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어느 결혼식에서 실제 있었던 일
[일반] 어느 결혼식에서 실제 있었던 일
이름 : 이근호(IP:)
저의 사촌 동생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결혼이벤트 회사에다 모든 절차를 맡겨나 봅니다.
정면 오른편에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습니다. 높이가 1m 30cm 정도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시작 시간이 조금 남은 시점에
그런데 신부측 하객으로 온 손님 가운데 9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 그 커다란 케이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몹시 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기에 그 여자애가 아직 결혼식이 시작도 되지도 않았는데 그 케이크에 손가락에 꽂고서는 흰 크림을 푹 찍어 자기 압속으로 쏙 집어넣고서는 부리나케 뒷쪽 인파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랑측 하객인 우리 삼촌이 보고 말았습니다.
애를 단속을 제대로 안 한 것이지요.
그 애는, 그 케이크가 누구를 위한 케이크 인지 감은 잡지만 지금 그 애의 머리속에는 온통 그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느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먹고 싶은 본능을 감출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점심 때가 훨씬 지났으니까)
그러나 실은 그 거대란 케이크는 그날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위한 케이크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피조물일 뿐입니다.(골 1:16)
그런데 인간이 이성적으로 그것을 안다 할지라도, 죄된 본성상, 저주받아야 될 죄인이라는 신분은 망각하고 영생을 얻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거대한 케이크)를 자기의 구원을 위해 손가락으로 꽂어 찍어먹고서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소리치고 인파 속으로 숨어들어가면 그것이 곧 성도로서 얻을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즉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더 이상 십자가나 죄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케이크에 먼저 손을 댄 그 꼬마 여자애의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라면, 그 애를 인파 속에서 찾아내고 뒷퉁수를 후려치면서 "이 못된 계집애야, 이 케이크는 너를 위한 케이크가 아니라 신랑, 신부의 혼인을 위한 케이크야. 아무리 어린애이지만 어떻게 네 밖에 몰라. 누굴 닮아 이렇지"라고 분노의 호통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애는 영원히 그 케이크를 먹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 거대한 케이크가 누구를 위한 케이크인지 온 천하에 밝혀진 후에, 그 여자애를 불러서,
"얘야, 이 케이크 조각은 너의 배고픔이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세워져 있었던 것이 아니란다. 이 케이크는 신랑, 신부가 기쁘게 그냥 공짜로 은총을 베풀어서 그래서 먹게 되는 케이크란다"라고 설명하면서 그 여자애에게 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여자애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이 결혼식 장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화려함이나 풍성함이 아니었구나,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꼬마인 내가 아니라 따로 계시구나"라고 느끼면서 은총의 케이크 조각을 먹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나 영생을 주 실 때에도 , 뒤퉁수를 후려쳐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자기 구원'을 마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할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아담의 죄악된 품성 때문에 '자기 존재 사랑'이 우선이 됩니다.)
"이 나쁜 놈아, 이 피를 너를 구원하라고 흘린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만이 온 세계에 전파되라고 흘린 피이니라"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뒤퉁수를 맞은 성도는 그 어떤 상황이든지(심지어 굶어죽는 상황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 상황마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증거하라는 선물로 받은 인생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나 만의 구원'이라든지, '나 만의 영생'이라는 개념은 용납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의 모임이 '그리스도 몸'으로 형성됩니다.
서로 받은 케이크를 내보이면서 "이 모든 흰 크림의 케이크는 모두 우리의 죄를 위한 십자가 사건에서만 제공된 것이기에 '나는 이래서 얻어 맞았다', 혹은 '나는 저래서 얻어맞았다'를 나눈는 장소가 되며 그런 일은 성령에 의해서 생성되어지는 유기체적 교회입니다.
만약에 그 유기체적 교회를 '내 소유의 교회'로 의식하면 결과가 등장될까요?
이렇게 되면
'이제 먹을 것 먹었으니 인파 속으로 숨어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다'라는 못된 계집애의 재판이 되는 겁니다.
어느 누가 천국 못가고 지옥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고해서 천국 가는 자가 아니라 그런 구원의 욕심마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저 욕심에 일종임을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뿐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계속 정당화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한 잠시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했었던 적인 있지만 이제 더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챙길 것 챙겼다는 겁니다. 그것을 내 소유를 전환하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는 돈을 만들어내는 영업을 하는 '업소'가 되는 겁니다.
교회의 생성론은 이럴 때 필요합니다.
자신의 몸(그리스도 몸)을 그 누구의 소유로 하청해서 넘겨준 적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 진 적이 없고, (고전 1:13) 십자가 진 적이 없다는 말은 새언약의 표준적 모델 인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마다 생각하는 '나의 교회'를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교회 관리자나 책임자가 아니라 여전히 주님이 주신 십자가 용서만 붙들고 살 죄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눈 돌리게 되면, 자신의 고유 영역이 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적과 동지, 원수와 형제가 십자가 복음 앞에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줄래 안해줄래로 판정나게 됩니다.
즉 십자가 복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화제에서 벗어나, "글세 내가 내 소유의 교회를 가겠다는데 그런 자격이 있다는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분명히 말해"라는 식으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곧 "글세 내가 배고프고 사는게 고달파서 케이크를 내 소유로 삼아서 먹겠다는데 자격이 된다는 말이야 아니된다는 말이야 분명히 말해 봐"라고 식으로 억박지르는 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세울 기준을 잃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 안에서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체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