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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일반] 20051108 부산강의-딜타이(2)우리교회[일반]

[일반] 20051108 부산강의-딜타이(2)

이름 : 한윤범(IP:61.73.48.238)

그런데 누구 히트 쳤느냐 하면, 이게 히트 쳤어요. 왜냐? 바르게 살자 하는데 바르게 못 살잖아요. 못 사니까 여기에 성만찬의 위력이 등장하지요. 성만찬의 위력이 등장할 때 성만찬의 위력이 중요한 것은 누구 성만찬을 주재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성만찬을 주재하는 사람은 한 하나님 밑에 하나 밖에 없는 교회 지도자가 해야 되는데 하나 밖에 없는 교황의 지도자한테 인정받은 자격증, 받은 그 신부가 개최한 성만찬을 떡 받아먹으면 구원 받습니다. 일반대중들은 복잡한 교회 필요 없어요. 누구 허락받고 성만찬하면 그 성만찬 인정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터툴리안은 더 웃기는 이야기가 성만찬할 때 참회하고 회개하고 해야 된다. 회개한고 난 뒤에 성만찬 참석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죄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고민이거든요. 한 번은 봐준다. 그렇게 되었어요. 한 번은 봐준다. 두 번은 안 되고.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식이 되니까. 돼지가 그러니까. 한 번은 봐준다.

그래서 교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그 다음부터 회개를 안 했어요. 왜냐하면 해봐야 죄 지니까. 임종 직전에 해서 앞에 있는 걸 전부다 용서받으려고. 둘 다 통박 굴리기는 대단하죠. 개판이라 개판. 예수님 복음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교회를 권력단체를 만들어서 유지하려고. 지금 한국이랑 똑같아요.

차라리 딜타이가 낫잖아요. 진리, 진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목사, 니는 방금 그 소리 한 것, 10년 뒤에 책임질래. 10년 후에 가면 또 무슨 소리 할지 모르는 거예요. 왜? 역사는 바뀌니까. 열반했습니다. 고함질렀잖아요. 그래서 바뀌는 놈이 이상한 사람이에요. 우리 주위에 바뀌는 사람 많습니다. 내가 옛날에 잘못 생각했다는 거예요. 책 내놓고 책 내용은 지금 틀렸다는 거예요. 그건 딜타이에요. 그렇다면 또 뭘 바뀔지. 앞으로.

그게 [지옥의 하나님]에 보면 나옵니다. 처음에 신학교 가서 졸업할 쯤 되면 개혁신학대로 하면 먹고 살 줄 알았어요. 개혁신학대로가 아니라 순복음으로 해야 먹고 사는 거예요. 한 5년 쯤 해 봐야 아는 거예요. 이제는 순복음 식으로 하는 것도 안 먹히고, 천주교식으로 해야 돼요. 목사 권위로 성만찬 잃어버리면 교인들은 교리고 신앙이고 교회사고 나발이고 조직신학도 다 필요 없고. 뭐 하면 구원받습니까? 떡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땡큐하고 가버려요. 돈 내고. 땡큐하고 가버려요.

성만찬 하기 위해서는 목사 권위 높이기 위해서는 장로 권위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장로 권위를 높이는 것은 사실은 장로 위주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목사 권위를 높여서 교인들로 하여금 간편하게 패스포드, 간편하게 목사, 장로, 집사 되어 있는 장로교회는 정통 이단 아니니까 거기서 성만찬하고 등록한 교인은 구원받습니다. 간편하게. 거기다 나중에 공동묘지까지 만들어버리면 끝장이에요. 하이라이트는 공동묘지에요. 노인네들은 교회 올 때 공동묘지 있는 교회 가버립니다. 왜? 죽어서 자식들한테 부조금 자식들 주고, 지는 교회에 짐 지우려고. 이걸 배우는 거예요.

신앙논쟁 한다는 자체가 철이 없는 거예요. 철없을 때 하는 거예요. 한국교회 개혁 어떤 그것도 철이 없어요. 양 무리고 이리 무리고 간에 그것도 철이 없어요. 나중에 목회 해 보세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노회 만들어서 어느 노회에 가입해서 정통으로 세례 받고 거기서 장로 되고 집사 되고 승진하고 그걸로 노회 많아서 놀러가고 그게 끝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정된 교회고 좋은 교회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말씀이 ( ) 없는 사람한테 한국교회 잘못됐다. 복음 전하자하면 그 사람들 부담스럽습니다. 귀를 닫아버립니다. 마음 문을 닫아버리죠.

그런데 딜타이의 모르는 것을 하이데거가 알고 있어요.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했어요. 딜타이는 역사가 돼야 변하고 나중에 역사 끝에 안다 하잖아요. 역사 끝을 하이데거가 먼저 알아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다. 이것 밖에 없다. 이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개념입니다. 하이데거가 딜타이한테 힌트를 얻었어요. 그러면서 멈추지 않고 역사의 끝, 다시 그려 봅시다.

인간은 외부적으로 역사가 흐르죠. 그러면 역사의 흐름이 딜타이에 의하면 생생하잖아요. 역사를 어떻게 느낀다? 생생하게 느끼죠. 생우동, 생라면. 하여튼 생생하잖아요. 그럼 생생한 게 이 안에 들어오죠. 하이데거는 뭐가 역사를 생생하게 보게 하느냐 하면, 역사를 생생하게 만드는 생생한 인간 속의 마음이 뭐냐? 이걸 뭐냐 하면, 이건 바로 가장 생생하지 않는 건 뭡니까? 시체잖아요. 그 시체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하는 그 생생함이 역사를 생생하게 만들었다. 딜타이, 선배님 그건 모르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역사를 생생하게 보느냐? 그냥 역사는 변한다. 우리의 진리는 한시적이고 임시적이다. 왜 그럴까? 그걸 몰랐지요. 하이데거는 알았어요. 그거는 외부가 아니고, 내 마음이 문제인데 내 마음의 역사가 외부로 나오는 역사로 보는 거예요. 그 말이 맞는 게 똑같은 사건이 터져도 일기장에 쓰는 사람이 있고 일기장에 쓸 가치도 없는 게 있어요.

일반사람들 기차 타도 교회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관심 있는 사람은 꼭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교회 잘 지었네. 우리 교회 저렇게 지을까? 관심이 다 있잖아요. 마음의 역사. 그래서 일기장에 쓰려고 하면 어디 가는데 교회가 아름답더라. 남들은 사건 취급도 안한 사건을 집어 들죠. 어떤 교회가 어떻고, 이렇게 하지요. 만약에 몸이 찌뿌듯한 사람은 일기 쓰려면 뭘 쓰느냐 하면, 청도 가면서 온천탕, 게르마늄 그걸 쓸 거예요. 야, 저 온천탕 언젠가 가봐야 할 텐데 그걸 쓸 거예요.

드라마에서 짝이 없는 사람들은 싱글들은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좋아요. 이미 결혼하고 한 50대 아줌마들은 그러한 주말 드라마보다는 일일드라마, 가정사이야기, 그게 또 흥미가 있는 거예요. 금쪽같은 내 새끼라든지 금순이 이런 이야기가 좋은 거예요. 그것은 역사는 누가 만든다? 바로 인간, 내가 만들고, 그러니까 존재자는 다 다르죠. 존재자는 다 다르지만 그 많은 존재자가 공통점이 있더라. 그거는 죽음에 대해서는 도망치더라. 그걸 존재라 해요.

죽음에 대해서 도망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가 없어지는 걸 무서워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이 근본이 아니고, 존재가 근본이다. 한 것이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를 가지고 뭐 기존 인간의 철학 가운데 최고의 철학으로 쳐주죠. 이 하이데거의 선을 넘으면 이쪽 세계는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불교 세계입니다. 하이데거는 뭐까지 못 넘느냐 하면, 존재까지는 됐는데 존재가 항상 뭐로 바뀌느냐 하면, 자아로 바뀌잖아요.

그런데 불교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자아가 아니고, 무아 세계죠. 자아라 하는 것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들이 일시적으로 잠시 조립한 것이 자아고, 그게 흩어지면 자아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아가 천 개, 만 개 될 수도 있고, 자아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요. 현재 내가 누구다고 아는 것은 임시적이고. 불교는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불교는 역사가 없어요. 그냥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물결, 그걸 관계망이라 해요. 관계망을 인연이라 하지요. 관계망으로 조성되는 거예요.

그 불교와 유사한 철학을 한 사람이 화이트헤드입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에서 출발했고 베르그송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딜타이의 생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살아있는 철학을 해야지 촉촉하고 쭈물쭈물 거리고 만지면 감각 있는 살아있는 철학을 해야지, 관념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다 버려라. 살아있다면 역사는 살아있고, 나머지는 살아있지 않다. 역사만 살아있다. 그게 바로 딜타이의 철학입니다. 그렇게 기초를 알았으니까 한번 봅시다.

18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현실 그 자체는 결코 논리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직 이해될 뿐이다.]

여기 '이해'라는 말이 나왔지요. 이거는 누구 이야기냐 하면, 슐라이어마허 이야기입니다. 슐라이어마허라 하는 것은 종교란 그걸 조직신학으로 틀을 잡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지금 뭘 느끼지? 하고 이해, 또는 느낌. 느낌으로 신앙 생활해야 된다는 게 슐라이어마허였습니다. 슐라이어마허로부터 해서 신학이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서 감정으로 갑니다.

나중에 니체가 오게 되면 감정에서 뭐로 가느냐 하면, 의지로 갑니다. 의지라 하는 것은 사실은 개신교 칼빈, 루터부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의지라 했는데, 이 의지는 ‘권력의지’라 합니다. 의지는 그냥 의지가 아니라 항상 권력을 힘을 추구하는 의지인데 그걸 지금까지는 억눌러왔다는 거죠. 그걸 억누르지 말고 그걸 개방해 보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걸 억누르는 이유가 그건 나쁜 의지야. 라고 어떤 선을 바라고 악은 추방하고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속에서 올라오는 권력의지를 그렇게 짓밟았는데 도대체 선이고 악이고 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놈들이 결국 자기 형이상학에 불과하더란 말이죠. 언 놈이 같은 인간끼리 선이고 악이고 할 놈이 있으냐 말이죠. 전부다 그게 힘 있는 자의 논리 밖에 더 되느냐 말이죠. 도덕이라는 게 힘 있는 자의 논리.

이런 것은 인간에선 밟아선 안 된다. 마음껏 개방해야 된다. 풀어놔야 된다. 그래야 인간 속에 있는 잠재적인 것과 가능성 두 가지가 있는데 달라요. 잠재적이라 하는 것은 이미 내부적으로 들어있는 거지요. 가능성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없지만 희망이 보이는 걸 가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잠재력과 가능성을 마음껏 개발하는 니체를 가지고 뭐냐? 적극적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그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소극적 허무주의인데 쇼펜하우어에요. 죽자. 둘 다 허무주의에요.

재미있는 것은 자꾸 적극적 허무주의가 소극적 허무주의를 뭐라고 훈계하느냐 하면, 그거는 허무주의다. 맨 날 훈계하는 거예요. 맨 날 욕하는 게 뭐냐? 너는 허무주의다. 십자가 하면 뭐라고 합니까? 소극적 허무주의로 자꾸 간주하는 거예요. 허무주의다. 모든 게 죄다. 허무주의다. 해야지. 그러니까 해야지 하면 허무주의가 아닌 줄 아는 거예요.

해야지 하는 말은 허무주의란 말은 여러분 용어를 잘 보세요. 허무주의란 말은 선과 악의 기준을 탈피하고자 나온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너희들이 선과 악을 추구 안 한다고 나한테 욕했다고? 그래, 그래. 허무주의 할게. 이래서 허무주의에요. 되는 대로 사는 것, 유비쿼터스. 어디서 나올지 출발할지 모르고 툭툭 튀어 나오듯이. 요새 애들이 유비쿼터스 아닙니까? 애들 행동이 지 마음대로 아닙니까? 말려도 안 되잖아요.

이게. 분열적 정서에요. 그래서 선악의 논리로 하면, 집착적 정서고 허무주의는 분열적 정서. 이걸 둘 다 정신병으로 보거든요. 라캉이나 프로이드는. 선악을 주장하면 이거는 편집증, 하나에 집착하는 편집증. 하나의 마니아처럼 빠지는 거예요. 허무주의는 뭐냐 하면, 이거는 종잡을 수 없는 분열돼. 분열증. 계속 상상과 공상을 일삼는 분열증. 그리고 이 둘 다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리고 둘 다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수시에 따라 이게 나올 수도 있고, 이게 나올 수도 있고.

왜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냐 하면, 왜 이 둘 다냐 하면, 인간은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자아가 의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걸 최초로 밝힌 사람이 프로이드입니다. 자아에 의식에 있는 게 아니에요.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자아가 의식에서 나온다고 본 겁니다. 무의식에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프로이드에 대해서 반박하는 반대하는 논리들이 많습니다. 무의식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래야 자아를 되찾는 수가 있어요. 만약에 무의식에 맡겨 놓으면 이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사형제도 없애버리자 하는 말은 뭡니까? 사회가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데 좋은 사회 만들면 개도 건전한 사람 될 수 있어. 이게 사형제도 반대하는 사람의 주장이거든요. 사회가 사람을 죽였는데 왜 그 사람한테 모두 책임을 묻느냐? 이거거든요. 왜 유영철에게 묻느냐? 이렇게 보고. 그 인간이 나쁜 게 아니고.

왜? 인간의 자아는 어디에 있다고요? 그 인간한테 있는 게 아니고, 자아는 유영철에게 있는 게 아니고, 무의식에 있고, 그 무의식의 관계는 뭐냐 하면, 무의식을 둘러싼 사회가 여러 가지 요소가 유영철을 형성하기 때문에 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회가 죽인 것이지, 지가 죽인 게 아니다.

참, 복음이 없으니까 짓을 해, 아예 짓을 해. 꼭 자기 존재를 정당화시키고 의인되고 싶어서.

181페이지 중간 위에 봅시다. 찾아보세요.

[딜타이에게서 자기의식은 '행위라는 나'] 그것뿐이에요.

행위 하는 나와 이게 자의식이라는 거예요. 자아가 내부에 들여다보면 나오는 게 아니고, 어렵지만 한번 보세요. 여러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행동하면 자아가 나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도 아니고. 자아 들여다보면 자아가 나온 것도 아니고, 행동하게 되면 자아가 드러난다. 이것도 아니고. 행동하면 자아라니까. 그걸 이해하세요.

내가 행동을 이렇게 하는 걸 보니까 자아가 이렇구나. 이게 아니고, 자아는 본인은 몰라요. 세월 따르면 내가 어떻게 살지 몰라요. 지금 행동하는 자체가 자아라니까.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까 내 자아가 이런 인간이구나. 이게 아니고. 그건 칸트가 다 이야기했고, 옛날에 피히테가 다 이야기한 거고.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어떻게 행동할지 자아가 안다, 모른다? 나도 모른다. 다만 행동하는 그 순간에 아,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그것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행동이 자아에요.

이것도 비슷한 이야기 성경에 있네. 마태복음 10절. 10장에 보면. 니가 어떤 말을 할 때 니가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낼 때 말을 할 때에 니가 말하려고 하지 말고 니 속에 말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라. 그것하고 똑같아. 유사하죠.

실제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설교 이렇게 하게 되면, 나중에 설교 녹음한 것 못 듣습니다. 너무 모든지 어깨에 힘 들어가면 뭘 해도 안 돼요. 골프도 안 되고 당구도 안 되고 뭐 해도 안 되죠.

미리 예상한다는 것은 결국 예상한 것이 그걸 선취라 하는데 자아한테 와버리잖아요. 그러면 자아가 드러나 버려요. 주님을 드러낸다 하면서도 자꾸 자아가 드러나요. 왜냐하면 자아 속에 자기가 준비한 설교가 자꾸 거기에 그 다음엔 이 말 해야지, 그 말 준비해놨잖아요. 그 말 끄집어내야지 한다고.

천방지축 내질러버리면 오히려 그것이 딜타이처럼 생생한 생 설교가 돼요. 준비된 설교는 별로고. 나중에 따져 보면 그런 욕도 안 나와야 될 건데 왜 욕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욕이라고 해서 나중에 비난 받을 만 하지만 들어보면 적당하게 썼다. 잘 튀어나왔다. 설교는 내질러버리세요.

이게 바로 기존의 보수적 교단에 속하지 않은 개척교회 목사의 장점입니다. 기존 교단에 속해버리면 교인들이 그걸 듣고 일러버려요. 다른 교회, 다른 교단에 일러준다니까. 좀 틀리더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요. 눈치를 본다는 것은 눈치 보는 자아가 형성돼야 되잖아요. 행동하는 나는 눈치 볼 게 없잖아요. 행동 자체가 자아기 때문에 무슨 행동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게 딜타이가 주장한 거예요. 완전히 형이상학을 다 깨서 선악이고 뭐고 윤리고 도덕이고 다 부셔버려요. 행동하는 게 나와요.

자, 182페이지 봅시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182페이지 제일 위에.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의미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그리고 182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죽음의 순간에 이 전체를 전망할 수 있다.]

이미 하이데거가 그 점에서 천착해서 더 깊이 들어가 적이 있지요.

182페이지에 보면,

[묵시적 예언이 시간을 종말에 고착함으로써 시간을 파괴하는 반면, 예측은 그 직조로서 시간을 도리어 생산한다.]

야, 참.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흔히들 시간 반대가 묵시라 보잖아요. 묵시 반대가 시간이고. 그러니까 시간 반대가 묵시고 묵시 반대는 시간이니까 이 시간과 묵시의 사유 말고 다른 어떤 변화 사유는 없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딜타이는 묵시는 시간을 파괴해 버리죠. 왜? 미리 예측하니까. 미리 예측하니까 파괴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건 뭐냐? 이건 종교가 되고 이거는 신앙이 되죠. 이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이성이 아니고, 교회만, 성경만 좇아야 돼요. 지금 이 사람들은 성경 필요 없이, 지금 근대철학은 성경 없어도 우리의 이성 가지고 따져도 신에게 나갈 수 있다, 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이건 안 되지요. 묵시는 안 되지요.

시간이 흘러가봐야 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러면 당신은 의미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딜타이는 생성하는 시간, 어떻게 생성하느냐? 묵시가 예측 가지고 파괴한다면, 예측 가지고 시간을 생성한다고 생각해 보자 말이죠. 그렇게. 그게 한 사람이 누구냐? 선취라고 하는데 그게 하이데거나 딜타이에서 나온 걸 주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의미 없이 살진 않는다 말이죠. 내가 미래의 주체자로서 지금 내가 예언을 만들어내는 예언자 되면 되지 않느냐 말이죠. 예언자 내가 하고 그 예언의 성취도 내가 해버리고.

그러면 내가 역사의 주인공인데 단 알아야 될 것은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나도 변하고 시간도 변하면 이것도 변한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나중에 갈 때까지 가보자. 그게 허무하게 느껴지지만 허무 하냐, 안 하냐 쪽으로 그것도 사유로 생각한 것이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이 진리 아니냐? 생생한 생철학이니까. 생생하니까 이게. 이래서는 안 된다, 된다가 아니라 생생하게 느끼면 그게 전부다 이 말이죠. 니, 꼴리는 대로 해라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게 젊은 애들 특징이 이겁니다. 미래가 없잖아요. 마음 끌리는 대로.

그런데 그렇게 마음 끌리는 대로 하는 애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그 마음 끌리는 대로 행동할 때 돈을 쓰게 되어 있고, 그 돈은 부자 부모가 도와준다는 것이고. 가난한 집에 애들은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하질 못하죠. 그럼 지가 공무원시험, 사법고시 공부해서 부잣집 애들처럼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하죠. 그게 나중에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생이라는 그게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산'이라 하는데 나중에 라캉이나 이런 사람을 보면 이것도 비판받지요. 생산할 때 생산의 내용은 자기가 생산하는 게 아니고, 딜타이는 자기가 생산한다. 타인의 욕망, 타인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이 부러워해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생산하죠. 인간은 행동한다. 뭘 본보기 삼아서? 남이 갖고 있는 좋은 것, 나한테 아직 없는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 모든 걸 가지면 행동 안 하겠네. 천만에 말씀. 모든 걸 가지면 가난한 자가 되고 싶어서 환장하죠. 가난 하냐, 부자가 아니라 무조건 현재 없는 것만 무조건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합니다. 인간은 현재 내가 없는 것만 무조건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힘 빠지고 기운 빠지면 가을남자처럼 바바리 깃 세우고 과거를 돌아보면서 찬바람이~ 불러와도 노래 부르면서 가을에 떠나가요 노래 부르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인생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관조하면서 동양화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죠.

동양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을 작게 그려요. 자연은 크게 그리고 자연보다 더 큰 그림은 안개에요. 여백이 커요. 그러니까 동양화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포부기 때문에. 나, 저렇게 살고 싶어. 시간이 오고 오는 세월도 정지된 상태에서 고기를 몇 마리 낚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서양화는 막대한 고기가 있어요. 고기는 안 잡힙니다.

그냥 낚싯대 드리워요. 얼굴도 없어요. 삿갓에 가려서. 흐르는 강과 자기 사이에는 안개가 끼고. 여백이 있죠. 모든 것이 무로 다 날아가요. 그게 동양화에요. 동양의 모습입니다. 참, 별 짓하며 지옥 다 가요. 별 것 다 구상하며 지옥 다 가요. 실컷 상상하면서.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도 동양화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여기에 마지막 어려운 것 하나 해 봅시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18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개인의 경험은 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들에게 해당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한 규정이 생명의 흐름 가운데서 변화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해석이 다 달라지니까.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에 있었던 일을 사십 살 때 해석과 오십 세 때의 해석이 달라요. 이것은 변화한다는 뜻이고,

[그러나 이런 과정이 생명의 진행 안에서 완료될 수 없는데, 이런 사실로부터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파생되는 게 아닐까?]

극단적인 상대주의.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죠. 그럼 니는 뭐고?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이거 누구 이야기했어요? 스토아가 이야기했지요. 스토아의 철학은 하나 밖에 없어요. 자연스럽게. 끝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예정론도 나오고 운명론도 나와요. 운명론, 예정론, 그리고 금욕주의 다 나와요. 자연스럽게. 왜냐하면, 욕심을 부린다 하는 것은 새로움을 창출하니까.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없는 거거든요. 없는 걸 찾는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스럽게 만들어요. 자연스럽게.

스토아학파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디오게네스. 황제가 와서 뭐, 소원이 뭐냐? 좀 비켜 줄래요? 햇빛 좀 가리지 말고. 토굴 같은데 들어가서 거지생활하면서. 그리고 또 뭐 합니까? 대낮에 등불 들고 가요. 뭘 찾습니까? 진리가 없어서 찾고 있다. 요새는 밧데리 들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다 부자연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에 의해서 공격 받게 되어 있고, 그 공격이 뭐냐? 인간이 불행이 온다는 거예요. 인간의 비극은 자연스럽지 않기에 온다는 거죠.

그런데 성경에 자연스럽지 않은 걸 가지고 이걸 지옥이라고 해요. 거지 나사로 맞은편에 부자. 부자는 자기는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예를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지요. 이게 부자연스럽잖아요. 바르게 살아야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래를 예상해서 부자연스럽게 사는 이것을 가지고 위즈덤, 이게 지혜에요. 그러니까 이 성경구절이 얼마나 어려운 해석입니까? 거지 나사로와 결합이 돼야 돼요. 거지 나사로 이야기와 결합되어야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부자연스러워야 돼요.

예수님은 위험스러운 분입니다. 함께 다니면 안 돼요. 다니면 꼭 죽습니다. 너무나 위험스러워요. 그래서 지난 주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제자들 다 도망했다고. 마지막 최후의 징조 주니까 도망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은 무척 위험한 분이에요. 같이 놀면 안돼요. 놀면 죽어요.

바로 바리새인 보고 니가 도를 알아서 나와 지금 심판주가 와도 믿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자연스러움 자체가 자연스럽거든요. 아, 이렇게 넓은 길로 가서 지금 멸망의 길로 가고 있구나. 이게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설교자의 제일 큰 아픔은 뭐냐 하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부자연스럽게 만들도록 설교를 해야 된다는 이게 진짜 총대를 메고 에이, 죽어라. 차라리 나한테 돌을 던져라.

이번에 예상대로 한다면 저는 부천개혁교회 설교제목을 스데반 집사로 지금 생각해요. 장로 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라. 죽는 게 부자연스러워요. 하이데거 보세요.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사도 바울은 뭡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얼마나 부자연스럽습니까? 이게 무슨 스토아철학입니까? 반대지.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은 전부다 사도 바울은 뭐가 들어있다? 스토아철학이 다 들어있고, 영지주의가 들어있다. 이렇게 해석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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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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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