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이웃사랑
선택과 이웃사랑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선택과 이웃사랑
윤리라는 것은,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로 해서 주장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전혀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윤리라는 것도 허구로 끝맺는다. 성경을 들려다 보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윤리성을 찾고자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인간 환경이 보다 성스럽고 선하고 의로운 쪽으로 성숙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대감 자체를 성경에서 하나님이 죄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는 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왕 존재하는 인간 사회가 보다 완전해지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희망 사항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성경책을 들여다봤던 것이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과의 흥정 심리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인간들이 행복하게 잘 살면 인간들도 기분 좋고 인간들이 또 그 신에게 감사하니 하나님도 기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신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네들의 세계가 보다 향상만 되다면 무슨 책이든, 무슨 계시든 마다하지 않고 다 이용하려든다. 순수한 동포애, 티없이 맑은 동정심 같은 것들이 지상을 뒤덮게 되면 바로 그것이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가 아니겠느냐로 여긴다. 아니, 완전한 세상은 아닐지라도 보다 완전을 향할 수 있는 방법만으로서 이런 윤리적 노력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느냐고 추론해 본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 성경은 이러한 추론까지 죄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을 그들은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해내고 있다. 처음부터 성경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윤리책으로 작정하고 대하는 그 마음 자세가 문제이다. 성경이 무어라던 우리는 그 책을 이용할 데로 이용하겠다고 여기는 것은 신과 정면으로 맞서보겠다는 강한 반항심이다.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일방적인 인간들의 요구 사항들만 정당화할 것 같은 귀절들을 뽑아 사용하겠다는 것은 무단 복제와 같은 범법 행위이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신에 대해서 온갖 좋은 표현은 다 동원한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정체로서의 하나님", "온 우주보다 더 큰 자비심을 가지신 하나님" "인류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이렇게 신을 추겨 내세워놓고서는 거의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연설이 달아 나온다.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합시다!" 방금 말한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 윤리라고 포장되어 강단마다 유포되고 있다. 정말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꼭 가나안 땅의 이방 종교를 보는 것 같다. 성경이라는 계시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보다 앞질러 새로이 계시를 만들어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두 가지 귀절을 잠시 거론해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39) 또 한 귀절을 인용해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9) 우리의 하나님은 대단히 편협한 분이라서 오직 선택된 자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만을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따로 관리하신다. 소위 양과 염소의 분류이다(마태복음 25:33). 여기에 비해 윤리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지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죽어도 같이 죽고 망해도 같이 망하자는 묵계 안에 놓여 있다. 따지고 보면 모두 한 핏줄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랑은 보편적인 속성을 지녔으며 사랑 앞에 서서 그 어떤 구별이나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윤리에서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간들의 윤리 요구와 한 점의 공통성을 갖지 않는다. 전혀 없다. 오직 선택 작업만 묵묵히 수행해 나갈 따름이다.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분명히 밝히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오직 세상 가운데 있는 자기 사람만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겠다는 것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데 어쩌란 말인가! 예수님의 속죄도 오직 임의로 선택해서 불러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서 9:15) 교회 속에 이방인들이 초대되었다고 해서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선택의 원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이스라엘 국가는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서 새워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세운 나라이다. 그 나라가 주위 국가나 세상 인류에게 보일 수 있는 원리는 오직 선택 사상뿐이다. 선택된 나라에게는 긍휼이, 선택되지 않는 나라는 저주가 있으리라! 이 구분을 보이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애굽기 33:19) 물론 구약 이스라엘 나라가 이 선택적 사랑을 포기하고 인위적인 인간들의 요구 조건에 충족한 국가 형태를 지향하다가 멸망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마치 이방 나라들이 자기 국가를 경영해 나가는 방식에 더 친화성을 가졌던 것이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당사자들도 나름대로의 자기 자존심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기 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 빈 자리에 이방 나라 가운데서 선택된 자로 채우셨다. 이로서 혈통적 선택 범위는 사라졌지만 그러나 은혜로서의 선택이라는 원리는 여전히 고수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25-32). 왜 하나님은 윤리를 인정하지 않고 선택으로만 일관하시는가?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선택적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의를 공급해 줄 수 없는 자기 약속 때문이다. 참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대해서 말만하면 갑자기 얼굴 색이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편협한 심성의 소유자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두 손을 귀에 가져가서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란 사람들이 성경을 곧잘 보는 것 보면 희한한 일이다. 선택은, 모든 철학자들을 곤궁에 빠트리는 내용이다. 인류의 모든 학문은, 선택이라는 사실만 빼놓고서는 나머지 모든 것을 탐구 대상으로 한다. 선택에 대해서는 왜 철학자들이 다루지 않는가? 그것은 신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하나님이 선택에 나서면 인간의 꼴이 우습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자유성도 우습게 되고 인간들의 재능도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들이 선택을 도외시하는 원인은 자기 자존심을 계속 고수하기 위해서이다. 계속 지혜자로 행세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전서 1:22-31). 인간들은 위의 성경 귀절과 반대되는 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주 안에서 자랑하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자랑스러운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자신만의 자랑거리가 나오기를 원한다. 인간도 이만큼 해낼 수 있고 또 성숙해 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들어서 하나님에게도 당당하려 한다. 성경은 분명히 언급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흔히 성경에 나와 있는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가지고 인간 윤리의 위상을 고수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내용은,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해야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웃 사랑도 하나님의 선택 행위의 한 단면이다. 선택 활동이 어떻게 이웃 사랑으로 확산되는가를 살펴봄으로서 흔히 말하는 윤리와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서 한 점의 공로라도 인간에게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웃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근거한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17-18) 여기에서 '형제'라는 말과 '동포'라는 말이 나온다. 즉 다같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입은 입장인데 서로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긍휼을 입혀 준 하나님의 사랑의 취지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방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인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에 복종하는 자가 있으면 역시 이웃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랑에 대들면 가차없이 저주와 심판을 감행해야 한다. 여호와의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애굽기 20-27)
이 본문에서는,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어다'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로 끝맺고 있다. 멸하시기를 명령하시는 하나님과 자비로운 하나님과 모순되지 않으려면 '선택'이라는 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뿐이다. 시편 136:15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무참하게 멸하신 것이 "자비하심"으로 일관되는 행위일까? 그것은 순전히 선택적 사랑의 입장에서 봤을 때만 진리이다.
이처럼 구약 시절에 있어 이웃 사랑의 실행자는 선택적으로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 나라가 된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3-48)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의 온전한 수준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느냐를 보여주신다. 너희 자신을 사랑해 주고 문안해 주는 형제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해내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론을 고려한 말씀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이 의가 있는 자에게만 천국에 들어 갈 수 있고 또 그 의는 온전한 이웃 사랑의 실현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이 온전한 율법 의를 실현시켜서 영생을 얻고자 한 율법사가 있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누가복음 10:25-28)
그런데 이 율법사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웃을 사랑하기는 사랑해야 할텐데 이웃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확정할 지를 몰랐다. '이웃'에 대해서 내용이 분명해진다면 그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다. 어떤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을 지경으로 길가에 있었다. 그런데 제사장도 그냥 지나치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에 그 피해 입은 사람을 구출해 주었다. 이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율법사는 말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라"라고 했다. "자비를 베푼 자=이웃"이라는 공식을 예수님은 제시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외형적인 조건을 초월해서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율법에다 이 공식을 대입해 보자. "내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에다가 이 공식을 대입하면 "너에게 자비를 베푼 자를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법이 된다. 결국 이 법은 구약에서 한결 같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지상에 그대로 실현시키는 셈이 된다. 먼저 자비를 베푼 자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즉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는 이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자를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도 아니요 하나님의 법도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은, 먼저 자비를 베푼 자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37) 즉 온전히 율법을 행해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네가 먼저 모든 이의 이웃이 되는 과정이 먼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온전한 의의 상태는 이 율법사에게는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전한 이웃으로 이스라엘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 애굽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온전한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도 역시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쪽으로 걸어나가시는 것이다. 온전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그 사랑과 긍휼 안에 놓이게 될 참된 이스라엘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은 기존의 유대 혈통의 경계선을 넘어선다. 이방인까지도 포함하고 모든 종족과 신분을 포괄한다. 이런 점에서 산상설교에서 나타난 "원수 사랑"의 내용까지도 실현되는 것이다.
원수까지의 사랑은, 곧 자비와 긍휼이 대상에서 제외된 자까지도 파급되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 완성을 본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 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1-16)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그것은 새언약밖에 있는 자에게 대한 진노와 새언약 안에 있는 긍휼로서 표현 될 수 있다. 마치 시편 136:15이나 17을 재현하는 것은 차원이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 5:10)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반면에, 새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끼리는, '형제' 또는 '너희'라는 말로 새로운 선택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비를 베푼 자에 대한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지체들은 서로 사랑하므로서 새언약과 새 의의 완성을 외부로 보여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1-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5:34-3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1서 3:13-16)
흔히 말하기를, 선택론이나 예정론에서는 전도 의지가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정반대이다. 오히려 전도 의지가 더 강렬해진다. 왜냐하면 종말 때의 '거짓 도'와의 싸움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도 기술과 능력과 열성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전적인 자기 부인이 안되는 자들이다. 자기 부인이 안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전도 기술과 행위를 창안하게 된다. 이렇게 창안된 전도 방식이 예수님의 참된 도와 부딪힌다는 사실은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온갖 고상스러워 보이는 윤리와 도덕적 덕성들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 하나 끌어 왔다고 해서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전도에 관해서 교만함과 우쭐됨을 지적하는 것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전도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어떤 기술과 윤리성과 참신한 아이디어의 산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자는 그 동안 헛수고만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의 열매인 자기 부인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란, 자신의 그 어떤 노력과 공로와 설득으로 인해 죄인이 구원되지 않았음을 늘 인정하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전도한 사람 같으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나의 설득력과 신학의 유식함과 기도와 열성과 성의와 노력과 애정과 구제와 돌보아줌과 관심가져줌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데 전혀 도움이 못했음을 증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번 전도를 통해서 나 자신부터 얼마나 실적위주의 나가는 사악한 존재임을 절실히 느끼고 나 자신의 행함에 여전히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는 교만함에 새삼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전적으로 죄인으로서 이번 전도 일에서 소외당해도 마땅합니다. 저 분이 구원받은 것인 순전히 하나님의 임의적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날 뿐입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자기 행함을 통해 괜찮은 결과에 기대를 걸고 조직 확충이나 정신이 빠져 있는자들에게는 이런 자기 부인이 가능할까? 자기 조직마저 부인해야 될 판국에…. 이런 교만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5)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전서 4:11)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