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회 48- '예수'라는 전부와 '십자가'라는 일부
'예수'라는 전부(全部)와 '십자가'라는 일부(一部)
이준
최근에 나는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하여 수없이 오고가는 논의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을 대하게 되었다.
"복음을 주셔서 이것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책임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이지 십자가 사건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지요?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을 또 주님께서 하시고 계신 모든 것을또 주님이 하실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 아닌지요?"
언뜻 보기에 충정어린 신앙심(?)으로 위의 글을 쓴 이는 소위 "온전한 믿음"을 거론하면서, 십자가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도가 받은 은혜를 소극적으로 다루는 것이기에, 정작 성도라면 성도답게 모든 국면에 대하여 적극적인 책무를 다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느 글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시 위와 같은 내용을 대하다 보면 거기에 담긴 글쓴이의 생각뿐만 아니라 평소 그를 전인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의식의 저변까지도 엿볼 수 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나는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포함하여 그가 쓴 글 전체에 흐르는 맥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글쓴이의 의식은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자신의 글에 나타난 일부 표현마으로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곧, 십자가만을 강조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의 경지가 아니며, 아울러 '예수'가 '전부'이고 '십자가'는 '일부'라는 그의 의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른바, '전부'와 '일부'로 대립 아닌 대립적 관계로 다시금 자리매김 된 '예수'와 '십자가',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생각일까? 보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이 논제는 우리가 믿는 진리와 관련하여 '십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부'인가, 아니면 핵심적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로 환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서, 문득 여러 해 전에 내 모친과 안경점을 운영하는 서로 형제 사이인 두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새삼스레 뇌리를 스쳤다. 당시 양측 간에 오고간 논쟁 아닌(?) 대화의 요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의식의 대립이었다. 그 두 사내들의 입장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지고지순한 보편적 이류애로서의) '사랑'에 이다고 보는 것이었고, 모친의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굽힐 줄 모르는 신념은 오로지 '예수'가 본질이라는 데 있었다.
나는 그 당시의 대립을 다시금 떠올리며 보다 좁은 각도에서 또 다른 대립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다름 아닌, '예수'와 '십자가' 둘 중에 어느 것이 신앙의 핵심이냐는 논제로 말이다(여기서 '핵심'이라는 말은 '전부'라는 말과 병용될 수 있겠다).
구약시대의 유태인들이 길렀던 가축 떼 중에는 수많은 양들과 소들이 있었다. 그 모든 가축 떼 가운데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것은 선택된 일부였다. 더욱이 오직 제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에서 피흘려지고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는 것만이 희생제물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즉 제단과 상관없는 양과 소는 희생제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희생제물을 희생제물답게 하는 것은 희생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희생제물이 바쳐지는 제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마23:19~20).
위 말씀을 다시금 새겨 보면, 제물을 제물답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제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예수를 예수답게, 복음을 복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달리 말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참'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단언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7~18)"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위의 말씀들의 취지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십자가와 상관없는 예수, 보다 엄밀히 말해 십자가를 핵심(전부)으로 삼지 않는 예수는 참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 십자가와 예수를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여기서는 십자가를 '일부', 예수를 '전부'라는 식으로 구별하는 것)은 성경적 입장이 아니다.
시내산 위에서 모세가 여호와를 대면하고 있었을 때, 시내산 아래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하나님(여호와)이라 떠받들고 있었다(출32:4). 그 당시를 두고서 우리는 "어느 여호화가 '참' 여호와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미 그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해가 지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피어나는 수많은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또 하나의 질문 앞에 서야만 한다.
"어느 예수가 진짜 예수인가?"
십자가라는 돕디좁은 틈새를 통하여 바라보이는 예수가 아니라면, 그는 '참' 예수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는 말이다. 모든 아담들에게 있어서 과거 '거짓' 여호와를 믿었던 유태인들의 전철을 되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태 왕국이 멸망한 과정을 지켜본 자라면 그 누구나 말이다.
자신에게만큼은 일정 수준 이상의 믿음이 있노라는 안도감을 은근히 마음 속에 품은 채, 그 멸망의 역사를 대하는 자들마다 저 유태인들이 섬겼던 온갖 우상들의 이름들을 꼽다 보면서 "어찌하여 참 여호화를 거부하고 그런 되지도 않은 우상들 쪽으로 기울었던가, 어리석은 유태인들이여!"라는 탄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심정의 소유자들 앞에도 여전히 '참'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쑥 들이대신다.
"어느 예수가 '참' 내 아들인지 너는 아느냐?"
십자가를 통하여 바라보지 않는 예수는 참 예수가 아니다. 십자가에는 반드시 참 예수만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 위의 여호와'의 대립 구도로 구성된 고대의 이야기를 '심각한' 실화로 접해본 사람이라면, 거짓 예수와 참 예수 사이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 곧 '십자가'를 두고서 양자 간에 그 진위를 가늠해 봄이, 취사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이 거짓과 미혹의 물결로 넘실거리는 아담의 세계 속에 처한 성도로서 늘 거쳐 가야 할 좁은 길임을 절감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통찰력은 오직 성령님의 허락하심 하에서만 제공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이외에는 아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이다(앞서 인용된 고전1:23등을 참조). 우리를 부르신 분은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이시다. "예수가 전부요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전부로서의 예수에 부속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부'로 보이는 그 십자가 사건이 흔히 '전부'라 여겨지는 예수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담의 세계로 보내신 이유는 다른 일이 아닌, 바로 그 '십자가 사건'에 있다. 십자가 짊어지라고 보내신 것이다. 십자가 짊어지신 어린 양만이 '참' 어린 양이셨던 것이다. 요한계시록도 일관되게 이 점을 언급한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서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5:6)"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계11:8). 진리를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 '일부'란 처음부터 없었고 오직 '전부'만 있었을 따름인데,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가 전부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전부라는 뜻이다.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