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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11월 24일 강의강의-

광주 11월 24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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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2.♡.57.66)

06-12-05 20:51

광주 강의 061124a

광주 강의(06. 11. 24) 20-1

이제부터 광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요한 1서 2장 18절에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상당히 용어가 재미나지요? ‘지옥 갈 사람이다. 이단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고,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고, ‘악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데,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란 것을 가지고 앞에 ‘적’을 붙여서 ‘그리스도에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규정을 지어 버려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이 오겠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악이다. 죄다. 여러 가지 개념이 있지만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는 이 그리스도만이 그 정체를 폭로할 수 있는 개념이지 다른 개념 가지고는 안 된단 말이지요.

그 사람이 내 돈을 훔쳐갔다. 그래서 너는 적그리스도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흔히 하는 오류가, 예를 들어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대목이 나왔다고 ‘거짓말 하는 사람 지옥 간다.’ 이런 식으로, 만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고 하면,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옥 간다.’ 이런 식으로, 지옥 간다, 심판 받는다는 그 기준을 성경 몇몇 구절 가지고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교인들이 어떻게 오해를 하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맹세를 했다. 그러면 ‘당신은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맹세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맹세는 안 했는데 “부자 된 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고 하니까 부자인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교인들로 하여금 혼란케 하지요.

‘방종’같은 경우에 문제점이 뭐냐 하면, ‘방종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정립케 하는가 하면 스스로 마음의 가계부를 써요. 선악 가계부. 착한 일 왼쪽, 나쁜 일 오른쪽에 써서 ‘방종하지 말라’고 하니까 착한 일 한 것 다 기억해야 되고, 나쁜 일 한 것 다 기억하는데 착한 일, 나쁜 일이라는 그 자체가 자기 인생 경험상 나오는 가계부지 옆 사람 가계부하고는 또 다르거든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옆 사람은 이것이 착한 일에 해당되는데 이쪽 사람은 그걸 잘 몰라서 그 일은 나쁜 일에 해당 된다. 예를 들어, 우리교회 조 장로님은 지난 선거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어요. 그런데 나는 노무현을 찍었거든요. 이럴 경우 조 장로님 입장에서 이 목사는 나쁜 일을 한 거예요. 노무현. 저는 착한 일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찍어보자고 해서 찍었단 말이지요.

사람이 살면서 사람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욕망이란 것이 있거든요. ‘사람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어요. ‘이렇게 하면 행복합니다.’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행복은 본인 욕망이 충족될 때만 행복입니다. 본인의 욕망. 일률적으로 ‘이렇게 하시면 행복합니다.’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각자의 욕망이 다 다르니까. 어떤 사람은 13평 전셋집에 있어도 행복한 반면, 어떤 사람은 100평짜리 자기 집에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100평 되면 행복하냐 고 묻는데, 정답은 이겁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은 다 다릅니다.’ 욕망이 다 다르고, 더 황당한 것은 그 욕망이 어제 가졌던 욕망과 오늘 가진 욕망이 또 달라요. 심지어 오늘 아침에 가졌던 욕망과 오후의 욕망이 다릅니다.

한창 배 아프고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이 세상에 변비만 없으면 부러울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지만 화장실 문 열고 나올 때는 딴 생각 하게 마련입니다. 들어갈 때 생각과 나올 때 생각이 다르잖아요.

욕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이것이 진리’니, ‘이것이 행복’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듯’이니 하는 것은 전부 개인적인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폭로시키고 철학계에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요 근래에 제가 안 이야기는 <십자가를 아십니까>라는 책이 폭탄처럼 느껴졌다는 글이 몇 개 올라와서 ‘그랬었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세계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철학계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어요. 뭐냐 하면, 철학자들이 남을 훈계한답시고 하는 이야기는 그 본인 혼자의 넋두리란 말이지요. 혼자의 넋두리를 우리에게 왜 하느냔 말이지요. 그렇게 심심하고 할 일이 없더냐? 그냥 혼자 일기장에나 쓰지 그걸 왜 남에게 이야기하느냔 말이지요.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되고’ 그것은 현재 너의 욕망에 부합되는 너의 윤리지 그것을 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느냐 이 말이지요.

그때부터 철학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는데, 그 반성으로 나온 것이, 사람이 행복이나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타고난 것이지만 그 행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욕망’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철학자는 욕망은 나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쁘다, 좋다 하는 것은 괜히 변명조로, 스스로 ‘인간아, 조심 좀 안 할래’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약간은 ‘나 이렇게 나무랜다’하는 티를 낸다는 것뿐이지, 생색내는 것이지, 어느 인간이 자기 욕망을 없앨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은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사람을 지배하고 끌고 갑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라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나’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주체’지요. ‘나’라는 것은 누구의 작품인가 하면 내 속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이 그 때 그 때마다 색다른 나를 자꾸만 생산해 내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 내 처신이 계속 변동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을 대할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이 사람을 대할 때는 또 다르게 대처하고, 이게 뭐냐 하면 ‘나’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요.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의 가사가 어떻게 되지요?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지요. 그 노래 누가 불렀더라? 조성모가 리메이크한 건데.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은 거예요. 너무 많아서 그걸 표현할 때마다 자기가 그것을 편집해서 내요. 카드놀이 할 때 이걸 낼까, 아니 저걸 낼까 하는 식으로 한다 이 말이지요.

행복 추구가 욕망이 우선이고, 욕망에서 진리가 나오고, 행복도 나오고, 윤리도 나오고, 의도 나오고 오만게 다 나오니까 이 행복의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욕망이 이렇게 움직인다.’ 까지만 이야기해야지 ‘이렇게 하면 욕망이 조절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자체에 모순돼요. 왜냐하면, 욕망이 어른이고 우리는 욕망이 만들어낸 피조물인데, 피조물이 감히 욕망에게 ‘어이, 욕망아! 다음에는 나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다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욕망은 이렇게 움직인다.’고만 이야기해야 되지 ‘나는 욕망을 이렇게 다스린다.’는 것은 완전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착한 일, 나쁜 일 하지만 요 일기장을 3년 뒤에 보면 가찬치요. 여기 착하다고 한 것도 전부 어디로 옮겨야 됩니까? 다 나쁜 칸에다가 옮겨놓아야 돼요. 착한 일 했다는 것을 나중에 보면 착한 일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적그리스도라고 할 때, 여기서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취지가 나오는데, 적그리스도라 할 때, 왜 세상에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을 구분할 때 천국 가는 내가 내 기준이 될 수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고자 하는 내가 ‘나는 이렇게 행동하므로 천국 가는 사람 맞아.’라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천국 가는 것을 규정짓지 못하고, 성경은 뭘로 하느냐 하면 이걸, 그리스도를 가지고 규정짓자는 것이 사도 요한입니다.

자, 지금 이 이야기는 듣기는 굉장히 쉬워요.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내가 기준 되지 말고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구나.’라고 굉장히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내가 기준점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가지고 해야 된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보면 나오지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지요. 이 기준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중심이란 것은 이해하기 쉬운데, 제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어떻게 평소에 내 기준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기준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결국 내 기준 아닙니까? 남 믿는 것하고 내가 믿는 것하고 멱살 잡고 싸움하잖아요. ‘당신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것이 믿음이야.’ 하고 싸울 수 있잖아요.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해 놓고는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진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상대방도 그럴 경우에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라는 사실 그것만 남길 수 있는 그러한 방식, 그런 능력이, 그런 해법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없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 말은 쉬운데, 내가 나만 생각하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나는 어디에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까? 나는 욕망에서 만들어져요. 그전에는 그것을 몰랐어요.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욕망을 어디까지 집어넣습니까? 이 욕망이 어디에서 생긴다? 무의식 세계에서 욕망이 만들어져서 그것이 의식 세계로 표면에 등장한다. 등장할 때는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타협해서 등장하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는 저런 욕망, 이 사람에게는 이런 욕망, 내 속에서 뭔가 타협을 하는데 그 타협하는 대상이 뭐냐, 이드와 에고와 그리고 초자아 이 세 가지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서 타협하는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욕망에 의해서 ‘나’가 생겨난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하는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내 욕망 땡기는 대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나’가 욕망에서 나왔으니까. 맞지요?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는 무슨 그리스도냐 하면, 내 욕망이 그전부터 기대했던바 그 그리스도를 왜곡해서 그리스도로 해석해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포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사랑, 정의, 명예 이런 걸 상상할 때 똑같은 칠판이다. 이것은 하자가 없지요. 그냥 칠판이다. 하면 둘이 안 싸우는데, ‘칠판이 깨끗하네.’ 하니까 옆 사람이 ‘이게 어디 새것이냐? 오래 됐지.’ ‘이정도면 새것이지.’ ‘이게 뭐 새것인데.’ 이렇게 둘이 싸우다가 나중에 ---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뭔가 조금만 첨가했다 하면 그 첨가된 부분이 서로 차이가 나서 싸우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기 욕망, 자기가 욕망을 다스리고 극복한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자기라는 것이 욕망에서 나왔는데, ‘내가 우리 어머니를 바꿔서 다른 아들로 태어날까.’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미친놈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제가 세 가지 미친놈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당신 꿈 이야기 내게 해봐. 그게 어젯밤의 꿈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해 줄게. 지가 뭔데 판단을 해요. 이건 미친 인간 아닙니까. 다니엘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느부갓네살이 ‘내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그 꿈을 너희들이 이야기해 봐.’ 그 신하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에라, 이 미친놈아! 꿈은 네가 꿨는데 우리보고 꿈을 말하라고.’ ‘너희들이 내 꿈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너희들을 다 죽이겠다.’ 그 때 신하가 한 말이 있습니다. ‘왕이시여,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인데 어찌 그리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그 때 느부갓네살이 하는 말이 ‘평소에 너희들이 하나님하고 관계없었나? 너희는 신녀가 아니었나? 개기일식 일어난 것에 대한 의미를 몰랐나?’ ‘모르지요.’ ‘그것도 모르면서 월급 받고 있었나.’ 이렇게 되니까 이래도 죽어야 하고 저래도 죽어야 하는 거예요.

요한 1서가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자, 제가 또 요한 1서를 보면서 이것에 대해 크게 잘 못 해석한 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 1서 1장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1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2절)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생명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아, 죄로 죽어야 될 인간이 예수님이 생명 주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네.’ 이러고들 있어요. 이렇게 해석하니까 요한 1서 전체가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또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라는 것이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욕망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걸 여러분들이 힌트로 하시면 요한 1서에서 “생명”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 우리가 생명에서 나왔으면 생명을 우리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건 상식이잖아요. 상식인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있고, 내가 오래 살고 싶은데, 어디에 생명이 있는가 보니까 요한 1서에 생명이 나타났다. 야, 내가 드디어 영생을 얻고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주인공이 누굽니까? 생명이 주인공이에요, 누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있잖아요.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워치만 리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워치만 리가 왜 이단인줄 몰라요. 위트니스가 나오니까 워치만 리를 좀 수상히 여기지만.

요한 1서의 생명은 이런 겁니다. 말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방금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생명을 얻을까? 라고 했지요. 이것이 우리들끼리는 내가 오래 살면 생명이고, 내가 죽어서 흙이 되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보잖아요. 이렇게 내가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자체가 생명이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죽음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오니까 이런 생각 자체가 죽음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요한 1서 1장부터 5장까지가 해석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 1서 2장에 적그리스도가 나오잖아요. 제가 적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뭘 중점으로 했느냐 하면, 적그리스도란 용어는 우리에게 뭘 의미하느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옳고 거름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이 야기기를 지금까지 쭉 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안일하게 생각해서 그리스도 중심이란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를 포기 안한 그리스도 중심을 이야기하더란 말이지요. 이렇게 나를 포기 안하게 되면 백날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해도 사실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날 구원해 주는 세퍼트에요. 그냥 독감 예방주사 한 대 맞는 겁니다. 예방 주사 맞았으니까 올 겨울은 튼튼한 거예요. 늦게 오신 분들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이제 필요 없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 있으니까 이제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 아닙니까? 그죠? 그리스도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왔으니까. 건전지의 강력한 에너지가 내 속에 들어왔으니까 나는 건전지가 있는 한 나는 위대한 강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신이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위트니스, 워치만 리 이쪽 계통 아닙니까. 내가 신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요한 1서에서는 지옥 갈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22절에 보면,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그렇게 되어 있고, 그 뒤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뭘 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4장 2절 한 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여기서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오셨다는 것 가지고는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돼요. 그런데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들이대야, 육체로 오신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고 시인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왜 그리스도라고 할 때 육체라는 요소를 부각한 그리스도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되는가 이 말입니다. 요한 1서가 이게 만만한 책이 아니지요? 사도 요한이 무슨 이야기 하려고 이런 논리로 가는지 그것을 이해해야 되요.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내 믿을 것 골라서 믿지 마시고.

광주 강의를 할 때 1장부터 5장까지 강의하면서 나름대로의 흐름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왜 앞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고, 뒤에는 이런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이런 이야기하고 이렇게 순서 배열을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 흐름을 파악해야 요한 1서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제가 설명하는 건데 --

예수님이 육체로 왔다는 것을 왜 강조해야 되는가?

기존의 육체는 누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기존의 육체가 왜 생명이 될 수 없는가를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그걸 대비하면서 등장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누가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있는 육체 튼튼하겠다, 들을 귀 있겠다, 그냥 오셔서 잔소리하시고 말씀하시면 듣고 영생 얻으면 되는데,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현재 우리의 육체가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그 말씀을 받은 육체에서 생명이 나올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증거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그 세 가지를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요한 1서 5장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과 피로 임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육체로 오셨는데 육체가지고 보디빌딩 했습니까, 헬스 했습니까? 그냥 그 육체 그대로 갔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뭘 남겼지요. 물과 피를 남겼잖아요.

그 다음에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시는 이가, 물과 피 그리고 성령이잖아요. 지금 제 말이 맞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이 물과 피와 성령이지요. 물과 피는 어디에 속합니까? 물과 피는 그리스도께 속하고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님께는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속하지요. 그러면 성령은 뭐 하기 위해서? 현재 우리의 육체로서는 우리 욕망에 의해 자아를 만드는 이런 것 가지고는 절대로 뭘 이해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물의 의미와 피의 의미를 이해 못한단 말이지요. 왜 이해를 못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저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생명 맞지요? 그러니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왜곡된 생명관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진짜 생명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 못하는 거예요. 이게 워치만 리 라니까요.

‘아, 인간은 죽는구나.’ 죽는 것 다 알지요? ‘신이시여,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오, 생명이 왔구나. 받자.’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예수님의 피와 물과 성령의 의미를 완전히 빼돌리고 하는 그런 일방적인 자신이 오래 살고자 하는, 자기 육체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욕망의 화신입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예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이 보내신 영이 아니면,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도 이야기하고 요한도 이야기하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성령이 와야 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나 여기 있잖아’라고 합니다. 내가 있고 예수님도 있으니까 내가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거예요. 너도 믿느냐고 묻고.

성령께서 왜 오셔야 되는가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세계가 그리스도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도 못한 세계에요.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계입니다.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은 ‘죽기 싫다. 누구 믿어야 영생 얻지?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고 하니까 예수 믿어야겠구나.’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집니까? 물도 빠지고 피도 빠지고 생명도 빠지고 남는 것은 예수님 남고 나만 남는 거예요.

들뢰즈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하면, 욕망은 자기를 포기 안 합니다. 이 욕망은 자아가 생성되기 이전의 욕망입니다. 욕망은 자기를 포기 안 합니다. 영원히 욕망으로 남고자 해요. 이게 욕망이에요.

‘사과해라.’

‘못하겠다.’

‘사과해라.’

‘때려 죽여도 못하겠다.’

계속 자신의 욕망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욕망 속성상 자기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부터 욕 얻어먹는 것을 용납을 안 합니다.

부부싸움이란 것이 처음부터 큰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요.

‘거실에서 좀 천천히 걸어라.’

‘바쁘다보면 빨리 걸을 수도 있지.’

‘내가 천천히 걸으라고 몇 번 말했나.’

‘왜 그러는데.’

‘얘도 깨고 하니까 천천히 걸어라.’

‘노력할게.’

‘노력한다고 해놓고 몇 번째고.’

‘노력한다고 안 하나. 왜 아침부터 바가지 긁고 야단이고.’

‘내가 안 긁게 됐나.’

이렇게 나가다보면 나중에는 뭣 때문에 싸운 줄도 모르고 ‘너, 왜 날 건드려’ 이것밖에 안 남습니다.

남자 고등학생들, 소위 노는 아이들이 나오지도 않는 침을 억지로 퇴 퇴 뱉어요. 침을 왜 뱉습니까? 그걸 보고 제가 또 가만있지 않지요.

‘학생 침 왜 뱉어?’ 아무리 생각해도 침 뱉을 이유가 없거든요.

하루는 버스를 탔는데, 학생들이 많이 타서 뒤에 우루루 몰려가서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욕하면서 떠드는데, 학교 안에서 하던 말투를 공공장소인 버스 안에서 계속 지속하더란 말이지요. 어른들도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욕하고 큰소리로 떠들어요. 평소 같으면 제가 ‘공공장소에서 말 조심해라.’하고 타이를 텐데, 그날은 그냥 패버렸어요. 때려놓고 이야기를 해야 이야기가 돼요.

‘왜 때립니까?’

‘욕했거든’

‘욕하면 때립니까?’

‘고마운 줄 알아라.’

‘왜 고마운데요?’

‘집에 가서 생각해 바라.’

요즘 고등학생들 선생님들도 손 안 댑니다. 폭력으로 경찰에 고발합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는 자기 욕망대로 살았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타야할 버스가 갑자기 오니까 급하게 타면서 학교 분위기가 그대로 버스 안까지 이어진 거예요.

‘나’라는 것은 나의 욕망의 대변자입니다. 나를 건드리는 것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맨날 바뀌면서, 오전하고 오후하고 또 바뀌면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알면서, 남이 나를 부족하다고 하면 화가 나요. 왜? 이것은 욕망에 시비를 걸기 때문에. 욕망에 시비를 걸면 욕망의 본성상 나의 욕망은 용서할지어정 내 욕망을 가로막는 상대방은 무조건 죽어야 돼요. 그래서 죽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간단하지요?

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에게 왜 죄인이라고 하느냔 말이지요.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하면 되지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뭡니까? 너희들은 처음부터 어둠이었다. 끝. ‘왜 그런데요?’ ‘집에 가서 생각해 봐라. 지옥에 가서 생각해 바라.’

나는 하늘에서 왔는데 땅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오자마자 무조건 죄인 되어버렸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진짜 자아가 강렬한 사람 같으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소리에 기분 굉장히 나쁩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해 주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처음부터 주님이 나를 쓸모없는 죄인으로 간주했다는 자체가 본성적으로 내 욕망에 시비 거는 것 밖에 안 돼요. 주님이.

요한복음 5장을 한 번 봅시다. 생명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신이 날 때부터 이미 사망의 세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욕망은 뭐가 됩니까? 죽어야 될 욕망이고, 그리고 그 욕망이 만들어 낸 나는 뭡니까? 당연히 지옥가야 되지요.

쉽게 말해서 나라는 인간이 있다는 자체가 지옥을 채우기 위해서 나라는 인간이 있어야 했구나 하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이 말씀을 이해해요.

나는 건전한 나인데 이 건전한 나를 누구 구원하지? 예수님이구나. 이렇게 해서는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돼요. 나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사망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건져냈기에 내가 전에 있었던 사망에서 비로소 생명의 세계로 옮겨간 거예요.

그렇다면 옛날 사망의 세계 때의 나는 누구의 지배를 받았습니까? 내가 사망을 조정한 것이 아니고 누구 조종해요? 죽음의 세계가 나를 지배했듯이, 그러면 자아는 뭐예요? 죽음의 노리게잖아요. 그러면 생명 세계에서는 누구의 노리게입니까? 주님의 노리게잖아요. 주님의 노리게기 때문에 나라는 것을 거기다가 내 비치면 안 되지요. 누구를 비춰야 돼요? 주님을 비춰야지요. 주님을 증거 해야지요.

이것을 방금 제가 한 해석 말고 기존의 워치만 리 식으로 해석해 볼게요.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인간이 실수해서 범죄 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지시기 독생자를 주셨는데 어떻게 주셨는가? 내 말을 듣고(그러니까 너희들에게는 들을 능력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데 너는 들을 능력이 있다) 내 보내신 이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시 말해서 너는 안 죽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우리는 어떤 인간인가 하면, 사망에 있는 게 아니고, 나만은 사망에서 빠진 인간이지요. 다만 구세주가 오지 않아서 구원 못 받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은 아니고 건전한 나지요. 왜? 메시아 오기를 기다리니까 건전한 나잖아요. 그래서 메시아와 내가 눈이 맞아서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은 나를 위한 예수가 되지요. 예수님을 위한 나가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건전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낚싯대로 우리를 건지면 돼요. 그냥 하늘에서 목소리로 ‘야, 너 거기 있지? 빨리 올라와.’ 이렇게 하면 돼요. 무엇 때문에 물과 피와 성령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건전한 인간인 이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유대인들을 보세요. 메시아를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그들에게 합당하게 메시아 보내주면 그들이 믿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성령이 오더라도 십자가 이전에 오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언제 온다고요? 십자가 지시고 와요. 왜? 뭘 책망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의와 죄와 심판이 사망에서 형성된 잘못 된 개념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의와 죄와 심판의 개념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책망의 장이 이뤄져요. 이런 것은 나쁜 것이고, 이런 것은 좋은 것이다. 구분이 됩니다. 이걸 요한 1서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속했다.’

요한 1서 4장 4-6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성령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여기 자아가 어디 있습니까? 자아는 없지요. 자아는 없고 뭐가 주인공입니까? 우리를 복속시킨 누가 주인공입니까? 하나님께 속하냐 하나님께 속하지 않느냐가 지금 누구의 결단 능력입니까? 누구 힘이냔 말이지요. 우리에게 오신 그 생명의 능력으로, 생명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뿐이지 절대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께 속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머리가 더 좋아서 속했습니까? 성경을 더 연구해서 속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 아니냐 하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예수님이 물과 피와 성령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어렵잖아요. ‘우리 힘으로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 때, ‘왜 아닙니까?’ 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못나서 그렇지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 1서에서는 ‘예수님이 물과 피와 성령으로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속할 수는 없다.’ 이렇게 답변해 줘야 된다는 것이 요한 1서의 이야기란 말이지요.

요한 1서가 이렇게 어려워요.

그렇다면 물과 피란 것이 왜 필요할까? 물과 피는 예수님께 속하고 성령은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는데 필요해서,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일을 하거든요. 그러면 이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하는데 대해서 우리의 협조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없지요.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처음 믿게 했을 때, 그 때만 하나님께 속합니까? 그 이후 나쁜 짓하면 탈락합니까? 그것도 아니죠? 성령께서 우리에게 속하기 전에 우리의 능력 없음이 분명해 졌잖아요. 없음이 분명한데 이런 인간을 성령께 속하게 했으면 이 인간이 여전히 능력 없잖아요.

현대자동차에서 영업사원을 모아놓고 자동차 팔라고 할 때,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대도 못 팔아요. 1년 가도 한대도 못 팔아요. 하도 답답해서 영업 잘 하는 사람이 몰래 자기가 건수 올린 것을 저 사람에게 넘겼어요. 넘기니까 회사에서 ‘이번에 실적 없는 사람 잘라냅니다.’ 예를 들어서 진짜 실적 못 올린 사람을 김상식씨라 합시다.

김상식씨가 실적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김영재씨는 한 달에 100대 팔아요. 그런데 회사에서 내년 영원 사원으로 남을 사람 명단을 발표하는데 김상식씨가 있어요. 2007년에도 계속 영원 사원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김영재씨가 자기가 판 50대를 김상식씨가 판 것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일단 영업 사원을 계속할 수 있는데, 앞으로 김상식씨가 잘 팔 수 있습니까? 어떻겠어요? 처음 들어올 때부터 한 대로 못 판 사람이 앞으로는 팔 수 있겠습니까? 못 팝니다.

이게 요한 1서 2장에 나옵니다. 2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됐습니다.

너희들이 처음 예수 믿을 때 기름 부음 받았다. 성령이지요.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그 다음에,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여기에 영원 지점장도 필요 없어요. 누가 있어야 하는가? 김상식씨 에게는 김영재씨만 있으면 돼요. 김상식씨 아버지 엄마가 와도 소용없어요. 한 대도 못 팔아요. 그런데 김영재씨가 계속 팔아가 누구에게 줍니까? 김상식씨에게 넘겨주는 거예요. 누가 가르칠 필요도 없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렇게 하신다. 너희와 함께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어느 날 묻지요. 상식이가 영재에게 “영재씨, 나 이렇게 무능한데 왜 당신이 팔아서 나에게 넘기는데요? 영재씨는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나를 도와줍니까?” 그러면 영재씨가 “내가 잘났거든” 이런 영재씨가 아닙니다. 성령은 내가 잘났다는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뭔가 따로 증거해야 될 분이 계세요. 그분이 누구냐? 그리스도의 물과 피를 근거로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지, 성령 내 공로로 돌리지 말고 물과 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돌려야합니다.

물과 피로 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음성으로 하지 않고 왜 육체로 오셔야 됩니까? 물을 보여주고 피를 보여줘야만 이 김상식씨는 한 대로 못 팔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잔소리나 늘어놓으시고 훌쩍 혼자 구름타고 ‘나 간다.’하고 올라가시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물과 피를 흘리시고 해야 하느냐? 그게 요한 1서 1장 10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지금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내 욕망이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는 뻑하면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안 보거든요. 우리가 무슨 소리해도 하나님이 보는 눈은 따로 있어요. 뭐냐 하면, ‘너는 죄인이다’고 규정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규정했는데, 우리가 내 욕망에 의해서 ‘나는 너보다 죄 적어. 나는 죄 안 지었어.’ 이렇게 나오면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까? 하나님이 거짓말 한 셈이 되잖아요. 결국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린 것이 되잖아요. 우리는 착한데 하나님이 잘못 판단했잖아요.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생긴다고요? ‘우리가 죄 없다’ 할 경우에.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 ‘죄 없다’고 하는 이 자체가 뭐라고요? 이 자체가 바로 사망이며 그것이 바로 죄다.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린 이유가 뭔데?’ ‘모르겠는데요.’ ‘네가 늘 나는 죄 없다, 죄 없다고 하니까 그게 아니야. 이게 진짜 네 모습이야 하고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았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곧 누가 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편을 들어줘요.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 지는 것이 옳았기 때문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뭘 했습니까? 부활 하신 후에 성령 보내서 물과 피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고, 부활은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 같아서, 스크린 있다고 해서 돈 받는 영화관 봤습니까? 여기에 뭔가 영상을 남겨야 되지 않습니까? 그 부활이란 스크린이 남긴 영상이 뭡니까? 물과 피와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셨다. 이게 십자가예요. 왜? 성령이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십자가 지신 후에 성령이 오니까.

세상에 어느 영화관이 ‘우리 집에 스크린 있다. 돈 5,000원 내라.’ 이런 영화관이 있습니까? 영화관에 가서 스크린 봅니까? 깨끗하네. 그게 뭔데?

부활이란 것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한 부활이에요. 그게 어린 양의 어린양 되심을,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써의 부활이란 말이지요.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부활은 십자가를 본격화시키기 위해서 부활되신 거예요. 부활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셔야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물과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우리의 무슨 죄? 내 욕망에서 만드는 ‘나’라는 것이 ‘뭐 믿어서 영생 얻을까?’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죄며, 이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 받는 것을 증거하는 헛된 짓인 것을 성령께서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인성으로 왔다’는 그런 조직신학적인 말이 아니고, 그 전체가, 그런 조직신학 자체가 여전히 인간들의 자기 구원 욕구, 욕망의 화신으로서 나온 거짓된 신학인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5분 쉽시다.

(2006. 11. 28. 14:27 녹취 마침)

우리교회(IP:122.♡.57.66)

06-12-05 21:09

광주 강의 061124b

광주 강의(06. 11. 24) 20-2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뭘 했느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하늘에서 오셔야 생명이지 그냥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사망의 세력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요한 1서 2장 15절에 보면, 세상이 이러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잖아요. 세상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은 누구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고,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 말은 결국 평소 우리에게서 나왔던 게 뭐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 결국 자기가 나왔던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제가 철학을 공부해도 ‘사랑’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 한 사람이 없다고 제가 단정 짓는 이유는, ‘사랑의 출처’에 대해서 이야기는 안 하고,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요.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화평하고, 사랑은 도와주는 것이고--’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여러 가지 현상들을 설명 하더란 말이지요.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에, ‘나는 성격이 어떠하다. 직업은 무엇이다. 키는 얼마이며, 몸무게는 얼마다.’ 이렇게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아무리 주워 모아도 ‘내가 누구냐’를 몰라요.

‘내가 누구냐?’는 것은, 피조물인 이상은 ‘내가 누구냐’로 접근하면 안 되고, ‘나는 어디에 속했다.’는 것으로 설명해야 된다는 것이 요한 1서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달리 ‘내가 누구냐’를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 왜 그러냐? 우리에게서는 피와 물은 성령이 안 나와요. 물과 피와 성령이 안 나오면 그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살아있는 호랑이와 같이 놀고 뒹굴고 하면 굉장히 위험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살아 있기 때문에 성질나면 물잖아요. 그러나 호피(호랑이 껍데기)를 방바닥에 깔고 무서워합니까? 호피위에서 뛰놀고 뒹굴고 마음 놓고 놀 수 있잖아요. 무늬는 똑같아요. 그러나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산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것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세상이기 때문에. 욕하면 같이 욕하면 되고, 누구는 성질 없나 하고 성질내면 되는데, 세상에 속한 자에게 사랑하는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죠. 성경에서 “사랑은 여기 있나니”라는 말은, ‘사랑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 지금 소속이 어디야?’ 그걸 묻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피조물은 ‘내가 누굽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 소속이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이유는, 그 소속 때문에 나 잘랐다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그 인간은 그 소속되게 하는 원리, 원칙이 위에서 지금 억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 1서에서는 ‘새로운 계명’이라고 합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말하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위주로 자기 입장을 고려한 차원에서 하는 ‘사랑’을 늘어놓는데 하늘에서 인정을 안 해줍니다. 이것은 부도수표입니다. ‘그것은 이놈아, 이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목사님,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내가 예수 믿고 이런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이 하나님 사랑 아니란 말입니까? 왜 그렇게 심하게 매도합니까?’ 이렇게 하는데, 진짜 사랑은 피와 물과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증거 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보장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성령이 보장해 줍니까? ‘야,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것은 진짜 사랑이다.’ 그렇게 보증해 주는 그런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간이 행한 것을 가지고 절대로 증거하지 않습니다. ‘아무게가 뭘 했다.’ 이런 것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증거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저는 이번 겨울수련회의 주제로 로마서를 다뤄볼까 생각중입니다. 그리고 다음 12월 28일 안산 공부는 로마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때요? 괜찮지요.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요. 그러면 누가 빌 바를 압니까? 성령께서 잘 아시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왜 빌 바를 안다고 하는가 하면, 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령께서 왜 우리 기도에 대해서 점수를 안 주느냐 하면, 제대로 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고, 그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시는가는 누가 아십니까? 성령께서만 알아요.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깨지는 가운데 뭐만 아느냐 하면, ‘아하, 이런 식의 기도는 응답 안 되는구나.’를 알지요.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그렇게 했어요. 예수 믿고 난 이후 뭘 얻는 게 아니고, 있는 것조차 다 빼앗긴다. 나아만 장군은 뭘 빼앗겼습니까? 장군이라는 그 명예와 명성 다 빼앗기지요. 심지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가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요. 스데반 집사는 뭘 빼앗겼습니까? 목숨을 빼앗겼잖아요. 예수 믿고 목숨 빼앗겼잖아요. 스데반 집사는 목숨 빼앗겨도 영생이지요. 왜냐하면,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이제 소속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소속이 생명 소속이라면 그딴 목숨 버려도 괜찮아야 된단 말이지요. 남들이 나를 미워해도 소속이 주님 소속 같으면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위대함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미움 받는 일도 감수해야 됩니다. 감내해야 돼요. ‘예수 이름으로 네가 욕을 먹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머리위에 임했느니라.’

사도 바울은 뭘 빼앗겼습니까? 다 빼앗겼지요 뭐. 다 빼앗겼어요. 사도 바울은 안 빼앗긴 게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자고’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 땅에서 죽은 자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야야기를 요한 1서에서 비추면 뭐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이걸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설교 초두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골치 아플 때는 천국에 한 번 다녀오면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삼층천에 가보니까, 본인이 올라갔어도 그곳에서는 ‘나’라는 것을 규정지을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이 내 맞나, 안 맞나?’ 할 정도로. ‘그 사람이 누구지?’ 할 정도로. 그 정도로 황홀했고 완전히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로 그 영광이 대단했단 말이지요. 그리고 난 뒤 다시 세상에 오게 되면, 세상 만물의 찌기처럼 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가슴조리고 서글퍼하고 낙심하고 낙담하고 그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거인처럼, 난장이들에게는 작은 돌멩이도 장애고 냇가도 장애지만, 다리가 길쭉한 거인은 듬성듬성 걷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이게 무슨 동네야? 복음 전해야지. 뭐 되도 않은 소리해. 복음 전해야지.’ 이렇게 듬성듬성 가기 때문에 그야말로 큰 사람이죠. 이것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미 천국을 봤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별 문제 안 되지요. 그것이 소속이 달라서 그래요. 스데반 집사님도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돌이 그냥 돌멩이 그대로 급속도로 날아와도, 아프긴 하지만 그것은 호피 아닙니까, 호피. 살아 있는 호랑이는 주님 저기 계시고, 내가 만든 것은 호피라니까. 호랑이 껍데기에요. 나중에 때 묻고 낡고 하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연연해서 ‘아이고, 잘못 됐습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예수 안 전할게요.’ 이런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단이다. 악마의 종이다.’ 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야구 심판이 포수에게 날아오는 공을 보면서 가운데로 오면 스트라이크, 옆으로 비껴나면 볼이잖아요. 비껴난 공을 볼이라고 했다고 투수가 듣고 ‘너, 나 미워하지’, 미운 게 아니고 나는 공이 밖으로 벗어나느냐, 볼. 바로 들어오면 스트라이크 이겁니다.

벗어나면 이단이고 바로 들어오면 성도고. 그게 뭐가 나쁜데? 우리가 해야 될 일이 그것 아닙니까? 누구 눈치 볼 일이 뭐 있어요. ‘저, 볼인데요. 투수님 스트라이크로 해 줄까요?’ 심판이 이렇게 해서 무슨 야구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도 사도 바울도 정확하게 냉정하게 그야말로 목격자답게 행동한 것입니다.

요한 1서와 연관되어 있기에 요한복음 마지막을 한 번 봅시다. 21장 24-25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보세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여기에 무슨 정치적 압력을 받겠습니까? 여기 북핵 문제가 왜 들어가요. 독도가 여기 왜 들어갑니까. [양무리 마을] 사이트에 보면 독도이야기 나오는데 독도가 왜 들어가는데? 독도 증거하라고 예수님 제자 되었습니까? 독도가 왜 들어가는데요? 기독교로 세상을 정복하려니까 그 따위 소리가 나오잖아요.

세상은 우리 소속이 아닌데 왜 세상을 정복해야 돼요? 껍데기 같은 것을 왜 정복해야 됩니까? 사도 바울이 UN사무총장 됐습니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귀향 갔어요. 세계 초국가의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다. 정치문제에 관여 안 해요. ‘너희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세상 에 불구하다.’ 그 이야기 했다고.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육체는 절대로 생명을 생산해 낼 수 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하면 안 됩니까?’ 예수 믿고 난 뒤의 생명은 우리가 만든 생명이 아니고 피와 살을 주신 그분이 만든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자랑 하겠습니까, 예수님 자랑하겠습니까? 예수님 자랑하지요. 그래서 물과 피와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요한 1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지난 시간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이 뭡니까? 만약에 우리가 죄 없다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예수의 피와 살, 성령 보내심은 말짱 헛짓한 거예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만약에 제가 신학교를 세운다면 목사 고시 칠 때 요한 1서를 가지고 문제를 내고 싶어요. 3장 9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 구절 설명해 보라고. 이게 무슨 뜻이냔 말이지요.

시간은 4시간 정도 주고(성질 급한 사람은 10분 만에 나오지만), 성경도 다 보면서 하라고 하고. 백날 성경 봐도 성령 안 받으면 못 풀 문제예요.

[십자가 마을]에서 제가 이것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절대 죄 안 짓는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그러니까 ‘나는 그런 이야기 안 했습니다.’ ‘왜 안 하는데?’

00씨는 그 내막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 하는데, 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생각한 것이 있어서 그래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듯이 두 번을 물었어요. ‘죄 절대 안 짓습니까?’ ‘나는 죄 안 짓는다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안 합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데’

사도 요한이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 짓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그 이야기를 못하느냔 말이지요. 그 이야기를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전히 자기 속에 선과 악의 가계부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과 악의 가계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요한 1서를 볼 자격도 못돼요. 자기 속에 선과 악의 가계부가 있다는 자체가 ‘생명’이라는 말을 할 입장에 있지도 못하다는 뜻이에요. 그게.

자기 속에 가계부가 있어서 착한 일 하면 선, 나쁜 일 하면 악. 그래서 방종하지 말라고 했다면, 요한 1서 3장 9절 말씀, 박옥수가 좋아하는 말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는 구절을 한 번 설명해 보란 말이지요.

당신이 진짜 생명 얻고 진짜 예수 믿는 것 같으면 예수 믿기 전에는 몰라도 예수 믿고 난 이후에는 일체, 단 한 번도 죄 지은 일이 없어야 돼요. 진짜 죄 지은 일이 없는 것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근호의 십자가는 틀렸다. 이제 우리는 절대로 죄 짓지 않는다.’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이호식씨.

빠지려면 확실히 이호식씨처럼 빠지든지 --

그러면 사도 바울은 뭐냐, 바울은 믿음이 약해서, 이호식 나만큼 믿음이 안 좋아서 그런 소리하는데 아직 바울은 멀었다. 적어도 사도 요한쯤 되어야지. 사도 요한 봐라. 얼마나 용감하노. ‘하나님께 난 자는 죄짓지 않는다.’ 완전하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쪽에서, 워치만 리 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인간은 신 되게 했다.’ 신이 뭐예요? 무슨 죄짓는 신이 다 있습니까. 이상한 신이 다 있네. 신이 죄를 짓는다는 말은 신이 하는 말에 오류가 있다는 말이고, 신이 하는 행동도 실수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게 무슨 신입니까. 이건 마귀지 어떻게 신이 이럴 수 있습니까. 죄짓는 신이 마귀잖아요. 안 그래요? 맞지요?

‘죄가 무엇이냐?’ 라는 개념을, 이런 마음속의 가계부를 가지고 죄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자체가, 이것이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자기가 구원 받고자 하는 욕망이 양산해 낸 적그리스도적인 발상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짓도록 그냥 두지 않는 분이 계신다. 그걸 요한 1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에 나오지요. 사랑이 있는 곳에는 뭐가 없다? 심판이 없다는 거예요. 죄는 있는데 심판만 없는 것이 아니고, 아예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사랑은 죄까지 없애주는데, 사랑 안에 무슨 작용 때문에 없어지느냐 하면, 요한 1서에 보면 그걸 ‘화목제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화물제물’을 쉽게 일상적인 용어로 설명한다면, 요한 1서에 잘 나와 있어요. 그게 바로 ‘사귐’입니다. 원수지간이었는데 이제 사귀는 거예요. 김상식씨하고 김영재씨가 한번 사귀고 안 사귀는 겁니까? ‘이번 달에는 내가 채워줬는데 다음 달은 내가 보장 못한다.’ 이게 사귐입니까? 아니죠. 김영재씨가 있는 한 김상식씨는 실적 때문에 잘릴 일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너무 건수를 잘 올리니까, 그쪽 실적 반을 주니까. 김상식씨 같은 영업사원의 경우 김영재씨가 있는 한 회사에서 나가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바깥세상에서 보면 그 상태가 뭐냐?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죄 안 짓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아들이 잘못 한 게 많지요. 그럴 때 엄마가, ‘네가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너를 호적에서 파낸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지요. 그렇다고 호적에서 빼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가 그래도 되느냐?’하면서 나무라지요. 이렇게 나무라는 자체가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부모의 사랑이잖아요. 사랑. 히브리서 12장에 보세요. ‘징계가 없으면 남의 자식이다.’

그러면 아들이 부모의 사랑을 다 압니까? 다 몰라요. 모르면서 사랑을 받지요. 그런데 엉터리 같은 놈들은 알아야 사랑 받는다는 거예요. 믿어야 사랑 받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다 알아요. 지금은 희미하게 밖에 안 보이는데. 다 아는 것은 천국 가야 다 아는데. 지금은 희미하게 밖에 모르지만, 뭐가 오기 때문에? 이상하게 계속 나를 용서하고, 계속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카드 가지고와서 죄 지었는데 얼마 결재하면 됩니까? 이래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나무라는 것도 사랑이고 징계도 사랑이고 살아가는 발자국도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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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