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21 : 1- 2 (해변 나라)
Re..사 21 : 1- 2 (해변 나라)
이름 : 이근호(IP:)
056강-사21장,1-2,(해변나라)-isa061004
해변 나라
2006년 10월 4일
설교 본문: 이사야 21:1-2
(사 21:1)『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
(사 21: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매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보고 들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맹세요 선언이요 천명입니다. 그 어떤 방해나 장애를 허락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수 밖에 없는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실행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인간들의 역사입니다.
인간들의 역사는 우상의 역사며, 자기 영광에 대한 도취요 과시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지난 흔적들이 꾀 쓸만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치부와 오점과 허점과 죄스러운 것들을 가리는데 꾀 쓸만한 업적들을 쌓아왔다고 간주되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역사라는 것을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묵시는 그런 것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의 수치를 폭로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평소 생활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그 대신 인간들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식으로 행동 하나하나에 나섭니다.
인간의 언어생활과 행위들은 수치가 폭로되지 않고 더욱 은밀하게 숨기는 식으로 자신을 둘러쌓게 됩니다. 인간이 이성이라는 것, 따짐과 판단력과 반성력, 같은 것은 모두 자신의 수치를 은폐하는데 신경 쓰면서 동원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미처 인간들이 자신의 수치를 가릴 경황이 없게 되는 식으로 벌어집니다.
난감하게 만들고, 황당하게 느껴지게 하십니다. 미쳐 손 쓸 겨를도 습격하듯이 사건이 벌어져 버립니다. 대비한다든지, 방어한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수용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유다 나라를 둘러쳐 있는 이방나라들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재료로서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집니다.
바벨론이란 물을 끼고 있는 광야 나라는 참으로 큰 제국이라서 모든 나라들의 기둥같은 존재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 제국도 애굽나라의 신세로 초라하게 전락되고 맙니다. 바벨론 나라는 신을 형상화해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방나라에 신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러울 것이 없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뭔가 대단한 업적이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항상 신의 이름을 동원시켜 자신의 영광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국경일이나 경축일 행사가 할 때에 보편적인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경배의식을 우선 실시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추석 명절날 조상 제사를 드린다든지, 국경일 행사를 하면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의 존재를 상정하는 시도로서, 이렇게 하므로 현 자신의 존재에 신성을 품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적 영광성을 품지 아니하면 보편적 군림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방종교의 행태도 인간의 수치성을 가리는 최고의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형상을 사정없이 박살내어 버립니다. 그들이 미쳐 손 쓸수없이 말입니다. 이로서 바벨론은 만천하에 자신의 수치성을 여지없이 폭로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은 단지 유다 나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까지 손이 미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유다나라의 본성이 이방나라의 본성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를 망하게 하신 것은, 유다 나라및 여타의 나라가 약간의 궁지에 몰린다고 여기면 여지없이 애굽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쪼르르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또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는 방편인 것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가린다고해서 부끄럼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교만함과 위선만 풍부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부터의 심판과 저주를 자초하는 식이 됩니다. 물론 유다나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5:8-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대군이 갓 요단강을 건너왔던 시기의 말씀입니다. 코 앞에 여리고성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돌격 앞으로 하면서 진격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전 백성들을 상대로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그 혜택이란 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떼어내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죄를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합니다. 도리어 죄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자기 능력으로 죄를 떼어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 떨어지는 죄를 떼어내기 보다는 도리어 그것을 덮는 식으로 죄 문제를 없애고자 합니다. 즉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고 신도 만들고 종교도 갖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수치를 당할 입장으로 변모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처리해버립니다. 그래서 죄가 저만큼 굴려가게 하십니다. ‘굴려간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죄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떨어져 나갔으면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이 퍼붓게 될 공격목표가 완전히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저 여리고성 이방민족들에게 여전히 여호와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된통으로 얻어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여전히 죄가 딱 들어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반드시 저주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곳에는 저주가 퍼붓을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죄를 관리하고 해결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제부터 성도의 모든 태도는 죄를 가리는 위선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한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들의 위장술로 인하여 모독받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