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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20051004 부산강의-슐라이어마허강의마태복음

Re..20051004 부산강의-슐라이어마허

이름 : 한윤범(IP:)

20051004 부산강의-슐라이어마허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이 되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라는 이 신학자. 이 사람은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1768-1834 동안 살았던 신학자지요. 169페이지입니다.

이 사람이 주장한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 사람이 현대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거든요. 보통 아버지란 말은 그 밑에 나온 모든 자들은 자식이다. 이런 뜻을 갖고 있잖아요. 나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말은 내가 그 사람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란 말은, 결국 현대신학의 모든 아이디어가 슐라이어마허라는 이 사람에게서 다 나왔는데 그러면 왜 그전에 있는 사람들은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느냐? 그것은 슐라이어마허와 그전의 신학에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가 그림으로 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슐라이어마허 그전에 두 가지, 독일의 그 당신 유럽 신학 사상에 두 가지 사상이 있었는데 진짜 진리라 하는 것은 결국 하나 뿐이어야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보편적인 상식, 인식이 없고 하나뿐인 진리가 반드시 외부적으로 나타나야 된다. 그걸 객관화라고 하는데. 객관적으로 규정이 된다. 딱딱 진리는 요것이다. 확정된 하나 뿐인 것이 진리다. 라고 이렇게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모든 이야기나 철학의 모든 이야기,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는 하나 뿐인 이 진리를 객관화하는데 하나의 필요한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방금 슐라이어마허 이야기하기 전에 방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반박 할 수 있습니까? 또 반박이 안 되지요. 항상 반박이 안 돼요. 반박이 안 된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현대철학의 아버지가 아니고, 옛날 철학의 종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슐라이어마허는 그게 아니란 겁니다. 뭐가 아니냐 하면, 진리가 하나분이고 객관화된다는 것은 이것은 그렇게 기대하는 것뿐이고, 실제는 진리가 여러 개며, 그것은 객관화 될 수 없고, 주관화된다는 겁니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렇게 주장하면 옛날의 진리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이 많겠지요.

진리가 여러 개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백 개를 믿어야 돼, 천 개를 믿어야 돼. 오직 하나만 믿어야 되지 천만 개 다 믿어야 된다면, 우리는 구원받기 틀렸지 않느냐?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슐라이어마허는 진리가 여러 개라는 말의 의미가, 진리는 여러 개니까 아무거나 잡으라는 뜻이 아니고, 비록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나타나는 양상을 여러 개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누구하나 독불장군처럼 진리라라고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거예요. 전에는 하나뿐인 진리를 객관화하기 위해서 그전에는 뭐냐 하면, 칸트라는 사람은 그 진리를 도덕에서 찾았습니다. 존 로크라는 사람은 진리가 뭐냐 하면, 진리를 인간의 의지에서 찾았어요. 인간의 도덕과 의지에서 찾았는데.

이런 결론은 뭐냐 하면, 내가 뭘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나가 있고, 내가 뭘 해야 되겠다는 것은 대상이 여기 있죠. 도덕도 내가 착해야 된다. 착해야 되는 나가 있고, 도덕도 간음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하는 어떤 내용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옛날의 신학이나 철학은 나라는 주관과 거기에 목표로 잡는 그 내용, 객관과 아무리 따라 잡으려 해도 안에 잡을 수 없는 갭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아무리해도 그 진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돌진하고 들이대고 달려가는 것은 있을 지언정 그 진리를 언제 한번 해봅니까? 아니지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내가 지킬 만한 것 골라잡아서 지키라. 이런 것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 지켜야 돼요. 탐내지 말라하는 분이 간음하지 말라 했겠느냐? 이러면서 모든 계명을 다 지켜야 돼요. 할례는 그거는 의식법이니까 안 지켜도 되고, 도덕법은 지키고. 이런 게 없어요. 모든 율법은 다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중에 하나라도 누락하면 다 지키라고 하신 분에 대한 참 뱉음이고 모독이고 무시한 게 돼요.

부모가 자식한테 너, 숙제하고 방청소하고 두부 사와라. 하는 심부름 했는데, 세 가지를 줬는데 그 애가 숙제만 달랑하고 두 개는 안했다 하는 것은, 그거는 어머니 말에 순종한 게 아닙니다. 그거는 누구 말에 순종한거냐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자기 자신한테 순종한 거죠. 사람이 자기한테 충실하게 순종했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죠.

제가 지난 주일아침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인간이 타고난 게 뭐냐?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해요. 영생의 길은 불행스럽게도 좁은 길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본성은 뭐냐 하면,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이 뭐냐 하면, 외톨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대세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 대세가 두렵다는 겁니다. 그 대세의 움직임에 굴복하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의 대가족이 있으면 아무리 아니라 해도 모든 다른 식구와 뼈대 있는 가문과 집안 어른들이 다 그리로 가면 '예'하고 고개 숙여야 됩니다. 여성분들이 시집가서 절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좁은 길로 가기 싫은 거예요. 나 혼자 잘 믿으면 되지. 절할 수밖에 없고 자기 합리화시켜서 하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데 나중에 나옵니다만 이 넓은 길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나 자신으로 탈바꿈되기를 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아시고, 내가 너희를 보냄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 것이다. 아예 이 세상의 실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리로 보고 우리는 양으로 잡아먹혀라. 이 말입니다. 잡아먹혀서 양이라는 거예요.

지난주 아침에 제가 재미있는 설교했는데, 목자가 치니까 양이 흩어진다는 이야기했지요. 문제는 오늘날 목자가 없어요. 그래서 백날 쳐야 아무 관심 없어요. 자기 애 성적 떨어지면 가슴이 덜렁 내려앉지만 예수님 고난 받았다 하면 이거는 아무 관심 없어요. 지 고생해라 말이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목자가 없는 것은 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자신의 목자는 누구냐? 자기 자신이 자신의 목자에요. 자기가 목자 되고 자기가 양되고. 목자 없는 채 가게 되면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 그건 멸망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목자를 쳐야 양이 흩어지리라. 에서 진짜 흩어질 수 있는 양이라면 대단한 양이에요. 왜냐하면 너무나 목자한테 결속되어 있고, 목자 없으면 못 산다 했기 때문에 목자에게 일이 벌어지면 자긴 도망치는데. 열두 제자만 도망쳤지 다른 사람, 그 당시 유대인들 도망 안 쳤어요. 잘 됐다고 박수 쳤습니다.

바라바를 원하느냐, 예수를 살리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했어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 십자가라 하는 것은 가슴 하나도 가슴앓이하지 않습니다. 괴롭지 않아요. 요새 예수님 십자가 해도 전혀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자 이야기 해봤자, 그래서 주일날 설교하면서 나 혼자 화가 나서 하는 말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 다니는 그 심보가 뭐냐? 심보가 수상하다고 했어요. 상처 받은 고난 받은 예수님만 증거 하지 않는 교회에 다니는 의도가 뭐냐? 거기는 분명히 많은 사람이 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게 죽음의 길이기 때문에 타고난 본성 따라서 큰 교회 다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많이 가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천국 가는 길이 없어서 못가는 게 아닙니다. 작은 교회에 가기가 싫어요. 소수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작은 교회 가면 환영해 줍니다. 환영하는 천국 길을 마다하고 환영하지 않는 큰 교회에 다 몰리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본성상 자기 자신이 목자 없는 이제는 자기가 목자가 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목자가 된 이유가 현대 과학에 있어서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아야 된다는 그것이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주위에서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이제는 목자 믿다간 등신 되니까 내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힘 달라고 큰 교회 가니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작전에 말려든 것이 되고, 분류할 때 병아리감별 하듯이 암컷, 수컷 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늪에 딱 걸려든 거예요. 주님의 작전은 완벽합니다.

그래서 [지옥의 하나님]의 끝에 보면 뭡니까? 드디어 양쪽 커튼이 내려오면서 갇혀버렸지요. 지옥 만들기에 성공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거 객관과 주관에서 '나', 자꾸 아무리 달려가도 객관을 지킬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형이상학이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추상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그 세계를 형이상학 세계인데, 이것이 뭐냐? 철학이지 참된 신학은 아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슐라이어마허를 현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말은 뭐냐 하면, 철학에 시달리던 데서 이제는 벗어나서 신학만의 독보적인 가치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그런 공로로 현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겁니다. 이해되시겠지요.

철학은 봐라! 참된 신학은 이러한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참된 신학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절대의존의 신앙에서 나온다. 라고 슐라이어마허는 이야기했습니다. 절대의존 신앙심. 그러니까 이것은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에 호소했다. 해서 감정을 기초로 한 새로운 신학이나 철학의 계시를 알려주는 겁니다. 거룩에 대한 절대의존을 하나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겁니다.

그러면 그전에 우리가 지난번부터 피히테, 그리고 셸링, 헤겔, 칸트, 우리가 쭉 오면서 그들은 뭘 이야기했던가요? 유한함과 무한함. 무한한 신과 유한을 어떻게 그걸 결합시키느냐? 거기에 그 사람은 매진했지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 무한이 있기 때문에 그 무한을 칸트는 뭐로 봤습니까? 숭고한 도덕심으로 봤던 거지요. 인간 속의 도덕심.

피히테는 뭐냐 하면, 내가 절대자라 하는 모든 행동의 기초, 기반, 모든 결정권은 나한테 있다는 이것이 바로 무한한 신이 내려주신 흔적이라고 봤습니다. 셸링은 인간은 따질 수 있다는 것, 반성할 수 있다는 절대이성, 절대이성이야말로 이것이 참된 신이 부여한 무한의 요소로 봤습니다.

헤겔은 그 절대이성이 역사적으로 이어져서 나중에 하나님과 손을 잡게 된 인류역사를 전개된다. 하나님이 전개한다. 이게 헤겔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부를 하면서 야, 거기에 대해서 복음은 아니지만 세상은 그쯤은 생각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슐라이어마허를 공부해보면, 슐라이어마허는 유한과 무한의 딱딱 대상을 놔두고 그 간격을 좁히는 식으로 따라잡는 식의 신학은 아니에요. 그건 뭐냐 하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도덕을 동원해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무한이 유한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신은 인간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들어있는데 어떻게 하느냐? 직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느껴짐, 감정이죠. 필링이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데 어떻게 느껴지느냐? 절대적인 신에게 의존하는 신앙심으로 의존하는 거예요. 이거는 이성적이고 의지로 따지고 착한 일을 하는 그런 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는 처음부터 이렇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절대적인 신에 대해서 의존하는 그런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없는 사람은 아예 신앙이란 말도 붙이지 말란 거예요.

또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네.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 행위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을 봐. 그대로 설명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또 일났네. 또 우리들을 기쁘게 하죠. 초반인데 기쁘게 하죠. 나중에 작살나지만.

늦게 온 사람을 위해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슐라이어마허 현대철학의 아버지죠. 그러니까 현대철학의 아버지지, 현대보수철학의 아버지는 아니에요. 현대보수철학의 아버지는 칼빈이고 루터지, 슐라이어마허는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철학하면 자유주의고 이거는 개판이고 이거는 인간주의고 했는데 그 현대철학의 원조,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 떡볶이 있듯이 갈비탕 원조 있듯이 원조 현대철학의 시작이 뭐냐 하면, 철학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오직 절대의존의 신앙심이다. 라고 나올 때 그것이 현대신학의 아버지가 될 때 야, 이거 현대신학이 상당히 바람직하고 이거는 우수한 신학이고 하늘의 뜻의 합당한 진짜 신학이겠다. 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지요. 우리가.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야기하기를 절대 의존하는 신앙심으로 말미암아 신학을 전개하고 진리를 전개해야 이것이 참된 종교고 참된 기독교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전에 있는 신학은 뭐냐 하면, 신에 관해서 논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논함인데 슐라이어마허 이후에는 신학이란 게 뭐냐 하면,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심에 관해서 논하는 거예요.

절대의존의 신앙이냐, 아니면 철학이 위장한 것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새로운 논리가 전개되는 그런 현대신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신앙심에 대해서 논하는 거예요. 신에 관해서 논하는 게 아니고. 글자 그대로 신학이란 신에 대해서 논하는 게 신학인 줄 알았는데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뭐냐? 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해서 이해하는 신앙심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 신학이란 말이죠. 뭔가 수상한 기미가 돌지요. 뭔가 삐딱한 가능성이 있지요.

신앙심이란 것은 결국 누가 갖고 있습니까? 인간이 갖고 있죠. 사람이 갖고 있잖아요. 신앙심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결국 뭘 논한다? 인간에 관해 논하는 거니까 이게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할만 하죠. 자유주의의 뿌리가 여기서 나오는 거죠. 신앙심. 현대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심은 뭐냐 하면, 대승적인 대승불교에 의한 무조건적인 자비심과 사랑입니다.

어제 어떤 분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대뜸 전화하며 하는 말이, 하나님은 누굴 위한 하나님입니까? 전화 첫마디가. 시비조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다. 그 다음부터 할 말이 없어요. 그쪽에서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면, 인간에게 맡겨놔야 돼요. 이제는 신은 은퇴하고 퇴출해야 돼요. 이제는 인간에게 다 맡겨야 돼요. 인간에게 맡기면 뭘 만들 줄 아느냐 하면, 인간은 조직적인 교회를 만듭니다. 그분이 나한테 전화한 분이 천주교신자에요. 제가 우리 아버지 장례식 때 천주교에 대해서 ( ) 보인다는 유명한 말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반발로 전화 온 거예요.

그들은 천주교에서 배우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배워요. 이게 바로 현대 인간의 신앙심에 의한 거기 때문에 신앙심을 논하게 되면, 인간이 신앙을 갖고 있죠. 그러면 인간을 조작하면 뭐가 나올 수 있습니까? 신앙심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절대의존에 관해서 신앙하는 게 신앙인데 절대의존은 어디 있느냐 하면, 슐라이어마허는 말하기를 초월적인 곳에 있는 게 아니고, 아까 은혜로 하는 게 아니고, 은혜긴 은혜인데 초월이 아니고, 이미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게을러서 절대의존 신앙을 못 가졌지, 영성훈련하고 도 닦고 하고 천주교 시키는 대로 하면, 현재 세상 속에 놓여 있는 이 무한한 신을 인간이 게으르고 그동안 자기 할 일 바빠서 그랬지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오랜만에 문자한 번 썼는데 되지요. 정신이 하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안 되는 게 없다 말이죠.

집착하고 정신을 모으면 신이 이미 바깥에 계시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깥에 기다린다는 것은 칸트와 피히테, 셸링, 헤겔이에요. 유한에서 무한을 따라잡는 식의 철학이지요. 슐라이어마허는 그게 아니에요. 이미 이 세상에 무한으로 계시기 때문에 잘만하면 수단껏 하면 이게 눈치 챌 수가 있고 그 신에게 절대적으로 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한 사람 건진 거예요.

이것은 그 당시에 교회가 과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람 수가 줄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사람 수가 어떤 교회에서 줄기 시작해서 만약에 천 명 되는데 구백 명 되면 비상 걸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도 집회하고 천오백 명 되도 다 떨어져버리고 또 팔백 명 되면 천 명에서 구백 명 될 때보다 그 위기감이 덜 해요. 뭐, 백 명쯤 떨어질 수 있지. 그러다가 오백 명 되면 위기를 느끼지요. 그 다음에 오백 명에서 백 명 되면 이제는 포기해 버려요.

그 당시는 온 국민이 태어나면서 세례 받고 신자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유행되면서부터 개인주의가 극단하기 때문에 교회 헌금하려하면 그 개인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옛날에는 농사져서 ( )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돈이 나올 출처가 농사짓는 게 아니고 자연에서 기술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얼마나 설치느냐에 따라서 수입이 늘어나고 덜 설치면 수입이 줄어드는 시대에 교회에서 남보다 더 많은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큼 더 설쳐야 되고 설친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교회를 못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는 돈 많이 내는 그 사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못 오는 사람은 돈만 내시면 훌륭한 지도자로 추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너도나도 도시에 가서 돈 벌고, 옛날부터 농촌 이탈하고 도시에 집중하는 이 문제점이 항상, 막 상공이 공장이 노동자가 많은 곳에 공장을 세우거든요. 원자재가 많은데. 하다보니까 교회가 시들해 지는 겁니다.

쟈크 엘룰 교회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쟈크 엘룰이 하는 유명한 말이 뭐냐 하면, 초대교회에서 교회가 사회구제에 나설 때 이미 그들은 예수를 버렸다. 이런 아이디어는 천하의 교회사를 백날 불러보세요. 그런 아이디어 나오는가? 교회가 사회구제와 이웃봉사 나설 때부터 이미 예수님과는 담 싼 거예요. 바이바이 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배고프니까 빵을 얻기 위해서 교회 오거든요. 전부다 가라라 가라. 가라 신앙, 엉터리 신앙. 그런데 교회는 한번 온 단골 놓치기 싫잖아요. 그들이 오게 되면 사회는 지도자급들은 민중들이 많이 모이는데, 아까 제가 그랬지요. 사람들은 어느 길로 간다? 넓은 길로 가지요. 교회가 구제로 사람 숫자가 늘어나니까 기존의 공직 사회에서 교회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게 뭐냐? 국교 선언으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의 대세가 돼버려요.

그런데 이미 쟈크 엘룰에 의하면 교회는 맛이 가버렸어요. 교회가 아니고 정치단체가 됐어요. 거기에 빌어먹은 게 천주교였어요. 교회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인간이 절대의존 신앙으로 말미암아 () 때 이것이 민중들에게 아주 호소력이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인기 얻었던 것은, 원효대사가 자기 나름대로 불교를 통달하고 중국의 선불교를 연구하고 난 뒤에 인도의 용수라는 그 사람이 선불교의 창시자인데 그 사람을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불교는 도를 닦는 교가 아니고 믿는 종교다. 그러니까 자력 종교가 아니고 타력 종교다.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가요? 원효대사가.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다 극락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민중들에게 대 인기 얻었어요.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거기서 조계종입니다. 조계종부터 해서 쭉 나온 겁니다.

문자해독이 아니라 교리연구가 아니라 누가 선만 참선하면 헷가닥 해탈되는 거예요. 돈오돈수에요. 순간적으로 깨닫고 순간적으로 성화되는 겁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가 아니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점차적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수양도 즉각적으로 거룩도 즉각적으로 되는 거예요.

성철 스님이 이걸 주장하고 동국대학교 뷸교학 교수들 이걸 반대해서 돈오점수라 하고. 교수가 알기는 니가 깨달음을 알아? 동국대학 교수들은 성철 스님은 너무 도사입니다. 너무 도사라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혼자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납득이 되도록 해야지. 니들이 불교를 알아? 성철은. 너희들이 무슨 불교를 알아. 그냥 책만 들여다봤지. 불교를 알아? 깨달아야 돼. 믿으면 그걸로 끝이야. 성화, 믿음, 의로움, 다 되는 거예요.

슐라이어마허가 이것이 민중들에게 호소되니까 그동안 문 닫았던 교인들이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받아들여서 문을 열고 대중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칸트의 착함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신앙적인 바탕이 성경해석에 대해서 이제는 새로운 해석학을 냈으니까 어떤 사람은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뭐냐? 성경해석학의 아버지라 했어요.

그러면 슐라이어마허가 이전의 해석학이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 진리라 하는 것은 그동안의 신앙고백이에요. 신앙고백서에서 나온 것, 그리고 천주교에서 말하는 교리. 교리를 성경이 그냥 어느 수단으로 외치기만 하면 되는데 이제는 여러분들이 직접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게 되면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게 되어있죠.

그러니까 이제 슐라이어마허가 해석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문법적 해석이 있고, 문법적 해석을 주장했고, 또 하나는 심리적 해석이 있습니다. 현재는 문법적 해석, 심리적 해석은 지금도 신학교에서 다 이렇게 가르쳐요.

문법적 해석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과 공통적인 신앙심이 있어야 될 때는 문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뿐만 아니고 개인적으로 깨달음이 있었단 말이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똑같은 말씀을 줘도 백사람, 백사람 느낀 것을 이야기해보면 큐티의 느낀 것을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 말이죠.

왜 그 점이 다른 것은 뭐냐? 현재 우리 속에 무한이 유한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줘서 깨달음이 있는데 왜 그 깨달음을 문법적 해석 가지고 틀렸다, 맞았다. 이렇게 시비 걸 검열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이에요. 본인이 깨닫고 본인이 즐거우면 끝나는 것 아니냐 이 말이죠.

지금 보면 굉장히 당연해 보이는데 그 당시는 용납이 안돼요. 왜냐하면 신앙고백에 의해서 교회 되고, 안 되고 했으니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뿐만 아니고, 천주교에서 철저하게 신앙고백 하잖아요.

너희들이 일반교인들이 어떤 해석을 해도 이 신앙고백서에 벗어나면 너희는 이단 돼. 이거는 종교재판에 넘어갈 거야. 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 일반교인들은 성경 봐도 건성이라. 이미 선입관이 이미 교리에 박힌 채 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은혜 받는 게 없었는데 슐라이어마허 해석학 이후에는, 이제는 교리는 기본으로 공통적으로 갖춰 놓고 나 혼자 은혜 받는 것은 따로 은혜 받으면 된다는 편리주의가 등장한 거죠.

이것을 슐라이어마허가 아주 쉽게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여기에 체계를 잡아놨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인간의 심리적 해석에서, 심리라 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이거는 늘 유동적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은혜 받는 게 유동적이라면 이걸 이해라고 해요.

이해된다면, 기존의 진리는 뭐 뿐이다? 처음에 이야기했죠. 진리란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하나뿐이고 뭐가 된다? 객관화된다고 했잖아요. 그럼 이렇게 되면, 진리해석은 하나뿐이 아니고 여러 개며 진리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그것은 객관이 아니고 주관적이다. 그러니까 남의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 목사 해석이라고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목사 해석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현대신학의 아버지고.

지금 보면 그게 당연한데 그 당시에는 그러한 주장이 파격적이고 무서운 겁니다. 항상 여기 나오는 철학가들이 환영받지 않았습니다. 전부다 목숨이 위태롭고 아슬아슬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들뢰즈 철학에 의하면 탈주. 그러니까 도주거든요. 도주한 놈은 잡혀서 죽게 되어있어요. 들뢰즈 철학이 도주철학입니다. 손성식 목사님 맨 날 탈주라는 말 하지요. 어려운 말 하는데, 탈주해서 도주한다 이 말이죠.

기존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도망치는 것이 현대신학의 뭐냐 하면, 유목적인 인식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유목이라 하는 것은 한 군데 돌아다니며 왔다 갔다 해야 되거든요. 왔다갔다 하다보면 이게 길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길이 이렇게 있으면, 이거는 전라도 가는 길, 이거는 경상도로 가는 길, 이거는 충청도로 가는 길, 이렇게 있잖아요. 옛날에는 길 따라가야 돼요. 길 벗어나면 안 돼요.

그런데 현대 유목적인 사회에서는 이리고 가서 길이 아닌 곳에 가버린 거라. 길을 벗어나서 벗어나면 이건 횡단이죠. 크로스 횡단해서 이리 가버려요. 가로지르기를 해버리면 그동안 놓쳤던 이 세상의 무수한 사건과 변이들과 변화들을 새롭게 습득할 수 있는 종합적 안목을 갖출 수 있는 것이 현대세계가 발전할 수 있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다. 이것이 들뢰즈의 메시지입니다.

또 그럴듯하지요. 항상 유명한 철학자들은 항상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를 해요. 복음적은 아닌데 다 맞는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은 결국 우리가 평소에 복음을 안다 해놓고는 복음적이 아닌 것이 너무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아이디어에 백년 후, 방금 슐라이어마허의 신학 또 다 잊어버렸지요? 뭡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주관적이다. 그것 하나 기억하세요. 그리고 신학이라 하는 것은 신에 관한 학문이 아니고,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본인의 신앙심에 대한 학문이 그게 신학이어야 한다. 주관으로 바뀌는. 진리는 객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진리가 있으면 오케이.

왜? 이 세상이 이미 무한이 들어있는데 남이 캐취하는 무한을 내가 캐취할 수도 있잖아. 하는 문제. 그야말로 자유주의죠. 그야말로 현대신학의 아버지죠. 내 팔, 내 흔들기입니다. 내 팔을 남이 흔드는, 두 바퀴만 돌아. 이거 없어요. 내가 돌리고 싶은 대로 돌리는 게. 내 팔 내 흔들고 흔들기 싫으면 안 흔들면 되는.

이게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개인의 능력을 창출하지 아니하면 다른 나라를 따라 잡을 수 없는 온 나라가 무한 경쟁에 돌입하는 시대에서 주체의 중요성, 주체의 가능성이 이처럼 신학까지 파급된 겁니다.

백년 후에 나타난 사람이 딜타이라는 사람이에요. 딜타이는 이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에 주목하고 백년 후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슐라이어마허가 핍박을 당했겠습니까, 무시를 당했겠습니까?

저는 [지옥의 하나님] 책 나왔는데 소식이 감감해요. 아무 반응도 없고. 제가 보기에는 그 책 좀 썼다고 봤는데 아무 반응도 없고 그런데. 너무 충격적이었나? 너무 까발렸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언젠가 까발릴 것 미리 당겨서 까발리면 당장 할 일이 줄어들잖아요.

딜타이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주관화 돼버리면 자칫하면 내 팔, 내 흔들기 돼버리면 그 주관이 나만의 진리가 되죠. 나만의 진리가 되면, 진리의 공통적인 요소가 없어지지요. 열 명이 회사하는데 열 명 다 지가 진리 돼버리면 이건 회의 안 되잖아요.

분명히 진리는 하나가 다양성 있게 나타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중에서 나쁜 진리와 옳은 진리가 있을 것이니까 그걸 가려내는데 어떻게 가려내느냐 하면, 나만의 체험하고 너의 체험, It의 체험, You의 체험, I의 체험, 여러 가지 체험들은 만나서 거기에서 나쁜 거, 옳지 않은 것은 탈락하고 옳은 것은 장려하는 그러한 고리가 마련되는데 그 고리를 가지고 역사라고 해요. 역사가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그 체험, 경험에서 인간은 다가 아니고 경험과, 아까 다시 해 봅시다. 여러분 또 잊어버렸을 건데. 인간의 진리라 하는 것은 내가 옳다는 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슐라이어마허가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뭐냐 하면, 새로운 경험이 오면, 이 경험은 어디서 나온다? 무한에서. 우리 유한 속에 있는 무한. 그러니까 신이죠. 신은 무한이잖아요. 그러니까 신은 초월적인 게 아니에요. 이미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자꾸 놓치면 안 됩니다.

이미 우리 속에 내재돼 있는 무한이 우리에게 우발적인 경험들을 줘요. 경험들을 주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와 수정작업이 이루어지겠지요. 그걸 슐라이어마허는 나만의 체험, 나만의 은혜 받은 것, 나만의 진리로 본 겁니다. 그런데 딜타이는 뭐냐 하면, 그게 너만의 진리는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진리가 되지 않으니까 그것은 모여서 시간에 맡기면 시간은 흘러가잖아요. 흘러가면 역사가 형성되고, 역사가 누가 옳은지를 가려준다 이 말이죠.

-헤겔하고 무슨 차이가?

헤겔은 딜타이하고 비슷한 시대인데 헤겔은 더 변증법적으로 아주 발달한 거예요. 딜타이는 성경해석 시대에 관한 거지만 헤겔은 그걸 초월까지 접촉시킨 게 차이점입니다. 더 원대하게.

국회의원들이 돈 받아먹고, 모자이크 처리해서 이렇게 나와서 역사가 옳고 그른 것, 이렇게 하거든요. 그게 딜타이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내 잘못을 판단 못합니다. 역사가 말해 줄 것입니다. 역사가 말해준다 해서 가서 아프다 해서 다 나와 버리데. 역사가 말해주죠. 돈 먹어도 역사가. 돈 한 푼 안 내도 다 나오데요. 역사가 말해주긴 말해줘. 아, 같은 편이었구나. 그 판사들 돈 먹은 사람들이고. 다 삼성그룹에 다 가버리고. 삼성그룹이 국회의원 돈 다 넣어서 전부다 저희끼리 먹고 산다고 역사가 말해 주지요.

역사로 인하여, 그러니까 역사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만의 독자적인 진리를 주장해 버리면 독선이 되니까, 역사라는 지평선에다가 과거에 어떤 식으로 흘러왔는가를 조사하면 거기에 참된 진리가 있다. 그러면 진리는 뭐로 하느냐 하면, 진리라 하는 것은 뭘 봐야 합니까?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진리가 이루어지겠지요.

현대신학에서는 바로 딜타이의 역사부터 시작됩니다. 이게 개혁주의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타락 전 예정인가, 타락 후 예정인가? 어느 것이 옳은가? 역사에 많은 신학자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역사의 신학자를 조사해보면 현재까지는 어떤데 앞으로 또 2007년도, 2009년도 신학자 나와서 또 어떻게 하게 되면, 진리가 바뀔 수 있는 문제지요. 그러니까 진리는 계속 미루지요. 미완에 있어요.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자꾸 미루게 됩니다. 자꾸 쭉쭉 미뤄내요.

딜타이란 사람이 역사라는 것 속에 진리를 역사란 지평, 역사의 지평. 이걸 지평이라 합니다. 지평이라 하는 것은 개방되었다. 경계는 갇혀 있는 걸 경계라 하고, 울타리는 갇혀 있고, 지평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평평한데 지평은 어디까지 영원히 이어지잖아요. 지평선 하면 가보면 또 있잖아요.

지평이란 말은 경계와 다른 점이 지평이나 경계나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동일한데, 지평은 가보면 또 넓어지고 경계선은 가보면 아, 이것이 다구나. 이렇게 되잖아요. 역사의 지평에서 진리가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해야 진리가 나오는 거예요. 진리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요. 그 책에 대한 진리는 또 다른 역사가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역사가 됐든 언어해석, 문법적 해석이 되었든 간에 역사를 보는 그 주관이 누구냐? 그걸 존재자인데, 그 존재자가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고 역사에서 수정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슐라이어마허는 이걸 공시적이라 해요. 현재 우리 같은 시대에 산다는 어떤 공통적인 진리를 느끼느냐? 이건 공시적이지만 딜타이는 이걸 통시적, 통시적이라 하는 것은 통으로 하는 겁니다. 공시적, 통시적 여러분들이 잘 안 들어봤을 용어인데,

예를 들어서 순경을 뭐라고 하느냐? 경찰관 하빠리 그걸 뭐라고 하느냐? 깡패들은 짭새라고 한다 말이죠. 또 뭐라고 하느냐? 짭새, 똘마니 이렇게 하거든요. 짭새, 순경, 똘마니하는 것은 현 시대 사람들의 용어들의 공시적 모임이죠. 그럼 옛날 조선시대 때는 순경을 뭐라 했지? 순라꾼. 고려시대는 뭐라 했지? 삼국시대는 뭐라 했지? 삼국시대의 용어를 끌어 모으니까 공시적입니까, 통시적입니까? 통시적이죠.

딜타이는 진리는 통시적으로 알아야 된다 말이죠. 옛날 것에도 엄연한 진리가 있고 되풀이 될 수 있다 말이죠. 슐라이어마허는 현재 우리끼리 모이면 그게 진리라 보는 것이고. 통시적 역사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이데거, 그 다음에 하이데거 해석이 나옵니다. 하이데거 해석은 뭐냐 하면,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간에 그게 전부다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존재인데 현실적인 존재 말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존재에 대해서 탐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이해하느냐? 왜 역사를 그렇게 이해하느냐, 왜 언어를 이해하느냐? 그냥 근원적인 존재론적으로 그 밑바탕 되는 걸 탐구해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때 나는 이 언어를 이렇게 사용한다. 라는 그 인간은 어디서 나온 인간이냐? 탐구한 것이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이 돼요. 거기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해요. 존재는 밑바탕에 있고, 존재자는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게 존재자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자는 다양하죠. 하지만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되게 하는 그것은 은폐되어 있어요. 은폐, 숨어 있는데, 은닉되어 있는데, 이 은닉되어 있는 것이 숨어 있는 게 주특기가 아니고, 이게 자꾸 은폐가 비 은폐성을 드러냅니다. 자꾸 갈라져서 이 세상이 현실적으로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해요. 그게 뭐냐?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존재라 할 때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사건의 뭉치라 보는 거예요. 사건, 사건의 연발. 사건의 뭉치로 보는 거예요. 그 사건이 만약에 나라는 나에 의해서 예상하고 예측하고 나왔다면, 하이데거는 존재자 밑에 존재를 따로 둘 필요가 없지요. 나 그렇게 예상했어. 그럴 줄 알았어. 와, 자전거 주차할 때부터 알아 봤다니까. 이렇게 우리가 예측할 때는 내가 궁극적인 존재자기 때문에 존재란 게 필요 없는데,

존재자들이 MBC 가요콘서트 본다고 쭉 줄 서서 있는데 3번 게이트 있는데, 문은 좁은데 문 열렸다. 밀어라! 하고 갑자기 밀어버리니까 효도관광 온 아주머니들, 할머니들 다 죽어버리고. 아이들 찡겨 죽고 이랬잖아요. 이것은 민 사람도 미리 예측 못했고, 예측 못한 우발적인 사건이 열린 거예요.

열어서 우발적인 사건이 현재 존재자가 알고 있는 자기 현재 존재 인식을 수정케 하지요. 개정케 하지요. 수정하는 거예요. 마, 인간이 세상이 그런 게 아니야. 진리가 그런 게 아니야. 새로운 사건의 집합으로서 진리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또 깨지고 나중에 무슨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면 또 깨어지지요.

나라고 구축된 것은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사건의 뭉치가 나에요. 왜 우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가? 왜 나한테는 형제가 없는가? 이게 왜 남들은 있는데 없는가? 이거는 형제 없는 사건에 도발해서 형제 없는 집안에서 사건화 된 게 나거든요.

이것은 하이데거의 탁월한 점이 보통은 사람들은 뭐냐? 지금까지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모든 형이상학 철학은 있음, 있음에서 연구하고 탐구하고 나가는 그런 거라면, 이 존재자가 마지막에 사건을 만납니다. 무슨 사건을 만나느냐 하면, 죽음의 사건을 만나요. 그러면 이 존재의 세계는 무슨 세계입니까? 죽음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죽음의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본 것이 하이데거입니다. 뛰어난 철학이에요.

산다는 것은 죽음의 부록이에요. 살아있다는 것은 본론도 들어가지 않은 서론이고 부록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어디로 나가냐? 결국은 하이데거는 불교와 연관되죠. 화엄경이라고 있는데 화엄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화엄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울이 한 면이 있는데 거울을 보면 이 거울이 교회를 비취면 교회 모습 보이지요. 전경이 보이지요. 그런데 까불다가 거울 깨뜨렸습니다. 그러면 거울이 천 개, 만 개 갈라지겠지요. 거울이 한 개 있을 때는 이 교회의 광경이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만 거울이 탁 깨지니까 깨진 파편 조각 하나마다 이 교회 전경이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몇 개입니까? 진리가 몇 개입니까? 거울이 만약 파편이 천 개라면 천 개 되겠지요. 그런데 파편이 또 깨져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천 개, 만 개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의 거울이 깨져서 천개 되었는데 천 개 속에 천 개의 광경이 들어있으니까 부분이 전체보다 작은 것도 아니고, 전체가 부분보다 큰 것도 아니죠. 부분이나 전체가 하나죠. 결국. 하나가 곧 부분이고 부분이 하나지요.

그러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우주의 전부라고 볼 수 없고, 전체 우주의 하나이면서도 나는 이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전체라고 알게 되는 다른 우주를 안 가 봐도 이 우주는 이것만이 아니라 딴 데 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인식을 주는 무한 인식을 준 나는 전체 우주를 다 포함하게 되는 또 하나의 전체지요. 또 하나의 전체가 부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화엄경의 주장입니다. 오랜만에 고상한 이야기 힘들게 했습니다. 뭐, 아멘이 나오지 않고

죽음이 존재다. 이 하이데거의 이러한 죽음의 실존론적 철학을 십자가와 연관시킨 것이 불트만 철학입니다. 죽음의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를 지배하고 그리고 끌어당기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살아있는 세계가 아니고, 죽음에 포위된 죽음에 얽혀있는 죽음에 보쌈 쌓인 죽음에 휘둘린 살겠다고, 살겠다고 결국 죽잖아요.

부자 청년이 살겠다고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습니까? 부자 청년이 살겠다고 돈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생 얻겠다고 착한 일, 십계명 다 지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뭡니까? 다 버리고 나 따라 와야 영생 있다. 그럼 주님 따라 가면 어디 갑니까? 결국 죽음으로 가지요. 십자가로 가지요. 십자가가 바로 영생, 사는 게 돼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이게 복음이고.

하이데거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게 불교고 하이데거입니다. 제일 중요한 언약에 의한 언약이 약속한 메시야가 빠진 거예요. 메시야가 빠진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죽음과 무, 없을 무. 무의 이야기는 그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마귀가 알려준 아이디어입니다. 유사복음이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지, 깨달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지, 내가 죽는다는 죽음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이야기하는 엉터리 죽음입니다. 진짜 죽음은 목숨 끊는 게 죽음이 아니고, 예수와 함께 좁은 길 가고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살아있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 달린 세례 받은 함께 있다 하는 죽음이죠. 그 죽음을 산 자는 산 자가 되죠.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이러한 산다는 것은 죽음의 부록이죠. 본론은 여기서 이야기하는결국은 살아보려고 애써도 죽어버리니까 존재자의 공통점은 죽는 다는 거예요. 이 공통점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다른 철학가들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그냥 하이데거는 실존론적 철학 이러거든요. 실존론적이란 말이 아니고, 하이데거는 죽음이 생명보다 더 넓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음이 진실이지, 삶은 죽음의 하나의 파편이고 허상이고 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이 모든 세상에서 만나는 하나의 허구다 이 말이에요.

나라는 것은 허구고, 살아있기 때문에 만드는 하나의 인상이에요. 이미지. 중요한 거 하는데 녹음이 되는지 확인해야 돼. 오케이. 녹음 안 되면 다시 해야 돼. 그런데 어떤 때는 들여다보다 또 잘못 건들어서.

하이데거의 해석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인간이 곡해할 수밖에 없다. 이게 해석학의 진수입니다. 뭘 해도 인간은 수천가지 언어를 해도 인간은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곡해함. 곡해. 이게 하이데거의 모든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수 믿습니다. 곡해하셨습니다. 죽어서 천당 갔습니다. 곡해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오해고 착각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진실이란 게 뭐냐? 죽어봐야 아는 거예요. 살아있을 동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오게 되면 아아, 그때 잘못 생각했네. 또 수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 오게 되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돼. 새로운 사건에 부딪치게 되면 아, 그게 아니고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때 30대에 잘못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말이야. 예수 믿었으면 술을 끊어야지. 이렇게 하다가 술 먹고 난 뒤에 아아, 잘못했어. 술 먹어도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인들의 수준은 그 교회 목사 수준 못 벗어난다고.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저한 죽음 위주와 그러면서도 딜타이의 통시적, 공시적이 아니라 통시적. 공시적은 누구에요? 슐라이어마허. 통시적은 딜타이. 이 딜타이와 그리고 하이데거는 뭡니까? 유한하죠. 죽음은 유한성 있잖아요. 유한성 해서는 이게 참된 진리가 안 되니까 유한을 고려하면서 무한한 진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현상주의자, 훗설의 현상학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자각은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 의식은 영원하다는 게 있어요.

훗설의 무한성과 하이데거의 유한성과 딜타이의 역사성을 다 합쳐서 종합적으로 인간을 이해를 한 것이 가다머에요. 가다머라는 드디어 현상학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작년에 죽었는지 무려 나이가 백 살 넘어서 죽었어요. 장수했어요. 요새 철학가들이 백 살 넘었습니다. 1890년대에 태어나서 2002년에 죽었으니까 백 살 넘어 얼마 전에 죽은 가다머인데.

이 가다머가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종합해 보니까 사람은 새로운 사건에 개방돼야 된다. 동시에 그러나 역사라는 과거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걸 어려운 말로 '영향사'라고 하는데, 어려워. 사람들이 계속 개인이 갖고 있는 '선이해'는, 선이해라고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이데거가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모든 것에 선이해가 있다. 선이해가 있는데 이것이 새로운 사건이 유발되면 선이해가 수정된다고 하이데거가 이야기했거든요.

그 선이해를 그걸 가다머가 인용해서 이 선이해는 역사적으로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 주위에 둘러싼 사회와 전통과 관습과 관행과 심지어 자기의 습관, 이런 것에서 영향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영향 받아 나온 것이 그게 선입견이다. 선입견에서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할 때는 선입관 없는 질문은 없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가다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뭐냐 하면, 대답이 먼저 되지 않는 질문은 없다고 했어요.

들어보세요. 대답이 선행되지 않는 질문은 없다 했습니다. 대답을 미리 기대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하는 질문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목사한테 물어도 목사님들은 그거 오해하면 안 돼요. 착각하면 안돼요. 저분이 예수에 대해서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옳은가, 그른가? 검증받기 위해서 참고로 묻는 거예요. 이미 해답은 갖고 있는데 해답이 옳은가, 그른가? 한번 참고하려고 묻는 거지, 수정하려고 묻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냐 뿐만 아니고, 남녀간에 특히 많은 게 나, 사랑해? 나, 니 좋아해. 남자는 여자의 육체를 원하고 훔치고,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훔치길 원합니다.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하나 했지요. 여자가 남자를 할 때 니, 네 마음은 내꺼야. 다른 여자 건드리지 마. 남자는 여자의 육체만 자극적인 신비적인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한번 해놓고 이제 같은 음식 또 밥상에 올라오면 맛없어요. 또 두리번거리면서 하이에나처럼 도시에 사는 것처럼 또 새로운 육체를 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거는 왜냐? 타락하고 난 뒤에 그럴 수밖에 없는, 그걸 탓하면 안돼요. 그게 본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선입적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향적인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하이데거처럼 죽는다, 죽는다, 이래버리면 진리가 안 되니까 이 유한한 새로운 사건과 과거의 전통이 현재 새로운 미래에 열릴 사건의 지평과 미래의 기대와 새로운 과거의 지평이 결합된다고 해서 지평의 융합이라고 합니다. 지평의 융합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이쪽 지평이 몰려와요. 저쪽에 미래의 지평이 몰려옵니다. 이런 기대감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새로운 사건이 생기면 현재 인간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연애할 때 되게 좋아하다가 결혼하는 것은, 제가 어제 그런 강의했는데 왜 결혼식을 성대 하느냐 하면, 남자들이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강제라도 못 헤어지도록 사회적인 관념상 그렇게 붙여 논 거예요.

만약에 한번 살아보고 그 다음 결정한다하면, 결국 얼마 안 가 다 6개월에 다 떨어집니다. 왜? 세라토닉이란 호르몬이 있어서 전부다 남자나 여자나 시시하거든요. 이미 아는 사람 같으면 시시하다고요.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투사. 새로운 모험, 위기. 나오잖아요. 새로운 거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거 시도하면 사회 문란하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강제로 해서 니는 안돼. 여자는 시집 사람이고 니는 이제는 헤어지면 엄청난 부담을 지어야 돼. 이렇게 강제로 묶어놔야 그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에 결혼을 그렇게 한 거란 말이죠.

새로운 기대감은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 사건은 미래 사건이에요. 이걸 가지고 하이데거는 '선취'라고 해요. 미리 취하는 거예요. 이 선취라 하는 것은 판넨베르그 책에 보면 나오는데 몰트만 책에도 나오고.

미리 취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으로 나옴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 새로운 사건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죽음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죽음이 주는 유혹이 제일 짜릿해요. 노인네들 둘이 사랑하는 영화에 보면, 죽어도 좋아. 제목이 [죽어도 좋아]에요. 얼마나 좋았으면 죽어도 좋겠습니까? 사랑은 죽음보다 더욱 강하다고 아가서에 나옵니다.

자살사이트에 가는 이유가 아무리 온갖 쾌락을 다 누렸지만 한 가지 못 누린 쾌락이 있어요. 마약도 해보고 뭐, 연기도 맡아보고 부탄가스도 맡아 보지만 아무리 해도 다시 맡아봐야 생생한 삶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삶은 고달파요. 오늘 참, 좋은 소리 많이 한다.

산다는 것은 왜 산다는 게 왜 고달프냐 하면, 내 욕망에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에 고달파요. 애가 5등 했으면 1등하고 싶고, 1등 했으면 더 하고, 체육 우승한 사람은 두 번, 세 번 우승 더해야 되고. 한 번 우승했으면 올해하면 나머지까지 다 이겨야 되고. 자꾸 새로운 욕망을 유발하고 발전시켜서 그 다음 4골 넣어라. 계속해서 이렇게 욕망 오기 때문에 고달프다니까. 내 욕망을 내가 주체 못하기 때문에 고달파요.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시마이 하겠습니다.

존재는 배고파합니다. 히딩크가 말했잖아요. 난 항상 배고프다. 존재는 배고픈 것을 왜 배고프냐 하면, 존재는 이게 주머니라면 거기에 알맹이가 소유가 있어요. 소유가 그 사람의 존재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유가 이렇게 있었는데 구슬이 한 두 개 빠져버리면 배고파요.

그런데 어린애들은 그냥 마법의 성이라. 환상입니다. 라라라~라라라~ 그 노래 가사를 보면 자기 영웅 되거든요. 공주가 있는데 공주를 찾아가면 환난을 이기고 마지막에 공주를 차지하는 역경이에요. 애들은 환상이에요. 모든 꿈꾸는 게 전부 환상을 꿈꾸는 겁니다. 그게 현실 속에 들어가면서 고달픔을 느끼죠. 애들이. 그걸 흔히 말해서 시건 났다. 이렇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 구득영 목사님이 시건 나기 위해서 하루 열여섯 시간. 세상에 얼마나 고생스러울까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 그게 고달프지만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주는 쾌락과 가깝기 때문에.

굉장히 역설적이지요. 참 희한해요. 매 맞는 여성, 안 맞으면 고달픕니다. 매 맞을 때 가끔 맞을 때는 갑자기 뭔가 오늘 하루 일과 치렀다는 생각 듭니다. 그래서 명태하고 여자는 사흘마다 때려줘야 여자가 서비스 좋다는. 왜? 맞아 본 사람만이 맞는 쾌감을 알아요. 군에서 안 맞고 자면 잠이 안 와요. 우리 군에 때 1974년도 안 맞고 자면 잠이 안 왔어요. 지금도 군대 생활 마찬가지입니다만. 빙산의 일각이죠.

나중에 때려달라는 거죠. 그 정도로 매조키스트에요.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메조키스트적인 쾌감을 에릭 프롬은 인간에게는 때리는 쾌감과 얻어맞는 쾌감이 다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프로이드는 그 중에서도 얻어맞고 죽는 쾌감보다 더 좋은 쾌감은 없어요. 왜? 다른 것은 반복될 수 있지만 그거는 한번하고 올인 하잖아요. 다 걸어버리고 끝나버리잖아요.

도박에 빠진 사람이 뭐냐 하면, 다 거는 죽음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에 빠지는 겁니다. 다 걸어버려요. 도박 10원 빵 재미 하나도 없어요. 100원 빵에다가 1000원 빵에다가 다 걸어버립니다. 심지어 마누라까지 걸어버립니다. 다 걸어버립니다. 다 걸 때 따나 안 따나 상관없이 다 걸었다는 그 쾌감은 자살의 쾌감인데 완전히 모든 걸,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죠. 몽땅 다 거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도박판에 가서 돈 잃으면 그 사람한테 돈 내놓으라고 고소해서 돈 받아내야지. 천만에. 돈 잃었다고 그 돈 딴 사람, 고소 안 합니다. 왜냐하면 고소하면 그 다음 그 판에 안 넣어주거든요. 그 판에 안 넣어주면 전에 천만 원 투자해서 넣을 때 도박했던 얻었던 그 쾌감을 그 사람이 착실하게 미용실 한다든지 이발소 한다든지 안 그러면 노동질 한다든지 안 그러면 회사 취직해서 그 쾌감을 얻습니까? 못 얻어요.

언제든 돈 모아서 다시 도박판에 갑니다. 홍콩, 마카오, 필리핀, 언젠간 돈만 있다면 다시 가요. 왜냐하면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아무리 예쁜 마누라도 그 쾌감보다 못해요. 왜냐하면 완전히 자기를 다 거는.

그래서 도박과 산에 오르는 것,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몽땅 다 거는 쾌감은 놀랍게도 테레사 수녀. 착한 일 하기, 자원봉사하기. 이게 마약입니다. 완전히 미쳐버려요. 신장 떼어주기. 또 있으면 또 떼어줄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 신장 떼어주는 사람들. 뭐 가지고 있는 걸 떼어주는 걸 나쁘다는 게 아닌데. 이게 되풀이되면 마약 같은 거예요. 착한 일하기. 교회충성봉사 많이 하셨지요. 마약이었습니다. 자기를 인정해주잖아요.

이러한 선취, 이걸 기대감이 피어오르는데. 이 죽음이 주는 쾌감을 사람들은 그걸 맛보니까 이게 개방적이에요.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러한 포부와 사람이 그리는 미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이 신으로 승화되는 스토리입니다. 모든 인간이 꿈꾸는 상상력의 시나리오는 뭐냐 하면, 자기가 신으로 붕 떠 승화되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그거에요. 남들이 우러러 보면서 해같이 빛난다 하죠. 완전히 변화산이에요.

그게 미래의 죽음이 주는 해탈의 기쁨이고 구원의 부활의 기쁨이에요. 그런데 미래는 뭡니까? 아무리 잘나도 시들해져 이제 재미가 없어. 뭐든지 한번 맛 본 것은 다 맛없고 재미가 없어요. 오늘 식사 여기 하다 저기 가서 안 맛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전체를 인간의 진리라 하는 것은 뭐가 영험하냐? 과거에서 오는 생성된 선입관과 그 선입관에 기초한 미래가 주는 새로운 보람, 이것이 인간의 모든 해석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뭘 봐도 성경을 보든지 책을 보면서도 과거에 있는 것과는 개선되고 미래에 자기가 붕 떠서 신이 되는 그것을 기대하면서 책을 보게 되고 남들과 대화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 가다머죠.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이마스? 독일의 경제학자, 그 사람은 가다머의 해석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입니다. 뭘 반대하느냐 하면, 과거와 미래를 이렇게 지평을 융합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거기서 비판하면서 수정해서 하게 되어있다. 이름이 뭐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하버마스. 하버마스가 그렇게 주장했어요.

그리고 하버마스 주장에 대해서 또 반대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람의 진리라 하는 것은 역사와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고. 텍스트에서 온다. 텍스트가 나를 비판하고 수정한다하는 것이 리꾀르란 사람입니다. 리꾀르는 너무나 보수주의자라서 성경문자주의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선입관은 버리고 성경자체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보자. 완전히 보수주의자도 이런 보수주의자가 없지요.

이것이 바로 나중에 가다머나 딜타이는 뒤에 나오니까 그때 좀 상세히 하도록 하고. 이처럼 슐라이어마허가 현대철학의 원조, 아버지란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뭐냐? 이제는 진리라 하는 것은 내가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내 안에 진리가 있는데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신은 인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거죠. 무한 속에 유한이 있고 유한 속에 이미 무한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월적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서 무한 속에서 즉각적으로 깨달음, 절대의존신앙 그것이 정말 인간을 신으로 승격시킨다. 라는 주장을 슐라이어마허라는 신학자가 했습니다. 절대의존신앙, 굉장히 믿음 좋고 신앙도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끝가지 절대 의존하는 오늘날 구원파라든지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태를 이렇게 미리 구약의 역사의 지평에서 봤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 오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하나의 진리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목자로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들입니다. 난데없이 우린 양이 되고 예수님은 선한 목자 되셔서 부족함이 없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러한 사건, 사건들이 천국의 사건이 되어서 십자가 사건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공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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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