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십자가의 은혜는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 십자가의 은혜는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이름 : 조규현(IP:222.115.248.80)
십자가의 은혜는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인간 쪽에서 알아 처리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면 십자가는 무의미 한 것이 되어 버린다. 십자가는 구원의 한 조건으로 1회용으로 필요한 것 뿐이다.
성경에는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고 부인했던 자 중에서도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베드로와 가롯 유다이다. 심지어 이 들 두 사람의 장래의 삶까지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예언까지 하셨다. 또 십자가상의 양 강도 중 한 사람은 구원되고 한 사람은 구원되질 못했다.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창기와 거지 나사로가 구원되었다. 이를 두고 믿음으로만 구원되는 것이며 믿음은 선물이라(엡2:8)이라 하였다. 현대어 성경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엡2:8)”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예지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미리 아셨고(예지), 그 결과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인간에게 새생명을 주어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준비하셨다(예정)는 것이다. 아울러 선택과 유기에 있어 그 숫자까지 미리 정하여 두셨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어거스틴의 개인적인 사상의 주장이 아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엡1:4)”하셨다는 그 신의(神意)와 비밀을 계시 받은 바울의 체험을 그대로 말한 것 뿐이다.
루터가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자존심을 최대한 치켜세우는 ‘영광의 신학’은 참 신학이 아니라고 하였다. 믿음을 인간의 의도대로 요리할 수 있으며 신의(神意)를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신학을 공격한 것이다. 루터에게는, 죽을 때까지 의인(義人)이면서 죄인인 이중적(二重的) 존재를 부정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 하나님” 또는 “낯선 하나님”일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참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는 꺼리기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심히 미련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십자가 사건’을 지금도 끊임없이 자기 백성에게만 발생시키시는 그 분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 사건’이란 가톨릭에서 말하는 ‘미사’가 아니라, 성도에게 성령이 내주하시어 십자가의 은혜를 늘 확인시키시는 그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내 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고전 15:10 )”임을 고백하게 하신다.
성도는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이 땅에서는 육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중성(二重性)을 바울은 로마서 7;19-2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또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사신다(갈2;20)고 고백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의 삶이 이래야 한다느니 저래야 한다느니 기준을 정하여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매 순간마다 성도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느낄 따름이다. 이 느낌이 실제 상황으로 닥아 오는 자에게는 이론과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