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악마와 싸우는 사람들
[일반] 악마와 싸우는 사람들
이름 : 이근호(IP:220.230.121.160)
악마와 싸우는 사람들
악마는 자신을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 본인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법조항이나 야구나 축구의 규칙을 적용시킬 때와 같은데, 누가 야구나 축구 규칙을 설명하면서 “나는 이로서 죄인입니다”라고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공격수가 최종 수비수보다 앞서서 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잘 설명해주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마치 축구 규칙 설명하듯이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교회란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것을 알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참으로 바른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악마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이대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 본인의 죄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결코 드러날 필요 조차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서 하늘에서 내린 법조항인 말씀이 눈 앞에 있고, 그것을 설명해내는 본인이 있다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고 여겨질 것이다. 물론 이런 성경 해석이 바리새인들의 해석이요, 그리고 그들은 이런 식으로 모세 율법을 설명하여 예수님과 마찰을 이르켰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해당한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일을 하신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동안 인간은 악마의 지배 하에서 성경을 해석해 왔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들의 성경 해석은 예수님의 성경 해석과 같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을 핍박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해석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성경 해석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본인만큼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나는 해석을 해온 것이다. ‘실컷 바르게 성경 해석했더니만 신으로부터 그 해석자가 저주받는다’, 이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예수라는 분이 와서 자기네들을 향하여 “너는 엉터리 성경 해석을 했어. 그리고 너의 아비는 악마야.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지만 바른 성경 해석이야”라고 주장하는데 있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자기를 소경이라고 여기는 자는 소경이 아니고, 소경이라고 여기는 자는 소경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소경이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성경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라고 더 이상 소경이 아니라 이미 소경에서 벗어난 인간임을 증명받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곧 소경이라니!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함부로(?) 주장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성경 해석에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사실을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일하심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이름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 이유는, 다른 이름, 즉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성경 해석을 제대로 해내지 못함이 확실히 확정되었음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성경 해석 능력에 의거해서 자기가 구원받는 자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해석과 인간의 해석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예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고 단지 주시는 대로 받아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피조물은 그 존재와 기능을 통해 스스로 독자적인 영역을 가질 입장이나 자격자가 되지 못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언명을 주신 취지가 바로 이런데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독자적인 자아성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런 태도는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를 과실을 따먹을 위상에서 배제당해야 될 태도이다.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주체에 인간은 스스로 자아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피조물로 변했다.
실은 그 ‘피조물’이라는 종속된 관계조차 벗어버리고 아예 피조물이라는 의식 자체에서 탈피해 버린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인간의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는 다 ‘나’라는 ‘자아의 산물’로서 수립되고 구성된다고 믿게 되었다. 아무리 신이 무슨 혜택을 주고, 무슨 은혜를 준다 할지라도, 결국 ‘나의 것’, ‘나의 소유’로 느끼질 때만 나에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고 무슨 일을 하셔도 그것이 최종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새사람 되고 ‘내’가 천국가고,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義)를 생산해 내어도 ‘나의 의’가 되지 아니하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십자가 의가 나에게 들어와서 ‘내 의’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나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바로 그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심어놓은 악마의 십자가관이다. 그런데 오직 이런 악마의 십자가관만이 인간들에게 알기 쉽다. 그래서 서로 의견일치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관을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님은 일체 인간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해 준 적이 없다.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하다. 피조물은, 그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가치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증거자에 불과하다. 즉 독자적이 가치가 처음부터 허용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간이라는 피조물에 남기시는가?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이렇다. ‘날씨가 개었다’는 말과 ‘날씨가 맑다’는 말은 순간적인 자연 현상적으로 놓고 보면 동일한 현상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의미상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날씨가 개었다’는 말은 그 전에 비가 왔다든지 아니면 구름이 꽉 끼어있다는 전(前)의 사정과 그 경로를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냥 ‘날씨가 맑다’는 것은, 그 전에도 맑았고 지금도 동일하게 맑다는 말이다. 하지만 ‘날이 개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맑지가 알았는데 이제는 비로소 하늘이 맑아졌다는 말이다. 의미가 완연히 다른 것이다. 비가 조금 전까지 내렸다는 지나간 상황이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날이 개었다’는 표현은 곧, 지나간 사정까지 포함시켜 그 경로와 과정도 지금의 의미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면서, 혹은 시장통을 다니면서 가슴에 커다란 글씨나 “나는 수감자였다”라는 것을 써붙이고 다닌다. 물론 이 사람은 지금은 자유 시민이다. 교소도에 수감될 필요없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화장실이나 관공소나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 사회적인 그 어떤 차별을 받을 필요가 없이 완전한 자유시민 맞다. 하지만 그 사람은 평생 자기 가슴팍에다 “나는 수감자였다”는 써붙이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왜 그런가?
보통의 자유시민과 이 자유시민과의 차이점이 무얼까? 그것은 과거의 자기 사정과 그 사정에서 이렇게 자유시민이 된 경과와 경로를 보여주는 임무로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해서, 이 특별한 사람은 비록 남들처럼 자유인으로 살아가지만 자력으로, 혹은 자율적으로 자유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수에서 지금의 자유시민으로 신분을 바뀌게 하는 그 분을 증거해야만 한다는 사명에 예속되어서 자유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헤헤. 나는 이제 자유시민이다. 이제 모든 것을 내 자율적으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는다. 거기에 비해서 단 한 번도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없는 일반 자유시민은 당연히 “나는 모든 것을 내 자율적으로 행하며 산다.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거야. 나는 나의 가치와 의미를 절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가슴에 ‘나는 전에 교도소 수감자였다’를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일반 자유시민과는 달리, “나는 나의 가치와 의미를 위하여 자유시민된 것이 아니올시다. 나는 이 명찰을 늘 떼지 못하고 늘 가슴에 품고 다니므로서 말마암아,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신 그 분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거자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비록 내가 이 도시에서 살해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조차 그 분께서 그분의 십자가 공로만을 증거하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라고 고백을 쏟아내게 된다.
이런 원리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경의 원리이다. 출애굽기 13:1-2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출애굽에서 오직 히브리인 장자만이 살아남았다고해서 그 장자가 그 집안이나 가문의 소유로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죽지 않고 구사일생 살아남았더라도 이미 그 장자는 영원히 하나님 소유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인생이라고 확정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록 가족과 함께 살아도 가족 입장에서는 이미 죽은 자이다. 다시 가족 소유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어린양의 피로서는 엄연히 ‘산 자’이다. 이 원리가 신약 시대에 와서 활짝 성취가 된다. 예수 안에서 성도는 ‘자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산자가 아니지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산 자로 여김을 받는 자이다. 마치 가슴팍에 ‘나는 수감자였다’는 명찰을 붙이고 다니는 자유시민과 같은 처지이다.
또한 사도들의 성경에서 되풀이해서 나오는 표현들이 전부 이처럼 경로나 과정을 증거하기 위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표현이 갈라디아서 2:20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만약 이 성경 구절을 악마적인 안목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어째거나 저째거나 나는 새 사람된 것 맞잖아”라는 해석이 튀어나오게 된다. 즉 성경 말씀의 내용이 ‘나의 것’이 될 때만 비로소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성경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사도들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어째거나 저째거나 이미 나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었으니 내가 무슨 행위를 해도 나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있어 영광 돌리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실현→그리스도→자아실현의 코스를 밟는 것이다. 모든 성경 구절을 이런 안목에서 해석하니,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혜택을 입었나 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되니 주님의 공로는 지나간 한 때로 족하고 마는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얼마나 더욱 더 위대하게 되느냐 하는 일만 남게 되어버렸다. 쉽게 말해서 가슴퍅에서 ‘나는 수감자였다’는 명찰을 떼버리는 것이다.
다시 자기 자신은 자아의 소유권으로 넘어왔다. 자신의 구원이나 신에게의 영광도 다 자기 행함에 좌우되게 되었다. 이런 입장을 고수하면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날이 개었다’가 아니라 ‘맑다’로 변형시켜 버린다. 계속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아니되고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로 본다. 자아성을 계속 구축하자니, 그 자아를 가치있게 만들어 줄 내용들을 여기저기를 가져다니 채울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니 자연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보다 많은 축적된 타인과 차별지는 ‘나만의 의로움’, 타인이 차별지는 ‘나만의 거룩함’, 타인과 차별지는 ‘나만의 착함’을 자기 존재의 내용물로 채워 넣어서 그것으로서 독자적인 자아의 행위의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 보이려고 애쓴다.
특히 교회관의 경우, ‘나에게 소유된 교회’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것이 더 이상 주님의 소유에 머물러 둘 수는 없고, 인간 손에서 운영되고 점점 완성되어 대상품으로서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는 거기서 생계비를 평생토록 정당하게 뽑아먹어도 된다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콩시루에 물을 부은 자만이 콩나물을 쏙쏙 뽑아먹을 자격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소유의 교회’이기 위해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저런 조건만 갖추면 내가 하늘에게 올바른 정품 교회라는 이름의 생산제품이라고 인정해 줄께’라는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악마들의 성경해석은 바로, 이런 교회관을 요구하게 된다.
즉 비록 나에게 소유된 교회라도 너무너무 제품이 잘 나왔기에 하나님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것 참, 하늘에서 재료만 보내주었더니만 목회자가 훌륭해서 교인들과 뜻을 합하여 제대로 교회다운 교회를 하나 만들어내었구먼. 기분이다!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 다 내가 천국에 넣어줄게. 너희들은 전원 합격!”이라는 칭찬 생산이 가능한 대상체로서 교회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기체적 교회관’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런 심보에서 비롯된다. 그 배후에는 ‘나에게 소유된 교회’이고 더 나아가서 ‘평생 생계비 뽑아먹어도 괜찮은 내게 속한 교회 갖기’ 심보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이 머리되시고 직접 관리하시는 교회라는 덩어리를, 어떻게하든지 를 인간 목회자의 손과 교회 제도권 속으로 인수인계 받는 것이 가능한 교회가 되게 교회관을 수립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교회를 수주해서 하청업무가 성사되는 독자적 교회관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바른 목회해서 바른 교회 만들어내면 그만아닌가”라고 우긴다.
이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바른 교회’가 되려면 그렇게 목회하는 목회자는 하자가 없고 정당해야 한다. 따라서 당연히 목사 자신만큼은 다시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나 일반교인으로부터 지적받을 필요조차 없는 특수계급을 형성해야만 했다. 죄가 있다면 주님이 자신에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고 하청주실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교회를 담임했다는 말은, 더 이상 죄에 대해서 지적받을 대상에서 면제 대상이 된다는 주장을 늘어놓게 된다.
즉 가슴퍅에서 ‘나는 수감자였다’를 떼버리는 목회자이다. 그 대신 그 가슴퍅에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요 하나님이 사자이다’가 명찰이 대신 붙어있게 된다. 모두다 악마가 세워준 악마의 종들이다. 쉽게 말해서 “이 교회는 내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불하받았다”라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 참된 교회는 모두들 가슴퍅에 "나는 죄인이었다"라는 명찰을 붙이고 다닌다. 그렇게해서 나를 의인되게하신 경로와 과정을 주도하신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것이 흐려지면, 이는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에서 탈락되어야 될 자들이다.
오늘날 주님은 성도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시면서 주님이 사시는 하늘나라로 곧장 곧장 데려가시지 않고 그냥 이 땅에서 왜 그대로 살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죄인이었다”를 가슴퍅에 붙이고 이런 악마의 종들과 영적 전쟁을 하라고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이야말로 유일하게 ‘악마와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가치와 의미를 따로 남기 위해서 모든 성경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악마가 가르쳐준대로 살아가는 악마의 무리들이다. 거기에 비해서, 자신을 죄에게 구원해주신 그 십자가의 공로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성도이다. 이들 사이에는 타협이나 휴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악마의 정체를 끝까지 드러내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멈추지 않는 업무이시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성도는 계속 소모되고 또 소모될 것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스데반 집사님을 비롯해서 모든 사도들이 이 순교와 죽음의 길로 이어졌다. 지금은 지금 시대의 성도들이 담당해야 될 차례이다. 이러한 죽음의 행렬은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