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22-26 /요셉의 죽음
요셉의 죽음 2003년 7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50:22-26 50:22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50: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50:26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죽는 마당에 소망이 무엇일까요? 소망은 각 사람마다, 각 시대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신약 시대 성도의 소망과 구약 시대 성도의 소망이 다를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내용을 채우듯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전체로 보면, 천국이란 악마의 머리가 메시야에 의해서 깨어져야 가능한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소망이 뻗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우리들이 만약 "소망이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요셉은 다음의 두 가지 토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그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언약, 즉 약속을 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언약에 의해 앞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은 언약이라는 이름의 긴 화물차에 실려 있는 화물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각 칸마다 각자 자기 역할이 따로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도와 임대차 계약을 맺은 것과 같습니다. 키 작은 자는 키 작은 채로 하나님과 임대차 계약을 한 것입니다. 목소리가 나쁜 사람은 그렇게 나쁜 채로 하나님과 계약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천국가도록 그렇게 화물칸에 실린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본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될 형편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먼저 24절에서, 먼저 있었던 언약을 소개합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두 번째로 그는 화물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말합니다. 25절에 보면,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언약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의 해골을 약속의 땅에 묻게 됩니다. 여호수아 24: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자신의 해골에 대해서 관리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자기 자식을 바쳐야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물"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온갖 순교자들과 신앙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보이는 세력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지금은 홍해 갈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물 위로 걷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토대로해서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처음 말씀드렸듯이 소망이란,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언약의 내용 밖의 것은 결코 소망거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소망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원칙에 준해서 보면,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의 소망의 윤곽이 잡히게 됩니다. 이 점을 위해서 저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언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8:26-31에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빌립은 내시에게 어떤 식으로 성경을 풀이했으며 내시는 무엇에 근거해서 그 말씀의 내용을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8:34-36에 보니,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대목에서도 예수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최종 근거로서 제외시킨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끝맺어야 올바른 성경 해석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이용해서 믿음이나 소망의 근거로 삼을 만한 실적 같은 것을 따로 챙기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자체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생겨난 어떤 사건을 자신이 구원받은 증거물처럼 간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신앙의 근거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쪽으로 넘어와 버린 셈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신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이근호목사의 십자가 신학임-이렇게 되니 이근호목사 본인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서는 안되는 신학이라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자신의 변화에 따라 믿음도 같이 변동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참으로 그 어떤 증거물도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의 경우와 같습니다. 죄수가 탈출되고 난 뒤 간수의 개인적인 입장이 난처하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 사도바울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네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자 여러분 과연 이 말씀 자체를 믿을 만 합니까? 괜한 헛소리에 불과하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확실한 소망을 가졌다고 자부하시렵니까? 제가 놀란 것이 이 말씀을 한 사도가 아니라 그 말을 곧이 듣는 간수의 태도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토록 믿는다는 것이 쉬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보면, 믿는 것처럼 쉽고 편한 것도 또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누가복음 23:39-43에 나오는 두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한 강도는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구원해 내라"고 다구칩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 물에 안 빠진 사람이 건져주는 법입니다. 같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물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한 강도는 이 상식적인 시선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쉽게 나오겠습니까? 이 고백이 쉽다면 당연히 우리 인생도 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소망의 확실성이 우리 인생을 장악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인생이 불행할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소망이 제대로 된 소망이라면 이 소망을 위하여 그 외의 것을 소망거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기대감 때문에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평가하는 쓸데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강도를 보면서, 정말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외 모든 것을 가볍게 포기할 수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신 것은, 부름 받은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를 덮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셉이 후손들은 요셉이 죽을 때 남긴 말은 제대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요셉이 죽기에 비록 요셉과는 헤어지지만 요셉을 요셉으로 불러주셨던 그 일관성있는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는 결코 그들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 계획 안에서 못 벗어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망에 의해 호출당한 것입니다. 소망이란, 자신의 장래가 이미 결정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성도라고 자칭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결정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 우리의 해골로 실려 가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죽음을 너머서는 세계를 후손들에게 소개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죽음을 능가하는 소망을 남들에게 말해 주도록 합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보이는 약속의 땅을 요셉을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접근해 들어가듯이 오늘날 우리들도, 비록 여기서는 안보이지만 강도가 편히 쉬고 있는 그 낙원을 소망하며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맨날 우리 형편을 따지고 계산하면서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고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