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11월 3일 강의
울산 11월 3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220.122.1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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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2.♡.57.66)
07-02-03 13:24
20061103a 울산강의-창세기 1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정시에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의 이야기가 현재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환영, ‘환영’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해서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죠. 이 환영을 현대인들은 상상, 환영, 자기 욕망에 의해서 매일같이 만들어내요. 아침에 눈 뜨고 출근하기 전에 오늘은 이렇게 되고 싶어. 환영으로서 떠오릅니다. 그것이 하루 종일 자기를 괴롭히는데.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똑똑하다고 할까요, 현명하다고 할까요. 이런 환영거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지금 현재처럼 복잡하질 않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되게 단순한 겁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자연세계만 충실히 순응하면 그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거지, 그 이상 뭐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연이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면, 그대로 따라가면 그게 잘 사는 거죠.
지금은 자연스럽게 살면, 만약에 그러니까 어둡구나. 자라하는 모양이구나. 자자. 어, 해 떴네. 일어나자. 지금 이렇게 옛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살아버리면, 지금은 못 삽니다. 왜 못 사느냐 하면, 지금은 무슨 시대냐 하면, 경쟁시대에요. 경쟁시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그야말로 이거는 유유자적하죠.
깊은 산골에서 달력도 없고,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고, 그저 계절변화만 느끼면서 살 때는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근데 지금의 도시생활에서 아침에 일어나 뉴스 보세요. 전부다 대통령이라. 왜? 대통령만 알아도 될 일을 온 국민이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다 알아버립니다.
열아홉 살 먹은 여대생이 산후조리원 가서 낙태한 것까지 다 나오지요. 그렇게 되면 산부인과 관리체제까지 다 생각해야 돼요. 골라서 정보를 제공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걸 모르게 되면, 직장에 나가서 왕따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코미디 유행어 모르면, 그 조직사회에서 사람 무시당하기 일 아니거든요. '운전해. 어서.' 그거 이야기할 때 안 웃어버리면, 그거는 사회에서 못 살 정도다 이 말이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옛날에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였지만, 지금은 누구와 경쟁상대냐 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경쟁상태입니다. 그 경쟁상태가 지금 복잡하게 만들었고, 지금 시대가 자연적으로 뭘 잊어야 되느냐 하면, 자연을 잊어야 되고, 자연을 잊은 만큼 빈 자리를 뭐로 채워야 하느냐 하면, 자신의 야심에서 나온 상상력, 흔히 이걸 비전이라 해요. 상상력, 꿈, 목표량, 실적, 이런 걸로 대체해서 살아야 돼요.
그럼 자연에 대한 연구는 누가 하느냐? 이거는 전문담당자가 있어요. 자연을 담당하는 걸 가지고 자연 과학자에요. 자연과학자들이 자기 분야에 따라서 물리 같으면 물리, 화학 같으면 화학, 생물 같으면 생물, 그 분야 따라서 연구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분야에 또 연구를 하고,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강의 첫 시간부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을 볼 때 옛날 사람이 성경 보는 것 하고, 지금 볼 때 사람들이 보는 것 하고 다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꺼내는 겁니다.
옛날 사람이 성경을 볼 때는 이거는 뭐, 믿습니다. 믿습니다. 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늘 대하던 그 자연세계에 대해서 그대로 이야기해주기 때문에 뭐, 아, 믿어야 될 건데. 이런 것 필요 없어요. 그냥 읽어보면 다 끄덕이게 되는 겁니다. 이거 창세기 1장 믿는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옛날 사람에겐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사람이 만약에 현대 21세기의 지금 청소년들이나 한국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 책을 읽어버리면 대번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그거는 내 분야가 아니고, 생물학 하는 사람들, 그 사람 분야기 대문에 그 사람이 연구한 것에 대해서 권위 있게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그 사람한테 전문가한테 한 소리 들으면 창세기 1장 읽는 것을 대체, 대신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창세기 1장해서 믿으면 될 텐데, 저, 생물학 전공이죠.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물학 전공한 사람이,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전문가이시잖아요. 전문가. 이게 진화론적으로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이걸 설명해 주세요. 창세기 1장이 왜 틀렸는지, 왜 우리가 배우는 과학하고 다른지 설명해.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본인이 이걸 보고 어떻게 느꼈느냐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이 책, 성경을 보고 이걸 인정하느냐 그거로써 나가는 게 아니라, 자연과학 담당자가 이 창세기 1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자연과학자 권위를 인정하면서 이걸 받고자 한다 이 말이죠.
제가 오늘 낮에 영남대병원 1009호실인가 하여튼 거기에 병문안 갔습니다. 말이 병문안이지, 병원에서 포기한 사람이에요. 얼굴부터 해서 손끝까지 노랗게 된 사람입니다. 나이가 사십 다섯인가, 사십 셋인가 남자인데. 간암에 걸려서 간암도 말기 중에 말기에요. 이식도 병원에서 말이, 하지 마세요. 안 됩니다. 끝났습니다. 투석도 포기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의식은 있고 말은 겨우 해요. 마지막 가는 길에 그 사람 교회 안 다니는 사람입니다. 누나가 우리교회 나와서, 마지막 가는 길에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그 누나가 저를 초청해서 갔어요.
그때 제일 먼저 내가 끄집어낸 게 그겁니다. 지금 아저씨가 우리 정 선생님께서 그저 직장생활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가 간 나빠도 그까짓 것 간 그거 뭐, 젊은 나이 뭐 해서 폭음하고 술 많이 마시고 담배 피우고 뭐, 돈벌이하고 뛰다보면 영업하다보면 그런 것 다 해야 되잖아요. 나이 사십 셋인가 그쯤 됐을 거예요. 이제 곧 몇 개월 안 남았다. 일 개월 안 갈 것 같아요. 제 생각엔. 그냥 청춘 끝내는 겁니다.
그때 제가 이야기했어요. 그 바쁠 때 내 몸이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 제일 먼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이 몸은 아픈 몸이든 성한 몸이든 이 몸은 만드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거 인정하십니까? 그러니까 대번에 인정하지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그 사람은 교회도 잘 안 다닌 사람인데 교회 거의 안 다니는 사람인데 평소에는 하나의 가장으로써 돈벌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돈벌고 돈버는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내 몸이 어디서 나왔느냐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사십 셋의 나이에 이제는 내일모레 곧 갈 나이되니까 비로소 자기 자신의 문제인 거예요. 생물학자에게 물을 게 아니고. 이 성경말씀과 이 사이에 목사도 젖혀버려요. 목사도 중간에 끼지 말고 비켜나시고. 이 창세기 하나님 말씀과 나하고 내일 오락가락하는 내 병든 몸과 직접 부딪치는 거예요. 직접 부딪쳐서, 과연 이 말씀 맞나? 과연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나? 그때 진지한 질문을 자기에게 처음으로 던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뭘 했느냐 하면, 히브리서 9장을 설명, 이야기해줬습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한번 확정된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대목을 가지고 마지막 가는 그분에게 이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죄 져서 죽는 게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는 것은 확정되어 있고. 그걸 인정하십니까? 하니까 인정하지요. 왜냐하면 지금은 돈 버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지, 이래 가지고 링거를 맞고 죽는 입장이기 때문에 달리 보이는 게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나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걸 인정합니까? 이제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 두 번째 나타나시는데 그거는 뭐냐? 예수님이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와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두 번째 구름 타고 오십니다. 그걸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는 거예요. 진작 왜 인정 안 했어요. 진작. 진작 왜 인정 안 했어요. 진작.
창세기를 우리가 공부하면서 너무 현대과학과 현대인식이 이 창세기하고 우리를 완전히 지금 앞에 두터운 안개막을 쳐 놨어요. 스크린을 쳐 놨어요. 지금. 그걸 지금 우리는 선풍기를 틀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창세기와 나 사이에 있던 그런 21세기 문명을 화~악 다 버리고 옛날 사람으로 돌아가 봅시다.
자연으로 돌아가 볼 때에 자연세계에 내 몸을 물컹물컹한 이 몸 덩어리부터 해서 손, 눈, 코,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정답은 성경대로 하면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바빠서 교회 못 나왔느니 나이 죽을 때 나올게 그런 것은 전부다 핑계 대는 겁니다.
분명히 창세기, 성경책이 내 책꽂이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우리는 살아왔잖아요. 사실은 창세기에 나오는 그 몸 가지고 살면서도.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그 몸 가지고 흙으로 돌아갈 이 몸 가지고 살면서도 창세기하고 아무 상관없다고 살잖아요. 이게.
그게 왜냐하면 다시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설명해야 돼요. 한 번 더 들어도 괜찮지요.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 같으면 단순했기 때문에, 단순 뒤에 하나 더 붙인다면 단순무식이죠. 단순 무식했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살았어요.
심지어 창세기 안 들여다봐도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조물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와요. 교회 안 다니는 할머니도 조물주께서. 조물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왔고, 그렇게 거기에 같이 살아가는 그것이 자연스런 인간다운 삶이라 했는데,
이게 경쟁이 되니까 자연만 쳐다보다가는 굶어죽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자연을 버리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버리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그런 것 생각할 틈도 없어요. 하나님이고 그런 것 생각할 틈도 없어요.
내가 버리고 남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복잡한 세계에 뛰어든 겁니다. 단순무식이 아닙니다. 이제는 복잡 유식해야 됩니다. 이젠 정보세계입니다. 복잡 유식하다보니까 세상에 자기 밥벌이 되는 것만 전공하고, 나머지 전공은 다른 전공자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주신 몸을 가지고 살면서 이게 자연스러운데, 몸은 하나님이 주신 건데 머리에서 여기서 터져 나오는 것은 나의 환영, 환상이죠. 또는 허망한 여러 가지의 상상력. 하나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내 욕망이 자아낸 욕망의 산물인 그 허망한 것을 따라가려 하니까 거기서 괴리현상이 일어나요. 괴리현상이 일어나니까 집에 오면 퍼드러져서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 또는 회사 끝나고 난 뒤 일차 가고 이차 가고 술 먹고.
그냥 뭔가 모르는데 자연스런 내 몸과 남한테 안 져야 경쟁해야 살아남아야 먹고 산다는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그걸 매우기 위해서 나를 쾌락과 감각에다 내 몸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져버립니다. 일차, 이차, 삼차 가면서 생각이 들어버리고. 그러니까 이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술은 술대로 먹다가 나이 사십 셋에 노랗게 되어서 손톱도 노래요.
전신이 노랗게 되어서 마지막 순간에 우리교회의 이근호 목사라는 사람 불러다가 히브리서 말씀, 한번 죽는 건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마지막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이야기를 이제 처음 듣는 거예요. 이제 와서 처음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드리는 것은 자기 환영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심을 잡아야 돼요. 중심이 있어야 돼요. 토대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속이고속이고 싶어도 자기 몸이 하나님이 만든 것을 우리 자신을 속이고 싶어도 속이질 못 하는 겁니다.
제가 요새 유행하는 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 사극에 등장하는 개가 21세기 개하고 똑같아요. 바로 저거다 이 말이죠. 개가 조선시대 개나, 조선시대가 아니지. 주몽 시대니까 고구려 시대지. 고구려 시대 때 개나 지금 개가 동일하다면, 그럼 고구려 사람들 발가벗겨 놓으면 오늘날 사람들하고 목욕탕 넣으면 구분이 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똑같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가 누구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내가 입은 옷, 내 옷에다 내가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발전이라든지 번영이라든지 진보라는 거. 이거는 환상이고 환영이에요. 그 고구려 시대 때 그 개가 고구려 시대 개는 아니지. 물론 세트장에 온 개가 요새 개 이지만.
고구려 시대 때 개나 지금 21세기 개나 동일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목욕탕 만나보면 똑같고,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고구려 시대 때 하나님이나 지금 하나님이나 똑같다 이 말입니다.
고구려 사람도 구원 받으려 하면 십자가로 구원받아야 되고,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구원받으려면 카드 긁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옛날에는 엽전 줘서 구원받고, 카드 긁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양쪽 다 예수님의 보혜사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하나로 묶어놨어요.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놨는데 뭐냐 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을 해버렸어요. 아무리 역사가 길고 길게 이어져도 아담 안에서 그 아담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 아담이란 인간을 만들어낸 그 규정 안에서 한 발자국도 그 후손들이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무리 새끼 쳐도 아담 안에 있어요. 아담이라는 항아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그런 식으로 다뤘다면 똑같이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걸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슬퍼하거나 노할 처지가 안돼요. 이미 그런 게 규정된 거예요. 이거는 네가 슬퍼하고 노하고 화난다고 해서 변경될 사항이 아니고,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나는 아담에서 못 벗어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게 기뻐야 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방법도 세월이 22세기, 23세기가 되도 똑같이 동일하게 공평하게 적용된다 말이죠. 이걸 기뻐해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를 우리가 첫 대하면서 제가 첫 번째 이야기하는 것은 환영을 나의 상상력에 스스로 속아가지 마시고, 선풍기를 틀든지 해서 그 안에 모든 안개 같은 것을 화~악 이렇게 날려 보내세요. 드라이아이스 같은 희미한 것을 날려 보내면, 비로소 창세기가 똑바로 바로 보입니다. 바로 보이면 내가 비록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창조 때 그때 그 사람, 그때 그 시절로 성경이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창세기 1장의 순간으로 우리를 거기다 세워 대지요.
그런데 정판옥 목사님, 왜 안 오시노?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성경을 볼 때 그때 그 장소로 그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 가야 돼요. 이러한 해석법을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가다머란 사람이 이런 해석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의 지평'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 역사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
지금 비록 우리가 창세기를 안 피면 21세기, 2006년도 11월 달. 폈다 하면 처음 빛을 창조했던 그때 그 시절. 그렇게 보셔야 혹시 이중에 누가 간암 걸리고 누가 혹시 당뇨 걸려서 노랗게 뜨더라도, 창세기 앞에서는 그것조차도 보기 심히 좋았더라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목사님, 그러하면 목사님, 지금 우리를 속이는 겁니다. 천만에 말씀. 속이는 것이 아니고, 당신들의 본질에 가까이 가시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습니다. 진짜 본질은 성경책에 있는데, 우리는 남 따라가다 보니까 환영 속에 환영이 나의 본질인 줄 알고 착각, 착각들 해서 경쟁하다가 심신 다 피곤하고 술이란 술은 다 쳐 먹고 술 다 퍼마시고 이것이 자기의 자아 모습인 줄 알고 이렇게 착각했는데 창세기에 돌아가 보세요. 있는 그대로가 간암에 걸리든지, 당뇨에 걸리든지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면, 저나 여러분한테 행복이란 없어요.
우리가 만든 상상, 환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왜? 우리 몸과 안 맡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몸과 육체의 운명과 우리가 상상한 운명과 안 맡기 때문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바쁘신 것 아는데 가끔씩은 자신의 본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상하게 여기 있으니까 목사 흉내 내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네. 잘 안 해 보는 건데.
그렇다면 옛날 속으로 잠시 돌아갔습니다. 돌아갔을 때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했어요. 이것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에게는 전기가 없었거든요. 전기가 없어서 해만 지면 깜깜했습니다. 해만 지면 깜깜했기 때문에 깜깜한 시간이 그 만큼 길기 때문에 겨울 되면 더 길지요. 긴 캄캄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낮의 환함, 대낮의 환함을 그들은 신의 작품으로 그대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어요. 얼마나 단순 무식합니까? 참, 그때 그 시절이 좋은 것 같아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따질 필요도 없이 낮만 되면 하나님을 봐요. 하나님의 내뿜는 그 손길이 빛이라는 모습으로 자기 어깨 위에 얼굴 위에 쏟아지잖아요. 이용복이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그 낯짝에 땡빛이'하는 노래 있습니다. '그 얼굴에 햇빛이'하는 노래 있거든요. 그 낯짝에 땡빛이 비친다는 노래 있어요. '눈을 감으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그 얼굴에 햇살이 비치는 노래인데.
옛날에는 가로등도 없고 밤만 되면 자야 돼요. 자야 될 시간에 그들은 대낮에 빛이 있다는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종교치고 신을 부정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왜? 빛은 어디서 왔겠느냐 이 말이죠. 빛은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거는 둘째 치더라도 저 빛이, 왜 빛은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이 나와 대지를 살리기 위해서 빛을 빛의 속성으로 막 뿜어 준 거예요. 하늘에서 막 뿌려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 어디서 그런 망발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햇빛이 늘 있으면 몰라도 밤 되면 해가 없잖아요. 밤 되면 빛이 없잖아요. 낮 되면 빛이 있잖아요. 이거는 우리 원이 아니죠. 우리 원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다른 분이 이 우주를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 때에, 그들은 빛을 통해서 의심 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는 거죠. 열아홉 개, 아는 척 하는 게 문제가 된다. 특히 로마서 1장에 보면, 그거 좀 설명해야 되는데 로마서 1장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하면서 요한복음하고 로마서를 왔다 갔다 할 겁니다. 그냥 창세기 보면 한 5분 보면 다 볼 건데.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아까 제가 빛이 이야기한 것 알지요. 나중엔 빛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동양에서는 다섯 가지 요소고, 서양에서는 네 가지 요소에요. 동양에는 다섯 가지 요소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있지요. 다섯 가지 요소 아닙니까? 나무하고 금속. 금요일 금속. 오늘 금속 날이네. 어제는 나무 날이고. 목, 금. 이게 속성, 무극에서 태극, 음양으로 나가는 다섯 가지 요소거든요. 서양에선 네 가지입니다. 물, 불, 공기, 그리고 땅, 흙. 땅, 흙 같은 거니까. 네 가지 요소거든요.
그들이 하나님의 이것은 자기가 요청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냥 주신 거예요. 그냥 주신 건데, 로마서 1장에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절부터 항목이 나옵니다. 항목에서 여기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과 수근수근함과 비방하는 것, 하나님 미워하는 것, 능욕하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우매한 것, 배약하는 것, 무정한 것, 무자비한 것” 스물두 가지입니다.
여기 스물두 가지 다 지키고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여기 스물두 가지. 이 교회 성화 안 되었네. 큰 일 났다. 성화되었다는 사람, 이거 다 지켰다는데. 성화론 주장하는 사람, 이거 다 시켰다는데. 스물두 가지입니다. 이거 다 지킵니까? 간암 걸려야 되나? 이거.
지금 어떤 게 해결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게 뭐라고요? 빛이죠. 창세기 1장에 빛이니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빛으로 알렸는데 우리가 그 빛을 보면서 신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왜 신이 싫어하는 신이 원하지 않는 스물두 가지 이 범죄가 왜 우리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난감한 거예요. 이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하면서 신의 품성을 받았으면 내가 천사가 되던지, 하나님이 되던지 뭐 돼야 될 텐데, 왜 스물두 가지가 다 나옵니까?
제가 스물두 가지가 다 나온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합니다. 안 나오려고 애쓰는데 누가 건드리잖아. 이러거든요. 건드리더라도 안 나와야지. 옆에서 시비 걸더라도 그게 안 나와야지. 빛이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 알 것 같으면 하나님 무섭더라도 안 그래야지요. 특히 이 대목.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건 족집게 아닙니까, 족집게.
교회 와서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교회 와 놓고 교회 나갈 때 이제부터 하나님만 생각해야지. 그런 다짐을 가지면, 그게 그렇습니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원하지 않는 나한테 나오는 거예요. 이것을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잘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없는 죄도 만들어내신다.” 야, 목사가 이거 알기까지 긴긴 세월 전하는 거예요. 설마 신학교 갈 때는 신학교수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죄를 안 짓도록 막으시고, 안 짓도록 조치하신다. 어느 신학자도 칼빈이든 뭐든 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자기가 살아보니까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아예 죄인 만들도록 작정을 했어. 죄를 만들어내요. 만들어내요. 가만있는데 옆집 아줌마가 성질내잖아. 가만히 난 착하게 살라고 하는데 건들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가지고 우리가 미처 예상치도 못한 죄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내놓은 요리 가지 수가 스물두 가지에요. 스물두 가지의 아주 화려한 반찬이 꼭 전라도 음식 같아. 반찬이 수십 가지, 쫘~악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휘황찬란하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이방인에게는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요. 그게 로마서 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차라리 안 태어나고 낙태한 놈이 훨씬 낫다. 얼마나 부정적 발언을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서 뭐 대통령했니, 국무총리했니 하지 말고, 안 태어난 그 놈 팔자가 최고 좋은 팔자다. 그게 제일 일등이고. 그 중 난 것이 나자마자 죽는 놈, 그 놈이 이등이고. 삼등이 뭐냐? 살다 일찍 죽는 놈이 삼등이고. 제일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이 이 땅에 오래 사는 놈.
그래서 사도 바울이 소원이 주여, 죽여 주이소. 꼭 장희빈 같아. 죽여주옵소서. 이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주께서는 택도 없다. 야야. 니, 쓸모 짝이 많은데 왜 니를 죽여. 미안하다. 못 죽이겠다. 죽여주옵소서. 더 써먹어야겠다. 죽여주옵소서. 미안하다. 더 써먹어야 돼. 왜? 니 죽으면 처자식이 불쌍해. 애 지금 시집을 안 갔어. 니는 직장 더 다녀야겠어. 더 다녀서 돈 좀 벌어서 시집보내고 죽일게. 아직도 멀었어. 너 고생 더 해. 주여, 지금 안 죽으면 간암 걸립니다. 간암 걸려도 할 수 없다. 니는 더 살아야 돼.
지금 우리가 팔자에 없는 참, 더러운 팔자해서 지금 오래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보험까지 들어서 건강보험까지 다 들어서 연금 들어서 지금 오래 살고 있어요.
순수하게 봅시다. 성경을 순수하게 있는 성경이 무슨 취지로 이야기하는지 봅시다. 이것은 현재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깨끗함과 그리고 분명히 창세기에서 만들어놓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 이유를 밝혀줄게. 그게 창세기 2장과 3장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이 있어야 돼요. 보기에 심히 완벽했더라. 정말 좋았더라. 정말 에덴동산도 멋지고 하여튼 멋졌다. 너무너무 좋아서 이루 말할 수 없었더라. 그런데 너희들이 내 성질을 긁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빛과 그 다음에 두 번째 날이 뭐지요? 궁창에 관한 하늘에 관한 거지요. 첫 번째 빛 만들기, 두 번째 하늘 만들기, 세 번째 땅 만들기 아닙니까? 땅과 바다 만들기 아닙니까? 첫 번째 뭐 만들기요? 빛 만들기. 쉽게 하라 하니까. 쉽고 깊게 하겠습니다. 첫 번째 빛 만들기, 그 다음에 하늘 만들기, 그 다음에 바다와 땅 만들기. 맞지요? 빛, 그 다음 두 번째 하늘, 세 번째 땅과 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네 번째는 빛과 관련되어 있어요. 빛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시발점이 되었다는 말은 하늘과 땅이 빛에 예속이 되게 해요. 하늘도 땅도 바다도 빛에 의해서 묶이도록 그렇게 조치하십니다. 네 번째가 빛과 연관된 물건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이 지상에 있는 빛과 관련된 물체에 예속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빛에 관한 물체지요.
빛에 관한 물체가 예를 들어 뭐가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이 있지요. 해와 달과 별에 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체세계에서 빛이 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태양빛이 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만약에 태양이 없어버리면 죽어요. 태양에너지 없으면 다 죽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 모든 구조가 빛 하나에 전부다 전체가 다 이, 삼, 사, 오, 육 다 예속된 겁니다. 전부다 없애는 거예요.
그렇다면 결국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이 중에 뭐만 남을까요? 달랑 하나만 남아요. 뭐만 남습니까? 빛만 남아요. 빛만 남고, 빛을 비추는 해와 달도 요한계시록 22장 천국에는 없어요. 이걸로 환원돼버려요. 전부다. 빛으로 이것만 남고 다 날아가 버립니다.
정판옥 목사님, 왜 안 오지?
이것만 하나만 달랑 남고 나머진 없어져버려요. 이것은 뭣을 뜻하느냐 하면, 이 육적인 것은 전부다 물체적인 것, 물체적이고 육적인 것은 임시방편용이었다. 물론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간암에 걸린 아저씨, 죽어야 돼요. 간암에 걸린 아저씨는 지금 교체, 고물하고 신품하고 교체하기 위해서 죽어야 됩니다. 이미 빛의 몸이 있는 이상은 태양에너지 때문에 살아가는 태양에너지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피부로 만든 이 세포로 만든 이 육체는 사라져줘야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 10절에 나와요. 그게 임시방편용이라는 게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 10절에 보면, 모든, 한번 봅시다. 제가 창세기 하면서 신약과 연관을 시키겠습니다.
1장 11절이네. 10절.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은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표현이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님의 손으로 지은 거라 해요. 주님의 손으로 지은 거다 말이죠.
지금 비타500이 있는데, 비타500보니까 광주 우 집사님 생각나네. 비타500있는데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놨거든요. 놓다가 손을 비타500에서 떼면 이제 비타500은 나하고 상관없지요. 그죠? 주께서 만든 것을 비타500을 내가 계속 손에 쥐고 있어요. 안 넘어지도록. 이것이 언젠가 손을 비타500에서 뗄 때가 있으면 더 이상 여기에 미련 둘 필요도 없고 집착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손이 있는 이상은 비타500이 거기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비타500은 왜 있느냐? 손이 있음을 알리기 위한 증거, 모형으로써 창조되어서 이 세상에 이 물질, 창조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과 예속된 연관된 물체가 등장했어요. 해와 달과 별. 해와 달과 별은 빛이 영존하면 없어져야 됩니다. 계속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목사, 창세기 1장 왜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히브리서의 ‘주’라 하는 것은 주님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모형으로 모형판으로 물체라는 재료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그걸 보고, 참, 보기에 예쁘다. 한 거예요. 참, 내가 보기에 좋구나.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육일 동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마지막 날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사람이 포함되어 있어요. 만약에 죄를 안 지었으면,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의 손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간암 걸려서 얼굴 노랗게 되어서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의 손이 저를 노랗게 만들었습니다. 그걸 통해서 주님께서는 니가 당뇨 걸리든지 간암 걸리든지 하여튼 니는 보기 심히 좋았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하나님, 니가 뭔데 나를 일찍 죽게 해? 내 청춘 돌려 줘. 청춘을 돌려다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주의 손을 모독한 거죠. 주의 손을 모독한 겁니다.
들어오세요. 어서오세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어서오세요.
주의 손과 더불어 나 자신을 파악할 줄 알아야 되는데, 이게 죄 짓고 난 뒤에 주의 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선악과 내 따먹어 버린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독자적인 노선으로 가다 보니까 빛을 가지고 빛에 예속된 것이 이게 자연스런 현실인데, 이 현실은 망각하고 마지막 육일 째 만든 자기 자신의 눈으로 전부다 빛과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보니까 여기서 자연과학이 발달하는 거예요. 전부다. 이걸 파악하는 거예요.
빛의 관점에서 빛에 예속된 천지창조를 생각해야 되는데, 마지막에 태어난 막내면서도 마지막에 있으면서도 마지막 입장에서 거꾸로 자연세계를 자기입장에서 보니까 이것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와야 될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아, 이런 인간 잘라내기 위해서 주께서 재림하고 심판하고 십자가가 지셔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같은 그런 게 있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사실 이만큼 강의 길어지면 또 앞에는 까먹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친절한 금자씨.
옛날 사람들은 성경을 보든 자연을 볼 때에 단순하게 봤어요. 단순하게 본 이유가 그때는 밤에도 전기 없었어요. 전기가 없기 때문에 낮의 환한 그 빛이 그렇게 신의 속성과 능력이라고 의심할 필요 없어요. 밤은 깜깜하니까. 너무나 밤의 깜깜한 것과 너무나 대조된 빛의 환함을 통해서 신은 곧 빛이며 빛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빛을 대낮에 주었다. 이렇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 걸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중세 미학의 역사, 중세 그림의 역사를 보게 되면, 현대는 이상스럽게 형광등이 있고 가로등이 있는 현대는 그림이 어둠침침하고, 오히려 중세 이전에 중세나 옛날 시대 때 그림 보면 모든 색조가 그렇게 밝아요.
그건 뭐냐? 옛날엔 하나님 중심을 그림을 그렸고, 요즘 와서는 암울하고 우울한 자기 내부의 진실로서 세상을 비추어서 그 비춘 느낌에다 거기다 그림을 그리니까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겁니다. 이건 아까 이 이야기 안 했지요. 새로 하면 또 새로운 게 나와요.
그래서 옛날 사람은 빛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굉장히 단순했지요. 단순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을 보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어요. 왜? 모든 것이 아침에 눈만 뜨면 다 있는 거니까. 바다, 하늘, 땅, 빛, 하늘의 별, 해, 달. 저거 하나님이 만들었다. 당연하지, 당연하지. 그걸 의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자연만 바라보고서는 밥 못 먹고 살지요. 경쟁에 나서야 되잖아요. 경쟁에 나서려면 뭘 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생각을 나만의 갖고 있는 주특기를 발휘해야 돼요. 자기만의 상상을 해야 되고 자기가 꿈을 꿔야 됩니다. 환영을 자꾸 자기만의 야망, 그 꿈이라는 게 야망에서 나오는데 자기만의 욕심과 야망에서 만들어낸 어떤 환상 같은 것을 일구어내야 돼요.
일구어내다 보니까 뭘 잊어버립니까? 해와 달과 별 보기를 잊어버렸어요. 자기 야망과 욕심을 이루려다보니까 전기가 발명되고, 전기가 발명되니까 이거는 밤중에도 방직공장에는 작업하잖아요. 밤새도록 잔업까지 하잖아요. 밤새도록 공장 돌린다고. 화력발전소는 24시간 가동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는 해를 보고, 달을 보고 동시에 내가 누구지? 저 해는 누가 만들었어? 그럼 나는 누가 만들었단 말이야? 이렇게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자연에서 누가 담당자냐? 그거는 생물학이나 자연과학 하는 사람에게 묻는 거죠. 저, 교수님 자연세계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내가 누구 필요 없이 내가 나는 누구냐? 나는, 저 빛은 누가 만들었나? 자기 물으면 될 텐데 꼭 전문분야 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서 그 사람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받아야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현실과 엄청나게 멀어진 생활을 지금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보더라도 과학이라는 희미한 안개가 막 들어오는 겁니다. 그때에는 뭘 틀라고 했습니까? 선풍기를 틀어야 돼요. 선풍기 틀면 드라이아이스 같은 그런 안개 같은 것이 걷히면서 선풍기 안 틀면 하나님이 트시는데 그게 무슨 간암? 간암이죠. 아파서 누울 때 그때는 직장이고 뭐고 내일모레 죽는다 했지요. 내 오늘 낮에 그분 찾아 병원 갔다 왔다 하지요.
그분 앞에 창세기 이야기하고, 히브리서 9장 이야기하면서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멘. 믿습니다. 인정합니다. 마지막에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
평소에 직장생활하고 술을 얼마나 쳐 먹는지. 왜? 그걸 먹어야 업적이라도 하나 따내니까. 그래야 처자식 먹여 살리니까. 몸을 막 굴리는 거예요. 일차, 이차, 삼차. 언제 심판이 뭐며, 언제 주께서 구름타고, 그런 것 지금 신경 쓸 틈이 없어요. 경쟁, 누구 환상과 누구 꿈이 더 세냐에 따라서 경쟁해야 살아남는 것이 이 세상, 21세기 세계거든요.
나중에 죽을 때 내일모레 오락가락 할 때 그때야 이제 성경말씀 하니까 믿습니다. 맞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제야 이야기하더라. 왜 처음부터 그렇게 환영에 사로잡혀서 왜 자기의 몸하고 실제로 몸은 하나님이 만든 것인데 마음은 하나님과 떠나 있고, 왜 그렇게 괴리된 것을 살았나. 괴리된 것이 괴로우니까 고로우니까 술로써 아주 감각적인 것으로 도박으로써 이런데 매진해서 어떤 낮의 괴로운 것을 달래려고 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자연만 가을 되면 가을로 족했고, 여름 되면 여름으로 족했어요. 그리고 아프잖아요. 죽는 것으로 족했어요. 아프면. 병원 필요 없어요. 애가 아프잖아요.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거예요. 애, 아프다고 자살하고 아파트 뛰어내리고 그런 것 안 합니다. 또 낳으면 되니까. 순풍, 순풍. 우리 집에도 우리 삼촌도 벌써 애 세 명이나 낙태시켰어요. 왜? 다들 쉬쉬했지만 다 그랬어요. 또 낳으면 되니까. 어려울 게 하나도 없잖아요.
뭔가 남들이 이미 그물 쳐놓은 그 환영 속에 그러한 타인들의 욕망 속에 우리가 지금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다시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도 없지만 창세기를 보시면, 직접 나를 직접 만들었구나.
그래서 그 예를 뭐로 들었습니까? 고구려 시대 때 개 하고 지금 개 하고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개가 똑같다는 말은 뭐도 똑같다? 인간도 벗겨놓으면 똑같다 이 말이죠. 갑옷 입었다고 옛날 사람이고 양복 입었다고 요새 사람. 둘 다 벗어놓고 목욕탕 가보면 실례지만 혹시 주몽이십니까? 못 알아봐요. 그게 주몽인지 최일도인지 못 알아본다니까. 몰라요. 갑옷 입으니까 옛날 사람이고, 양복 입으니까 현대 사람인 줄 알지.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 옷에 우리가 지금 속아 넘어가느냐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옛날 고구려 사람도 구원하는 방식은 예수님의 피고, 오늘날 21세기 아니라 25세기가 되도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딴 거 기대하지 마세요. 세월 갔다고 딴 수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옛날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라면 요즘은 예수님의 피. 이 책, 교재 제일 앞에 있어요. 제일 앞에 보면, [구약에서는 유월절 정신이 상실되면 우상이 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정신이 상실되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 책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창세기가 뭐로 되어 있다 했어요? 빛이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나머지는 전부다 빛에 예속되도록 했다. 두 째날, 세 째날, 네 째날, 다섯 째날, 여섯 째날, 전부는 빛에 예속되는 식으로 했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 사일 째 만들어낸 작품이 해와 달과 별이 되어서 해와 달과 별은 뭐냐? 빛이 모든 것을 만들어다를 보여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낮에는 해가 반짝반짝 증거하고, 밤 되면 달과 별이 반짝반짝 증거 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빛에 예속된 그런 존재다. 라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아니면 생명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나니. 창세기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보고 너는 피조물이야. 너는 창조자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존재야. 너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네가 있어야 돼.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있다는 건, 마치 해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해는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처럼.
그런데 나중에 요한계시록 22장 이야기했지요. 요한계시록 22장 되면 뭐만 남아요? 달랑 빛만 남고, 둘째, 세 째, 네 째, 다섯 째, 여섯 째 모조리 다 없습니다. 목사님, 여섯 번째 인간도 없습니까? 인간도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사, 오, 육은 이거는 물체로 만들어요. 흙으로 만들었거든요. 빛만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이제는 자기 역할 했으면 이제는 없어져야 됩니다. 사, 오, 육입니다. 사, 오, 육 합하면 뭐가 되노?
사, 오, 육 이쪽에서는 일, 이, 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날은 빛을 말하기 위해서, 다섯 번째 날은 하늘을 말하기 위해서, 여섯 번째는 땅과 바다를 채우기 위해서 만들어요. 서랍만 먼저 만들어놓고 서랍에다 들어갈 장난감 만들고 옷 만들고 해서 옷 만드는데 이 서랍은 무슨 서랍이냐? 하늘 말하기 위해서. 이 서랍은 바다와 땅을 말하기 위해서. 이 서랍은 빛을 말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서랍 열 때마다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하기 위함 입니까? 우리가 하늘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바다를 정복하기 위해서 있습니까?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여섯 번째 우릴 만든 거예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충만하라. 여기에 복을 준다는 말은 확장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확장이 된다는 뜻으로 대표적인 예가 오병이어입니다. 오병이어에 주께서 기도하니까 이거는 뭐, 한도 끝도 없이 막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에 보면, 엘리야 시대 때 기름이 한정도 없이 나왔어요. 그때 그릇이 모자라서 다 못 받았지, 아마 그릇이 더 있었으면 더 채웠을 거예요. 그릇만 몇 개 더 있었으면 완전히 꽉 차는 건데. 한도 끝도 없이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 할 때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자꾸 나오는데, 그것 먹고 죽었잖아요. 지옥 갔잖아요. 그것 먹고서도. 그건 뭐냐 하면, 빛에 예속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이 물체를 갖고 있으니까 인간 자체가 물질이니까. 물질 족하면 창세기를 하나님이 모든 끝낸 줄 알고 있어요. 창세기 자체가 빛에 예속되라고 빛을 바라보라고 빛을 있음을 눈치 채라고 준 창세기 1장인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배만 채우면 감사합니다.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도망치고 말더란 말이지요.
오병이어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예수님 찾은 이유가 뭡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참, 이 대목이. 이번에 제가, 조금만 하고 5분 쉽시다. 이번에 제가 하버마스라는 사회학자, 철학가 책을 읽으면서 또다시 느낀 것이 있어요. 그 독후감을 크로스빌리지에 실어 놨어요. 크로스빌리지 화려하지요. 거기다 실어놨어요.
그 책을 보면서 또다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종교가 어떠니, 윤리도덕이 어떠니,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다 배부를 때 하는 소리고. 약간 먹고 마시는데 자신 있다, 싶을 때 그때 곁눈질하고 눈 돌리는 이야기지, 종교, 믿음, 사랑, 배고프면 대번에 원상복귀 쫙 대번에 옵니다.
그게 인간의 자기 몸뚱이밖에 생각 안 해요. 이게 고무줄 속성인데, 고무줄을 당길 때는 고무줄이 멀리 간 것 같지요. 탁 한번 놔보세요. 고무줄은 안면몰수하고 자기 원 자리로 탁 튕겨버립니다. 환원되고 맙니다. 사람이 믿음이니, 신앙이 좋으니, 성화론 어떠니 해도 다 먹고 살자는 짓이에요.
그런데 늦게 오신 분들 못 들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그것 밖에 모르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아까 일찍 오신 분 답변해 보세요. 그거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했지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니는 운전 고따위 밖에 못한다 말이야. 먹는 지, 입는 지,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사랑, 믿음, 아무리 얘기해도 항상 우리는 역시 돈이 최고입니다. 라는 아주 솔직한 고백을 세월이 갈수록 찬바람이 불수록 그걸 절실하게 느끼게 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기 실패 탓을 하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우려되는 것이 자기를 보고 인생 실패했다고 간주하는 걸 저는 제일 싫어합니다. 원래 실패했는데 뭘 또 실패해요. 처음부터 실패했는데 거기다 새삼스럽게 실패했다고 낙심하는 걸 보면 웃겨요.
가만~있어 보세요. 왜 실패하는가? 그 과제는 주님의 숙제입니다. 괜히 설쳐서 죄 안 져도 가만있으면 자신의 본성, 나는 돈 밖에 모릅니다. 곧 나오기 때문에 기다려보세요. 십년 믿어 보세요. 역시 돈이 최고다.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겁니다. 저절로 나와요.
이것처럼 은혜로운 이야기가 없어요. 그렇다. 왜? 목사님, 이제 비로소 저 자신을 알았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어요? 위선과 위선으로 세 겹, 네 겹 깔아놨는데 선풍기 한번 틀고 간암 걸리니까 그게 다 안개처럼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나는 이건만 있으면 최고입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발, 육체로 흙으로 만든 이 육체에 대해서 그걸 개선해 보려고, 그걸 발전시켜 보려고, 개과천선 해보려고 제발 그런 헛된 수고를 하지 마세요. 우리보고 그 수고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이미 장만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 마지막 나이 구십 다섯 되어서 돌아가실 순간이라고 봅시다. 주께서 이미 장만해 놨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제 흙에 속한 형상을 바르게 산다든지, 착하게 산다든지, 훌륭하게 살아서 복 받겠다는 그런 헛된 망상, 그것 성경 창세기하고 다릅니다.
창세기는 주께서 있는 대로 좋았어요. 괜히 손대지 마세요. 작품 버립니다.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놔두는 것이 최고의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요즘 심히 좋은 하나님의 풍경입니다.
5분 쉬겠습니다.
우리교회(IP:122.♡.57.66)
07-02-03 13:31
20061103b 울산강의-창세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아까 잠시 복습하면, 빛이 있으라 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빛만 빼놓고 나머지는 없어질 창조는 임시방편적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고 땅도 없고 모든 게 다 없어져요.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제가 천지를 주께서 주의 손으로 만들었지만 그거는 멸망하게 돼요. 다 없어질 것이라고. 없어지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물으신다면, 주의 손이 하시는 그 다음 일을 보라고. 주의 손이 주님의 손이 그 다음에 어떤 작업에 또 들어가시는가를 알기 위해서 배경으로 깔아놓은 것이 돗자리로 깔아놓은 것이 창조인데, 그것을 빛만 남기고 나머진 없어지지요. 밑 돗자리가 끊어지고 요한계시록 천국에는 빛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걸 '광채'라 하지요. 광채는 어느 정도 되어야 광채라 하는 말을 하느냐 하면, 눈부심. 이걸 복음의 광채라 하는데. 고린도후서 4장 4절. 복음의 광채, 그러니까 복음의 눈부심의 이러한 세계를 주께서 주의 손으로 하시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깔아놓은 어떤 자리, 그러한 배경, 그러한 연극의 뒤에 있는 무대장치,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의 광채가 제일 먼저 어디에 들어오느냐 하면, 이게 중요해요. 사람의 마음에 들어옵니다.
담배냄새 나는 것 같은데. 난 담배냄새에 민감해서 매일 주위 사람과 싸워요. 우리교회 밑에 세상사람 하는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 담배냄새나면 내가 막 뛰어 내려가요. 그건 딴 이야기고. 강의할 때 딴 이야기 자주 합니다. 그거는 뭔가 어려운 이야기할 때는 한 템포 쉬어가자는 뜻에서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눈부시게 임하게 되면, 그때 그 순간에 이 사람은 눈에 피조세계가 날아가 버려요. 안 보입니다. 신기하죠.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있지요.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심지어 올라간 당사자가 나냐, 아니냐? 그것조차 분간 안 될 정도로 하늘의 복음의 광채에 들어가 버리면, 앞에 빛 때문에 깜깜해지죠. 앞에 게 안 보이니까.
갑자기 조명 스포트라이트가 쫙 비춰 버리면, 너무 밝기에 이게 뭐야? 도대체 높은 데야 낮은 데야 분간 안 될 정도로, 너무 밝아서 이쪽이 생각 안 될 정도로, 창조세계가 생각 안 될 정도로.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갈 때에 너무 휘황찬란해서 도대체 거기 사는 사람이 나, 맞기는 맞는 거야? 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황홀에 빠지는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의도했던 빛의 세계에요.
요한복음에 보면, 빛이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에는 창조 전체를 육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루로 보는 게 아니라 뭐로 보느냐? 속성으로 봐요.
이 세상이 어떠냐? 이 세상의 길이가 몇 키로입니까? 어둡습니다. 어허, 이 지구가 넓이가 몇 평이냐 이 말입니다. 어둡습니다. 어허, 높이가 몇이냐 하니까. 어둡습니다. 속성으로 성질로 이야기해요. 우리들 양의 크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성질로 이야기한다고. 그럼, 나는요? 어둡네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것은 천국을 목사님, 천국이 여기서 몇 키로입니까? 빛의 세계입니다. 어허, 몇 키로냐니까? 안드로메다 성운 그 바깥에 있어요? 빛의 세계입니다. 로켓 타고 며칠 가야 돼요? 빛의 세계입니다. 제자가 물었어요. 예수님,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너희 안에 있느니라. 어디 있냐고요? 어느 장소에, 몇 미터 앞에? 너희 안에 있느니라. 도대체 말이 안 통해요.
천국은 속성으로 성질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아는 이쪽에선 뭐냐? 물체의 세계, 사물의 세계는 우리가 거리를 재거든요. 아까 하나 빠뜨린 게 있습니다만, 사일 째 만든 게 뭡니까? 해와 달과 별 아닙니까? 해와 달과 빛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 속에 갇히게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해와 달과 별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 감각에 매여서 살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생체시계도 마찬가지고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도 생체리듬이 있어서 자기 내부에 시계 같은 것들이 있어서 해와 달과 별의 그 운동에 의해서 그 결의 진동수에 맞춰서 살도록 되어 있어요. 해와 달과 별에 맞춰서 살게 되는 겁니다. 부엉이가 무슨 지가 아이큐가 높다고 밤인지 낮인지 알겠습니까? 다 생체리듬이 조화가 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면, 빛의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작용하는데 그게 뭐냐? 먼저 들어와요. 왜 먼저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나중에 복음의 광채가 들어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이렇게 들어오는 이유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아, 이거 어렵습니다. 이거 어려운 이야기에요.
먼저 여러분들이 기존의 신학에서 다른 쪽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해 볼게요. 다른 쪽에선 이겁니다. 사람은 흙으로 되어 있다. 사람은 왜 짐승과 다른가? 코끼리 같은 경우에. 사람은 왜 코끼리하고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짐승하곤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만이 짐승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짐승하고 차이점이 뭐냐? 네 가지를 이야기해요. 첫째는 직립보행. 문자 써서 죄송합니다. 서서 걷는다는 뜻이에요. 두 번째, 도구사용. 세 번째, 언어사용. 네 번째 불사용.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월등하고, 언어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낫고,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낫고, 직립보행, 낫고. 이것이 바로 다른 짐승하고 차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런 독특한 것의 특징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겉이고, 내부적으로는 뭐냐? 내부적에서는 다스릴 때는 이런 기계적으로만 다스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된 품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품성이 뭐냐? 의와 거룩과 선함. 이런 것이 여기 들어와서 이것과 더불어서 그걸 다스리게 되어 있다. 의와 거룩과 이것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직립보행, 이것도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됐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하자. 라고 기존의 신학은 이야기해요.
따라서 죄를 지었다는 말은 형상이 없어진 건 아니고, 아니 사람이 죄 지었다고 해서 벌벌 기어 다닙니까? 죄 지었다고 말을 못하고 그렇습니까? 죄 지어도 막 자동차 몰고 날아다니고 그렇잖아요. 조폭 세계에 의리가 없습니까? 심지어 성경에 보면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기 집안에서는 자애로운 어버이 아닙니까? 아무리 악할지라도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대목 나오지요. 아무리 악할지라도 의와 양심이 살았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기존의 신학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진 건 아니고, 있는데 이게 죄가 들어와서 고장이 난 거예요. 고장이 나서 뭘 무너뜨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고장 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수리를 해서 이걸 다시 회복시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도 있고, 모든 이 세상을 지배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빛의 입장이 아니고, 제일 막내, 제육일째 만든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또다시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론을 볼 때 이런 형상론이 나와요. 자기중심으로. 이 형상론의 문제가 뭐가 있느냐? 이 문제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뭐가 없어야 되느냐 하면, 지옥이 없어야 돼요. 지옥이 없어야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약 이 비타500, 비타500 또 이야기하자. 내가 만약 비타500 제가 산 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비타500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비타500이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비타500에다가, 아참, 비타500의 내용물이 맛있는 음료수가 나와야 될 텐데 맛없는 게 나왔어요. 이게 상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던 직립보행, 도구, 언어, 이거는 문제없는데 이 안에 내용물이 잘못되었거든요. 그러면 진짜 좋은 음료수를 넣었으면 그걸 사용해서 먹어야 된다는 것이 방금 제가 설명한 거죠? 방금 설명 또 하나 되지요. 껍데기는 문제없는데 알맹이가 지금 제조해서 문제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럼 알맹이만 바꿔버리면 껍데기는 하나님이 받는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지옥이라는 게 뭡니까? 이것 자체를 내가 이걸 패는 거잖아요. 때리는 거잖아요. 여호와증인 단체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어떻게 지 자식을 왜 패느냐 이 말입니다. 왜? 자기가, 누가 만들었는데? 신이 만들어놓고, 우리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신이 직접 만들어놓고, 왜 그것도 영원토록 형벌을 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쪽에서 하는 말은 지옥은 없다. 그럼 지옥이라는 말은 왜 하느냐? 겁주려고. 어이, 떽, 겁주려고. 겁주면 정신 바짝 차려서 가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그런 하나님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은 변태에요. 자식 열 명 낳았는데 그중에 다섯 명은 천국 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