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23 : 15-18 (두로의 회복)
Re..사 23 : 15-18 (두로의 회복)
이름 : 이근호(IP:)
두로의 회복
2006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이사야 23:15-18
(사 23: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을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칠십 년이 필한 후에 두로는 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사 23:16) 『잊어버린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
(사 23:17) 『칠십 년이 필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 그가 다시 취리하여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사 23:18)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향하여 일을 벌리시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데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은 우리의 가치를 대단히 고귀한 존재가 지탱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덕분에 대단히 쓸만한 인물이라고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있어 하나님을 믿는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노림수를 비켜 가십니다. 인간들이 예상한 그 방법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인간의 죄를 발굴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두로 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멸망하기 위한 멸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를 회복할 때 어떤 식으로 회복하시는가 하는 점을 보이기 위한 심판으로 다가오십니다.
두로 도시가 망하고 난 뒤에 왕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두로 도시를 통치하는 특정한 질서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왕의 임기에 해당되는 70년을 의미있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 70년은 그냥 방치된 기간이 아니라 창녀가 활발하게 매춘을 하던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기간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두로 지방에 경제적으로 흥청만청 쓸 수 정도로 돈이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곧 그 돈이 쾌락적인 것으로 흘려들어갈 여지가 많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감각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리는데 사용됩니다. 사람의 정신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은 자아를 강하게 의식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만약에 자아의 존재를 잊어버리면 고통과 근심도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아를 감각적으로 잃어버리는 쪽으로 돈을 쓰게 마련입니다.
사치품을 산다든지, 도박을 한다든지, 매춘을 한다든지, 술과 마약에 탐닉하므로서 자아를 잊고, 자아를 잊으면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괴로울 때면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연 찾게 마련입니다. 두로 지방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멸망당해서 온 도시가 황폐해져 버리게 되면, 사람들은 전에 잘 나가던 시절의 삶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 때의 화려함과 지금의 초라함이 극히 대조가 되면 될수록 마음의 참담함은 더해집니다. 이 기간이 바로 흔히 보통의 왕이 통치하게 되는 70년이라는 겁니다. 통치자가 없는 이 빈 자리를 창녀들이 돌아다니면서 고객들을 끌어모으던 그 때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현실의 참담함이 더욱 더 아리게 젖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70년이 지나면 창녀들은 본격적으로 매춘 영업에 나서게 됩니다. 이것은 곧 전에 두로 지방이 주위의 도시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면서 오로지 돈과 재물과 쾌락만 추구했던 그 때의 실상을 대변해주는 바가 됩니다. 그래서 벌어들린 돈들은 어디가 쓰일까요? 놀랍게도 여호와에게 제사지내는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여진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은 소위 착하고 거룩하고 훌륭한 인재들과 좋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곧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좋게 해석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훌륭하거 거룩한 하나님이시기에 훌륭하게 거룩된 인재들을 통해서 훌륭하게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이 진행된다고들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소위 더럽고 속물이라고 간주되는 자들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쓰여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훌륭하고 대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뜻을 들고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자신이 가치를 부지하고 포기 못하겠다고 우기는 그것을 되레 지적하고 정죄하는 방식으로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입니다.
매춘부들이 부르짖는 사랑이라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한 핑계로서 외치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흔히들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용어인 ‘사랑’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므로서 정작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겠다는 노림수를 깔고 사랑을 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노림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참으로 받으셨다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요구에도 감사해야합니다. 즉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즐거이 …”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꽁꽁 묶이고 매인 자입니다. 주님께서 다 하시고 우리는 그냥 관람이나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함께 하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일일이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그 쪽은 아니잖아. 그 쪽은 넓은 길로서 멸망으로 통해! 방향키 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창녀보다 더 못한 죄인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용하신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훌륭한 자질을 보시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능력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입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에 주님께서 털어내기 위한 사랑으로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