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강의(06. 10. 27) 19-2
Re..광주강의(06. 10. 27) 19-2
이름 : 서경수(IP:)
광주강의(06. 10. 27) 19-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어둠이라는 것은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없어지니까 어둠은 빛이 오기 전에 잠정적인 현상에 불구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한 1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빛 따로 있고 어둠 세계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는데, 어둠 세계는 놀랍게도 빛이 와도 어둠이 빛을 밀이내서 어둠 속에 못 들어오게 만들어요. 기발한 아이디어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두움이란 자체가 용어가 잘 못 된 것 아니겠어요? 우리 상식으로는. 첫째시간 녹음 안 된 부분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한 1서에서 사도 요한은 인간을 볼 때, 빛에 속한 인간과 어둠에 속한 인간을 따로 구분해 놓고 그 운명은 빼도 박도 못하는 것으로 고정시켜버립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정리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이 세상 현실은 인간들끼리 ‘잘 해보자! 넌 왜 그렇게 못해!’ 이렇게 인간들끼리 협의하고 의논해서 되어질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절에 다닌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 이름이 예수라고요. 그 유명한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분이기에 존경하는 뜻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하지, 곡괭이 들고 망치 들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때려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그런 품성이 있어서 적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누구시지요?’ ‘나, 예수다.’ ‘예수님! 제가 평소에 기다리던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이런 인간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는 상태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범위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외부에서 와서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과 싸워서 결판이 나야 그 다음에 강도가 자기 소유로 만드는 법이지, 어느 도적이 와서 싸우지도 않고, ‘실례합니다. 저것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예, 가져가세요.’ 어디 이런 도적이 있습니까?
집 주인을 꽁꽁 묶어 놓아야 가구를 도적질 하지요. 만약에 주인을 안 묶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기 것 가지고 간다고 난리를 치겠지요. 마치 출애굽 때처럼. 애굽의 바로 왕이 가만히 있던가요? 자기 노예들 데리고 간다고 기병들을 동원해서 쫓아 왔고, 그들이 홍해에서 죽지 않습니까. 이것이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요한 1서가 현실이라고 할 때, 뭐가 현실이냐? 불신자나 신자나 간에 둘 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 뜻대로 뭔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개조하고 그런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눈을 뜨라는 거지요. 눈을 뜨게 되면 제대로 된 현실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 되고, 저쪽에는 불신자로 드러난단 말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요한 1서 2장 21절에서는 진리와 거짓으로 나눕니다.
적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21절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진리에서 나는 것 있고, 진리에서 나지 않은 것(거짓)이 있단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거짓말하고는 다르겠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거짓이냐’고 할 때, ‘진리가 무엇이냐’가 결정이 되면 거짓도 그 순간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내겠지요. 진리에서 나지 않은 것은 전부 거짓이니까 진리가 오기 전까지는 유보되어 있다가 진리가 떴다 하면 거짓은 거짓으로 쭉 몰리고 진리는 진리대로 몰린단 말이지요.
‘거짓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되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나 그리스도가 언제부터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까? 처음부터 관심사는 아니었지요. 여러분이 교회 다니기 전에 예수님에 대해 관심 있었습니까? 없잖아요. 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데, 정신이상자가 와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나를 미워했지!’ 이러면, ‘아저씨, 우리는 아저씨 미워한 적 없고요 오늘 처음 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적그리스도고 사랑하는 자는 진리에 속한다.’고 한다면 ‘아저씨, 나가주세요.’ 이렇게 할 거란 말이지요. 왜냐? 평소에 사람이 자기가 관심을 가진 사람 같으면 ‘나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인가’가 결정될 텐데, 아무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불쑥 나와서 그런 소리 할 때는 ‘이게 돌았나?’ 이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제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복음 없는 인간은 인간 취급도 안 해준다고 할 때, 이미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인간이란 개념이 있지요. 나는 인간이다. ‘나는 원숭이가 아니고 사람이다’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 아니다.’라고 하게 되면, 평소에 자기가 사람이라고 여겼던 이 인간이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다시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기준에 대해 반대해야 될지 아니면 수용해야 될지 결정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어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요한 1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인간은 몽땅 다 구원 받는다.’ ‘선악과 따먹고 난 후 너희들 고생 많았지?’ ‘주님, 고생 많이 했습니다.’ ‘걱정마라. 내가 너희들을 다 구원해 줄게.’ 이렇게 되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구태여 아들을 보내 십자가 지고 이런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그러면 그냥 사랑해주면 되지 무엇 때문에 기준을 냅니까?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데 ‘너 배고프지?’ ‘엄마 나 배고파.’ ‘여기 떡 있다. 먹어라.’ 이러면 될 텐데, ‘너 배고프지?’ ‘예, 배고파요.’ ‘여기 떡이 있는데, 수학 10문제 풀고 먹어라.’라고 한다면 거기에 사랑에 뭐가 붙습니까? 조건이 붙지요. ‘엄마, 나 사랑하는 것 맞아?’ ‘왜 그러니?’ ‘떡을 주면 그냥 주지 왜 수학문제 풀라고 하는데?’ ‘실은 내가 수학을 사랑하거든.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을 사랑하거든. 나의 관심사는 수학에 있지 네가 내 아들인지 아닌지는 수학을 보고 결정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낸 것은, 아들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들이 없어요. 지금 아들도 아닌 인간들을 아들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일에 흠집을 냈습니다.
다 잊어버리셨을 텐데,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 홀로 하셨다는 그러한 기념물로 심어 놓았지요. 만약 선악과를 안 따먹게 된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는 것이 유지되겠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그때부터 인간은 뭘 느끼고? 주체를 느끼고, 그때부터 하나님은 뭘 느끼고? 그 인간을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나라에서, 에덴동산이란 것은 창조의 상징물로 완벽한 나라 아닙니까. 완벽에서 선악과를 떼 내는 거예요. 그래야 이 에덴동산이 여전히 완벽으로 남지요?
동산 가운데 나무가 두 종류가 있어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지 않습니까.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다. 그래서 내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 선악과 타먹지 않은 이 상태가 생명을 따먹을 만한 그러한 상태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잘라내야 될 것 아닙니까? 암 세포를 잘라내야 이쪽이라도 계속 온전하게 유지되지요.
그리고 온전히 유지된 생명나무가 ‘나는 생명의 떡이요.’했으니까, 이것이 그대로 이 땅에 덮치는 거예요. 이것이 확장되는 겁니다. 우리는 갈 수 없으되 주께서는 안식을 위해서 이미 완전하게 유지되어 있는 생명나무를 밑에까지 확장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선악과 없는 새로운 세계, 제 2의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주께서는 만드셔야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항상 인간은 잘라내야 될 입장에 있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정죄함이 없다고.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정죄함을 당해도 싸다’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정죄함이 없지, ‘우리는 늘 정죄 받아도 마땅해!’ 라는 것을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절대로 인정 안 하지요. ‘나에게는 악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 아마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걸.’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날 위하여, 날 보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가지고 우리를 뭉개버리기 위해 오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내가 여기 앉아서 ‘아마 주께서 날 구원하기 위해 올 걸.’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와장창 하고 천장이 내려앉아서 완전히 깔려서 종알거리던 입과 이빨이 다 부서지고 막살이 났는데, 위를 보니까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고 계세요. 나를 밑에 깔은 채 ‘다 이루었다.’고 해요.
그 깔린 것 중 하나가 정죄함이 없는 사람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얼마나 쉽습니까. 위를 쑤셔서 천장 무너뜨려야 합니까. 여기는 천장 무너뜨리려면 5층까지 다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확인이 됩니까?
요한복음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 자꾸 아버지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고 그것은 마귀라고 이야기하니까 유대인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용어가 ‘여호와 하나님’ 아닙니까? 자기는 ‘주’를 섬기고 있는데, 마귀를 섬긴다고 하니까 --- 얼마나 의식이 바뀌어야 ‘내가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은 마귀였어.’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결국 안 나옵니다. 못 나옵니다. 예라, 너나 죽어라고 하면서 죽여 버렸지요.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담의 족속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 주체가 있는 이상은 신을 만들어도 주체인 내가 만들어요. 메시야를 만들어도 내가 만들어요. 참고 서적은 뭘로 할까요? 성경.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들어도 내가 만들고, 예수님을 만들어도 내가 만들고, 삼위일체도 내가 만들어요. 그게 2,000년 동안 삼위일체를 만들어 온 겁니다. 교회가. 이것을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올렸지요. 자아실현 → 그리스도 → 절대자아
이호식씨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면, 에베소서(5:8)에 보면 우리는 ‘빛의 자녀’지요? ‘빛의 자녀’ 같으면 우리한테 어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둠이 없잖아요. 어둠이 없는데 어둠을 이야기할 필요 뭐가 있느냐? 어둠을 이야기 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을 능가해야 돼요. 사도 바울을 능가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빛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바울의 뒤에 오는 사람들이 타 넘어가는, 뜀틀 할 때 집고 넘어가잖아요. 이렇게 바울을 타 넘고 바울보다 더 나가는데,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원하는가 하면, 이제 예수님도 필요 없단 말이지요. 네가 이미 말씀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게 징징대지 말란 말이지요.
빌립보서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지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1:20)라고.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사도 바울이 수준이 낮아서 아직도 ‘그리스도, 그리스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에요. 장성한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수준이기에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니니’ 이런 소리 하고 있는데, 이제는 예수님하고 맞먹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하고 맞먹는, 예수님과 같은 형제로 살아가는, 예수님은 큰 형님이고 나는 동생이고, 그래서 맏아들 되게 하시고 ---
이 말은, 우리한테 더 이상 어둠이 없다는 말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이 다 성령의 일이고, 그래서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 짓지 않는다.(3:9)’ 그래서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아주 수준 높은 사람이 되었잖아. 이런 주장을 해요.
왜 제가 이호식씨의 논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새사람 되었으니 명령법에 따라 새사람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논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지 못한 이유를 아까 이야기했지요? 빛의 자녀 같으면 뭐가 없어야 된다? 마음속에 다시는 어둠이 없어야 되는데,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겁니다. 이호식씨처럼 ‘나는 다시는 어둠이 없어. 이제 나는 아무 거리끼는 것이 없어.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일이야.’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상봉 목사님처럼 ‘빛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어둠을 느낀다.’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돼요.
요한 1서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2:22)라고 했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여기 예수는 하나님 예수가 아니고 인간 예수다. 그 이유가 뭐냐, 요한 1서 1장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에서 들었다, 봤다, 만졌다는 것은 구체적 인물로서 실제로 만져지는 어떤 분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분이 바로 예수인 것을 그 당시에 다 아니까 그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느냐, 화살표(→)가 있잖아요. 이 화살표를 끊어버리느냐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끊으면 적그리스도, 안 끊으면 이것은 진짜 빛의 자녀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사도 요한은 만지고, 보고 다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안 봤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이 어떤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가 보고, 만졌는데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했을 경우에 어떤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 ‘손으로 만져봤기 때문에 믿음이 오더라.’ 라는 식의 뉘앙스가 강해요. ‘실제로 봤기 때문에 더 확실히 믿어지더라.’ 라든지, ‘만졌기 때문에 믿어진다.’ 이렇게 될 공산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봐서, 만져서 믿음이 생겨나는 경우는 성경에 없다고 봐요.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이야기하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을 안 믿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란 말이지요.
그 이유가 뭐냐, 요한 1서 2장을 봅시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하지요. 여기서 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좇아 온 사람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됩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 예수님 보고 ‘아, 그리스도 맞네!’ 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로 좇아 왔다면 이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누구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예수님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리라고 믿어지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요한복음 8장과도 통해요. 8, 9장 다 통합니다. 그래야 요한복음과 요한 1서가 다 통하고 일관성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을 돋보기를 가지고 보면 그 안에 하나님 보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나님은 보이는 분입니까, 안 보이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못 보는 분이잖아요. 보면 죽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해요. 아하, 이게 지금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겠어요?
자, 지금 제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저를 보니까 하나님 보입니까?
좀 더 논리를 깊게 들어가 봅시다. 오늘 이왕 어렵게 한 것,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누구를 알아볼 때에, ‘전용렬 목사님이 오셨습니다.’라고 하면, 전용렬 목사님이 누구더라. 전에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면 ‘이분입니다.’ 라고 해도 모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안다는 조건 하에 ‘아, 언제 한 번 봤지요? 안산에서.’ 이렇게 되면 이미 봤던 그것 때문에 그걸 대조해서 볼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이미 본 사람 같으면, 예수님을 보면서 ‘아이구, 하나님, 예수님이 오셨네.’ 이렇게 되는데, 어느 놈이고 하나님 본 놈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안 봤잖아요. 아무도 안 봤는데 예수님께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예요. 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렇게 나오니까, 나를 통해 누구를 보라고? 아버지를 보라고 하니까 ‘그러면 당신은 누군데요?’ ‘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어! 나는 창세전부터 함께 있었어.’ ‘실례지만,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증인 두 사람 갖고 있어. 내가 증언했고, 아버지가 증언하고’ 바리새인들이 이 소리 듣고 환장 합니다. ‘당장 구속시켜’ 이렇게 됩니다.
말이 안 통하지요.
방금 제가 말이 안 통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세상 말만 통합니다. 이게 어디 나오는가 하면 요한 1서 4장 4-5절, 지난 번에 봤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지금 사도 요한이 이 이야기를 왜 확신을 가지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편은 여기 여기 모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 누구야, 우리 같이 모이자.’는 겁니다. 그 모이는 방식이 전체를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고,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데, 확인작업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어디에는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마귀고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날 때 최초로 하나님이 나타난 거예요. 그 외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몰고 올 때 최초로 나타났고, 그 이외에는 하나님은 세상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들면서 살아왔어요. 그동안 신을 만들면서. 그 충돌이 십자가라는 충돌 아닙니까.
방금 우리가 이렇게 들었지만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을 이겼다.’ 우리가 항상 의식해야 하는 것이 뭐냐, 세상 전체는 하나님이 없고 거짓만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거짓된 세상 속에 침투한 거예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침투했습니다.
침투할 때 남긴 것이 요한 1서에는 세 가지라고 했는데, 5장 6, 7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과만 함께 있다. 딴 데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가 예수님의 행적, 일대기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누구에게 세례 받았어요? 세례 요한에게 물로서 세례를 받았지요. 그 때 물로써 증명했잖아요. 왜? 성령이 내려왔으니까. 두 번째는 뭡니까? 피죠. 물과 피 또는 성령이죠. 이 중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몇 가지에요? 앞에 것 두 가지죠. 물과 피.
세상에 어느 하나님이 물과 피로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있습니까?
자, 만약에 성경에 ‘물로 뒤집어쓰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이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천당 가려고 다 물 뒤집어 쓸 겁니다. 물 뒤집어 쓴 사람이 한 두 명이라야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세례 받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자, 그 다음에 뭡니까? 피. 십자가 피를 흘리면 메시야다 할 때, 필리핀 천주교에서는 고난절 행사에서 헌금을 해서 노숙자에게 가요. 노숙자들이 평소에는 성당에 다니지 않다가 고난절 행사 연극을 위해 뽑혀서 십자가 들고 가면 돈 줍니다. 이것 증인이 있어요. 우리교회 서00 장로님. 필리핀에 오래 사셨으니까.
멋진 아르바이트죠. 십자가를 메고 가면 천주교에서는 그것을 보고 감동 받으니까. 이 일을 보통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하니까 노숙자에게 돈 주고 시키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예요? 성령이죠. 성령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성령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알지요.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앞에 있는 것, 뭘 증거 합니까? 물과 피만을 증거 하겠지요. 물과 피만을 증거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야 맞다고 성령이 와야 증거 되지요. 세 번째 증거가 첫 번째 두 번째 증거를 그리스도와 접목시키는 일을 하지요. 그래서 성경께서는 피 중심으로만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피, 사도 베드로도 피, 사도 요한도 피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피만 증거 한다는 것은 소위 믿는 자도 그 피 속에 풍덩 뛰어들면서 자기는 이미 죽었다고 외치면서 뛰어 들어야죠. 그러니까 성도, 성도해도 남는 것은 피 밖에 없는 거예요.
피를 증거하기 위한 성경의 명령법들 서술법들 그리고 사도 요한이나 바울의 편지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쏠리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라는 지혜. 어리석어보이는 그 십자가.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피의 언약. ‘어찌 아들의 언약의 피를 네가 모독하느냐’(히10:29), 베드로 같은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위하여 택하심을 얻었다’(벧전1:2), 모든 것이 피로 되고, 십자가의 원수는 바로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원수가 드러나지요.
지금까지 이해되십니까? 이해 안 되도 된다고 하세요.
자,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있다. 이것까지 나왔지요? 그러니까 요한 1서 2장 22절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되어 있지요. 아버지와 아들을 따로 따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야, 이건 정말 어렵다. 이건 구약 전체를 파악하셔야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제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바꿔봅시다. 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는 거죠. 하나님과 그리스도 이 관계는 아시죠? 그리스도는 반드시 와야 되죠. 왜? 아버지 하나님의 뜻, 모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자, 이것을 그대로 옮겨와서 ‘아버지와 아들’로 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일하지요. 왜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가지요. 그러면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 것 같은데, 다시 합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이 관계는 있어야 됩니다. 왜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몸을 준다고 하니까 그리스도가 와야 되지요. 이건 이해하시죠?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랬잖아요. ‘오, 우리의 하나님!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다윗에게 성전을 허락하신 하나님 ---’ 전부 다 믿잖아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전부 다 하나님과 메시야 이 정도는 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를 확증해 보니까 그전까지 알았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로서만 하나님으로 고정되고, 나머지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을 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걸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 요한 1서 2장 22절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는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 따로 믿고, 또 예수님까지 더불어 믿어서 여기에 성령까지 알아서 세분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 오해인지 여러분 설명하시겠습니까?
내가 알 수 있는 하나님, 내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것은 마귀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였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가 뭐냐? ‘나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었던 사람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내가 구약을 보면서 기껏해야 하나님 계시고 메시야 보내신다 이정도 밖에 몰랐던 사람인데 이런 것도 다 엉터리였습니다.’ 라고 자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짜 천국 갈 백성입니다.
백부장 있지요?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겠다는. 소위 하나님 말씀에 정통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는 사기꾼이고 이단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말하는 이론을 가지고 백부장속에는 무엇이 들어왔기에 ‘주여,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세상에, 어떤 이런 놀라운 믿음이.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율법에 근거해서 예수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하늘나라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물론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아는 상태에서 예수를 하나님이 주신 메시야라고 알았지요. 하나님은 맞는데 메시야를 몰라서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내가 본 분이 메시야라고 이렇게 알았는데, 지가 아는 하나님마저 이게 엉터리라는 것을 나중에 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네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 이것도 모르느냐?’ 뭘 모르느냐,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걸 몰랐어요.
아들이 왜 죽어야 됩니까? 니고데모가 소속된 어두움, 예수님을 칼라 찔러 죽이는 것같이 죽였기에,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때에 니고데모가 속한 세상의 본질이 노출되는 겁니다. 마치 놋뱀을 봐야 될 사람이 그냥 놋뱀을 보는 것이 아니고 물리고 난 후 보지요. 진짜 뱀에게 호되게 물릴 때, 나는 물릴 만 합니다. 물려도 마땅합니다. 라는 입장에서 놋뱀을 쳐다봐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백날 쳐다봐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그 한 마디로 끝나는 것 아닙니까. 우리보고 병들었데요. ‘저는 병 안 들었는데요.’ ‘진짜 병들었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나는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너희들이 일괄적으로 나를 죽였다. 그래놓고 뭐 나는 구원 받을 만 하다고. 죽인 놈이 구원받을 만 합니까? 왜 죽입니까? 내가 아는 하나님과 메시야의 공식에 안 맞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하나님은 맞는데 메시야가 틀리다는 거예요. 그 메시야는 구름타고 와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구름타고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메시야냐’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좀 있다 갈게.’ 하시니까, ‘예라 죽어라.’ ‘좀 있다 갈게, 나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그들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게, 좀 있다 구름타고 오지 마시고 지금 그냥 오셔도 되는데 왜 지금 구름타고 안 오느냔 말이지요. 그것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몰라요. 하나님은 누구만 알아요? 아들 되시는 예수님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누가 증거 합니까? 물, 피 아니에요. 세 번째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물과 피를 가지고 그 분이 그 물과 그 피가 보통 흔한 물과 피가 아니라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하나님을 몰랐음을 까발리는 물과 피, 우리가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그런 증거로써 물과 피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물과 피로 증거 되지요.
그러면 사람이 성경을 볼 때 뭘로 보아야 됩니까? 물과 피로 봐야지요. 성경 어디를 봐도 십자가가 보여야 되고.
십자가가 보이게 되면 목사가 설교할 때 어떻게 합니까? 어느 구절이라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못 지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대로 오셨고, 이 말씀이 그래도 성취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해요.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몰라서 그래요.
‘모든 말씀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고, 다 이루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요.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말씀 같으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이 말씀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 말씀을 안 지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목사님, 목사님은 말씀 지켜서 그런 말 하는 모양인데 목사님은 그러면 24시간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게 산다는 말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훌륭한 삶을 삽니까? 그 비결 좀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화내면서 ‘네가 나를 능멸하려고 하는구나.’ 라고 나오지요. 그러면 ‘아, 이 목사는 지옥 갈 사람이구나.’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을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십자가 피 찍어 바르면 이것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래서 ‘값싼 은혜’라는 말도 나오고 그러지요.
사도 바울은 진짜 신자 맞습니다. 누가 증거 한다고요? 마귀가 증거 해요. 세상에 마귀가 이걸 증거 해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사도 바울이 수많은 명령법과 권면의 말씀을 했는데, 누군들 이런 소리 안 하겠습니까? ‘사도님은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지킵니까?’ 누구나 이런 소리를 하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 한다.’ 죄가 넘친다는 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담이 왕노릇 했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노릇한 거기에 우리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님의 의가 나서서 죄가 넘치는 곳에 죄를 다시는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넘치지요. 다른 말로하면 용서가 넘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한 마디로 할 수 있는데, 모든 거룩한 말씀이 은혜로 다 담겨 있습니다. 은혜로 있다가 우리의 육적인 곳에서 죄가 넘치게 나오지요.
죄가 넘치게 나오는데 그래서 우리가 마음껏 죄 짓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죄악 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왔을 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율법과 상관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성경에 있는 ‘탐내지 말라’는 것은 매직으로 지워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율법에서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을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이제는 내가 상관 안 해도 될 것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가 지켰으면 그 말이 맞아요.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그것을 가지고 오는데 어쩔거야.
‘탐내지 말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그 말씀 가지고 들이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늘 죽이는 방식이 자신이 남긴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죽이는 방식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우리도 모르는 우리 속에 어떤 식으로 촉수를 가지고 반응을 나타내는가 그 반응을 들키게 만들어요. 들키게 만드는데, 한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어요. 물론 자기 의지가 아니겠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해 놓고 그 다음에 부도났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분명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 했는데 부도난 시점에서 회상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부도가 났을까?’ 인과관계에 들어가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해되십니까?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서 신경이 좀 쓰이는데.
원래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없는데 인간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지난 번에 나쁜 짓 했는가 조사를 해보니 나쁜 짓은커녕 착한 일을 했어요. 착한 일 했는데 갑자기 부도가 났으니까 주체가 살아있으니까 생각이 나잖아요. 항의와 반발이 생기지요. 그러면서도 들은풍월이 있어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도 하지요.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감사가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해요. 얼굴에는 감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제가 목사님께 신신당부합니다. 제발 목사님들 설교할 때 혼자만이라도 복음에 감사하는 얼굴을 하고 강단에 서라고 합니다. 혼자라도. 교인들이야 지금 장사가 안 되서 얼굴을 찌푸리고 오든 말든 간에. 목사 본인만이라도 ‘여러분, 너무 좋은 것 있거든요.’ 하고 즐거움으로 설교해야 하는데, 목사가 시큰둥하게 있다는 것은, 이번에 설교 잘 해서 헌금 다발로 받아 내겠다는 심보가 있는 거예요.
감사할 만 해야 감사하겠다는 그런 심보가 있기 때문에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짜증이 나오는 거예요. 짜증이 나오면서 바로 등장하는 것이 뭐냐?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돈 내라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보이지 않는 소리. 돈, 돈, 돈 --
이건 정말 적나라한 이야기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대로 안 살았기에 이런 어려움을 당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복 받습니다.’ 이것이 전부 다 뭐냐, ‘당신들 돈 내기 전까지는 나는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다.’ 그 고백입니다.
목사 본인은 헌금 적다고 감사 안 하고, 교인들보고는 감사하라고 하고. 이럴 때는 물으세요. 목사 붙들고. ‘목사님, 목사님은 돈 없어도 어떻게 감사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보세요. 아마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저는 목사인데, 돈 없어도 주님 계시면 감사합니다.’ ‘그러면 헌금 안 해도 감사하겠지요?’ 그 다음은 할 말이 없겠지요.
그것 때문에 제가 이런 글 썼잖아요. 십자가마을에. ‘말씀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하더냐?’ 찔리지 않던가요? 말씀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하던가요? 감사해 보세요. 말씀 지키게 된 것을 감사하지.
사도 바울의 경우에 ‘내가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에요. 내가 온 말씀을 다 지켜 말씀에 흠이 없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전파한 후에 나도 버림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다시 말해서 내가 지켰다고 자부할까 두렵단 말입니다. 왜? 자기가 모든 것을 지켜서 의인된 것이 아니니까. 끝까지 십자가 의만 바라보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뭐냐 하면, 나를 죄인 중에 괴수되게 만드는 주님의 작업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주와 함께 있고 주가 내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그 은혜가 팍팍 나오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나이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다 다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네가 보기에는 죄인처럼 보이지만 주께서 같이 역사한다면 형제기 때문에 형제를 네가 시험 들게 하지 말라.’ 이게 뭐냐,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다른 것을 어떻게 다 일괄적으로 할 수 없지만 단지 중요한 것은 항상 은혜가 나오고, 은혜가 나오면 더불어서 감사와 기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공식으로 표현했잖아요. ‘자기 죄를 아는 순간 제일 행복하다’고. 너무 기쁘고 풀쩍되어 천장으로 날아갈 것 같아요. 자기 죄를 알게 되면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순간이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2.5초 지만.
자기 죄를 아는 순간 모든 무거운 짐이 다 벗어지고, 진짜 그 순간에 주를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 순간이 짧게 지나가지만.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죄인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 뭐가 아쉬우냔 말이지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려운 것 다시 해 볼게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다는 말은, 우리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제 할 일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음을 증거하는 일’만 하면 되지요. 거기에 대해서 누가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게 요한 1서 2장 끝에 나옵니다.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성령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몰랐는데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되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모든 것을 자기가 느낀 대로 다 드러내지요. 따라서 목사가 가르칠 필요 없지요. 목사는 자기 인생이 따로 있고 거기에 따라 다루기 때문에 그리로 가요 되고, 나는 나의 길이 있는데, 다만 나오는 것은 동일하게 주 안에 있을 때는 이러 이러한 것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그것이 요한 1서 1장 2장 쭉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 죄 없다 하면 주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아까 했지요. ‘정죄함이 없다면 정죄함이 없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다.’ 자기는 항상 정죄함을 받을 만 했다 함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어둠이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갔는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되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 뒷부분에 더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사랑이 나오는데, 그 사랑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결국은 다 사랑으로 나와야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이다. 사랑으로 나온다는 말은 어떤 일을 당해도 심판받을까 무서워하거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런 식으나 나온다 이 말입니다. 사랑이 들어가면 사랑만 나오게 되어 있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만 나온다는 논리가 그 뒤에 전개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깊은 야심한 밤이지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 이런 저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과연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평소에 감사했고 좋아들 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세상을 이긴 분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의 신분과 운명과 미래가 확증되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정죄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알릴 수 있는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6. 10. 31. 14:0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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