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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11월 7일 강의 조지 래드 [조직신학]-구원의 새 시대강의요한계시록

부산 11월 7일 강의 조지 래드 [조직신학]-구원의 새 시대

이름 : 이근호(IP:122.47.57.66)

039 20061107 조지 래드 [조직신학]-구원의 새 시대

http://222.231.1.74/~woorich/study/busan/busan061107.hwp

우리교회(IP:122.♡.57.66)

06-11-16 20:24

한윤범 목사 녹취
20061107 부산강의:조지 래드 [조직신학]-구원의 새 시대 - 1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제5과 구원의 새 시대.

이 래드의 책에 상당히 도움 되는 부분이 하나있어요. 도움 되는 게 뭐냐 하면,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놨다는 게 정말 좋아요. 이건 보통 신학교에서는 이야길 안 하거든요. 신학교에서는 랍비들에 대해서 이야기 안 하는 이유가, 랍비들은 적 아닙니까? 예수님 적 아닙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예수님 죽였던 사람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우리 예수님은 우리 편이니까.

그런데 신학교 교수들은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랍비들, 유대인들의 바리새인들의 성경해석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하지만 신학자들은 그런 점에서 약간 양심적이라고 할까요, 정직하다고 할까요? 랍비들이 왜 예수를 싫어했는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물을 못 생겨서 싫어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말 안 들어서 싫어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랍비들이 사람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모세율법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율법에 대한 해석 차이를 랍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말씀, 또는 율법이라고 하지요. 이 말씀을 줬다는 것은, 여기 이 대목에 나오지요. 제5장에도 나오고 6장에도 나오는데 읽어보면, 안 읽어 봤지요. 읽어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을 하늘나라 은혜로 구원받아요. 왜냐하면 자기는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할례 행하면 구원받아요. 구원받는데 이제 그 구원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놓칠 수가 있는데 여기 래드의 해석에 따르면 랍비들은 어떻게 봤느냐 하면, 말씀을 지킨 것과 안 지킨 것을 대비를 해요. 말씀을 지킨 쪽이 많으면 구원에 들어가고, 그 비율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하늘나라에 하나님 높은 자리에 가까운 자리에 가는 겁니다.

이 랍비들의 이러한 해석에 신학자들이 주목을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구조가 사도 서신에는 안 나와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 이야기 그 정도 했지, 사도 서신에서는 천국 가서 어떤 구조로 짜여 있는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 당시 랍비들의 책에 보면 천국 가서 서열 매겨지는 그 구조가 나오는데, 그 구조를 요한계시록에 하늘나라의 24장로들과 천사들의 배치가 이상스럽게 기독교와 관계없는 유대교 랍비들의 책에서 그냥 흡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그걸 주목했어요.

결국 신학자들이 그걸 주목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성경책이 아니다. 뭐, 그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도 힘들다 보니까 유대교에서 있는 그것을 아이디어 삼아서 거기다 각색을 예수만 집어넣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 정도는 얼추 아니까 예수 집어넣고 예수 믿으면 아마 지금까지 알고 있는 그런 구조와 유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들었으면 기가 찰 말이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총신교수도 그런 거 없어요. 없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이 안 썼다. 라는 것을 거의 99%가 그걸 인정하는데 사도 요한이 쓴 게 아니란 말이죠. 무슨 장로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빙자해서 썼겠지. 라고 하는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 있다는 것은 이거는 일주일을 가운데 특정 날을 잡아서 주의 날이 있던 것이 확정되었다고 보고, 이미 일요일 예배가 확정되었다는 말은 이거는 초대교회에서 한참 후대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하고는 참으로 상관없는 그러한 책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요한계시록을 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의 책들을 열 권 이상 봤어요. 열 권 더 돼요. 쭉 보면서 주의 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하고, 그 다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천년왕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쭉 이렇게 보니까 전부다 주석책도 보면 거기에 대해선 어물쩍 넘어가고 거기서 말하는 사람도 없어요. 왜냐? 주석 깨나 쓴다는 사람이 그냥 쓰겠어요? 다 유명한 신학자 자료 빌려서 쓰잖아요.

그런데 신학자마다 천년왕국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천년왕국이란 개념이 어디서 나왔느냐만 이야기하고 끝내버려요. 천년왕국이란 개면이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하지, 그게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신학자들은 이거는 실제 문제로 보지 않고, 그 당시의 종교적인 분위기로 보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자체를. 종교적인 분위기.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믿습니다가 아니라, 아는 거예요. 아,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적 분위기, 종말적 분위기에 속했구나. 라고 우리가 아, 옛날 사람 그 정도 그렇게 살았었군. 할 뿐이지, 그걸 옛날 사람에 있는 정신구조를 우리가 왜 따라갈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믿어야 될 책이 아니고,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믿었느냐를 보여주는 그냥 역사적인 흔적, 전설의 고향 나오는 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년왕국이 있느냐 하는 그거는 아무 마음에 부담도 없지요.

그렇게 되면 뭐까지 휩쓸리느냐 하면,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고, 생명나무 과실 이 이야기도 옛날 사람들이 갖고 있던 개념적 구조를 반영할 뿐이지,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해줄 뿐이지, 실제로 해도 없고 달도 없고 생명나무가 열두 과실, 그건 아니라는 거죠. 그건 옛날 그 당시 사람들 이야기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또 뭐 눈 떴느냐 하면, 랍비들의 구약해석을 어떻게 봤느냐? 눈 뜨자는 겁니다. 그걸 보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모종의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시비 걸고 뭐 때문에 그렇게 싸우고 급기야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안 죽여야 될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도 손 씻고 가면서 나, 이건 내 담당 아니다. 했는데 억지로 법을 억지로 지켜 가지고 기어이 죽여야 되고. 심지어 바라바 대신 예수님 죽였다. 하는데 바라바 대신 예수님 죽였다는 이 의견도 들어보세요.

바라바를 왜 선택했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싫어서 바라바를 선택했다 여기에 초점이 있어야 되는데. 이 학자들은 바라바를 왜 선택했겠느냐? 바라바 선택한 것에 초점을 맞춰버려요. 해석을. 그러면 바라바는 살인강도가 아니에요. 일종의 독립운동갑니다. 독립 운동가를 누가 싫어했느냐 하면, 빌라도가 싫어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싫다, 싫다 해도 예수님보다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누구를 제거하느냐? 바라바를 제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낌새를 머리 좋은 누가 알아요? 유대인들이 해서 빌라도야, 내 앞에서 놀지 마라. 예수보다 저 사람이 더 중요해. 라고 이렇게 한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은 어디에 치중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의 구약율법 해석을 그들은 순순히 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정치적 해석에만 국한해서 그렇게 해석했다고 보는 거예요. 신학자들이. 신학자 하지만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하버마스의 책을 평했잖아요. 그게 1100페이지가 나옵니다. 1200페이지 됩니다. 엄청난 책인데. 그 하버마스의 책을 보게 되면, 그동안 사람들이 사회라는 것이 정치적 산물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영적인 산물로서 어떤 추상적인 신이 함께 있다는 종교를 대행, 대체하는 조직으로써 국가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게 18세기 이후에 벌써 개시되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교회의 신뢰가 떨어진 거예요. 헤겔의 철학에 나오지요.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니까 이제는 신도 안 믿고 아무것도 안 믿고 사느냐? 천만의 말씀. 옛날에 교회에 기대했던 조직, 모든 활동을 커가지고 이제는 전 국민이 세례 받고 전 국민이 국가라는 교회에 안정되게 보장받는 식으로 서양국가가 성립되었고.

그전에 동양에서는 뭐 했나? 동양에서는 그런 종교적인 국가는 없었어요. 자연화 된 국가뿐이에요. 약간은 있지요. 뭐냐 하면, 우리 임금님은 신에 의해서 삼족끼리 해서 신이 있다. 그 정도는 있지, 그걸 완전히 전면적으로 하지는 않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종교화시키지 않았지만.

이 서양국가의 개념은 교회라는 게 있고 그 다음에 국가가 있습니다. 중세 다음에 중세 전체가 교회 아닙니까? 중세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현대로 넘어온다고. 이렇게 넘어온다고. 그렇게 넘어오니까 국가 전체가 교회가 되었을 때는 이것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것을 오랫동안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그전에 사회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정치적으로 방해된다고 죽인 것이 아니고, 뭔가 자기들이 믿던 고유의 종교와 달랐기 때문에 죽인 겁니다.

그 흔적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와요. 예수님께서 계속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시비 거는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를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으니까.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에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도대체 유대사회가 유대인들이 무엇이 길래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첫 번째고요. 또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은, 그게 정립이 될 때 두 번째는, 그러면 열두 제자나 혹시 예수 믿는 사람은 무슨 이유 때문에 예수를 계속 따라 다니느냐? 무엇을 기대해서 따라 다니느냐하는 그 두 번째 문제가 또 남아요.

이걸 말로 길게 설명하지 말고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지금 이 그림은 현재 5장, 6장에 나오는 래드의 사상을 반영하는 겁니다. 래드는 이 사상에 빠져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예수님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했느냐를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어떤 심정으로 대했느냐? 그런 건 관심이 없고, 주워 먹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나온 결과들을 우리더러 고맙게 주워 먹습니다. 여기에 다 써 놨어요. 제목을 한번 보세요. 구원의 새 시대부터 해서 축복의 혁명 나온다는 말은 뭡니까? 주워 먹는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과 어떤 심정으로 교제했는가는 없어요.

현재 주시는 은사 나오지요. 구원의 은사 나오지요. 이게 계속 이렇게. 죄 사함의 은총 나오지요. 의의 은사 나오지요. 전부다 우리한테 유리한 거지요. 그 다음에 6장 넘어가면, 찾으시는 하나님 나오지요. 초청하시는 하나님 나오지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전부다 누구 입장이에요? 이야기해보세요. 우리 입장 아닙니까? 우리 입장. 우리 입장이라고.

지금 재미있는 것은 래드가 유대인들의 랍비들의 성경해석은 잘못됐다. 비판하면서, 이상봉 목사님은 유대교의 모든 것을 종교라고 했다고요. 종교기 때문에 이거는 헛짓하고 있다. 이렇게 봤거든요. 유대교의 랍비들은 성경해석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그들의 심정, 랍비들의 심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만 너희들은 무조건 잘못되었어. 라고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무조건.

그들이 모세율법을 두고, 자 우리가 모세율법을 두고 예수님 없다고 생각해봐요. 예수님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신약성경 모른다 하고 구약성경만 있다 하고 그것 가지고 해석해 보세요. 바리새인의 해석을 능가할 수 있습니까? 턱도 없어요. 능가 못합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우리가 천국에 못 간다 했어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하고 예수님의 소식이 안 전달된 상태에서 모세율법을 배우고 하면,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은혜로 구원받은 상태에서 다만 은혜를 잘 표현하는 그 말씀을 많이 지키는 것이 적게 안 지킨 것보다 많을 경우에 그 사람은 천국에 가고, 그보다 더 많이 지킨 사람은 서열상 상급이 매겨진다.

지금 마태복음에 '상'이라는 말의 개념이 뭔 뜻입니까? 상이라 하는 것은 구원문제가 아니고, 일단 상 받은 사람에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성과급이잖아요. 상이 그렇잖아요. 애들한테 상 줄 때 퇴학하라고 합니까? 니, 상 없으니까 퇴학하라고 합니까? 상 없어 퇴학하는 게 아니고, 상 없으면 그냥 상 없는 채로 상 없는 학생이 되는 것이지, 잘하면 상 주잖아요.

그러면 잘하면 상 주는 것은 승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다같이 학생은 맞아요. 추가적으로 보너스를 더 주는 거잖아요. 상이. 그 상 개념이 마태복음의 상 개념 아닙니까?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공관복음이 복잡해지지요. 복잡하게 봐야 돼요. 굉장히 복잡하게 봐야 된다고.

여기 5장, 6장에 나오는 이건 뭐냐? 주워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율법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틀을 가지고 해석했느냐? 라는 것을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 소식 없으면 바리새인이 보는 틀과 똑같이 보게 되어있어요.

바리새인들 지난 시간 강의했지요. 바리새인들 어떻게 봤다고요? 구원은 은혜로 받고, 하나님의 영광은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고. 왜냐하면 출애굽과 그 은혜라 하는 것은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납득이 될 겁니다. 다른 이방민족들과 차이점이에요. 은혜 받았다고 하는 걸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게 아니라, 그 유대인들은 왜 우리는 저쪽 민족과 개 같은 민족과 다르냐? 항상 그것을 극대 극으로 가져갑니다.

그걸 가져가면서 민족적, 종족적 정체성이라 이렇게 할 수 있지요. 나중에 사회학적 이야기하면. 종족 정체성, 유대교적 정체성이죠. 유대교적 정체성, 우리들끼리, 라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저쪽과의 차별화를 철저하게 계속 교육돼야 되고 훈련돼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뭐냐 하면, 어떤 같은 능력으로 붙자.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이방 가운데 착한 사람들 많으니까.

그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특별히 선택되었고. 그래서 신학자들이 현재 지금 칼빈주의를 그렇게 욕하는 거예요. 예정론주의자라고. 마치 뭐가 같다고? 옛날 예수님 죽였던 유대인들과 똑같은 놈들이라고. 왜? 창세 전 선택이니까.

유대인들은 선택되었고, 선택 되었다는 표시가 뭐냐? 할례와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에 대해서 그렇게 욕을 하고 로마서 2장에서 할례에 대해서 육적인 할례를 행해?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골로새서에서 할례에 나오죠.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때려죽여도 저쪽에는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동의했어요.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동의했다고요. 왜냐하면 로마서 11장에 보면 감람나무 비유하면서 그 말은 맞는다는 거예요. 다만 이방인에게 구원이 간 것은 이쪽에 지금 빠져서 그 빈자리, 보궐시키기, 채워주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원래 너희들은 이방인들은 개 같은 인간이라서 이쪽에 안 차면 저쪽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계속 이스라엘을 주장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해서 뭐냐 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도 바울이 동의하기를 엘리야 시대에 칠천 명 남게 둔 것이 행함이냐, 은혜냐? 라고 해서 현재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남아있지만. 이스라엘이 은혜 구원받는 건 동의해요. 그건 바리새인도 하는데.

그렇다면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젠 개망나니처럼 살아야 됩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주신 모세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기 때문에 그걸 지켜서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모세율법에 대해서 영광 돌리는 방식으로 틀을 잡아나갈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이 왜 이단인가? 적어보겠습니다. 이게 중요한 말이에요. 지금 제가 극대 극을 비교하려고 바리새인법과 예수님이 보는 것과 비교하려고 합니다. 이쪽에서는 뭐냐? 예수님이 왜 이단인가? 바리새인들의 정답은 뭡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이 인물이 나쁘다든지 고향이 어설퍼서 촌놈이라서 그렇게 인간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서 미워서 하는 게 아니고, 자기 밑에서 안 배웠다 욕하는 게 아니고,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율법을 안 지키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라고 준 거예요. 안 지키고 구원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은 은총, 천국이라는 말은 율법이 율법화 될 때 율법이 성취될 때 천국입니다. 율법이 온전히 성취될 때 천국이에요.

그런데 이미 구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더 나가야 됩니다. 뭐냐 하면, 율법을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에 영광을 돌릴 때 그때 이방민족과 현격히 차이 나는 택하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에 두 가지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할례. 이거는 창세기 17장에 나오지요. 할례 받은 자만 아브라함의 복이 오니까. 두 번째는 뭐냐? 안식일. 안식일이 어디 나오느냐? 에스겔에 나와요. 에스겔에 보면 모든 율법은 폐해서 뭐만 폐하지 않는다? 안식일만 폐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식교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안식교 교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예수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가 구원받는다 할 적에 그 하나님의 계명이 뭔 줄 알아요? 그게 안식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예수만 안 되고, 예수 말고 안식일 지켜야 돼요. 그러니까 안식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거 보면 뿅 가지 뭐. 이 소리를 장로교에서 못 들었는데 이 말이 맞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예수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무조건 이단이에요. 이거는 어떤 예수가 ( ) 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율법 지킬 시간이 좀 적은 사람들, 율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백정이라든지, 이방인들, 간음한 여인들, 그리고 세리들, 로마에 붙어서 사는 놈들. 그것을 서열화 매겼잖아요.

율법과 늘 가까이 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제일 높은 자리에 있고, 이쪽에선 낮은 자리에 있는데, 이 구조가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져야 비로소 이 지상에서 구조가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조 맞습니다. 라고 정당성을 보장할 수 있잖아요.

만약에 이 지상에서 이런 구조가 안 되면, 아이고, 똑같이 구원받는데 뭐 하려고 그거 지키노? 천당 가서 똑같아지는데. 이렇게 되서는 안 되잖아요. 지금 진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율법 지켜야 영광 된다는 것이 천국도 이렇게 됐다고 이야기 해줘야 지금 이게 정당화 된다니까. 이 구조가. 천국에서 안 통하는 원리 같으면 이건 완전히 사이비 아닙니까? 천국에서 통하는 그대로 되려면 그대로 되는 거예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것에서 나온 기본이 뭡니까? 기본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하셨다가 기본이 되는 겁니다. 있게 하셨는데 백정이나 세리나 간음한 여자나 뭘 발휘 못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지킬 능력을 발휘를 안 하고 썩힌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비해서 예수님은 뭡니까? 너희들이 내 심정을 아느냐? 내가 아버지 앞에서만 아는 아버지하고 나 사이만 아는 내 심정을 아느냐? 이 말이죠. 이쪽에선 뭐냐? 이쪽에선 뭐 중심입니까? 자기 구원 중심이죠. 나 중심이죠. 여기는 누구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중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중심이야기하면서 나 중심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것은, 심정은 아무도 몰라요. 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까 이야기한 바리새인들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를 낫지 못합니다. 항상 나 중심으로 나는 말씀 지킬 수 있다.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돼요. 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는 뭡니까? 누구 중심이라고요?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 이렇게 되거든요. 예수님 중심이라고. 예수님 중심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속닥속닥 했던 것을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몰라요.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성경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12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11절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같이 시작.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게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서로서로의 사정 모른다. 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사람도 하물며 그런데 하나님의 속사정을 인간의 능력으로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심정을 아버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과 고난과 하실 일을 우린 모르지요. 그 모르는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여기는 나는 나 중심이고, 이쪽은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이창섭 목사님이 있는데 이창섭 목사님이 오늘 아침 일곱 시 반에 뭐 했는지 모르잖아요. 그걸 예를 든 거예요. 사람도 남의 사정을 모르는데. 남의 사정을 모른다는 뭔 뜻입니까? 나 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나밖에 모르니까 뭐가 나왔다? 바리새인 같은 율법해석이 나왔다 이 말입니다. 지금.

-12절 한번 읽어보세요.

그 12절은 설명할게요.

-12절은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영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알잖아요.

알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설명할게요. 지금 뭐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모르잖아요. 뭐 밖에 모르느냐 하면, 나밖에 모른다고. 성령을 받게 되면 뭘 알게 돼요? 예수님의 사정을 알고, 또 뭐를 알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도 알지요. 지금 바리새인들은 성령이 안 온 사람들 아닙니까? 성령이 안 온 사람이니까 뭘 배제해요? 뭐는 아예 생각도 안 합니까?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그런 건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지요. 그건 완전히 배제해야지요. 지금 자기는 나밖에 모르지요.

나밖에 모르는 게 뭐냐? 나는 어떻게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돌리느냐? 이거죠. 나밖에 모르는 상태인데. 예수님의 성령이 유대인들이라도 괜찮고 이방인 괜찮아요. 성령이 주께서 오게 되면 뭘 아느냐?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를 알죠. 왜? 나는 나밖에 모르는가를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것만 압니까?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들어봐요.

-그것만 아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강의 시간 멀었다니까.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걸 알지요. 그리고 뭐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모르는 입장에서 이제는 뭐까지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정도 알게 되었지요. 어떤 상태에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니까 나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 뭐라고? 말씀을 내가 지켜야 영광 된다는 것은 어디에 속한다? 나밖에 모르는 건데 이것이 얼마나 시건 없는 소리인지 뭘 통해서 알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정을 알고 보니까 이것이 얼마나 시건 머리 없는 엉터리 같은 소리인지 이젠 알게 된 거예요. 이 두 가지를 다 알게 되는 것을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구약에 언약궤가 있지요. 언약궤는 협의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저, 모세, 이번엔 어디로 갈까요?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협의해서 가는 게 아니고, 이 언약궤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서 지 마음대로 갑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예상한 것을 비껴가면서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물이 없고 양식 없는 곳으로 간다고요.

만나주는 것도 법궤 이동하는 것도 애굽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놀랍게 하니까 결국 그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만나는 먹고 마시고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라고. 순종하는데 뭘 해야 돼요? 마음을 낮추라고 준 게 만나에요. 그게 신명기 나오지요. 8장에.

배고픈데 밥 주면 마음 낮출 것 뭐 있어? 그냥 주는 대로 만나 먹으면 되는데. 만나가 그냥 만나가 아니고, 마음 낮추고 낮추게 하는 그런 만나에요. 엄마가 아들에게 밥 차려 주면서 마음 낮추라고 주는 밥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야야, 먹고 이렇게 하라 하지. 그러나 만나는 그런 만나가 아니고, 니가 지금 엉터리라는 거예요. 니가 지금 사고방식이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순종, 순종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한 예가 보통 칼 들고 싸워야 전쟁에 승리하잖아요. 그런데 아말렉 전쟁은 어떻게 했습니까? 정말 특이해요. 산 위의 모세가 지팡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전쟁이 일어나더란 말이에요. 그리고 물이 없어요. 어디 물이 바위 속에 숨어있다는 걸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은 앞으로 어떠한 장벽이 오더라도 심지어 정탐을 안 보냈으면 다행인데 정탐을 보내고 난 뒤에 그 사람들 어떻게 했어요? 열 명 어떻게 됐습니까? 대성통곡했습니다. 이제 죽었다. 모세한테 원망했습니다.

결국 모세한테 원망했다는 말은 그동안 계속해서 뭘 품고 있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선입관 가지고 천국의 희망이 완전히 좌절된 거예요. 약속의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적들이 약한 것도 아니고, 단지 뭐가 문제입니까? 내 식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을 본인들이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자기한테 믿음 있다고 여겼지요. 하면 됩니다. 하면 됩니다. 했는데 항상 믿음 한 가운데서 보니까 절망이고 낙담이고 장벽이고 우리는 뭐 같고? 저거는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이것이 두 개 합해서 언약이 되는 겁니다. 언약은 성령은 항상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 예상한대로 어긋나게 만들어요. 나는 이 말씀을 지켰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 말씀을 지킨 게 아니에요. 나는 기도했다 했는데 성령오고 보니까 성령이 하시는 기도하고 내 기도하고 달라요.

성령의 하신 기도는 뭐냐 하면, 바로 모든 일을 주께서 지금 우편에서 기도한 덕분에 이루어진다는 거. 우리 기도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베드로야,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너는 마귀에 빠지지 않았느니라.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 기도를 대조하기 위해서 우리 기도를 우리로 하여금 기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계속해서 만들어가요.

그래야 그것이 언약이 되어서 바깥에 주님의 은혜만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은혜만 나오려면, 왜 나는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느냐가 계속해서, 계속해서 숙성되고 익어져야 됩니다. 이게. 지금 제가 예수님의 심정에 대해서 아직 이야기 안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야기 안했으니까. 이 책에선 부스러기 했는데 그 부스러기 나중에 이것 이야기하고 난 뒤에 부스러기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부스러기를 이런 은사를 받고 복을 받고 이런 병 고침을 받고 낫는다. 여기에 관심을 둬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가 관심 있다는 것은 아무리 래드가 랍비들의 성경해석을 욕을 해도 그 틀은 동일한 틀이다. 똑같은 나 밖에 모르는 틀, 그대로 유지하고 있더라.

그래서 예를 들면 창녀가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 라고 말을 딱 던지면, 내 중심에 있을 때는 뭐 해야 됩니까? 나 중심에서는 아, 이거 창녀 되도 천당 가는구나. 이거 세금 떼어 먹어도 천당 가는구나. 라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그죠? 맞죠? 왜? 자기 구원 중심이니까. 그럼 나도 창녀 같이 살아도 괜찮겠네. 나도 세리처럼 돈 떼먹어도 괜찮겠네.

만약에 뭘 모른다면? 예수님의 심정을 모른다면, 혼자 있다면 이렇게 되겠죠. 그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죠. 그 사람 어디 갑니까? 당연히 지옥 가는 거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방종이 없지요. 있을 수 없지요. 왜? 방종한다는 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방종을 안 하기 위해서 자칫하면 내가 방종할 수 있으니까 내가 창녀처럼 되고, 세리처럼 되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새사람을 입으라에 여기에 어긋나니까 그래.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방종하지 말고 열심히, 이 사람도 어디 가요? 이 사람도 지옥 가는 거예요. 왜? 둘 다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은 전혀 모르고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이거 놀랍게도 로이드 존스 목사 산상설교에도 나옵니다. 이것이 사고방식이. 영적생활에는 이게 잘 안 나와요. 영적생활, 에베소서 강해 가운데 이게 잘 안 나오는데, 그 뒤에 나오는 노동문제 이런 거 보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쪽입니다. 자아 중심의 사고가 나와요. 이유가 뭐냐 하면, 청교도 정신이거든요. 보통 이게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신학생들 전부 여기 다 따라가고 있어요.

예수님의 고린도전서 2장 보면, 예수님의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속사정을 알아요.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인간들은 백정하든 뭘 하든 놔두고 예수님 홀로 아버지와 있었던 그 내막, 마음의 내막을 성령을 받으면 그 내막을 알게 됩니다. 그 내막을 보게 되면, 이것은 바로 죄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공의로우신 분이고 자비로우신 분인데, 이 사랑의 희생을 위해서 이 예수님 본인이 제가 희생자로 저를 보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결국은 이쪽에는 뭐가 붙습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해서 구원받질 못하지요. 왜냐하면 이건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니까. 김달원 목사님 설교한 대로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지요. 모든 것에서 배제되어 있어요. 까불던 놀던 까불던 충실하던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다 배제되어 있어요. 예수님하고 아버지 있는 이야기만 우리에게 그냥 넘어올 뿐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아버지가 자기 원하는 자를 살리는 것처럼 나도 내 원하는 자를 살린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저쪽에 지금 건물 안에 예수님, 하나님 계시고 바깥이 인간이라면, 저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하고 칼부림을 하고 기도하고 관계없이 이미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속닥속닥 예수님하고 하나님이 이미 결정 다 해놨어요. 남는 건 뭡니까? 남는 것은 아버지가 내가 주신 자만 예수님께서 희생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속닥속닥했던 그 심정이 심정입니다.

요한복음 17장 기도에 나오지요. 아버지, 경상도 말로 아버지예, 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특별히 이 세상이 아니고, 내가 기도한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이 세상 중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남겨진 것을 감사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제자들은 자고 있다고. 요한은 들었는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것을 예수님하고 아버지 사이에 속닥속닥 이미 결정 난 사항이에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니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자. 라는 것이 해당이 될까요, 안 될까요? 해당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가 믿을게. 라는 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안 해요. 전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만약에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방금 제가 하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저는 아무것도 안 것도 없는데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다 하셔서 결정 다하셔서 저를 가지고 주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 담게 했습니다. 전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그걸 가지고 예수님을 증언한다. 예수님만을 증거 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직 거기서 이야기가 안 끝났어요. 자, 문제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아까 주가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하고 다 이야기된 것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오지요. 누가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성령님이 들어오십니다. 지금 우리는 자아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 믿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니까. 믿음이 선물로 와야 되니까. 이건 안 되고.

그러면 성령님께서 누구하고 의논합니까? 우리하고 의논할 턱이 없지요. 우리하고 의논 안 하지요. 의논 안 할 수밖에 없지요. 처음부터 우린 배제되어 있으니까. 김달원 목사 설교대로 우린 배제되어 있으니까. 성령님은 우리하고 의논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만 하나 확보돼요? 세상을 책망할 뿐이지요. 우리는 나 중심이니까. 내가 나 중심이라는 걸 언제 알았다고요? 성령님이 오니까.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 이 방에 나 혼자 살다고 생각하는데 나 혼자 살기 때문에 어디 가도 있는데 갑자기 뒤를 쳐요. 이상하네. 나 혼자 사는데 누가 치지. 나 혼자 밖에 없어. 또 치는 기라. 왜 자꾸 쳐? 누가 있단 말이야. 보니까 투명인간이 나를 치는 거예요. 그때 문 열고 어이, 당신, 혼자서 뭐라고 하느냐? 당신 혼자 있잖아. 나는 내 안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분이 있더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분이 나를 책망하는 거예요. 할 때 지금 예수님과 성령님 사이에 이 마음은 성령님이 아시잖아요. 어디 나오느냐?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로마서 8장에 뭡니까?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분이 우릴 위해서 대신 기도하지요. 그래서 뭘 이룬다? 이미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지요. 이걸 아는데 성령님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알려 줍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데 그 책망의 기준이 요한복음에 보니까 우리하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예수님하고 비교하지요. 예수님하고 비교해서 예수님 편에 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령님이고, 예수님 입장에서 우리를 의에 진리로 책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도 성령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가지고 책망하지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고 처음부터 돈을 사랑하지 안할 것 같으면 성경책에서 뭘 찢어버려야 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처음 교회 믿을 때 잠깐 보고,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이미 성령님 들어왔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그걸 안 봐도 되지요.

그러면 한 10년간 돈을 안 사랑했다고 봅시다. 11년째 돈을 사랑 안 합니까? 그런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 같이 우리는 뭐 해야 돼요? 매일 같이 책망 받을 수밖에 없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돈이 많을 때야 돈을 사랑 안하지. 주여 돈을 사랑 안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돈이 없을 때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책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성령은 책망할 때 너가 최선을 못했어. 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기준으로? 너는 왜 예수님처럼 안 돼? 예수님처럼 못되는 거야. 예수님처럼 돼야 하나님 영광이잖아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비교하면서 책망하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비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어느 기준을 비교해야 됩니까? 예수님의 뭘 가지고 비교해야 돼요? 예수님이 하신 일들 중에 최고의 일이 뭐예요? 십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어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한테 따집니다. 어이, 이근호 이리 와. 예. 물 위 한 번 걸어. 이게 예수님은 걸었는데 너, 왜 물 위를 못 걸어. 이런 식으로 따지는 분이 아니잖아요.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왜 마가복음 보면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독을 먹어도 하는데 왜 우리는 못 합니까?

예수님이 계시다는 증거를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음란한 세대에서 기대하는 표적 있잖아요. 놀라운 기적 있잖아요. 납득이 되는 기적들. 그런데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이 뭡니까? 요나의 표적이에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와 함께 있다는 표적이 놀랍게도 자기의 약함이에요. 자기의 고난입니다. 내가 약한 데서 주의 은혜가 온전함이라. 심지어 고린도후서 1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살 소망이 끊어졌지요. 살 소망이 끊어진 이유가 뭡니까? 고린도후서 1장 한번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살 소망이 끊어진 이유가 뭐예요? 1장 5절에 나와 있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보세요. 지금 1장 8절에 나오는 살 소망이 끊어진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뭐 예수님께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가만있는데 뭐가 넘쳤어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누구 고난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 이미 안 죽었습니까? 고난 안 끝났습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의 남은 고난이 내게 채운다 하지요.

아니, 예수 십자가 이젠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이제는 좀 청산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 마음대로 살지를 못해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법궤가 자기 원하는 대로 가는 게 아니라 법궤가 인도하는 곳은, 이거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인도하지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무엇의 격차? 우리의 속사정과 우리의 속마음과 진짜 아버지의 뜻과의 차이가 격차가 일어나지요.

마찬가지로 성도라 하는 것은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법궤가 있으니까 법궤가 인도하는 대로 하는데 그 온전히 다 이루었다 하는 뜻이 예수님 뜻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인도하는 그대로 우리와 비교시켜서 우리를 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령께서. 치는데 그럼 우리는 치고 난 뒤에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하면 될 거다 이 말이죠. 보통, 이 목사님, 그거 잘못됐어. 하면 아이고 앞으론 잘 하겠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십자가가 뭐냐 하면, 반성해서 잘하는 게 아니고, 죽어야 그게 잘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근거에 의하면. 십자가의 죄는요? 제가 예수거든요. 아버지 하나님,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대신 다 깨끗하게 살면 안 됩니까? 이게 십자가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야, 예수야. 니가 지금 갖고 있는 죄는 니가 대신해서 잘 살아준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죽어야 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선 죽는 것밖에 없어요. 그 저주가 십자가입니다.

무엇 때문에 새로 생겼습니까? 죄가 있기 때문에 발생된 그 저주가 십자가고, 그 저주를 담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했을 때 그래서 의를 만들을 때 그게 뭐냐? 그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에요.

그럼 다 이루시려면, 십자가 구조는 뭡니까? 죄인에서 뭐라고요? 저주로 이룰 수밖에 없고, 저주가 뭐냐? 죽음이죠. 그 다음에 그냥 주신 의에 대해서는 천국이고 복이죠. 이것이 한꺼번 들어있어서 지금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함으로 말미암아 뭐가 발생됩니까? 죄가 발생되죠. 우리 생각은 앞으로 잘할게, 잘할게요. 이게 있는데, 잘 할게요가 아니라 그 정과 욕심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옵니다. 25절.

십자가의 성령께서는 성령 따라 살면 우리는 우리 속의 육이 날마다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해서 십자가 속에 들어갈 때는 저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뭐로 나옵니까? 용서로 나오는 거예요. 한번만 그렇습니까? 평생 동안 한번만 그렇습니까? 우리 십년 뒤에 돈 안 좋아합니까? 우리가 오년 뒤에는 먹든지 마시든지 걱정 안 합니까? 한번만 그렇습니까?

말씀이 작열할 때만다 계속해서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죄로 들어가서 의로 나오고, 주여, 주의 의로 구원받는군요. 제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죄로 들어가서 의로 나오는 이걸 두 자로 뭐라 합니까? 이걸 은혜라 합니다. 그래서 뭐냐? 고린도전서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 주신 것은 우리로 은혜를 알게 하심이라.

그 은혜가 뭐냐?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 은혜가 뭡니까? 세 자로 이야기하면 은혜가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내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게 은혜가 아니잖아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은혜가 아니라, 십자가 믿을 수 있는 게 은혜 아닙니까? 내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 같으면 그건 뭐가 되겠어요? 그건 은혜가 아니고, 은혜에서 뭐로 끝나야 돼요? 이제는. 행함으로 가야 되지요. 행함이 성립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어떤 법을 지켰다는 게 성립되어야 돼요. 그러면 이게 뭐가 됩니까? 행함이, 행함이 되려면 성경말씀을 뭐로 봐야 돼요? 전부 율법화 시켜야 되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어이, 이 목사 뭘 지켰어요? 뭘 지켰더라. 이거 지켰다. 이러면 그것은 뭐가 돼요? 그것은 이미 그 말씀을 율법화 시켜놔야 그 다음에 행함이 뒤따라옵니다. 나 이번에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 해서 가난하게 되었다. 지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다른 옆에 구절은 놔두고 그 구절은 지켰잖아요. 그러니까 전체를 성경말씀을 율법화 시킬 경우에는 반드시 행했느냐, 안 행했느냐가 나와요. 근데 십자가는 뭡니까?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죠.

그러면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모든 것을 저주할 수 있는 율법의 완성이죠. 만약에 자기 행함을 내세운다 하면, 십자가는 뭐로 변합니까? 졸지에 뭐로 변해요? 율법의 완성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믿어야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행함으로 십자가 믿은 위인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 행함으로 못하니까 누가 한다고요? 성령.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니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육체로 마치느냐? 그 말은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뭐로 마쳐야 된다? 성령으로 마쳐야 된다. 그리고 성령은 뭐만 주장한다? 우리가 몰랐던 것만 가지고 우릴 공격한다. 몰랐던 게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은밀한 것. 그 은밀한 것만 가지고 우리를 들이대지요. 들이대면 우리는 그때 뭐라고 하느냐? 아하, 나는 나밖에 몰랐던 사람이었고, 나밖에 모른다는 거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밖에 몰랐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그 말씀을 뭐 화 시킨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화 시켜서 그것 지켜서 구원되리라, 또는 영광 돌리라 생각했던 이 사고방식이 그걸 지키는 주체자가 누구에요? 나니까. 나를 배제하면 지킬 주체자가 없으니까 어차피 나밖에 모르는 입장에서 그걸 지켜 온 사람이구나. 오호,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내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었다. 누가 나를 구원하랴? 라고 붙어 있는 게 뭡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이것은 니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성령께서 너를 지배하게 되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런 사람이 된다. 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들어보면 항상 유의할 점이 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왔을 때 예수님이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은 것처럼 성령도 우리하고 의논하느냐, 아니면 성령은 십자가, 주님의 지시를 받느냐? 그 차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지신 것을 우리 가지고 증거 하느냐? 아니면 우리하고 속닥속닥해서 의논해서 우리하고 어떻게 타협을 해보느냐? 그 이야기에요. 둘 중에 어느 게 맞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이제 성경에 보면, 권면하는 게 있고 명령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권면, 명령, 서술 어떤 경우라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 라고 했을 때 율법, 나라는 행위, 바리새인이죠.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나만 달랑 알았을 때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구원은 뭐로 받는다? 은혜로 받는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홍해로 건너간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은 뭐만 합니까?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이거면 끝나죠. 다시 뭐로 돌아가요? 나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자기는 해가 딱 질 때부터 분을 안 품었어요. 해 지고 난 뒤에 분을 안 품었다고 했는데 성경에 그 뒤에 보니까 뭐냐 하면, 남을 용서하라. 이렇게 나오거든. 그러면 이것도 지켜야 될 것 아닙니까? 남을 용서한다. 그런데 남을 용서했는데 또 나한테 시비 거는 기라. 또 용서해야 된다고. 일곱 번 용서했어요. 또 나한테 배반해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게 공관복음입니다. 지금 공관복음 설명하려고 한 시간 설명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인간이, 예수를 따르는 바리새인들이건 간에 누구든지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마음은 누가 알지요? 예수님은 알지요. 우리는 모르잖아요. 나 중심일 때 예수님의 말씀 조차에 대해서 나 중심으로 해석하면 어떠어떠한 것들이 나오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열두 제자가 앞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은 요한복음과 사복음은 예수님하고 제자하고 부지런히 주고받고 주고받는데 항상 깨지는 쪽은 어느 쪽이 깨집니까? 제자들의 의외로 깨지지요.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칭찬 받는 쪽이 나옵니다. 누굽니까? 제자들이 아니고 누구에요? 세리와 창기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마리아 사람과 백부장,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소위 바리새인들은 저쪽이라 하고 예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저쪽이라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과 그 다음에 제자는 아닌데 뭔가 특이하게 불쑥불쑥 우발적으로 등장하는 몇몇 주께서 의도적으로 등장시키는 인물들이죠.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이런 자들 말이죠.

그런 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자들 쪽은 아니고, 나는 십자가 믿고 구원받았다. 이제는 이렇게 나중에 살아야지. 이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쪽이 제대로 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노선에 속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안 쉬고 그냥 갑시다. 도마가 예수님의 얼굴 보고 예수님 알아 봤습니까? 아니잖아요. 도마가 예수님 얼굴 보고 믿습니다. 했습니까? 뭐 보고 믿습니까? 창 자국과 핏자국 믿었다고. 그때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이 말 했죠. 이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이 말은 도마가 보고 믿는 식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도마가 한 것처럼 보고서 믿는 식이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식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보지 않고 믿는 식이라는 말은 믿을 때 자기 공로가 섞일 수 있습니까, 섞이지 못합니까? 못 섞이지요. 섞이지 못한다고.

그러면 자기가 행함으로 내세운 것도 없이 있다면, 이것은 철저하게 주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뭘 배제합니까? 나를 배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여기 오늘 래드의 교재처럼 이제 교재에 들어가 보면 이해가 돼요. 들어가 보면 불쑥불쑥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때 말이 맞아요. 래드의 이야기가 맞는다고. 이게 뭐냐 하면, 찾아주시는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축복의 은사주시는 하나님, 구원의 은사주신 쭉 나온다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하나님 있잖아요. 여러분 읽어보셨으니까 다 아시겠지요. 이 대목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니까 이거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양이 평소에 목자를 위해서 얼마나 울었느냐, 애타게 찾았느냐? 이런 것은 전혀 모르고 양은 뭐냐? 철딱서니 없는 거죠. 그냥 양 위에 뭐만 덮입니까? 찾는 목자의 은총만 덮이지요. 그냥 요새 말로 십자가의 은총만 덮인다 말이죠. 잃어버린 양이 되어서 나, 이래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여기선 나가 나올 수 없지요.

그런데 예수 믿고도 제자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자기는 제자거든요. 그러면 제자 된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질문을 그대로 할게요. 예수님, 몇 번 용서해 주면 됩니까? 한번 적어볼게요. 질문 한번 보세요. 몇 번이나 용서하면 그게 참다운 용서, 예수님이 원하는 예수님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용서입니까? 라고 물었다는 자체가 베드로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 하옵소서. 그 다음 뭡니까? 내가 제자니까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몇 번 용서하면 예수님이 요구하는 성령이 요구하는 그 수준에 딱 맞다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제 말 맞죠. 제가 틀린 말 아니잖아요. 맞잖아요. 안 그러면 물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이죠. 칠십 곱하기 칠이죠. 그러면 베드로가 이 말을 듣기를 490번 용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저주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한 것은, 니 꼬라지를 알라. 이 말 아닙니까? 결국 그 이야기가.

한번 봅시다. 똑같은 질문합니다. 예수님, 디모데전서 보니까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하는데 어느 정도 되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압니까? 라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거예요. 교회 처음 오면 물을 수 있습니다. 그때 목사가 이러는 거예요. 에라, 씨. 니 꼬라지를 알아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목사님 말씀대로 십자가 믿고 새사람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말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먹는 거 입는 걸 족한 줄 알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하루에 두 끼를 말합니까, 세 끼를 말합니까? 족하다는 게 어느 정도 돼야 됩니까? 에라이, 니 꼬라지를 알아라. 니 꼬라지를 알란 말이죠.

아니 이 목사, 이리 오세요. 문자를 봐야지. 그건 당신의 영적인 해석이고 당신 신학이고, 문자를 보라고.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하면, 먹는 걸 족한 줄 알아요? 잘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앞으로 쭉 그대로 유지하세요. 이렇게 칭찬해 줘야지. 어디 그렇게 겸손하고 충성된 종을 니 꼬라지를 왜 그런 욕을 합니까? 남 상처 입게. 그런 소리 안 하겠어요?

그걸 두 자로, 크게 쓰겠습니다. 이걸 ‘사랑’이라.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뤘느니라. 해가 질 때 분을 품지 마라. 그 뒤에 나온 말이 뭡니까? 주께서 너를 사랑함 같이 사랑하라. 남을 용서하여라. 사랑이에요. 요한일서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이 네 속에 움직이면 너는 죄 짓지 않을 것이다. 맞지요. 주제가 그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랑이 무슨 사랑이라고요? 니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니 속에서 사랑하는데 어느 수준이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다.

요한복음에 새 계명이 뭐라고요?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란 개념은 바로 지금 베드로가 이 질문하고 난 뒤에 나온 대목이 뭐냐 하면, 어떤 데나리온 유명한 이야기 알지요. 여러분 목사님들이니까 그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세상에 동전 20원 안 갚았다고 반 옥 갇히고 조져버리고. 어떤 사람을 임금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수억을 탕감해 줬는데 그거 안했잖아요. 그때 그 임금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노하지요. 그거 설명하겠습니다. 노하는 것.

지금 십자가마을에 들어오는 사람이 뭘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사랑으로 보지, 저주로 보는 사람이 없어요. 십자가는 일반교회에서 사랑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라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십자가가 저주하는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총체기 때문에. 율법은 뭐라고요?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 있죠.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으로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마지막 심판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뭐가 있으리라? 저주가 있으리라. 사도 바울 같으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하다?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지금까지는 내가 묵인했지만 마지막 때에 예수님 십자가 모르면 이방인이고 나발이고 저주받는다.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예수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는 저주받는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받으면 마귀의 종이다.

십자가를 그냥 봐주는 용서의 사랑의 십자가로 이해했는데 이게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게 새 언약이거든요. 제가 그토록 새 언약, 새 언약 했잖아요. 새 언약에는 옛 언약의 완성으로써 옛 언약에는 죄인을 용서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죄인과 용서가 다함께 포함되어서 이것이 새 언약으로 완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살과 피는 계속 우리에게 주어져야 돼요.

그 십자가 안에 십자가가 주를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 사랑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어느 정도 돼야 사랑이냐 하면, 이게 은사로 주어져야 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사랑에 미쳤다. 그래 미쳤다. 내가 사랑에 미쳤는데,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사랑에 미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했다가 죽은 분을 위해서 살게 함이라.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성경 한번 봅시다. 디모데후서 봅시다. 디모데후서 2장 26절. 누구 한번 읽어보세요.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걸 꼭 보여줘야 됩니까? 사로잡힌 게 뭡니까? 독립하는 겁니까? 사로잡혔다는 뭐예요? 참, 불쌍하게 되었다 이 말 아닙니까? 신세 조진 거예요. 사로잡힌 거예요. ‘사로잡혔다’ 이 말은 완전히 성령에 의해서 인데, 그것이 기쁨이고 즐거운 이유가 바로 그 안에서 사로잡히면서도 기분 좋은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를 느끼지 않으면 사로잡힌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어요.

나 역시 새사람으로 살았다 말이야. 나 죄인 아니란 말이야. 왜 자꾸 날,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 상대방은 기분 나빠요. 그런데 나는 주님 없으면 못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사로잡힌 게 기분 좋아요. 제발 좀 사로잡아 주세요. 나, 주님 떠나면 나는 죄인이고, 주님 떠나면 나는 죽은 놈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는 죽은 자고, 예수님은 산 자입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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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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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