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서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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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존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서론 1-2
04. 9. 20 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조직신학의 분류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에 연장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까지 올라가는데 결국은 다 떨어지고 예수님만 달랑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심을 누가 도와주었습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근호 목사가 도와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혼자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부처도 안 되고 공자도 안 됩니다. 다 이루심이기에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우리의 착함으로 보태어야 한다는 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죠! 혼자 다 이루셨다는 것은 혼자서도 다 된다는 말입니다.
혼자서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은 예수님만 믿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선행을 보태야 하늘나라의 상급을 더 받고 하는 것도 없고 그냥 하늘나라고 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예수님만 올라가셨기에 여기에는 절단, 단절입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묵시세계의 거룩성입니다. 우리가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착함의 대결 또는 정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묵시세계의 거룩이란 누구뿐이냐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only 오직 누구뿐이냐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거룩은 예수님만 거룩하신 분이기에 다른 사람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 마틴루터 킹 목사? 그들이 십자가를 졌습니까? 거룩이라는 말을 어디다가 갖다 붙이는 것입니까? 성자의 무리? 거룩이라는 말은 예수님만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홀로의 거룩성입니다. 그것은 결국 절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홀로의 거룩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이 어렵습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됩니다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겠지요.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열심히만 하면, 노력만 하면 누구나가 다 구원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못 배워서 그렇고 헌신이 없어서 그렇지 누구나 열심히 헌신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면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구원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라이프니츠의 계시론 입니다. 나중에 할 것인데 라이프니츠는 신에게서 주어진 우리는 모나드라는 단자이고 그 단자에는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주름처럼 접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접혀져 있는 것이 펼쳐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계시론 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언약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빠졌다고 하면 그 사람이 욕합니다. 예수님이 빠진 것이 아니고 언약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홀로의 예수님이 빠져버리고 예수님은 하나의 시범조교 모델케이스로 보는 것입니다. 저렇게 착하고 저렇게 이웃사랑하면 나도 구원되겠네! 이런 식의 엉터리 메시아가 되러버리는 것입니다. 엉터리 메시아입니다. 언약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서 결정된다고 하였습니까? 언약으로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언약을 모르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예수 믿는 것도 내가 결단해서 믿어야 하고,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모를 때 나오는 모습입니다.
언약을 알게 되면, 언약은 누구만 이룰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을 누가 다 이루신 것입니까? 예수님만 이루십니다. 베드로는 왜 안 됩니까? 아까 베드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묵시세계의 악마의 힘을 모르는 것입니다.
악마의 힘을 모르고 보이는 것은 역사세계이니 역사적 존재인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을 잊지 않고 모아둡니다. 일기장처럼 모아두는데 모아두면 그것이 자기의 역사가 됩니다.
자기 역사란 텅텅 비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난주에 와서 이런 일을 하였고 이번 주는 이런 일을 하였고 다음주는 이런 일을 할 거야! 이런 것이 잊어지지 않고 모아 모아서 사건의 뭉치를 만들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역사를 인간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포기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물위를 걸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것을 잊지 않고 모아 모아서 나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간증하는데 마귀가 지겠습니까? 웃기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간증하는데 마귀가 지겠습니까? 마귀는 누구만 겁냅니까? 예수님만 겁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재료입니다. 그런 재료하고 상대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인간이 괜히 착각해서 병들었구나!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구나 하면서 마귀 쫓아낸다고 기도한다고 하면서 돌아다니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적인 것이 아니면 반드시 역사적인 것이 되고 역사적인 것이 아니면 반드시 언약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역사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의 뜻은 무엇이냐?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해 왔습니다. 무엇을 하였는데?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사사들이 나타나서 블레셋 미디안 군사 무찔렀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해 온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모방하고 그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이사야가 말하기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참된 제사가 된다고 하니 저희들이 십일조를 해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내가 십일조 내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십일조 하였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십일조 해 보셨습니까? 십일조 해 보고 욕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가 어려운데 십일조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해보고 나서 욕하라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이런 때에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자기 팔목을 전기톱으로 자르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돈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돈을 내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헌금내지 마라는 교회만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까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 했다! 구제했다! 금식했다는 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네가 의인이라고? 차라리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저 자가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언약을 이루고 말씀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악마의 능력과 역사의 무게를 얕잡아 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죽기 직전에 들어가서 공포를 느끼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봉사 헌신하여도 자기생활이 어려워지면 그 다음부터 교회를 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의를 포기하였다고 하여도 자기 자존심 상하면 교회 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한 여자는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이혼하기 전에 있는 사람에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난리입니다. 이혼하더라도 교회는 나와야지요! 예수님보고 나와야지! 그런 자존심을 초월 해야지요! 라고 하였던 그런 사람이 막상 본인이 이혼하고 나니 교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부끄럽잖아요! 인생 실패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남들이 수군수군 대면서 무슨 소리 하는지 뻔히 아는데 내가 미쳤습니까? 그곳에 가게! 그러면 그동안 교회에는 어떤 조건하에 나온 것입니까? 어느 정도 욕 안 얻어먹을 만한 어느 정도의 조건이 구비되었다는 하에 그 교회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 상처 안 받았다는 조건하에 나온 것이고 목사에게 욕 안 얻어먹었다는 조건하게 나온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꿈꾸는 역사를 달성하기 위하여 주위 사람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무게입니다. 자기 자존심에 못 이기고 자기위신과 자기체면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무게입니다.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하니 상급도 없겠다고 욕하지만 네가 강도가 되어가지고 예수 믿을 수 있는지 해 보세요!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못 믿습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지 않은 믿음은 인간이 믿음을 흉내 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인간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로 잡았습니다. 그것이 조직신학입니다. 완전히 신학을 조져놓은 것입니다. 조직신학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고요? 인간이면 누구나 납득이 가고 해 낼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구원이 될 수 있는 체제, 시스템을 갖추는 이것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일반교인들은 조직신학하면 참 못들은 이야기입니다. 신학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도 조직신학은 잘 못 들었습니다. 조직신학이 무엇이냐 하면, 계시에 관하여 계시론, 인간에 관하여 인간론, 하나님에 대하여 신론, 예수님에 대하여 기독론, 성령에 대하여 성령론, 삼위일체에 대하여 삼위일체론, 구원에 대하여 구원론, 그리고 마지막 때에 대하여 종말론, 교회에 대하여 교회론 이런 것들을 묶어서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마치 31가지의 아이스크림을 모아서 파는 것처럼 신학의 여러 가지를 조직신학으로 묶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조직신학을 한 것을 가지고 으스대는 것입니다. 왜? 너희가 이런 조직신학을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배웠으니 아마추어가 어디서 까부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님! 성령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예! 제가 조직신학에서 성령론을 배웠는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종말론을 배웠으니 종말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원의 과정이 어떻습니까? 부르심 소명 칭의 믿음 의인 양자 수양 성화 영화 이런 것이 있던데 그런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 제가 이번 금요일부터 강의하겠으니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조직신학의 체계를 갖추어 놓으면 고객들이 와가지고 한수 배우고 목사들은 그것을 가르치면서 돈 값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의 권위가 삽니다. 그런데 그것하고 천당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하고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 호기심입니다. 삼위일체가 어떻습니까? 삼위일체 알아서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조직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이 점점 더 성화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더욱더 향상되면서 예수님처럼 올라가게 되면 인간의 품위가 달라지고 인간의 행동거지가 달라지고 술도 담배도 다 끊고 완전히 성화된 거룩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도덕적 방법이 동원된 것이 조직신학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누가 거룩합니까? 예수님! 베드로는 거룩합니까? 하나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삼년동안 배워놓고 기껏 한 것이 배신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때가 되매 주께서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닭 울 때 베드로가 안 것입니다. 닭 울 그 순간에 잘못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끌어오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닭이 울고 싶어서 울었습니까? 주님이 울게 하셔서 울은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알았습니다. 그것도 처음에 안 것이 아니라 세 번 울 때 알았습니다. 네 번을 울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닭보다도 못한 자신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닭은 순종하였는데 자기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지금 초라하게 맥없이 죄수의 모습으로 사그라지고 무너지는 모습이지만 그 초라함 속에서도 닭은 위대한 메시아를 발견하였는데 베드로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서 내 살자면서 배신 때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묵시를 볼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믿는 초라한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는 의미를 알겠지요!
그래서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지 순례하는 놈들 전부다 사기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가, 즉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성지인데 어디서 역사적인 유물을 찾습니까? 그러니 평소에 신앙생활 안 했다는 증거입니다. 평소에 주님과 함께 교제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비행기타고 날아가야 합니까? 성지순례란 목사들이 놀러가고 싶어서 핑계된 것입니다. 그것도 훈장처럼 두 번 갔다 왔다고 자랑하고 세 번 갔다 왔다고 자랑하고 그렇게 갔다 온다고 교인들이 얼마나 돈을 퍼 넣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직신학이 죄 입니까? 죄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이지요! 죄이면 안해야 할 텐데 왜 합니까? 그렇게 강의를 해도 죄이니 안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의를 해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습니까? 예! 그러면 기도 안해야 되겠네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해 보아야 내 기도하는 내용의 응답과 내일 주어질 응답이 얼만 핀트가 맞지 않는지 목도하고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죽어가는 인간이 아닙니까! 죽어가는 인간이 어떤 이유 때문에 죽어 가는지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자식을 놓아서 키워 보아야 자식이 얼마나 못 된지 알고 그 못된 자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고 그러면서 자신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 키우면서 속상한다고 자식을 죽일까요? 그게 아니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역사는 죄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죄인가? 왜 나는 예수님 없이는 못 사는가! 나는 왜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옥갈 수 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부모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모르니까! 부모님이 안 믿고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이 두고두고 원망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는 죽기 전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처 믿겠다고 찬불가나 틀어놓고 죽었는데 정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인데 정말 지옥이 있다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런 적개심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네 엄마를 아느냐? 내가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더 알지! 네 엄마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내가 안다. 엄마가 70평생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가면서 살아놓고서 감사한 적이 있는가? 없네요! 부처한테 감사해놓고서 무엇이 엄마가 착해? 너에게 잘해 주었다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목사님 너무 비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비정한 것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때려죽인 것이 비정한 것이 아닙니까? 에덴동산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처럼 설쳐가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 그것보다 더 비정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 훔친 것 비정한 것이 아닙니까?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따먹어요? 하나님의 것을 왜 손댑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셨는데 자식이 왜 비정한 것입니까? 그것이 네 것이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의 사랑의 꽂히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됩니다. 이 교회에다가 꽃꽂이를 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꽃꽂이 해 놓은 것 만져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꽃꽂이 해 놓은 사람은 환장합니다. 내가 꽃꽂이 해 놓은 것을 왜 만지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해버리면 그 사랑에 의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고 헤어져보세요! 미칩니다. 특히 비 오는 날에 유행가 음악에 그런 음악이 나오지요! 사랑하고 사랑의 대가도 모르고 헤어지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른 여자와 헤어졌다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슈퍼 아줌마하고 헤어졌다고 울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한 여자인데 그 여자가 나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지 않을 때 괴로워서 울고불고 난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작살입니다. 고래잡이 작살이 고래에 꽂히면 작살을 꽂은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작살입니다. 쏘았다! 꽂혔다! 사랑은 내가 주었으니 내 것이다! 부부싸움이 그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것은 너는 내 것이야! 하는 뜻입니다. 너는 내 말 안 들으면 패버릴 거야! 서로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랑 값을 못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무엇이든지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자기 꿈이 제일 좋은 꿈이고, 자기의 믿음이 최고의 믿음이고, 전부다 나 나 나라는 자기중심입니다.
요즈음 우리교회에 자아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는데 목사님 예수님 믿고서 자아가 없어집니까? 고상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죽는다는 것을 없어진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없어진다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죄인으로 남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없어진다는 것으로 알고 내가 무엇을 하여도 다 예수님이 하는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침투한 것이 있습니다. 입니다. 예수님이 침투한 것 입니다. 성령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기존에 또 내가 있지요! 그러니 둘 다 있는 것입니다. 이 쪽은 날마다 죄인 되고 이 쪽은 날마다 용서하시는 분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죄 이 둘이 만나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잘나고 잘난 사람이 만나면 구원이 안 됩니다. 한 쪽은 죄인이고 한쪽은 무조건 용서 해 줄때에 이 관계가 형성이 될 때에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도록 만들어 가시면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어지면 용서 받을 대상이 없으니 공중에 붕 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 중심으로 조직신학을 하기에 이 책에서 말하였습니다만 인간은 날 때부터 조직신학이 있다? 없다? 있습니다. 이 책의 표현에 의하면 교회에 올 때에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텅텅 빈 서랍으로 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빈 서랍이 아닌데, 목사가 설교를 하면 저것을 담을까 말까? 자신이 아주 바쁩니다. 조는 사람은 늘 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쁩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들을 분주하게 빼고 넣고 하면서 채워 넣느라고 작전을 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속에는 이미 조직신학이 들어있어요! 그 조직신학을 제가 이 책에다 담았습니다. 인간들이 죄지은 상태에서 어떤 조직신학을 만드는지를 이 책에 담았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야기한 조직신학도 같이 겸하여 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죄인 앞에 거룩한 주님께서 양쪽을 다 합하여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양쪽을 다 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론 같으면 인간들이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저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시는 바로 이것이 계시이다. 하는 식으로 양쪽을 다 실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여러분들이 성령 받은 자인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계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쳐서 와야 합니다. 아까 하던 헌금이야기 다시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을 헌금한 것을 가지고 부자가 많이 한 것보다 저 여자가 더 많은 것을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십자가를 거쳐서 보면 저 과부의 헌금은 자기의 돈으로 헌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할 때에만 주님께서는 어떤 돈보다도 더 값진 것을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 안에서는 양적인 비교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양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왔느냐의 문제입니다. 네가 헌금한 것이 누가 주시더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 능력에서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까? 절대로 나오지 않고 주님의 묵시적 능력이 잠간 잠간 떠오르게 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목사님! 그것이 떠오른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서입니까? 아까 성도를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성도는 재료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재료? 세상 사람들은 죄만 보여주는 재료이지만 우리는 무엇 하나를 더 보여줍니까? 주님의 은혜성도 보여주어야 하기에 문득문득 주의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나와야 구원받는 다는 말이 아니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오게 되면 구원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루에 열 두 시간 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오시거든 이것이 내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누가 있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꼬? 이 돈 내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돈인데 내었을꼬?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내는 것도 은혜이구나! 돈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런데 내는 이것도 은혜라는 것이 잠시 생각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았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뭉쳐야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뭉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하고 십 원도 안내도 괜찮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를 인간의 행함으로 이해한다면 굉장히 구원받기 쉬워요! 하루에 2초만 은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정말 은혜로 생각한다면 구원받기에 불가능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작이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올라가서 십자가를 거치고 부활된 상태에서 다시 세상으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자체가 죄인데 또 예수님의 조직신학을 합니까? 예수님은 조직신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는 말을 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의 하나하나의 시스템을 부정하기 위하여 정죄하기 위한 것이기에 예수님의 조직신학이라고 한 것입니다.
네가 종말에 대하여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이미 그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인간이 이미 죄인이기에 죄인인 육체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조직신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은 이렇게 엉터리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하여 조직신학을 전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계적으로 자 계시론을 하자! 구원론을 하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속에 모든 조직신학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에서 나오지만 요한복음 8장의 경우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잠시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라는 말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직접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가지고 인간과 연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면 인간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안 죽이고도 구원하시는 방식은 어떤 방식입니까? 선지자나 꿈으로나 우림이나 둠밈이나 어떤 흔적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구원되기 위한 방책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의 전제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내려왔을 때에 왜 수건을 머리에 썼습니까? 40일간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그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을 씀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은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도 들어있고 영광도 들어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다 들어있는데 다만 계시의 특성상 사람을 안 죽여야 하니 하나님의 그런 거룩과 영광을 감추고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감추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른 예를 들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액자로 만들어서 벽에 걸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섭습니까?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글씨를 가지고 이 강단에 써 놓으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벌벌 떱니까? 애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 인천 하늘에 한글로 탐내지 말라는 글이 나타나면 겁이 납니까 안 납니까? 겁이 납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보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하늘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써야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늘에 쓰이는 탐내지 말라는 것이나 여기에 쓰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다 하나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이 벽에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는 글자가 쓰여 지니 그 왕이 벌벌 떨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손가락이 누구 손가락입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떠밀고 난리를 쳤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같이 합숙훈련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 보고 겁을 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어설픈지 아시기에 모든 하늘의 영광을 다 감추시고 심지어 뺨까지 얻어맞고 옷 빼앗김을 당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꼬락서니 좋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와서 그것도 그냥 피조물이 아니라 깡패 같은 피조물에게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수시로, 수시로 묵시를 나타내셨는데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 때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물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주목하게 하고서는 자 보십시오! 지금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물이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기 짱! 완전히 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정작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생겼는지를 모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어머니가 부탁하여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자기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뿐이지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습니까? 안 가졌습니까?
평소에도 가지셨는데 인간들이 육적인 인간이 되어가지고 그걸 철저하게 깔아뭉갠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예수가 우리 구세주입니다. 동시에 창조주 아닙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아닙니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안 부르면서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까! 막 먹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모든 아픔과 겸손과 종처럼 낮아지심과 죽기까지 모든 것을 감내하셨는데 그러한 은혜성을 모르고 건방을 떨면서 헌금 좀 했다! 착한 일 좀했다! 너는 왜 그따위로 사느냐며 싸우고 말입니다. 참 철이 없어도 보통 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 좀 있으면 교회에서 헌금하라고 할까봐서 교회 안나오고, 돈 없으면 헌금하는 것이 부담되어 또 안나오고 그러면서도 예수 믿는다고 우기고, 뭐합니까? 지금! 차라리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그래도 나는 어려서부터 유아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받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서도 인간의 계시와는 완전 딴 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한 것이 예수님의 계시라면 인간의 계시라는 것은 참 웃깁니다. 인간들은 무엇을 계시라고 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없으면 적적하다는 것입니다.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놀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꿉놀이 하는데 같이 놀려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친구하려고 만들었는데 죄를 지어서 그 값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친구가 없어서 적적하니 어떻게 해서든 달래서 같은 레벨을 만들기 위해서 사랑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의 계시를 논하기 전부터 이미 신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아는 것을 다 풀어놓는 것입니다.
원래 계시란 신으로부터 받아야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합시다. 원래 하나님이라는 분으로부터 무슨 소식을 들어야 알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은 인간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친구 삼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왜 나오는가 하면, 저희들 입장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친구 없으면 적적하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들 자녀를 왜 놓습니까? 자녀 없으면 적적하잖아요! 낳으면 좀 분잡지만 안 심심하지요! 그러니 나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 인격자이니 나의 생각이 곧 누구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같으니 내 생각대로 할 테니 나의 생각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말할 때에, 사랑을 왜 합니까? 외로울 때에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짝을 찾을 때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짝을 찾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니 아마 하나님도 짝이 필요해서 우리를 사랑해 줄 거야!
그러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니 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친구 삼고자 하실 때에, 친구 간에 무엇이 통해야 합니까?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같은 연배라고 다 친구가 됩니까? 말을 걸어보면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취향 성격 가정환경 같은 것들이 비슷한 공통점이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사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런 계시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의 계시관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밑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확장시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로 연장시켰다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부모와 자식관계에 무엇이 생깁니까?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안상홍 하나님의 증인이라는 곳에서는 하나님 어머니를 믿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 붙들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시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확장하고 연장하여 하늘까지 연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에 대하여서는 내가 빠삭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뻔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까? 또는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우리는 그의 신부! 이런 신랑신부는 결혼 해 본 사람은 다 알지 뭐! 그러니 뭐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 아닙니까? 신랑 신부 다 아는 이야기이나 그 비유를 추적하면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다 아는 것이지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용서하면 다 되는 것이지 무엇을 한국교회를 보고 이단이니 삼단이나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확장시켜서 하나님의 관계까지 이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형성된다면 대화가 되어야지요! 그래서 그 대화를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조직신학에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이것도 되지도 않지만- 두 번째로 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들 합니다. 그렇게 알고 싶어들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면 된다고 여겼기에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까지 한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그냥하면 안 되고 금식까지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이냐 하면, 간절한 기도이니까 여기에 무엇이 들어가느냐 하면, 애걸복걸 하는 나의 정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윤리지요! 그러니 윤리성 더하기 정성 이것이 인간의 계시입니다. 이제 정리가 되었지요? 인간의 계시란 윤리성에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정성입니다. 윤리성과 정성을 빼놓고서 한국교회가 되는가 한번 보세요! 한국교회 어디를 가더라도 윤리성 빼고 정성 빼면 목회가 되는지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오는 손님이나 가르치는 목사나 간에 인간들이 만든 이런 계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착함으로 복 받는 간증과 정성 드려서 복 받는다 간증 이 두 가지 밖에 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교회 키우기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떤 성경구절을 어떻게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전부다 사기입니다. 인간 대 인간, 자기 친구들 관계, 또는 직장 상사들과의 관계, 부부의 관계, 자식들과의 관계, 이러한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관계를 모방하여 확장시키면 하늘과도 통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일까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심어놓았는데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였을 때에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까?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다는 이 말씀에는 말씀을 지키는 윤리성과 정성 바치면 된다는 이 교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은 어렵도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서 그들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어떤 자도 나에게 올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포기하라? 윤리를 포기하고 정성을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윤리포기하고 정성포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바 없는 사람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연사 호소합니다. 정말! 사람이 윤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의를 포기한다는 말은 나의 구원은 나의 의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때에 나오는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이혼해도 교회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러니 사업망해도 교회 나오라는 것입니다. 왜? 처음부터 자기 의는 포기하였지 않습니까! 자기 착함을 포기하였지 않습니까! 게을러도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왜? 자기 정성을 포기 했잖아요! 헌금 한 푼 하지 못해도 교회 나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헌금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 없어도 교회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무슨 주를 안다고! 부부싸움 할 때는 꼭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네가 나에게 얼마나 해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가 아이 보았나? 혼자 아이에게 시달리는 것 아나 모르나? 너는 내 직장생활 하는 것 얼마나 힘 드는지 아나 모르나? 그러면 바꿔서 해볼까?
자기 의를 가지고 있으면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계시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조직신학이 무엇인가 하면 정성과 착함이라는 이 두 가지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성과 착함이 결국은 누구를 살해 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데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 속에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말씀을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정성을 다해야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간주하고 예수님을 본 받자는 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좀더 깊이 나가 봅니다. 인간의 계시란 윤리와 정성인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의 윤리성이란 인간의 착함입니다. 인간의 착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이것은 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가 이런 소리를 하였습니다. 인간에는 근본적으로 하늘의 법도가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이법이라고 합니다.
인간에 하늘의 이법, 이치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측은지심 즉 남을 보는데 불쌍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예를 갖추는 것, 그리고 사람이 정의로운 것,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 이런 요소들은 인간 속에 신적인 품성이 들어있다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신학의 맛을 본 사람은 이런 것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흔히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도 있는 그것을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법이라고 하지요! 인간 이치의 법이 인간 속에 들어있어서 인간은 기와 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는 물질적 요소요 이는 기를 구체화시키는 하나의 법칙을 가지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은 인간에게만 있습니까? 가만히 보니 두더지라든지 개미라든지 자연물에도 있지요! 그러니 이런 양심이라든가 정성을 다한다든가 하는 것은 자연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지금 이런 것들은 인간들이 만든 계시입니다. 자연 속에는 인간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중요하기에 쉬지 않고 계속하여 하겠습니다. 자연 속에 인간도 포함이 되고 짐승도 포함이 됩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는 착한 심성은 분명히 착한 누군가가 집어 넣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분이 누구인가 하면 그들은 그 분을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신이 착하다고 누가 그렇게 말하였습니까? 이런 질문은 여러분 생전에 처음 듣는 질문일 것입니다. 신이 착하다고 누가 이야기하든가요? 여러분이 지옥에 한번 가 보았습니까?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십년 살고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네 고생 많이 했지! 이제 풀어주겠다. 이런 곳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있어야 하며 이곳은 죽지도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주는 곳이 지옥입니다. 물 한 방울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여기 컵의 물이 많습니다. 이 한 컵의 물이 지옥에서는 얼마나 보통 값이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이 아쉬워서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묻혀 달라는 곳이 지옥입니다.
지옥 불, 유황 불, 영원히 고통 받는 곳,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 받는 곳 그 속에 한번 들어가 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요!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라고요! 하나님이 착하신 분이라고요! 그래서 유명한 슈바이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는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겁주려고 하신 이야기이지 지옥은 없다는 것입니다.
겁을 주어야 죄를 억제하고 돌아설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 지옥을 안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현재 목사 가운데도 지옥을 안 믿는 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목사는 원래부터 믿음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고, 지옥을 안 믿는 것입니다. 지옥을 안 믿으면 나머지는 무엇만 있겠습니까?
수능의 내신 성적만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합격을 시켜주면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까 말한 인간의 계시인 선함과 정성을 유발시킬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급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많이 노력할수록 많이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그대로 천국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장님도 계시고 저 밑에 말단 사원도 있듯이 천국도 기껏해야 그 정도라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지옥은 없는데 제일 밑바닥에는 부끄러운 구원이 있고 제일 위에는 사장님 같이 느긋하게 자식아 좀 노력하지 뭐하느라고 세상에 있을 때에 봉사도 하지 않고 그랬느냐고 나를 보라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 영광을 받잖아! 라는 여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식의 사람들의 계급을 지어가지고 인간 세상과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 세상과 똑같이 만들어 그것을 그대로 연장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지옥을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잖아요! 사람은 많이 죽인 유영철도 잘못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 놓고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괴팍하고 마음이 고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지옥을 없애버리는 조직신학, 거기에 비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고운 성품으로 충만하지요! 물론 폭풍이 있고 풍랑이 있어도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고 사실은 이 자연은 하나님의 따뜻한 품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어냐 하면, 착함이고 양심인데 이것을 칸트가 이야기 하였습니다. 칸트라는 학자가 말하기를 인간 속에는 오성이 들어있는데 이 오성은 숨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과 자유와 영혼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이성 범위 밖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무엇으로 수용하여야 하는가 하면 윤리적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윤리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신의 성품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칸트의 철학입니다.
제가 칸트의 주장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오늘날 교회 목사들의 주장입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철학을 무시하지 마세요!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철학에서 다 이야기 한 것입니다. 칸트는 모든 자연 속에 신의 착함과 신의 사랑과 정성이 다 들어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두 시간 이상 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 자연계시를 앞장세워서 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뺀 결과입니까? 신의 저주를 뺀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를 뺀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히 절단, 차단입니다. 십자가를 빼 버리면 차단이 아니라 하면 됩니다. 아이 캔 두 잇입니다.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이것이 인간의 계시인데 진짜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고 십자가는 세상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빠지고 엎어지게 만드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으며 오직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지금 강의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만든 자연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한 예수님 홀로 역사 세계에서 묵시 세계로 점프하셔서 부활하셨는데, 자연 계시를 말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특히 자연계시에 의하면, 유대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론 적으로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곧 신의 자녀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지, 자식은 누가 만들었지? 아~ 우리 부부가 만들었구나! 내가 자식을 만들었기에 자식은 내 자식, 나는 자식의 부모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인간의 신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현재 인간들의 관계를 가지고 말하면 납득이 되지요! 설득이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심과 긍휼하심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료로서 어떤 자녀는 긍휼의 자녀로 어떤 자녀는 진노의 자녀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무시하는 인간 쪽에서는 만들어 놓았으니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연속극에 나왔지요! 여자가 남자하고 하루 밤 자고나서는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만들어 놓았으니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우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이상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가을비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맞는 것입니까? 왜 이런 가을비가 옵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KAL기 폭파될 때에 미국에서 15년간 유학해서 박사학위 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의 형이고 동생이고 여러분의 가족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원망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15년간 유학해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오는데 러시아의 미사일 맞고 폭파 되었을 때에 러시아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죽이시려면 미국에서 죽이시든지 아니면 15년 후에 죽이시든지 하시지, 우리가 착해서 그동안 교회 열심히 다녔고 우리가 농땡이를 부렸다면 할말이 없지만 목사가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왜 죽이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주의 은혜의 덩어리로 앉아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왜 모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공로를 모르고 자꾸만 눈에 보이는 인간의 역사에서 어떤 공로를 찾고 다듬어 체인을 계속하여 연결시켜 나가서 자기 의를 형성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착하다고 하는 이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이 자연 계시를 어느 신학자도 다 긍정합니다. 단 칼 바르트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에게 자연계시란 있을 수가 없다. 자연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이다. 죄인이기에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자연계시라는 것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별계시는 무엇입니까? 자연계시가 있다면 특별계시가 있다는 것인데 특별계시는 무엇입니까? 성경책을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이것도 자기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어디 성경책에 특별계시라는 말이 있습니까! 성경책을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연계시가 계시가 맞지만 다만 흐릿하기에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성경책을 보면 분명해지니까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합쳐서 계시라고 그들은 증거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시비를 걸었는가 하면, 이 책을 본 사람을 알 것인데 자연계시를 안다고 구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자연계시를 알면 구원이 옵니까 안 옵니까? 그들에 의하면 온다고 해야 합니다. 또 특별계시인 성경을 보면 구원이 옵니까 안 옵니까? 그들의 경우에는 온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말은 십자가 지신 분이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믿습니까? 아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연계시를 알고 성경을 백독하여도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면 왜 그것을 계시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극장 간판보고 영화 다 본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았다고 예수님에 대하여 압니까? 모르잖아요? 모릅니다. 우리가 부부사이에 자기 아내를 얼마나 압니까? 나는 압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상대방에 대하여 친분이 있다고 해서 얼마나 압니까? 몰라요! 모릅니다. 왜요? 상대방이 변하고 나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변하기 때문에 모릅니다.
변하지 않고 일년쯤 멈추면 좀 알지 모르지만 둘 다 부지런히 변하는 것입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변화무쌍합니다. 애들도 얼마나 변한다고요! 지금 저렇게 까불대고 왔다 갔다고 하지면 커서는 모릅니다. 엄마 나 안 그랬는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 놓아야 정답이 됩니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본인은 모르고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이것이 믿을 것이 못됩니다. 현재 이것이 몇 시간을 갈지 모릅니다. 지금 비 오는데 돌아서서 바쁘고 하면 다 잊어버리는데, 예수님이 누구시더라? 예수님이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는 식으로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이렇게 고백되어야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내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하는 고백이 솔직하게 나와져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그렇다면 잘 들어보세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소멸됩니까? 소멸되지 않습니까?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이혼을 하던 무엇을 하던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자기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구원한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내 능력으로 된다면 오늘 교회가거라! 안 간다! 이런 것을 내 능력으로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 능력으로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무엇이든지 은혜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의 눈치보고 가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빠서 또는 차가 펑크 나서 못 오는 그런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못 가는 것이지요! 그렇더라고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를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니 목사님 제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은혜로 살지요! 그러면 됐습니다.
그런데 삐져서 안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당신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온 것입니까?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앞에서 해 온 것이란 그 사람을 떠나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매사에 범사에 그 사람이 성질나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한바탕 소리치더라도 본인의 속에 있는 능력은 본인이 속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내가 이런 소리를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본인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이야기 해 줄 필요도 없고, 이야기 하면 이야기 해주지만 그것을 남에게 확증 받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조직신학을 배웠는데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요? 라고 하면 아닙니다. 조직신학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착함으로? 아닙니다. 정성으로?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을 가지고 사도행전 1:8절에서 성령이 임하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그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약간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이십분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안 쉬고 하였기에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양심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양심은 신이 주신 형상이다. 인간이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못된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악마가 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인간에게는 두 얼굴이 있는데 하나는 천사의 얼굴이 있고 하나는 악마의 얼굴이 있다고 하는 이것이 모든 동화, 드라마, 영화,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상식에 이것이 푹 삶겼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러고 가 아니라 마땅히 옳은 것으로 알고 모든 교육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존 듀이의 교육입니다.
또 몬테소리라는 아줌마의 교육까지 모든 교육들이 양심에 호소해서 숨겨진 양심, 잠자는 양심,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능력,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교사가 되어서 개발해 줌으로서 그 사람은 훌륭한 시민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자질을 가진 자로서 인류와 사회와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교도소에서도 교정하는 것이 그것이 아닙니까? 그 사람의 선한 양심을 개발해서 그 사람의 약한 양심을 죽이고 억제시키고 선한 양심은 개발시켜서 착한 사람으로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이 불가능하다면 교육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니 모든 교육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교육이 무엇입니까? 총신에 기독교교육학과가 있지요! 기독교교육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