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10월 17일 강의 조지래드 [신약신학]-하나님 나라
부산 10월 17일 강의 조지래드 [신약신학]-하나님 나라
이름 : 이근호(IP:)
038 20061017 조지래드 [신약신학]-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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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64)
07-03-18 21:30
20061017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하나님 나라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나라, 이걸 신학교 때 배웠는데 꼭 배워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옛날에 공부했던 것, 세월이 가면서 잊어버려요. 잊어버리고 설교하면서 그때 정리되었는데 정리된 것과 이 구절하고 연관을 그때는 시켰는데 왜 순간순간 이게 안 떠오르지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설교할 그 대목만 집중했지, 평소에 기본 바탕을 계속해서 공부해 놓아야 순발력이거든요. 설교는 순발력입니다.
순발력이 위험하다해서 철학교수들은 그대로 강의할 때 한자 한자 그대로 하고, 세미나 같은데 참석해 보세요. 그냥 읽습니다. 세미나 보면 지루해서 못 봐요.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이 그냥 안 보고 하던데, 공부 많이 한 철학교수들이 눈도 안 맞춰줘요. 그냥 가져나온 것, 쓴 것 그대로 읽어요. 있는 사람도 그냥 보는 거예요. 전통이에요. 다들 그렇게 하고 누가 안 보고 하면, 그거는 선배가 후배보고 건방지다 어쨌다 소리하기 때문에 그대로 보고 하는 겁니다.
그대로 하는 신학교수들도 있어요. 외국에서 교육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에. 니가 건방지게 니가 뭐, 성령이 충만하다고 그렇게 하느냐? 보고 읽어라. 실수 적게 한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나 설교라 하는 것은 토요일 준비한 것, 그거 버리고 현장에서 새롭게 주는 것과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맞추어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이걸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반응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 대목 이야기해도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때는 내가 교인들에 대해서 지금 잘못된 선입관 가지고 말씀가지고 돌파한 거예요. 찝어 든 거예요.
교인들 생각이 딴 데 있는데 토요일 날 준비할 때 아마 이렇게 하면 반응 나타날 거라 예상했는데 예상대로 핀트가 안 맞아서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럴 때는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른 구석을 심어 봐야 돼요. 그러면 이게 약간의 매치가 될 때 그때 그 설교시간은 공통의 관심사로 돌아섭니다. 전하는 자나 설교하는 자나 받는 자가 공통의 관심사가 되지요.
공통의 관심사가 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하면, 예배 마치고 다음에 뭐 할 거다 하는 걸 잊어버려요. 거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몰입하게 되면 그 한 결과가 점심 먹을 때 그 주제가 계속 이어져요. 점심 먹을 때 딴 세상이야기 안 하고 정치 이야기 안 하고, 이명박 이야기 안 하고, 그대로 오늘 말씀 한 것이 그대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고 난 뒤에 교인들이 새로운 것이 없다고 느낄 때는 평소에 교회 오기 전에 갖고 있던 관심사가 튀어나와 버려요. 요새 아이들 영어 가르치는데 뭐가 좋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관심사가. 그러면 그걸 옆에 목사가 가만히 같이 점심 먹으며 듣고 있으면,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이 교회에서 무슨 의미냐 말이죠. 아까 한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들의 어떤 변화된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말은 말씀에 관심을 두는 변화죠. 말씀에 관심 없다가 말씀으로 다시 돌아온 그런 변화를 기대하고 열나게 설교했는데 끝나고 난 뒤에 정말 목사님이 무슨 설교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는 것처럼 전혀 그거는 아무 그거는 나한테는 손톱만큼도 들어온 적,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확정하는 것처럼 다른 관심사를 내놓을 때,
목사가 어디 돈 보고 목사 하는 게 아니잖아요.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또는 말씀에 관심이 있을 때 목사로서의 어떤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없어도 전해야 되겠지만 이왕이면 그런 기쁨이 있으면 신나잖아요. 반응 나타내면. 그럴 때 목사는 진이 빠지지요. 허탈 되지요. 이 교회에 계속해야 되느냐? 나라는 존재가 있으나 마나인데 꼭 내가 있어야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하는 그러한 약간의 낙심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감이 되지 않아서 그래요. 교인들이 교감이 되지 않아서. 열 명이 있다. 교인이 열 명 있다면, 열 명과 나까지 포함해서 열한 명이 거기에 공통 관심사 속에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서 그 설교시간은 시간조차도 잊어버려야 됩니다.
그런 것을 매인교회에 박기삼 사장님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렇게 크로스빌리지에 박윤진 씨가 믿음 있는 행위에 대해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그걸 그대로 카피를 해요. 사장님이. 설교시간인데 그걸 설교시간에 사전에 읽어보게 합니다. 읽어보게 하고 그 다음에 그 주제 상황에 설교하고 설교 끝나고 난 뒤에 물어봐요. 교인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애 어느 학원에 가면 영어 가르쳐 주노? 너무 그렇게 하면 세미나 되지, 너무 교수가 가르치는 학원 돼버리지, 너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가끔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가끔은 그렇게 해서 약간에 약을 쓰는 거죠. 하도 말씀 자체에 관심이 없으니까. 각자의 의견을 묻습니다. 교인이 백 명 되면 안 돼요. 한 열댓 명 정도 될 때 그때 물어요. 묻게 되면 그때부터 분주한 일주일의 하루생활 가운데서 그 교회 오는 시간만큼은 강제든 의도적이든 안 그러면 자발적이든 상관없이 강제로 방금한 그 말씀의 주제로 활발한 토론이 오고가죠. 토론이 오고가면서 점심 먹고 집에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약간 미룰 수가 있습니다.
지금 목사들은 점심 먹고 집에 갈까 걱정이라. 기존교회가 그렇다고 아무리 비판해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부터 이미 점심 먹고 난 뒤에 집에 갈 생각부터 하니까 도대체 말씀이 들어있는 말씀의 사람인지, 안 그러면 인정받으러 온 사람인지, 잘났다고 소리 들으려고 온 사람인지, 참 괴롭지요. 그런 식으로 해서 일종의 요령인데, 그런 식으로 해서 거기에 대해서 나중에 결론은 기대하지 안 하는 게 좋죠. 자기 이야기 자기가 할 뿐이니까.
자기 이야기, 자기가 하더라도 끄집어내는 순간은 너, 나를 잊어버리잖아요. 억지로라도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 그걸 관심을 두잖아요.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도 그 주일날 활발하게 토론하고 열 냈던 자신도 모르게 아주 열 내게 되거든요. 열 내고 하던 그 기억을 아무리 둔한 아둔한 사람이라도 그게 한 이틀은 간다 이 말이에요.
가면 어떤 효과가 있게 되느냐 하면, 본인이 스스로 알았던 그 말씀, 또 남들에게 자기하고 의견이 다른 다양한 그걸 통해서 본인 문제가 말씀을 통해서 한번 해결지어 볼까라는 어떤 움직임 같은 것이 발동되죠. 이제는 목사가 아니라 집사가 아니라 내가 아는 말씀과 내 문제와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결해 볼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고 저런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 이 말씀 이것이 나 하는 일과 어떤 해결점을 줄 수 있느냐를 스스로 검토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약간 내릴 수 있다는 효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는 신학교 교수처럼 봐 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나, 월급 받았다. 돈 냈다. 강의 받고 이렇게 될 문제가 아니라 가족처럼 그 사람의 심령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그러한 깊은 애정이 그러한 행동이 목사의 행동을 통해서 교인들이 그걸 감을 찾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신학교 때 어떤 그런 주제를 가지고 이거는 신학교 때 딴 일이 없으니까 학교 공부만 일이니까 어떤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간에 여기 하늘나라 공부를 했는데 그때 뭔가 아, 하늘나라 이렇구나. 그러면 모든 성경구절은 이 하늘나라의 기초로 해서 뽑아낼 수 있겠구나.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걸 베이스라 하지요. 기본 베이스를 하나님나라로 정립했다 말이지요. 신학교 때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이런 거나 정립하고 있어야지요. 앞으로 자기 장래에 목회할 때 어떤 성경구절 가도 여기서 다 뽑아내리라. 그래서 이걸 시험을 해봐요. 전도사 때 중, 고등학생 애들 앞에서 실험을 해본다고.
실험을 해 보니까 청년들 실험해보면 실험이 먹혀들어요. 전도사님 깊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전도사님, 목사님보다 설교가 낫습니다. 깊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배웠습니까? 공부 많이 하네요. 전에 있던 전도사는 맨 날 놀려가자는 이야기밖에 안 하는데 공부 많이 하시네요.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속으로 뭐라고 하느냐? 속으로 청년들아, 내가 이거 준비하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하늘나라 베이스 하는데 30분 청년회 성경공부하기 위해서 신학교 기숙사 올라갈 때부터 내려갈 때 하루 내내 교수들 강의할 때부터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만 생각하는 그것만 계산하면 한 다섯 시간 걸린다. 다섯 시간 준비해서 30분짜리 끄집어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껏 반응이 아, 깊습니다. 한 마디 들었다 이 말이죠. 듣고 난 뒤 지 마음대로 살지만. 들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나중에 새벽기도까지 하고 수요일까지 주일까지 하려면, 하나하나에 다섯 시간 내지 열 시간 해야 된다고. 30분짜리가 다섯 시간 같으면 60분짜리, 40분짜리는 열 시간은 준비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목회를 한 20년 했다. 그럼 매 설교할 때 이만큼 기본 베이스를 이만큼 준비합니까? 야, 이게 평소에 제가 크로스에 그런 글 있어요. 평소에 밥 먹을 때도 눈을 떼지 않고 책을 본다. 이게 누가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고시, 한꺼번에 합격한 변호사 있어요.
그 사람이 당시에 어떻게 공부했느냐 하니까, 밥 먹을 때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왜? 엄마는 비빔밥만 해야 돼. 쓸데없이 이것 먹고 저것 먹고 안돼. 비빔밥 해놓으면 비빔밥이 코로 들어가든지 관계없이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다같이 똑똑한 사람에 천재들인데 거기서 합격이라는 걸 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 공부해야 된다 말이죠. 그렇다면 적어도 사법고시 정도는 안 되지만 공부를 해야 된다. 평소에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 놓으면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우리 교재를 삼으면서 다시 추가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만. 하나님 나라 했을 때에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나라, 천국개념이 어떠냐 하는 것은 전혀 이 책에서는 4장, 5장 전체를 읽어보세요. 한번도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 자체가 평소에 우리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 천국 개념은 안 나오고, 예수님 하는 말씀에 이런 구절, 이런 구절이 있다. 라는 것만 여기서 예수님과 예수님 사이에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 방향만 이렇게 정립을 해서 세워놓은 겁니다.
이것이 신학교 때는 요 정도만 해도 충분했었어요. 목회를 하게 되면, 아까 이렇게 청년들은 별 줏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나라 이야기하면 야, 신학이라는 게 저렇게 깊구나. 신학이라는 걸 얕보면 안 되겠네. 저렇게 깊은 게 신학이구나. 하겠지만 이게 청년들 대상이 아니고, 어른들 대상, 나중에 장사하는 아줌마들 대상으로 할 때에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설교시간에 하나님 나라 이렇게 하고, 하나님나라 운을 떼니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예요.
특히 처녀시대 때 그렇게 신앙도 있고 처녀시절 때 청년회 공부할 때 즐겁게 공부하던 게 시집가서 정작 애 둘 낳고 난 뒤에 애만 정신이 팔려 있는 기라. 관심이 없어요. 왜 관심이 없느냐 하면, 하나님나라 이야기하면, 그거는 신학에 관한 부분이고, 그거는 청년 때 다 들은 부분이고, 지금 나의 삶에 실존은 그거하고 따로 노는 거예요.
교인들이 이걸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들 노는 세계가 따로 노는 세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거는 직장마다 가정환경 다 다른 거예요. 따로 노는 세계가 다르다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고, 이렇고 하니까 신학에 대해서 목사, 당신 전공이니까 우리가 들을 필요 없고. 여기서 나온 우리가 뭘 하면 천국에 간다. 이것만 달랑 얻겠다. 뭘 하면 천국에 골인한다. 그 공식만 달랑 이야기하고, 이것까지 다 알라하니까 애 키우고 장사하니까 들어도 모르니까 딱 단출하게 이렇게 하시면 요렇게 구원 받습니다. 이것만 내놔라 하는 거예요. 교인들이.
그거 왜 그러냐 하면, 자기 따로 있는 세계는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목사가 자기 신학 공부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이듯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돈 벌고 살아가는 영역은, 예를 들어서 보험회사면, 보험회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건 내가 내 가족과 내 삶을 기초로 하는 이것 없으면 내가 굶어죽는, 그건 따로 있기 때문에 이것은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정리되기를 이거는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거고, 이 목사 손대지 말고, 다만 내가 교회 온 것은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문제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이 성경에 신에 대해서 그런 건 때려치우고, 어떻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할 때에 어떻게 지금 하고 있느냐, 아니면 내가 안 하고 있느냐? 그것만 확인해서 안 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되고, 하고 있으면 어, 구원 받았네. 하고 확인 절차에 들어가면 끝나는 문제라 말이죠.
그렇다면 목회를 취직 안 된 청년들에게 할 때는 이게 되지만 실제로 자기를 꿍치고, 엄청난 덩어리, 빙산의 엄청난 덩어리, 삶의 정황, 모든 걸 꿍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는 하나님나라가 이쪽을 뭐냐 하면, 공격해야 돼요. 이쪽에 있는 세계를 다 부셔버리지 아니하면, 이쪽에 들어갈 구멍이 없어요. 방법이 없다고.
그쪽에 있는 세계.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안 굶고 사느냐 하는 그렇게 해서 만든 시스템, 구조, 이것을 공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는 말도 꺼내기 전에 튕겨 나오고 남는 것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아부성, 또는 구불성 그러한 공식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다음주 교회 와서 한 수 들을게요.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나라 고민이 여기 4장에 초반에 좀 나옵니다. 래드는 그걸 몰라요. 왜 이런 신학자들이 하나님나라에서 다양한 개념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가? 지금 래드조차도 왜 그렇게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몰라요. 왜냐하면, 여기는 주로 독일 사람들이고, 다드 같은 사람은 영국 사람이거든요.
영국이나 독일이나 20세기 이런 신학을 하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산업이 일어난 시기에요. 쉽게 말하면 바빠요. 교회에 오질 않습니다. 분주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이 신학 교수한테 요구하기를 사람들이 오도록 하는 신학을 우리한테 제공해 달라. 그걸 요청하던 시대입니다. 산업시대에요.
산업시대에 나온 신학이 뭐냐 하면, [신칸트주의]입니다. 그래서 여기 지금 소개되어 있는 4장 초반에 소개되어 있는 모든 신학자들 있잖아요. 슈바이처부터 나오는 신학자들, 큄멜. 신학자들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신칸트주의에서 속하는 그러한 신학자들로서 거기서 나오는 신학이 뭐냐? 신칸트주의 천국관입니다.
제대로 신학 책을 쓰려면 좀 페이지가 더 나가더라도 그것까지 감안을 해주면 신학생들이 아, 장래의 목회까지 이런 걸 고려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감을 잡을 거예요. 일체 여기는 이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 걸 제가 지금 보충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 79페이지에 보면, 4장 초반에 하르낙의 [기독교란 무엇인가?] 나오죠. 진보적 견해 처음에 4장에 하나님 나라의 해석들 나오죠. 찾았습니까? 하르낙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르낙 이 사람이 대표적인 신칸트주의 철학에 속해요. 그러면 신칸트주의 철학과 거기 나오는 신학의 경향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하르낙 같은 이 사람의 유명한 천국관이 나오는데 이 천국관에 준해서 그 다음에 바이스, 다드, 큄멜. 불트만, 몰트만 쫙 이어서 나옵니다. 그것을 참고로 해서 나오는 거예요.
하르낙의 교회가 무엇인가. 그 당시에 대히트를 쳤어요. 독일에서. 원래 히트를 치지 않으면 유명한 신학자로서 부각이 안 됩니다. 수많은 신학자들 있어도 히트 친 신학자들만 이름이 남아요. 하르낙이라는 사람은 그 뒤에 계속 유명해졌습니다.
그럼 하르낙이 이야기한 것은 무엇이냐? 그걸 한 마디로 적어볼게요. 하르낙이란 신학자가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이야기한 그게 뭐냐 하면, 천국이란 지상천국인데 지상천국은 잉여 사랑을 베풀기. 이거에요.
하르낙이 이거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르낙은 무엇을 이야기했느냐 하면, 천국을 미래로 봤던 것은 초반에 이 성경 자체에 대한 교부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죽어서 가는 이승이 아닌 저승의 문제로 둘려버렸다. 라는 것을 헬라적 신학과 히브리적 신학의 차이점을 가지고 쫙 설명한 거예요. [기독교 본질]이란 책에서. 그걸 쫙 설명한 거예요. 하르낙이 유명하게 된 것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왜곡 되었는가를 펼친 그걸로 대히트를 친 겁니다.
거기에 준해서 나온 게 뭐냐? 천국은 미래의 나라가 아니고 지상천국, 지금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윤리적 나라에요. 잉여 사랑을 베풀자. 추가적인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 그것이 오늘날 성도의 해야 될 일이다. 이 추가적 사랑이 뭐냐?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산상설교에서 하르낙은 이렇게 봤습니다.
구약의 유대교가 갖고 있는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이 내세우는 사랑과 윤리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아냥 거렸지요. 비웃었지요. 뭐라고? 잘한다. 한번 해봐. 그러나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고작 그거야. 기껏 그 정도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천국에 있는 사람은 그걸 능가해야 돼. 라고 그걸 잉여. 그걸 더 능가하는 사람이에요. 능가해야 돼. 뛰어넘어야 돼.
그런데 그 뛰어넘는 것은 누굴 위한 뛰어넘음이냐? 자기 구원을 위한 뛰어넘음이 아니고, 이웃의 그 나머지 토막을 잘라서 이웃에게 공급하고 나누어줌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요한 윤리란 말이죠. 하르낙이 이야기하기를. 과거에서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예수라 하는 것은 누굴 예수냐 하면, 내 구원받는 예수에요. 나만 달랑 구원 받는 예수에요. 나만 구원 받고 손 털고 끝나는 거예요. 남 죽든 말든.
그런데 사실은 하르낙이 오기 전에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지금 공장에서 일 바쁘잖아요. 산업이 일어날 시기 아닙니까? 원자재는 식민지에서 막 들어오지요. 상품은 계속 찍어내야 되지요. 일손이 모자라서 열네 살, 열두 살, 하루 열여섯 시간씩 노동했던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문제 있어서 거기에서 너무 사회적 쪽으로 나가고 여러 가지 혼란했던 그때에요.
그때 교회가 해야 될 의무가 뭐냐? 이 시대 사명이 뭐냐? 너무 돈돈돈, 돈에 팔려서 이웃을 돌보지 않더라. 여기에 착안한 겁니다. 당신은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니까 구원받았잖아. 우리 목사한테 그렇게 배웠다는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하르낙이 화가 나는 거예요. 구원받았는데 교회 왜 가. 지금 공장 돌아가기 바쁜데 구원받았으면 됐지, 교회 왜 나가는데. 그때 하르낙이 그거는 예수님의 정신과 어긋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설교는 미쳤다고 줬냐 말이죠. 괜히 준 게 아니거든요.
그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다르다 거예요. 뭔가 처음부터 구원의 개념이 잘못됐기 때문이고, 천국개념이 잘못됐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기존의 교수들과 기존의 목사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에요. 그 문제가 뭐냐? 그 문제의 원인은 개인이 해탈하는 식. 불교, 동양식으로 말하면. 개인이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개인문제로 집착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 산업시대에 돈 밖에 모르는 이 시대에 자본이 최고로 선 이 시대에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는 이 시대에 진정 교회는 문 닫으라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이 시대야말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진정 필요한 시대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는 돈으로 인간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돈으로 천국의 맛을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생각한 그 이상의 이러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 이상의 윤리와 도덕이 능가하는 윤리와 도덕이 지상천국을 이루라고 주께서 이렇게 주셨다. 그렇게 보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교회가 존재이유를 안 거죠. 아, 나는 교회 나와서 나만 챙겼어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바로 어려운 사람,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될 그런 책임으로서 교회가 있어야 되구나. 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되돌아오면서 성경에 이런 말도 있었네. 그런데 그게 안 보였을까? 아하, 내 구원만 챙기다보니까 그게 안 보였구나. 해서 다시 돌아보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터지는 것이 뭐냐? 미래 천국을 박살내는 신학자들이 용기를 얻고 줄줄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 슈바이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똘아이였다. 광적이었다. 예수님에서 뭘 삭제해야 되느냐 하면, 미래적인 구름타고 오는 걸 삭제를 해야 된다.
그거는 하도 말발이 안 먹어주니까 이렇게 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묵시적인 것을 기대를 했으니까 진정 예수 이분이 전하려 하는 것은 이웃사랑이었는데 하도 말발이 안 먹어주니까 미래에 구름타고 온다는 소리해서 약간 현혹을 하고, 본인도 현혹을 너무 하다보니까 본인도 그렇게 될 줄 알고 착각했는데 그만 죽어버리니까 아무 일도 안 와서 본인 착각이었고.
거기에 대해서 제자들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똘라이라는 걸 제자들이 알고 있었는데. 막상 죽고 나니까 자기 위치가 상당히 모호한 위치에 있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들 중에서 정당한 것, 상당히 먹어주는 것 있잖아요. 현세적으로 이미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이렇게 하고,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나타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이상의 사랑의 그런 윤리를 사도 바울, 베드로, 사도 요한은 그걸 권면 형식으로 교인들에게 증거 했다는 겁니다.
특히 요한 일이삼서에 보면, 철저한 뭡니까? 사랑이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라고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라. 어디서 그따위 위장적인 말을 하느냐? 형제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거든 아예 사랑 안 받은 줄 알아라.
그래서 새 계명을 주노니. 새 계명은 이거는 니 혼자 지키는 계명일 수 없지요. 새 계명이라 하는 것은 대상이 있고, 그 대상 사이에 따르는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새 계명이 형성되기 때문에 새 계명이 준다 이 말이에요. 그게 뭐냐? 사랑의 새 계명을 주노니.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지상천국, 보이는 천국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가치와 의미를 늘리는데 축적된 그러한 천국관이 산업사회와 더불어서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79페이지부터 84페이지까지 쭉 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세적인 천국, 지상적인 천국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윤리와 도덕을 약간구분하면,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은? 윤리란 개인적이에요. 개인이 얼마나 행복하냐. 윤리란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기쁨, 감사, 행복, 환희, 이건 윤리에요. 도덕이라 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다 잊어버리니까 적어놓으세요. 윤리, 도덕 같이 쓰기 때문에 같은 것인 줄 알고. 구제, 관심, 타인에 그 다음에 배품, 자선,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그걸 보통 도덕이죠. 타인과의 관계. 그러니까 타인이 없더라도 개인적으로 기쁨, 감사 있어야 되고, 개인적인 기쁨, 감사 이것이 타인과 만났을 때 거기서 사랑의 형성으로 되어진다 말이에요.
그런데 왜 이 하르낙의 신학이 신칸트주의, 칸트란 이름이 왜 들어갔느냐 하면, 그걸 설명해야 돼요. 신칸트주의란 게 왜 들어가야 하느냐 하면, 전에 칸트주의가 철학이 단순히 철학이 아닙니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고, 계몽이에요. 이걸 합쳐서 계몽주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합쳐서. 계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을 개화시키고, 계몽하고, 짐승 같은 인간을 사람 만드는데 동원된 윤리체계를 말합니다. 윤리체계, 철학체계, 사상체계를 말하는 겁니다.
서양의 철학은 단순히 동양철학처럼 도 닦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이런데 이 뜻을 이 땅에 어떻게 펼칠 수 있느냐? 그 방법론에 대한 하나님의 형상되는 이성의 마음껏 발휘성, 이게 서양철학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헤겔의 모든 철학의 중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왜 중심이 되느냐 하면, 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인간이 신이 되어 간다. 신으로 승격하는데 관심이 있었어요. 헤겔 이전까지는. 그러니까 헤겔 이전까지는 인간이 높아지는 신학이에요.
그런데 헤겔부터 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낮아진 철학과 신학을 한 겁니다.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헤겔 전까지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아는 게 없다. 죄인이다. 그리고 인간은 한계가 있다. 부족하다. 맨 날 실수한다. 오류가 있다. 알아도 부분밖에 모른다. 전체를 모른다. 진리에 대해서 항상 왔다 갔다 한다. 유동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자체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나님 뜻만 따르자. 하는 쪽으로 나갔다 말이죠.
그런데 헤겔은 뭘 찾아냈느냐 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생각해 봐라. 이 말은 사람이 이렇더라도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쪽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봐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에이, 너는 저리가! 이렇게 하지 않고, 인간이 인간을 무시해도 나, 하나님은 인간을 무시하지 않겠다. 선뜻 먼저 선점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없겠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의 가치성,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창조성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그걸 매도하지 말고, 모독하지 말고,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찾아낼 생각은 없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시편 8편에 뭐라고 나와요?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여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것도 조금도 일률적이고 사실은 천사 이상으로 훌쩍 뛰어넘게 하신다. 어찌하여 인자를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창세기 1장 28절 "다스리고 정복하고 하라." 그만큼 모든 걸 주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은 뭐라고 했어요? 철학자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계몽하는 그런 역할을 철학이 담당했지요.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철학자들보다 머리가 나쁘니까 즉 공부를 적게 했으니까. 따를 수밖에 없어요. 다 그 당시는 전부다 세례 받고 성도니까. 성도가 성도의 말 들을 것 아닙니까? 신학은 뒤따르라 가기 바빠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는 게 뭐냐? 여기서 해봅시다. 신이 누스라 이게 이성인데 다른 말로 로고스라 하지요. 신이 로고스, 신은 하나밖에 없는 일자. 이것이 영으로 와야 돼요. 왜 영으로 와야 되느냐 하면, 이 영이 와야 다양성이 돼요. 하나님은 일자 아닙니까? 하나님은 변동이 없어요.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밖에 없는데 이 세상은 다양성 하잖아요. 성격 다르지, 풀, 나무, 코스모스, 사람, 다 다르잖아요. 신이 창조할 때 다양성으로 창조했잖아요.
그러면 여기 정신은 영으로 되니까 작은 영, 큰 영이 차이 나죠. 영으로서 그게 뭐냐? 자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성을 로고스를 통해서 영으로 증거 할 때 영은 여기까지 전달되면, 이 정신을 받들어서 영은 자연을 통치해요. 자연을 통치하면, 자연은 성령을 영을 받아서 이성을 깨닫고 이성을 통해서 신에게 합일한다. 이 코스입니다. 이 코스 잊지 마세요.
그렇다면 헤겔이, 하나님이 사람 됐잖아요. 성육신됐잖아요. 그게 헤겔의 중심이에요. 하나님이 성육신 되었으면 아까 이게 뭐라고 했습니까? 로고스죠. 그 로고스가 이성 아닙니까? 그래서 헤겔은 이성으로 시작해서 이성으로 끝내는 대규모의 전 세계의 모든 절대이성으로 지배하는 통치철학을 만든 거예요. 이 이성에서 다양성이 나오는데, 이 다양성은 성령을 많이 받은 아주 성령을 적게 받은 것은 돌멩이에요.
성경에 보면 나귀가 말하잖아요. 그럼 평소에 나귀가 말합니까? 말 안 하지요. 그런데 나귀가 말 못합니까? 우리의 상식은 나귀가 아예 말 못한다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나귀가 말을 했지요. 그것은 헤겔이 보기에는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까지는 나귀는 이거는 줘 패도 괜찮다. 이렇게 봤는데 당나귀가 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특별히 임할 때는 인간과 영적으로 교류가 가능한 존재물이 되는 거예요.
존재물이 된다면, 물론 인간처럼 평소에 그렇게 살진 않지만 너무 우습게 본 거지요. 자, 그러면 우리가 당나귀를 우습게 봤잖아요. 영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데 발람 선지자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당나귀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헤겔의 철학이 국가로 나갑니다. 그러면 국가에는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지요. 그런데 지금 헤겔의 그 시대가 뭐냐?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갔잖아요. 누가 돈 버는 놈이 장땡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가 누굴 이용해요?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가진 자가 마음껏 이용하지요. 이거는 인간 취급도 안하지요.
그렇다면 인간 취급도 안 되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뭐를 시사하느냐 말이죠. 우리에게 뭐를 호소하려고 하느냐? 아무리 노예 같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사람 되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그 가치, 존엄성을 다시금 생각해 줘라. 그러면 생각해 줘라 하면, 생각해 줍니까? 지금 돈 벌기 바쁜데 어디 남 생각해주기 바쁘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국가가 등장해야 돼요. 국가 등장하는데 교회가 국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경찰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찰에게 봉급 줄 세금을 거둘 권한이 없어요. 그리고 헤겔의 의미에서 복지라는 것이, 교회에서 하는 복지라는 것이 교회가 하는 복지는 제한적이에요.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도와 줄 복지를 하려면 그 사람에 인적사항부터 조사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공무원들이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가짜로 생계비 얻어먹을 놈, 많기 때문에 어느 놈이 일하려고 합니까? 그것까지 세밀히 조사해서 은닉된 재산까지 조사하려면 공무원들이 필요해요.
교회가 구제할 때는 기분상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돼. 기분상 하지만 조사해봤냐 말이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열 교회에서 받아 쳐 먹어서 한달 수입이 목사 월급보다 더 많다는 것을 누가 조사해 봤습니까? 어느 집사가. 교회 나오기 바쁜데 언제 그거 조사할 시간 어디 있습니까?
그럼 복지정책을 누가 해야 돼요? 국가가 해야 돼요. 이미 서양 국가는 전체가 신도니까. 전체가 신도 아닙니까? 전체가 어릴 때부터 세례 받잖아요. 자동적으로 받잖아요. 신도기 때문에 신도 같으면 목적이 뭐예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하나님이 주신 뭘 사용해야 된다?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되 그 이성은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다양성을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도 넉넉히 하나님께 합일할 수 있는 쪽으로 국가 행정과 법이 제정된다 이 말입니다. 헤겔 주장이.
그러니까 헤겔이 이렇게 나오니까 교회는 뭐 하느냐? 교회는 국가 말 들으면 되지, 뭐. 교회는 할 일이 있지. 다만 폭력이나 이런 것 말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하늘이 주신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로마서 13장에 나오잖아요. 국가가 주는 권세는 이거는 그냥 장난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한 자에게 상주고 악한 자에게 벌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잘 복종해야 됩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어야 된다. 만약에 안 그렇다면, 교회만 하나님 뜻을 갖고 있고 독점적으로, 교회 바깥에 나가면 전부다 짐승이고 개망나니냐? 그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정말 교회가 성도 여러분, 교회만 교회 행세 하지 말고, 바깥에 나가서라도 주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한다면, 그들이 나가는 의료라든지 행정이 감옥, 교도소에 근무하는 공직자라든지, 농사짓는 농부든지, 장사꾼이든지 전부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 정신 하에 움직여 줄 때 교회도 자기 설교에서 한 이야기가 보람을 느끼잖아요. 오, 아이고, 나라가 잘 되고. 아이고,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만하네. 라고 보람을 느낄 것 아니냐 말이죠.
교회 밖에는 다 도둑놈들이고 교회 밖은 짐승이고 교회 와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만약에 교회가 한다면, 교회 안에서 이야기한 것과 모순되지요. 여러분, 나가서 바르게 사세요. 훌륭하게 사세요. 주의 뜻입니다. 라고 하는 말을 그게 모순 안 되려면, 그 사람들이 교회 바깥에서 각기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 직장 내에서 원칙가지고 하는 것도 목사가 그걸 인정해 줘야 된다, 안 줘야 된다? 인정해야 된다 이 말이죠. 현대중공업에서 과장이 차장보고 이야기하고 하는 그것도 주의 뜻으로 인정을 해 줘야 된다 말이죠. 그게 평소에 목사 설교하는 것 아니에요? 빛과 소금되라고. 그렇게 여전히 설교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교회 목사가 설교로 이야기하는 것과 성경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과 헤겔이 이성에 의해서 각자 전공분야에서 따로 법을 이야기하는 것과 동등한 계시의 공과를 능력을 인정해 줘야 된다 말이죠. 목사 말은 진리고, 하나님 뜻이고, 생물학 공부하는 그것은 진리 아닙니까? 똑같이 인정을 해주자 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서 나왔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약한 사람 무시하지 말라. 그 안에 주의 뭐가 들었다? 영이 들어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자연이라면 자연은 영에 의해서 신으로 돌아가는 이성에 돌아가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런 공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헤겔 이후에 여기에 동조하는 칸트도 이쪽이거든요. 이러한 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칸트도 이야기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은 일단 자율성을 확보해요. 이 자율성이 하나님의 이성이 함께 있는 자율성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꼭 목사가 아니더라도 교사를 하던 뭘 하든 하나님의 자율성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해야만 한다. 이거는 하면 어떤 복을 받습니다가 아니라 무조건 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르낙의 초점은 뭐냐? 하나님 말씀은 무조건 해야 된다. 그래서 신칸트주의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칸트 이전의 윤리는 이렇게 하시면 복을 받습니다. 이쪽이었는데 칸트는 그게 아니고, 무조건해야만 한다. 무조건 도덕적이어야만 한다. 왜? 그래야 신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무조건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된다.
그것이 헤겔을 통해서 더 구체화 되었죠. 무조건 하면 안 된다. 왜? 사람은 안 때리면 매를 안 들면 안하게 되어 잇다. 그러면 매 드는 사람은 누굽니까? 매 드는 쪽이 누구에요? 국가지요. 아까 했잖아요. 헤겔. 이해되십니까? 헤겔과 칸트 이해되지요.
무조건 국가가 들어야 돼요. 국가가 해서 그냥 어려운 사람 도우면 일이 안 되거든요. 무조건 세금 내서 세금 가지고 복지정책 무조건 나가야 돼요. 거기에 종사하는 전담 공무원부터 뽑아야 돼요. 월급 줘서. 최저생계비 안 되는 사람은 무조건 줘야 돼요.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하는 거예요. 거기 합의해서 동의해서.
그래서 헤겔의 국가는 뭐냐? 합의에요. 왜냐하면, 왜 합의냐 하면, 자율성이라 하는 것은, 아까 다시 해 봅시다. 이것 해야 돼요. 나만 자율성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도 자율성 있지요. 그럼 자율성은 누가 줬습니까? 성령이 줬잖아요. 그럼 이쪽 자율성이 좀 작다고 해서 이쪽 자율성을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그 사람이 한 자율성도 성령이 준 걸로 인정하고 이것도 나도 인정해서 그래서 성령 안에서 서로 합하면 이게 하나의 완전한 국가가 될 수밖에 있다.
이 헤겔에 대해서 나중에 그 뒤에 신학 쪽이 아니고, 저쪽 철학 쪽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반대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주 멋진데.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는데. 반대할 이유가 뭘까요? 이겁니다. 제일 처음 반대한 사람이 마르크스 아닙니까? 마르크스 이후에 전부다 반대했어요. 헤겔은 환상을 쫓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는 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걸 모르느냐?
자, 그런 국가는 없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몰려올까요? 이미 한번 떠난 교인들, 다시 교회로 오지 않습니다. 왜, 뭘 알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보다 못하다? 세상이 가르치는 철학보다 못하다는 걸 안 이상은 교회에서 들을 게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교회에서 말하는 윤리도덕은 실효성이 적어요. 사회에서 시민단체에서 하는 것이 훨씬 실효성이 커요. 음란비디오 방지, 교회 차원에서 하면 안 돼요. 저쪽엔 돼요. 왜? 저쪽은 경찰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비디오방에 가서 강제로 하는데 실효성이 적어요.
결국 저들은 뭘 알았느냐 하면, 교회 목사들이 바르게 살자. 세상의 이런 걸 추방하자.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에 대한 핑계냐 하면, 목사, 밥 먹고 좀 살자. 나 좀 살려달라는 핑계거리로 옳은 소리 몇 마디 하는 걸로 사람들은 벌써 인식을 하게 된 겁니다. 잔소리 누가 못하느냐 말이죠. 그런 잔소리 수준은 신문에서도 다 하고 주위에서 배운 사람은 다 한다 이 말이죠. 이제 그런 잔소리, 질 낮은 잔소리, 수준 낮은 소박한 잔소리 이제 그만 듣겠다.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나온 게 뭐냐? 그럼 누가 위기입니까? 교회가 위기지요. 헤겔 믿다가 헤겔 놓치고 나니까 교회 위기죠. 그때 나온 블로흐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마르크스 이후에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희망의 철학을 이야기했다고. 이게 언제냐 하면, 바로 1940년에서 한창 이차대전해서 소위 계몽이 깨져버려요. 계몽, 똑똑하고 잘난 놈들이 결국 남는 것은, 권력 싸움밖에 남지 않고 불쌍한 대중들은 그들의 센 자존심의 희생물밖에 안된다는 걸 알고, 그 다음에 절망이 있을 때 그때 희망의 철학을 내밀어요.
희망의 철학 후 튀어 나온 게 뭐냐? 희망의 신학. 몰트만 나오고, 판넨베르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차대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야 된다. 하고 나온 것이 하이데거 신학이 나옵니다. 그 하이데거 신학 이후에 나온 게 뭐냐? 바로 불트만 나와요. 그래서 하이데거의 신학에 의한 하나님나라 개념이 또 나옵니다. 그게 뭐냐? 수직적인 묵시적인 신학이 나와요.
지금 이 이야기가 이 교재에는 전혀 안 나오고 있어요. 불트만 신학이 어디서 나왔는가 안 나와요. 하나님이 하나의 사건으로 온다. 사건으로 와서 여기에 부딪칠 때 비로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안다. 이게 누구 철학이냐 하면, 하이데거 철학입니다. 하이데거는 서구의 모든 것이 하나의 역사의 흐름, 이게 역사의 결정력인데. 역사의 결정력이라는 것은 개인이 자기가 장차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시나리오를 짜가는 거예요.
이것이 이렇게 짜가다 보면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나의 절대성이 돼버려요. 내가 잘난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이것 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밑에 있는 존재라 하는 것은, 내가 어디서 나왔으며 어디서 그런 것은 생각할 틈이 없어요. 왜냐? 산업사회이기 때문에.
다시 물으려면 존재에서 다시 물으려면, 이걸 논리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하이데거의 이야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실 하이데거 이전에 니체에서 나오는 거예요. 니체에서 하이데거 나오고, 들뢰즈 나오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쭉쭉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니체철학은 오늘날 기업의 경영인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철학이 되고 말았어요.
산업시대 때 기술과학시대 때는 이런 사고방식 이외에는 다른 것은 용납이 안 돼요. 힘드냐? 풀자. 이거에요. 스트레스 받나? 풀자. 이겁니다. 지금의 아까 교회 이야기했는데 교회에 교인들이 교회 올 때 힘들게 삽니다. 너무 힘들어요. 교회 오면, 그걸 풀어주는 교회가 사는 거예요. 말씀에 전혀 관심 없어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소개해서 들어가는데 그 사람이 뭐 되었느냐 하면, 그 교회의 등산 담당 전임목사가 되었어요. 교인들은 신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그 목사가 산에서 했던 사람이거든요. 등산을 모를 때는 교회 마치고 등산가는 재미를 몰랐었는데 그 목사가 오고 난 뒤에 산에서 노래 풀고 하니까 세상에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다는 걸 처음 알은 거예요.
그냥 그전에는 예배에 기쁨 있는 척했지요. 그전까지는 무슨 기쁨이냐 하면, 드럼 두드리고 기타 치는 그 재미로 했는데 이제는 그 교회 분위기가 바뀌는 거예요. 드럼이고 기타고 귀찮아. 마치고 중년 30대, 40대, 50대, 등산가는 놀려가는 그 재미에요. 그동안 어떻게 하는 게 재미있는 줄 몰라서 그랬지요. 그런 식으로 하는 신나고 신나요. 여러분도 노는 주특기를 해야 돼요. 어디가 맛있는지 그런 게 있던지.
그래서 교회가 처음에는 복음 있는 척하고 억지로라도 내지만 그게 목사님도 지쳐버리고. 목회 한 6개월 내지 1년 하면 지쳐버리고. 교인들도 보통 개코도 모르고 따라오다가, 따라오다가 지쳐버리고. 나가면 둘 다 노골적으로 재미있는 거 없나? 등산, 낚시, 볼링. 처음에 총신 목사들 모일 때 세미나 열었습니다. 지금은 뭐냐? 볼링대회해요. 노골적으로 볼링에다가 사우나하고 한바퀴 코스를 돌아버립니다. 진작 그러지. 진작.
이런 입장에서 과연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제가 쉬지 않고 계속 강의하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나하나 들어갈 것인가? 도대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마태복음 10장 한번 보겠습니다. 10장 20절. 19절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 아버지의 성령에 해당되는 사람이 다 입니까, 아니면 특수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까? 특수한 사람이지요. 그 특수한 사람을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제자지요. 그러면 제자가 이 말을 이 고난을 갖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누가 제자를 부리는 겁니까? 부리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에서 나와요. 아, 저 사람은 군주, 이게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있는 걸 알고 간 게 아니고, 그 앉은뱅이가 말을 걸어온 것도 사실은 생각한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이나 제자들 보면, 제자들은 가지고 장기의 졸처럼 다루시지요. 다루게 되면 그들은 예상치도 못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봐요. 그들은 자기가 예상한 게 아니기 때문에 너무 좋아서 주님, 주님, 사탄이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70명의 제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때 그들은 순간적으로 뭘 잊어버렸습니까? 자기가 예상치도 않은 놀랐던 일에 놀란 이야기 한 순간 뭘 잊어버렸느냐 하면, 너희의 생명책에 너희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해야 될 사실을 놓쳐버렸지요. 그죠? 이것은 뭐냐 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에 한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귀신이 떠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마가복음 마지막에 나옵니다. 마지막에 성령이 임하면 독을 마실지라도 해롭지 아니하고 방언을 이야기하는 쭉 나오지요. 이것은 철저하게 예수님은 내가 부려야 될 그런 대상자를 뽑는데 그 뽑는 것도 우리하고 협의합니까, 협의 안 합니까? 협의하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뽑고 일방적으로 다뤄놓고 그리고 자기가 예상치도 못한 발언이 튀어나오는데 그 발언은 뭐냐? 자기가 이야기해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의 성령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체계를 한번 잡아 봅시다. 하나님나라가 왔을 때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는 하늘나라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기존에 있던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과 이런 인간의 하나님나라는 이미 추방될 인간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나라 개념이에요.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웃기지 마라. 너희들은 하늘나라 천국에서 추방될 것이다.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천국을 논하고, 하나님나라를 논하는 것은 이건 소용없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이쪽에서 이쪽으로 들어올 순 없습니다.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기서 완전히 비밀로 차단시켜 놨어요.
그 다음에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없느냐? 있습니다. 있는데 이쪽에서 생각한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아니지요. 그럼 이쪽에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개념은 뭐냐 하면, 자기를 포함시키는 구원 개념이에요. 자기를 포함시키는데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언약적인 근거를 댔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만이 포함될 수 있는 하늘나라 개념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나오잖아요. 백부장은 이방인이죠. 백부장은 언약 밖에 있는 인물이지요. 백부장이라는 언약 밖의 인물이 이 천국에 들어오려면, 자기가 갖고 있는 천국개념이 뭔가 와해되든지 수정을 하든지 개조를 하든지 해야 이방인이 들어옵니다. 지금 백부장은 로마사람입니다. 로마사람이 어떤 형편이냐 하면, 지금 유대민족을 핍박하고 압박하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 현재 천국 갈 사람을 핍박하는 나라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도저히 이 사람들은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천국백성이 된다면 이 백부장은 로마인을 버리고 유대인이 개종해야 돼요. 유대인으로 개종도 안했는데, 이거 중요합니다. 유대인으로 개종도 안하고 유대인 바깥에 있는데 참, 거기에 거기도 천국이 임한다? 그러면 내가 구축한 언약체계 개념이 결국 엉터리란 말이죠.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팔레스타인의 소위 기독교인들이 야고보 파가 굉장히 의심한 것이 유대인으로 개종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돼요. 율법을 지키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이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한 천국개념이 틀렸다는 말 밖에 안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지옥 간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회의가 벌어진 거예요. 만약에 이방인도 천국에 가려면 무엇이 성립돼야 하느냐 하면, 율법 없이 이방인이 구원되면서도 율법 다 지킨 것과 모순되지 않는 어떤 무엇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그들이 의롭다하고 구원받아야 되는 원칙이 따로 철도노선을 따로 깔아야 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논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 생각은 이겁니다. 이방인들이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니다. 왜? 유대인들도 이사야를 알거든요. 내가 부르지 않는 백성에게 부름을 받고, 나오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니고, 단지 반드시 필수적인 게 있는데 이방인들이 구원이 되려면, 현재 하나님이 주신 법이 있잖아요. 율법. 하나님의 모세 율법과 이 테두리 안에 들어온 상태에서 그래서 구원이 되는 것이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구원된다? 이거는 율법 폼으로 준 게 아니지 않느냐 말이죠. 이건 지키지 말란 말이냐? 그런 뜻이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 유대인들아, 너희들이 지금 지켰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안 지켰단 말이죠. 그런데 안 지켰는데 왜 지켰다고 하느냐?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잖아. 말이 돼야지.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게 아니야. 그 율법으로선 영광에 이를 자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율법 지키지 말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지킬까, 안 지키지 말까?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행함에서 한 발자국도 안 벗어나는 않는 행함이란 말이죠. 그자체가.
니가 주장하는 행함이 결국은 무엇을 모독하게 되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십자가를 자빠뜨리는 십자가 필요치 않는 자기 열심을 따로 구축하는 셈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그 사고방식 틀이 행함이라 하는 것을 그렇게 유지하느냐? 절대로 믿음으로 다가갈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행함이 가만히 있는 행함이 아니고, 저희가 하고 십자가를 완전히 박살내는 행함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께서 그런 양식으로 십자가를 만들어냈거든요.
어린애가 손장난이 심해서 뭘 잘 깨요. 엄마가 어린애가 얼마나 잘 깨는지를 쉽게 알려주기 위해서 정말 잘 깨지는 그런 석고 만든 인형을 딱 줬더니만 대번 애가 깨버렸다고. 그러니까 으아, 하며 엄마. 왜? 따지는 거예요. 왜 잘 깨지노? 나는 곱게 다뤘는데 인형이 깨졌다고. 엄마는 줄 때 깨지는 인형을 왜 줬느냐? 든든한 인형을 줘야지. 니가 니 속에 니도 모르는 죄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너의 속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처참하게 깨질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내가 다가갈 수밖에 없다.
아까 헤겔의 잘못이 뭐냐? 헤겔은 하나님이 사람 되었다 했죠. 그래서 사람의 가치를 찾아야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저주받았다는 이야기를 헤겔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저주받아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받는 게 아니고, 사람이 저주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에 모순된다고 본 거예요. 어떻게 자기가 만든 인간을 자기가 저주합니까? 무슨 그따위 하나님이 다 있어. 저주하려면 왜 만들어 놨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저주하는 이유가 사람을 구원하려고 만든 게 아니고, 저주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만을 높이기 위해서 저주받아야 될 인간들을 이 땅에 먼저 창조한 거예요. 저주와 저주받아야 될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말미암아 그 저주와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과가 얼마나 위대하냐를 알려주게 하는 하나의 배치들로서 하나의 장치들로서 인간들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깔아놓은 겁니다.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창조자의 속성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끝이에요. 달이 왜 달이냐? 해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왜 인간이냐? 신이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쨌든 하나님이 어떤 법을 줘도 사람은 행함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하니까 그것을 깨치우고 그런 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행함에 쉽게 죽을 수밖에 없고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행함에 의지한 자는 십자가 앞에서 거치는 돌이 되는 겁니다. 그들이 왜 십자가를 안 믿느냐? 행함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 인식의 틀을 깨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다시 봅시다. 하나님나라가 여기 왔다. 그런데 기존의 하나님나라는 이미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법이 있어서 법 안에서 하나님나라다. 이 하나님나라에서 이쪽으로 올 수 없어요. 부자 청년이 이 책에도 나옵니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이. 조지 엘든 래드는 어떻게 이걸 해석하느냐 하면, 이 사람이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왜 구원 못 받았느냐 하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의 틀로 보지 않고, 뭐냐 하면, 아직 시간이 덜 돼서 그래요. 아직 종말이 안 와서 구원 못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예수님 자신의 공로와 그 은총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우리가 미처 인식이 모자라서 구원 못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구원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나라는 없는 것을 만들어요. 왜냐하면, 열두 제자가 하는 말 중에서 고기 실컷 잡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의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 이 말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한테 오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그것이 얼마나 내가 잘못된 사고방식인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나 같은 인간은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시는 게 좋습니다. 할 정도로 자기 죄를 안 거예요.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그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걸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단독 결정에 의해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오는 겁니다. 이미 기존에 있는 인간의 사고방식,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이것에 의해서 이것의 죄를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죄인 줄 몰랐어요. 오고 난 뒤에 죄를 알았습니다. 자기가 소경에서 눈 떠야 소경인 줄 알지, 소경인 줄 모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는 쪽에서 오게 되면, 그들은 저들의 숨길 수 없는 죄를 인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배척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뭘 노리느냐 하면, 결국은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알아 들어먹어서 구원 받는 쪽이 절대로 하늘나라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복되도다. 알게 하는 것은 성령이니라. 니가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니 안에 누가 말한다? 십자가 안에서.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안의 성령께서 말하는 식으로만 하늘나라가 전개되고 전개되는 겁니다.
자, 이것을 오늘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설교, 교회 실정에 비교해봅시다. 지금 난전에 있는 아주머니들 일하다가 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생계유지 세계 있어요. 이거는 손톱도 안 들어갑니다. 이거 없으면 굶어 죽어요. 다만 교회 온 것은 내세 문제에요. 지금의 문제가 아니고 내세 문제라고. 목사님, 어떻게 하면 죽어서 좋은 데 갑니까? 좋은 나라 갈 수 있도록 만 해 주세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그거 안 되면 그대로 하고, 되면 구원 받았구나 할 테니까. 그렇게 온다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실 때는 아까 베이스, 탱크가 하늘나라라고 했지요. 방금 제가 소개했잖아요. 이 탱크 안에서 말씀이 튀어나온다고. 나오면 말씀은 어디를 겨냥해야 돼요. 끔쩍도 손톱도 안 들어가는 삶의 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