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5 : 1 (주님의 성실함)
사 25 : 1 (주님의 성실함)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이사야 25장 1절
제목 : 그 날에
일시 : 2006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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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6-11-15 21:07
여호와의 성실성
2006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이사야 25:1-2
(사 25: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사 25:2) 『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견고한 성읍으로 황무케 하시며 외인의 궁정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염두에 둘 사항은,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만약 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의 성실함이나 하나님의 진실함이 다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여야지만 하나님답다고 판정내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나를 오늘 밤에 죽이거나 나를 지옥 보내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 합당한 일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이란 이사야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찬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을 이해해서 그 분이 하신 모든 일이 당연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날 때, 그 사고의 희생자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은 그 백화점의 무너짐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가 나타났다고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무너진 잿더미 속에서 사랑하는 외아들이 묻혀서 죽었다고하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부모와 죽은 아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런 재앙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해석을 가지로 하나님을 대하게 되겠습니까?
단순히 평소의 믿음가지고 버티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데려가시겠다는데 우리 인간이 붙잡을 수 있겠어? 하는 수 없는 참을 수 밖에 …”라는 식으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진심에서 우려나는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일 처리 정말 잘 하셨습니다. 훌륭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항상 자기 입장에서 대했는데, 하나님께서 깊은 뜻이 계셔서 나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그 자체가 고마울 경우에는 이런 감사가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에게 없는 존재입니다. 평생을 그저 십자가 앞에서 까불고 또 까분 기간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하면서 까불고, 어떤 사람은 집사하면서 까불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사람이 까부는 것을 우리가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어떻게 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만 전부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하는 증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열왕기상 16:3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그런데 이 말씀은 여호수아 6:26의 말씀과 관련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왜 하나님은 무너진 여리고성 자체를 그냥 두게 하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 즉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기념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있음’이라는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게 됩니다. 자꾸만 ‘자신의 있음’을 주장하게 되면,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에 대해서는 털끝 하나 손상 입히지 말고 도리어 자신의 아쉬운 점이나 모자라는 점까지 보충해 내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은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해서 성실하시고 진실 하신 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된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자신이 스스로 있다고 여기는 자를 그냥 두시지 않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리고성은 그렇게 해서 무너진 성이요, 그 무너진 황폐함 그대로 대대로 두게 하시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전달케 하시려는 겁니다.
무너진 여리성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념물인 것이 아닙니다. 야곱 백성 자체도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기념물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하게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늘 우리 자신은 벌써 없어져도 상관없는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진작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자들이 우리라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말라기 1:3-4에 보면,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페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돔의 나라들은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아무리 우리 성읍을 무너뜨려도 우리는 다시 쌓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무리 쌓아도 내가 다시 무너뜨리고 저주해 버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 에서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실까요? 그것은 그들이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은 항상 자기 유리한 입장에서 신을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깨닫기 하기 위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기어이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에서의 족속은 결코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인간들은 저주받기 위해서 반드시 이 땅에 등장시키고야 마는 것이 하나님의 진실함이요 성실함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랑이 자신의 공로를 근거로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오로지 주님 자신의 성실함과 진실함 그 자체의 증거와 기념물로서 자신들이 사랑받게 됨을 압니다. 바로 이런 야곱만이 여호와를 제대로 증거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