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마을을 새로 시작하면서
십자가 마을을 새로 시작하면서
이름 : 이근호(IP:220.81.176.151)
십자가 마을’을 새로 시작하면서
베드로전서 1:10-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대목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이미 선지자들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 계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미리 들어가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도대체 그 선지자들 속에서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입니다. 즉 선지자 개인적인 구원 챙기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을 사용하여 장차 자신이 지상에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시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의 진정한 존재 의미와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연 자기 구원 챙기기입니까? 자기 의로움 챙기기입니까? 전에 선지자에게 들어와 계시는 그 ‘그리스도 영’이 오늘날 성도에게 도착해야 비로소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로마서 8:9) 이것은 성령께서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나 성도에 의해서 조종받는 영이 아니라 혹은 이미 ‘성도의 영’이 되어 버린 ‘성령’이 아니라 아무리 성도 안에 들어와서도 어디까지나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마치 옛날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증거 할 뿐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말입니까? 오직 택하신 성도를 통해서만 그러합니다. 만약에 성도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행한 것을 증거 한다면 이는 비록 자신은 성령 받았다고 우겨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이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공중이 권세를 잡고 있는 악령입니다.(에베소서 2:1-2) 이 세상 신입니다(고린도후서 4:4). 항상 마음씀씀이와 정신을 땅의 것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그런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게 만드는 영입니다.
하나님에게 열심도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로움을 쌓기 위한 행위이고, 열심이고 충성이요 지식입니다.(로마서 10:2-3)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義)을 거부하게 만드는 영입니다. 이 타고난 자신의 영에 지배를 받으면, 결국에는 ‘자신의 잘남’과 ‘위대함’과 ‘절대성’을 증거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이것에 시비걸면 본노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죽는 것만 궁극적으로 남게 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자신의 영’만 있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가지고 침투하셔서, 성도의 마음 속속들이 박혀있는, 아담의 품성을 죄라고 규정하시고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런 일을 하시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6:8-15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은,
1.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우리에게 알리시고 적용시키신다.
2. 우리 인간을 책망하실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신 그 십자가 복음과 진리와 진리와 사랑과 지혜와 자신의 영광성을 가지고 우리를 책망하신다.
3. 이로서 이미 ‘산 자’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내부에서는 ‘책망의 장(場,)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우리의 인간적인 판단 사이의 격차를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와 상한 심령을 유지하도록 하신다.
4. 이로서 우리는 성령님의 요구대로 오직 ‘예수님의 증인’으로 남게 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이 원칙이 우리 성도 속에서 맹렬하게 쉬지 않고 작동을 하게 되니(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3) 그동안 우리 인생살이를 통해 미처 예상치도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 죄의 깊이를 더욱 알게 하사, 그런 죄를 위해서 단번에 해결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의 공로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영광에 대해서 세상에 증거토록 하시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수립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4-8)
이 본문에서, ‘악한 세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면, 이 현실이 왜 ‘악한 세대’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지를 오직 성도만이 ‘자기 몸을 버리신 십자가’ 앞에서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영’께서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래야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집니다.
인간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그냥 긍정적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악한 세대’에 속한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하고 어쨌든 자신을 존재 가치가 있는 위대한 의인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본심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른 기준으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늘 우리를 책망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다 드러납니다. 그것도 평생토록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브리서 4:12-13)
그렇다면 이 성령은 누구에게만 주어지는가? 구약 때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처럼, 요한복음 1:33에 보면, 신약 때도 실제로 성령이 임한 자들이 발생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 세례는 모든 인간이 다 이 혜택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택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뿐입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데살로니가후서 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디모데후서 1:9)
이렇게 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만을 증거하게 되는 특수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교회란 인간들의 종교적 조직체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성령으로 인하여 연결되고 교제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1-22)
이 성령님으로 인하여 교제되고 연결되는 교회는 모퉁이 될 되시는 예수님과 사도와 선지자와 오늘날의 성도가 모두 공통점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을 증거한다는 특성을 띱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 것을 증거 할 수 밖에 없으면서 기어이 교회라고 우기는 자를 자동적으로 제거하고 배제하는 능력으로도 일하시게 됩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친히 교회의 주인되셔서 늘 교회를 성령을 통해서 발생시키십니다. 제거될 자를 제거하고 새로 들어올 자를 들어오게 하십니다.
이 작업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서 움직입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디모데후서 4:14-15)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1:18-20)
교회를 새삼스럽게 목사가 소유하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교회는 오직 이미 예수님의 손에 있기에 목사가 새삼스럽게 교회 사라질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한다는 자체가 주인 행세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요구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시는 대로 감사히 회개하면서 움직이면 되는 겁니다. 즉 목회자는 주님으로부터 ‘사로잡혀 있으면’ 그만이지 자꾸만 교회를 ‘자기 교회’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참으로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디모데후서 2:26)
우리는 스데반집사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때에도 인간대접 못 받고 날아오는 돌을 정면으로 맞아죽는 지독한 개죽음 속에서 하늘에서 자신의 반겨주시는 주님 얼굴의 광채에 어쩔 줄 몰라 평안해하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한 그 스데반집사처럼, 늘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이 봉사의 교제를 나누는 사이트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