도 이런 욕심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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