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울(의존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서론 1-1
Re..서울(의존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서론 1-1
이름 : 이장우(IP:)
서울(의존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서론 1-1
04. 9. 20 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 조직신학의 서론부분을 하겠습니다. 조직신학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서 예수님이 조직신학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적도 없고, 조직신학 만들어야 구원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기도 전에 인간들은 자기들이 먼저 조직신학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들어 놓고서 그 만들어 놓은 틀에서 인간이 납득이 되도록 구원을 해 내라고 억지를 부리는 식으로 조직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할만한 조직신학을 하나님이 제공해야 하나님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하나님이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그것을 나무라겠습니까? 호응을 하겠습니까?
이런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우면서도 이것을 제대로 알면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갚지 않는다는 이것이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배후에 있는 악마와 상대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갚을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놔둬버립니다. 왜 놔둬버리는가 하면 사실 하나님이 노리는 악마를 들추어내는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투캅스라는 영화를 보면 조폭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쫄따구 까부는 것을 경찰이 놔둬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송사리를 잡으면 안 되고 그 배후에 있는 건더기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이 조직신학을 만들어가지고 신이시여! 우리가 납득할 만한 그런 신이 되소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겠나이다. 이렇게 하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더 지키지 왜? 더 철저하게 해보라! 365가지 그것 가지고 되겠어? 더 해봐!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송사리이기 때문입니다. 배후의 정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총 정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험치기 전에 총 정리하는 것처럼 총 정리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사물로 표현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식으로 표현을 하니 마치 그것을 실제로 그런 사건이 터져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해석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합니다만 묵시와 역사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역사란 눈에 보이는 사건의 뭉치입니다. 사건덩어리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총 정리하는 책이다. 무엇을 정리하는 책인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역사와 그 역사를 조종하였던 그 배후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묵시이지요! 묵시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신학에서는 자주 씁니다. 묵시가 역사를 조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묵시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능력입니까? 아닙니까? 능력이 아닙니다. 능력이 아니라 묵시에 의하여 조종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무엇입니까? 묵시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사건들의 집합 뭉치!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못하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사건이 마치 구원의 능력인양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건이 마치 구원의 능력인양 곡해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사건이 되는데 마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는 사건이 구원의 능력인양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666표 받지 말라고 하니 그것을 안 받으면 마치 구원되는 양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건을 모방하면 그것이 구원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보고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면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묵시적인 능력 때문에 그런데 마치 에베소교회처럼 되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면 구원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자고 설교를 합니다. 모방이지요! 모방!
제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서 서론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계시론 입니다. 계시론 에서 제일먼저 한 이야기는 모방과 본질을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서 주신 계시를 사람들은 그것을 모방해서 자기가 구원받는 계시인양 소유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고 하면 자꾸 교회 와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왜? 그것을 모방하면 자신도 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암이 걸린 것은 역사입니다. 역사는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며 만들어진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병이 나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건은 왜 터졌는가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성경적으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거룩한 전쟁의 여파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파가 퍼지듯이 거룩한 전쟁의 여파, 또는 연못 속에 돌멩이를 던지면 퐁당하고 물결파가 일어나듯이 연못 중앙에 돌을 던졌는데도 연못가에 있는 사람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시면 내가 어려웠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다는 말씀을 누구에게 합니까? 마지막 심판 때에 염소 쪽이 아니라 양에 해당되는 쪽에 말씀하십니다. 그 대목의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도와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마귀와의 거룩한 전쟁의 여파가 인천에 사는 가만히 있는 나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뭉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옥에 갇히고 목마르고 고난 받는 것임을 파악하게 되면 바로 그 여파에 따라서, 결국은 여파를 일으킨 주인공과의 연관성에 의하여 이 사람은 양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옥에 갇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 옥에 갇히겠습니다. 이것은 구원 못 받습니다. 갇힐 때는 갇히겠지요! 무엇 때문에 거룩한 전쟁 때문에!
사도바울이 주기도문을 못 외웁니까? 잘 알고 잘 외워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고프고 굶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줄 아는 분이지만 실제로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여파입니까? 자신이 기도 안 해서 나온 여파입니까?
교인들이 제일 답답한 것은 세상에서 무언가 일이 잘못되면 기도가 부족하고 성경공부를 안하고 예배에 참석을 안 해서 되었다는 식으로 자기 쪽에서 원인을 찾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벌 받기 싫어서 먼저 자기에게 매를 때리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가 다 그런 것입니다. 네가 행동을 잘하게 되면 그 잘한 행동에 따라 구원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뿌리는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은 언약에 의하여 그 사람의 행동이 조종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마음 편한 이야기입니까?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 아주 마음 편한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내 잘잘못에 의하여 앞으로의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할지라도 언약에 의하여 구원될 자라면 구원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뿌리는 언약에 있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고 믿음이 없으니까 무엇으로 바꿉니까? 그 행위의 주체를 언약에 두지 않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믿습니다! 허하면 믿습니다! 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애들 선교단체에서 큐티하면서 많이 하는 것이 있지요! 로마서 10장의 말씀, 내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주를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 그것을 그대로 해 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도 자기 동생이 안 믿으니까! 동생을 보고 칼을 쥐고서 흉내라도 내게 해서 형의 의무와 책임인 전도를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의 주체자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집어넣으면 유대교가 됩니다. 집어넣으면 유대교가 되고 빠져버리면 복음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것을 뺄 줄 모르는가 하면 묵시를 모르고 역사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본인이 아닙니까! 밥 지을 때에 가만히 있으면 밥이 지어집니까? 가만히 있으면 공부하게 해 줍니까? 피아노 내가 가만히 있는데 치집니까? 내가 손가락으로 뚱땅거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 사람들은 이런 경험과 체험을 모아 모아서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는가 하면 자신의 가치관 우주관 종교관들이 다 거기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를 움직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 너무나 진리이고 더 이상 말할 것 없이 확정된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을 시켜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주지요! 못할 것은 안 줍니다. 할 수 있는 것만 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를 모방하면 구원됩니까? 안 됩니다. 뿌리가 묵시적인 인물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아 거기에 두어야 하는데 자꾸 자기 행위에 뿌리를 두니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것도 행함입니다. 예수를 내가 믿으니 자기 행함이 들어가잖아요!
교회의 문제도 그렇잖아요! 누가 무슨 말을 했다! 그러나 누가 무슨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배후에 여파가 있는 것입니다. 묵시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죄가 있는데 그 죄라는 것이 잘 안 들킵니다. 언제 들키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올 때는 그 말씀에 의하여 발단이 되어 그것이 자기 의라는 모습으로 바깥에 토하여 내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면, 평소에 도적질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단번에 무엇으로 나옵니까? 나 지금까지 도적질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자기 의가 죄의 모습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속으로 하나님의 영광 거룩 이야기 하지만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을 순종했습니다. 또는 바빠서 순종 못했습니다. 하는 식으로 행위 주체자를 자기로 귀환해 버리는 것입니다.
실컷 예수 믿는다고 해 놓고서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의 책임자를 좋으면 좋은 대로 자기에게 돌리고 나쁘면 변명으로 돌리는 식으로 자기의본 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는 자기 의를 포기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파를 보내서 구원한다는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만들어서 구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능력 같으면 사람 만들어서 구원합니다. 사람의 인품을 변화시켜서 구원합니다. 그러나 묵시적인 능력으로 구원하시면 인간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인간 그 자체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를 그 자리에서 안 죽이고 그저 기적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사회봉사 120일하고 또 전도 몇 명 하게 해서 낙원에 가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그 자체를 낙원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행위가 배제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묵시적 능력과 역사적 능력을 혼동해서 그렇습니다. 묵시적 능력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 약속에 의하여 나온 것이기에 약속의 뿌리가 언약이니 그 언약이라는 뿌리에 근거해서 우리는 구원하는 능력이지 우리가 잘하느냐 못하느냐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그것보고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가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막지요! 그것이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놀라우신 주의 은총입니다. 찬송가 405장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소극적 의미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저항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연못가의 아이가 파도치는 것을 보고 파도야 내가 너를 반기지 않으면 나에게 못 와! 이렇게 우기지를 못합니다. 파도치면 치는 데로 발목을 적시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조직신학의 책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폭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는 폭설을 누가 막습니까? 내 머리 어깨에 온 몸에 뒤덮이는 하늘의 폭설을 무슨 수로 막습니까? 폭설아 그만 와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비가 오는데 이 비가 우리에게 유익이냐! 무익이냐를 따져서 옵니까? 비는 그냥 옵니다.
은혜는 여파에 의하여 오는 것이지 우리가 오라고 요청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우리가 달음박질 한다고 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속성의 여파에 의하여 속성이란 지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이라는 지진에 의하여 그 여파가 미친 사람은 구원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진노이지요! 진노의 여파가 미친 사람은 지옥 가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달음박질 한다고 부르짖는다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가 이런 소리하니 그러면 미쳤다고 기도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묻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효과 볼 줄 알았습니까? 기도하고 안하고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제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덴동산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우리가 만들었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죠!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에덴동산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누림을 받는 존재이지 자기가 스스로 살림을 꾸려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은 것은 네가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쪽 구석이 아니라 동산 중앙에 잘 보이는 곳에 심어놓고 너는 시키는 대로 누리기만 하면 되지 네가 건방떨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는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있으면 악마입니다. 그러니 없는 권한을 만들어 준 놈이 누구입니까? 그것이 뱀 아닙니까! 악마입니다.
그래서 일이 터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악마의 권한에 속하였기에, 기껏 한다는 것이 그래도 착한 일을 하고 그래도 믿잖아요! 하면서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기초로 해서 무언가 자기 의를 자꾸 끄집어내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아까 폭설 이야기 하였지요! 저항 할 수 없이 폭설을 그냥 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폭설같이 오는 것입니다.
이런 폭설 이야기, 저항할 수 없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그것을 은혜라고 아는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그것을 은혜로 아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독합니까? 이 지독한 것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마귀가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전세 값도 없이 사글세도 없이 그냥 내가 선악과 안 따먹는 조건으로 살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식의 자기 공로를 집어넣어서 에덴동산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꾸만 우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돌림병입니다. 전염병입니다. 장금이가 필요합니다. 전염병을 치료할 의사가 필요합니다. 애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 병이 들린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염병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것은 교회와도 마찬가지이고 집에 가도 마찬가지이고 목사에게 설교 들어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전부 다 어느 누가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욕을 하면 그것도 은혜인데 뭐! 이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상처 입었다고 합니다. 무슨 상처를 입어요! 죽은 시체를 보고 무엇이라고 한다고 해서 반응을 하면 그것이 죽은 시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어들 때에 이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기대치가 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여파가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것을 일률적으로 정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꾸 이상적인 역사뭉치, 예를 들어 심플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건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모방은 능력이 아니라 악마의 습관입니다. 이상적인교회가 안 되어도 구원되잖아요! 묵시적인 능력에 의하여!
이상적인 가정이 되고 싶다, 이상적인 가정이 되어서 무엇에 써 먹으려고,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것이 전부다 무엇입니까? 은혜가 아니고 나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기주장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묵시적인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에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함으로 그것이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이런 사고방식은 마귀가 심어주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가지고 안 됩니다. 묵시를 믿어야지! 역사적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는다면 그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그 사랑하는 것이 몇 년을 갑니까?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몇 년 갑니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인데! 심지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사람인데 도대체 사람의 어느 때를 믿을 수가 있습니까? 20살 때 다르고 2살 때에 다른데 도대체 그 사람의 어느 때를 그 사람의 본질로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흐르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것을 잡아 놓고 구원을 얻었다 아니다 라고 확정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묵시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자기 맹세, 맹세라는 것은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한 것이기에 이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숙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그러니 그 숙제를 우리가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자기 숙제를 하다 보니 그 결과물로 우리가 구원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예수님의 소유로 간주해야지!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구원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여전히 자기를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기에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묵시 이야기할 때에 이야기 할 것이 무지무지 하게 많은데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모자랍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이냐? 모든 것을 총 정리 하는 책이다. 어떻게 정리하는가? 요한 계시록은 두 가지가 섞여있다. 무엇과 무엇인가? 묵시적 이야기와 역사적 이야기가 섞여있다.
왜 이렇게 섞여 있어야 정리가 되는가? 사람들은 역사에 속았다. 요한 계시록에 와보니 역사라는 것은 하나의 흔적이고 하나의 사건의 뭉치이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 그 사건 하나 붙든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에서 결정이 되는가? 요한계시록은 묵시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여파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구원자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면 악마는? 악마도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양쪽 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역사의 형식을 빌어서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한 낱말 한 낱말을 해석할 때에 반드시 역사를 통하여 묵시에 도착하여야 딩동댕 정답이 됩니다. 묵시적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 아예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을 여지를 만들면 안 됩니다.
야! 마지막 때에 이렇게 환란이 많구나! 견디자! 이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믿으면 되지 견디기는 무엇을 견딥니까? 그러면 못 견디면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으라는 이 말입니다. 그런 말이지 견디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기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겨야할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묵시적인 이 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행함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이 문제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쉬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산상설교하고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하늘나라고 가셨습니까? 물위로 걸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만 손 털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슨 사건을 마무리 하셨을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산상수훈에 멈추면 안 됩니다. 오병이어에 멈추면 안 됩니다. 문둥병자 고친 것에 멈추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중간과정에 불과하기에 그곳에서 멈추어 버리면 정답을 제대로 모르고 정답이 포함되지 않은 채 다른 예수를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저 이용가치 있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 헌금을 하는데 과부의 두 렙돈이 귀하다는 말씀을 보고 동전 두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본이 귀하다고 하였으니 동전 두개도 귀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습니다. 동전 두 렙돈의 이야기는 중간 지점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을 보아야 할 것을 십자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헌금하려니 돈은 아깝고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어서 있는 돈까지 다 까먹게 되면 안 되기에 헌금은 해야 하겠고, 성도는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나도 말씀대로 한번 해보자.
우리 목사님이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해서 살라고 했으니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보자! 그래서 말씀을 보는데 어! 동전 두개 하여도 부자의 많은 것보다 더 하였다고 하니 이거다 하면서 동전 두개 하고 자기 정당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만약에 거치고 과부의 동전 두개를 이야기 하였다면, 인간이 어떤 헌금을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또 중간 지점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의 자식이 간질병이 있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낫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떻게 귀신이 쫓겨나고 이렇게 낫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기도와 금식으로 내 아들 낫게 하겠다는 것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한번 거쳐서 오게 되면 자기 아들의 간질병을 낫게 하여 달라는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욕심이고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게 되면 십자가에 가까지 가게 될수록 십자가 비슷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오병이어 하다가 다음에는 오병이어가 없습니다. 다음부터 양식문제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점점가까이가면 덩달아 그동안 많이 추종하던 사람들도 중간에 다 떨어집니다. 결국 제자들마저 다 떨어지고 달랑 예수님 혼자 올라갑니다.
물위를 걸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 저 사람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님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 더럽겠지요! 그 더러운 기분을 예수님이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직전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자기 목숨 바쳐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귀이야기 하셨습니다. 너 모르지? 뭔데요? 사실 마귀가 너를 지옥에 끌고 가기 위하여 너는 내 것이야 하는 식으로 밀 까부르듯이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소리하고 네가 기도해서 지옥에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기에 네가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줄로 알라는 이 말입니다.
그것이 어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습니까? 여기에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면서 우리 중에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자기 잘나서 교회 나오고, 다 자기 잘나서 헌금하고, 다 자기 잘나서 목사 했지! 누가 그 은혜를 알았습니까!
거저 20살 때 전도 몇 명했고 30살 때 헌금 얼마 했고 목사 했고 이런 것들만 자랑했지 주의 언제를 언제 알았습니까? 내 사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다! 날마다 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오늘도 교회 왔으니 복 주겠지!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교회가 있어도 절간입니다. 이것은 사기집단입니다.
사기가 아닌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왜 복음이 사기가 아닌가 하면 복음의 뿌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언약대로 구원할 자를 구원하기에 사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왜 사기가 되는가 하면 사람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방가야 되지요! 위로해야 되지요! 다른 교회 나가는 사람 우리교회 오라고 붙잡아야 됩니다. 전부다 사기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언약을 이야기하여야 될 텐데 그것은 하지 않고 거저 내 교회 유지되기 위하여 사기를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런 위로와 사랑을 은근히 고대하면서 교회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는 사랑 안 해주는데 이 교회에서는 사랑해줄 것인가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흥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흥정해서 세운 교회가 없는데 한국에는 약 5만개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장래에 얼마나 잘될 것인가! 내년에는 경제가 풀릴 것인가! 자기 장래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역사에 대한 희망, 역사에 대한 소망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 자체가 이미 묵시에 의하여 불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흘러가고 내년에 봉급이 오르더라도 이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년되면 내년의 허무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2006년 되면 2006년의 허무가 있고 2008년 되면 2008년의 허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셋방살이 하다가 아파트 하나 마련하면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합니다. 아파트 하나 사 줘보세요! 죽어도 소원이 없는가! 앉아서 벽지 색깔 때문에 허무를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환상에 속습니다. 매일같이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에 낙심하며 잠자리에 들고 그 다음에는 또 되지도 않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또 환상을 만들고 그것이 안 된다고 신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사실 적개심은 누구에게 가져야 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가 아니라 내가 싫어요! 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십자가를 거쳐서 가게 되면, 마태복음 23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아비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천주교에서 신부를 아비라 그러지요!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자기를 아비라 지도자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비가 누가 있으며 지도자가 누가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도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목사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목사가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리더십 강좌나 열고 있는 그들에게 리더가 되어야 속이 풀리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 지도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고 아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밖에 없다는 이것은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역사밖에 모르고 묵시는 영적인 내막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알았다면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속 십자가 이야기해서 제자들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과해야 다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뒤에 무엇이 나옵니까? 부활이 나옵니다. 부활은 묵시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 역사에서 묵시로 점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와 보라고 그러십시오! 나사로? 살아났다가 다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딸, 베드로의 장모, 죽었다가 살아나든지 병이 나았든지 간에 역사속의 인물입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뛸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뛴다는 말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다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나를 믿고 부활하는 이 말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장대높이뛰기 신기록을 세운 여자가 기록이 4미터입니까? 야~ 새처럼 날았어요! 붕 날았습니다. 그러나 뛰어보았자 내려오잖아요! 왜 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네 영혼 오늘밤에 도로 찾아가면 그것은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교회가고 장로 되고 목사 되어도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나마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가 되던 무엇이 되던 간에 죽는다는 사실만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다 안 것입니다. 내가 역사적 인물로 태어나서 결국 역사적인 무게, 죄의 무게의 의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한 설교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디에 심방을 가면서 우연히 장로님 차를 가면서 보니 대구 어느 은행 지점 앞에 한 여성이 서 있는데 제가 보기에 한 30대로 보였습니다. 딱 중간쯤이죠! 그 여성이 만약 할머니라면 얼굴이 어떻게 될까요? 할머니가 되겠지요! 그러면 할머니가 되어 서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더 지나서 해골이 되어 있다면 해골로 서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30년전 에는 어린애로 기어 다녔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2.5초 정도의 시간으로 필름을 빨리 돌려봅시다. 그러면 아이가 긴다. 아장아장 걷는다. 유치원이다 하는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결국은 해골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성이 무엇 때문에 거기에 서 있었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살았습니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태어났다! 죽었다! 사는 이유가 뭐예요?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유가 없잖아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다 보여주시는 것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네 실상을 십자가에 다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해골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역사 속에 태어나서 역사와 함께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태어나서 역사 속에서 어떤 직종에 있든지, 목사가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간에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 속에 가두어 졌습니다. 죄 속에 가두어 졌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 3장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심판아래 있다는 저주 아래 두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살아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어떤 사람도 부활이 못 됩니다. 부활이 못 되는데 부활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자리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께서 죽을 사람도 그 사람의 속에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절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하여 사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닙니다. 성령을 누가 보내주느냐? 하는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이 산 자냐 죽은 자냐하는 것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도대체 무엇을 증거 해야 합니까? 열심히 사세요! 착하게 사세요! 그런 것이 왜 증거 되어야 합니까? 산상설교 보았지요! 남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비판하지 맙시다. 그것을 왜 증거 해야 합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비판하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는 틈만 나면 간음하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인간도 달성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것을 24시간 다 지킬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은 성경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정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공자나 맹자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 때 그렇게 배웠지요! 성경말씀을 주면 안 준 사람보다 괜찮은 인간이 되어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지고 성화되어 천당 간다는 이따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제가 교회오기 전까지는 이것은 죄이지만, 이것은 설마 어느 놈이 감히 죄라고 해! 이것은 너무나 착한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성경 말씀을 딱 보니 이것도 죄고 이것도 죄 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구 지방의 서문시장에 있는 사람이 동대문 시장에 물건을 하러 간다고 합시다. 주에 제가 이렇게 돈을 벌어서 십일조도 하고 선교헌금도 하려고 하니 이것을 착한 일이지요! 그죠! 하면서 자기는 착한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아 바로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제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느냐? 너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네가 무엇인데 장담할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인데 내일 어디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내일 일을 알기는 아느냐는 것입니다. 내일은 누구 소관입니까? 내일이 왜 인간의 소관이 아닌 줄 아십니까?
아까 이야기 하였는데 내일은 누구 소관입니까? 그것은 묵시세계에서 만들어 주어야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가 되고 안 되고의 사건은 은혜로서 묵시적으로 주어야 되는 사건인데 그런데 건방지게 묵시도 모르면서 현재의 역사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가 내일의 역사를 이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안개인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안개가 무엇입니까? 안개란 있는 듯하지만 없어지는 것입니다. 잠시 흔적만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이 안개입니다. 이것이 안개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첫 시간 하면서 제일먼저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인간이란 묵시적인 거룩한 전쟁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야 함을 에덴동산과 함께 세트가 되어가지고 보여주는 재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 먹으면 죽음,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하여 우리를 들추어내는 미끼로 사용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첫 시간을 쉬면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서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지독하게 자기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주위도 속이는 악마의 속임수라는 사실입니다. 내 결정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됩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 행한 것도 없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속성이고 우리는 그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5분간 쉽시다. 녹취 061030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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