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705 부산강의-피히테
Re..20050705 부산강의-피히테
이름 : 한윤범(IP:)
20050705 부산강의-피히테
(강의:이근호 목사)
1학기 종강 강의를 하겠습니다.
피히테라는 사람 잘 못 들어 보셨지요. 피히테라는 사람, 그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고, 피히테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여기 신학자, 또는 50인의 신학자, 철학자 속에 포함이 되는가? 그 사람이 쓸만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우리한테 들을 만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여기 뽑힌 것 아닙니까? 우리는 피히테가 무슨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이겁니다. 자아라는 것은 이게 지금 성화론과 관계되어 있는데 잘 들어보세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나, 같은 말 아닙니까? 자아라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자아가 행동한다는 게 말이 좀 잘못되었는데, 자아는 곧 행동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게 정당한데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렇게 돼버립니다. 행동하는 그 몸체, 그것이 자아로 구성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행동하는 몸체가 자아로 구성됨. 이것이 피히테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전까지 칸트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아가 있고 이 자아가 생각을 하고 의식을 하고 의식한 것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면 그것이 행위가 된다. 이렇게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중세 때도 마찬가지인데.
존재자가 먼저 있고, 존재자가 팔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고 어떤 행동에 나설 때 소매치기라면 소매치기를 한다든지, 안 그러면 황우석 교수처럼 연구를 한다든지, 실험하는 행동, 야구 선수가 요새 삼성 영 안타 맞고 그런데. 야구선수가 타자로서 배트를 휘두른다든지, 이러한 행동이 나올 때 사람들은 행동을 보는 게 아니고, 그 행동한 사람이 너, 누구야? 라고 존재를 행동을 통해서 보거든요.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에 행동에 나서고 사람들이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존재의 정체를 당신은 이런 류의 사람이구나. 이게 우리의 상식인데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행동이 자아를 그때그때마다 만들어낸다 이 말이죠. 자아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자아라는 것은 지워버리고 행동에 나설 때 그게 자아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가 어디에 적합하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나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에 넘기우고”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죽고 난 다음에 끝입니까? 죽은 내 몸을 통해서 뭐가 나온다 했어요? 예수님의 생명이 나온다 했지요.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본다 말이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십자가 이후에 부활하고 난 뒤에 주님은 어떻게 능력을 행사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문제가. 사도 바울이 만약을 산상설교를 딱 본다면,
어떤 분에 저한테 참,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어떤 질문을 했느냐 하면, 이런 질문을 했거든요. 이 목사님의 강의를 들어보니까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그렇게 복음이 간결한데 왜 성경 자체, 사도 바울은 왜 복음이 안 간결하냐 이 말입니다. 성경 자체가.
예수님이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든지 사도 바울의 서신에 보면, 이거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이근호 목사님 강의 들어보면 복음이 굉장히 간결하게 나오더란 이 말이죠. 왜 사도 바울은 간결하게 복음을 못 전하느냐 이유가 뭐냐?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한진영 씨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교회에 있어요. 질문답변 있잖아요. 답변은 여러분이 보면 아는 거고.
복잡하게 써놨지만 이런 겁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관심이 있어요. 십자가에만 관심 있는데 십자가, 십자가하면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용해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받으려고 시도를 해요. 그게 나쁜 짓이거든요. 그게 아주 나쁜 짓이거든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는데 이렇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면, 감히 죄인이 천국을 가려는 아주 나쁜 사고방식을 가질 수가 있어요.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한테 이익 되게 한다 말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가지고 자아를 구원 받고자 하는 자아에게 다가섭니다. 다가서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말씀이에요. 그걸 좀 설명해야 되는데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옛날 우리가 총신에서 배웠던 신학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가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그림으로 그립시다. 예수님은 여기 있고 예수님 안에 뭐가 되어 있느냐 하면, 칸이 있어요. 여기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신의 자리가 있고, 그 다음에 인간 자리가 따로 있는데 인간 자리를 둘로 나눠요.
인간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이 예수님이 갖고 있는 구원의 메커니즘, 장치입니다. 그런데 바깥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사람이 있잖아요. 인간은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인간은 영혼과 육은 죄로 말미암아 다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혼과 육 가운데는 영혼은 깨끗해요. 순진무구해요. 그런데 죄 있는 육신으로 왔잖아요. 로마서 8장 3절에 의해서.
그러니까 이 육신은 많이 봐주는 거예요.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지니사 죄를 용납할 수 있는 귀싸대기 맞아도 맞을 수 있는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줄 수 있는 그러한 융통성이 있는 영역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기껏 뭐가 보이느냐 하면, 예수님이 보이잖아요. 만만한 예수님이 보이죠.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향유 붓고 눈물 흘리면서 예수님 발을 씻어줬잖아요.
이게 옛날 구약 때 시내산 같으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거기 모세도 벌벌 떨면서 올라갔는데. 어데 다른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해요. 만나면 죽어요.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고요. 삼손 아버지, 엄마도 그렇게 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사자 만나서 이제 죽었다고. 야곱도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이젠 난 갔구나. 생각했잖아요. 살려달라고 비니까 복 받아서 살았지만. 그런데 그거는 구원은 만만치 않은 겁니다.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만만한 쉽게 대화가 가능한 숙식을 같이 하는 그러한 분이 왔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영혼이 다 썩었으니까 예수님 당시는 육과 육으로 만날 수 있지요. 왜냐하면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눈이란 육 아닙니까? 육은 육이거든요. 예수님의 형체가 보이잖아요. 오늘날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뭘 동원해야 돼요? 영혼을 동원해야 된다고. 영혼을 동원해야 된다는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우리를 건져내는 접촉점으로 영혼을 생각하는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제가 지금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한국개신교 목사들 설교 한번 따져보세요. 그들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교인들과 접촉점을 어디로 잡는가 한번 보세요.
그 영혼의 속성 중에 하나가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간절함이에요. 그러니까 목회 의외로 쉽지요. 죄악된 영혼, 육 가운데서 지금 육은 일단 안 보이니까 예수님은 안 보이니까. 본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기도 많이 해야 되는 거고. 영혼 가지고 작업에 들어가거든요. 영혼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양심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하면, 어떤 나쁜 놈도 유영철도 양심 있다고 합니다. 그 GPS 자기 동료, 선배 일곱 명, 여덟 명 죽인 놈도 나, 죽을 때까지 바르게 살겠다. 이따위 소리하고 있다고.
양심이 있습니다. 하면 아멘하지 나, 양심 없는 개요. 이런 인간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 사람들의 가치를 논하고 싶다. 당신은 양심이 괜찮습니다. 하면 사람 뿅 갑니다. 가게 되어 있어요. 양심에 호소하는 거예요. 출산드라가 양심에 호소하잖아요. 삐쩍 마른 자들은 가라! 뚱뚱한 사람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먹습니까?
사람이 교회 올 때는 본인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서 옵니다. 본인의 가치가 있는데 아무리 내가 인간 덜 되도 뭔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구원받을 가능성을 접촉해 주는 게 뭐냐 하면, 양심이라는 겁니다. 오늘 8월초에 할 강의 다한다. 할 수 없다.
양심에 호소합니다. 양심의 기능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후예들이 많이 연구 다 해놨어요. 해보니까 양심 기능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열심 내는 것, 지성이면 감천되는 것. 양심껏 살면서 간절하게 요청하면, 이런 양심을 주신 하나님이 양심을 썩히라고 줬습니까, 그걸 발휘하라고 줬습니까? 그들이, 그거는 양심은 마음껏 발휘하라고 준 거잖아요.
그러면 양심을 발휘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의 뜻에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신께서 요구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양심에 의해서 간절함을 부리면. 그러면 신께서 고개 끄덕이면서 너는 다른 사람보다 간절함이 이렇게 넉넉하니 내가 어찌 너에게 복을 주지 않으리오. 히스기야의 기도를 본받아라. 또는 한나의 기도처럼 간절함으로 기도하니까 없는 아들 생겼잖아. 하는 식으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아, 내가 잠자고 있는 양심을 교회 와서 깨우침 받았으니까 나는 이제 살만한 희망이 있다. 기대감을 가질 수 있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가능성이에요. 오늘 끝났다. 이게 가능성이에요. 가능성을 깔짝깔짝 건드려서 가능성을 개발해서 그 가능성으로 신에게 접근해 나가는 이런 것을 지금 교회에서 다 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게 자리가 뭐냐? 영혼이라는 자리에요.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신과 인간의 공유적 속성이라 해요. 공유적 속성이라 하는 것은 같이 공히 같이 존재하는 어떤 속성이에요. 수학으로 말하면, 공집합이죠. A라는 집합과 B라는 집합 속에서 서로 만나는 면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만나는 그 면적을 공집합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담배 피우나? 나, 담배 냄새에 민감해서 큰일 났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지었다 할 때 아까 인간들은 그 존재에 의해서 행위가 나온다 했잖아요. 지금까지 칸트까지의 신학은. 그러면 나쁜 행위가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쁜 행위가 나왔다는 말은 이쪽에 존재 쪽에 문제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이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기존까지의 신학은 뭐냐 하면, 인간이 몸이 잘못된 게 아니고, 영혼이 잘못 된 거예요. 영혼이 죄로 물든 겁니다. 이게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전수받아서 아담의 죄가 줄줄 내려와서 영혼에 문제 있다는 거죠.
그러면 영혼의 문제는 어디 푹 담가서 씻어내야 될 필요가 있잖아요. 어디에 담그느냐? 이 영혼을 어디 담그느냐 하면, 아까 예수님이라는 분이 아까 했지요. 예수님 안에는 뭐가 있다? 신의 자리가 있고, 왜냐? 신성과 인성이니까. 신의 자리 있고, 어디 자리 있습니까? 인성의 자리 있지요. 신성의 자리는 접근 못한다 했지요. 만나면 죽으니까. 그래서 인성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지요.
인성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데 인성의 자리가 인간과 예수님의 만남인데 예수님은 지금 눈에 안 보이니까 예수님 육체가지고 안 되니까 영혼에 들어가야 되는데 영혼은 예수님 순수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할 때는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그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육체가 육체의 죄에 자신의 영과 육을 여기다가 합체시키면,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의 영혼이 영육 간에 받을 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저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해소가 되었지요.
십자가는 뭐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죄를 씻어주는 거잖아요. 우리 대신 저주받은 곳 아닙니까? 제 말 안 틀렸지요. 그러니까 우리 죄를 씻어주기 때문에 여기에 합세를 하게 되면 예수님이 안고 있는 그 죄가 곧 우리 죄기 때문에 그 죄가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을 때 뭐도 함께 씻게 내려가는 거예요? 우리의 죄도 함께 씻겨 내려가고 씻겨 내려가는 동시에 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성령이 역사하니까.
성령께서 이렇게 된 사람을 어느 방으로 인도하느냐 하면, 영혼 방으로 인도해줘요. 예수님의 영혼은 어떤 영혼이냐 하면, 거듭난 영혼이죠. 그게 거듭난 영혼이잖아요. 그 거듭난 영혼이 죄의 영혼을 대체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의 영혼을. 이걸 새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쪽 이론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우리의 영혼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영혼으로 대체해 버리면, 우리의 영혼은 순수한 영혼이 되고 순수한 영혼이 되었으니까 순수한 자아가 되었지요.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 되었잖아요. 새로운 피조물 되니까 행동하는 것이 뭔가 거기에 걸 맞는 깨끗한 행동이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이 깨끗한 행동을 나오기 위해서는 여기에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과 이 행위를 결합을 시키지요. 결합을 시키면 예수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은 이 산상설교부터 해서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들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 행동을 보고 본인 자신이 구원 받은 자냐, 구원 안 받은 자냐? 측정해보라 이 말입니다.
이런 이론이 지금까지 천주교와 개신교의 이론입니다. 칼빈이든 루터든 전부다 이런 이론입니다. 길게 이야기했는데 길게 이야기한 게 이게 맞느냐 이 말입니다.
이러고 싶지요. 왜냐하면, 근본의 출발점에 뭐가 문제냐 하면, 교회에 온 사람이 뭐부터 무슨 생각부터 합니까? 나는 나의 준재의 가치가 뭐냐? 나는 왜 사느냐? 나는 사는 이유가 뭐냐? 나는 어떤 가치가 있기에 아직 살아 있느냐? 자기 가치를 챙겨보겠다는 의도에서 교회 나왔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그들에게 덤터기로 집어넣어 준 신학이 이 신학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은 행동 똑바로 하면 당신은 구원 받은 사람 맞습니다.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런데 행동을 똑바로 못 했을 때 그런데 가만히 말은 들어보면 맞는데 살다보면 행동을 똑바로 못하거든요. 행동을 똑바로 못할 때는 행동을 똑바로 못한다는 말은 내 자아성에 뭐 문제 있다 이 말 아닙니까? 행동 똑바로 했을 때는 나, 거듭났구나. 했다가 갑자기 행동을 똑바로 못할 때는 나, 거듭나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불안감이 있지요.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튀어나온 게 뭐냐? 연옥이라. 연옥. 그게 연옥인 거예요. 당신 힘으로 죄 해소 안 됩니까? 안됩니다.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고 난 뒤에 패자부활전 자리가 또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정화의 불이 있어서 카타르시스, 정화의 불이 있어서 그 불이 당신의 죄를 말끔히 해소하고, 죄 없는 상태에서 천국에 슛 골인 합니다. 라는 게 천주교의 연옥설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문제점이 뭐냐 하면, 불이 죄를 씻어줍니까? 야, 이게 이제 문제에요. 불이 죄를 씻어줍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여기에 불교신자 가는 사람, 목 조르고 권총 들고 위협하면 예수 믿습니까? 막 찌르고 막 째비고 팔 비틀면 예수 믿습니까? 그 사람이. 아담은 좋은 환경에서도 하나님 안 믿었습니다. 사람이 고생한다고 믿음 나올 것 같으면 고생 자진해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12세기에 연옥을 만들어놓고부터는 그 연옥에 안 가기 위해서 미리 앞 당겨서 연옥의 아픔을 미리 감당하는 것이 루터의 계단 오르기에요. 지금까지 루터의 계단 오르기가 단순히 자기 의를 쌓기 위해서 그랬다고 알고 있잖아요. 제가 조사를 해보고 연구를 해보니까 그게 아니고 연옥설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루터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에다가 이제는 십자가 위해서 증인 되고자 사람이 바뀐 거예요.
뭐가 새사람인 줄 알아요? 나 천당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사람이 바뀐 것이 새사람입니다. 루터 당시의 천주교는 연옥이 그렇게 무섭게 연옥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연옥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퀴나스는 연옥에 대해서 여덟 가지, 아홉 가지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기를 연옥의 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벌보다도 혹독하다고 봤습니다. 초반기의 연옥은 지옥과 가까워요. 지금의 연옥은 천국과 가깝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연옥이라는 중간단계가 있어서 그 중간단계에 있을 때는 성당에서 네 가지의 일을 해야 돼요. 이번 강의에 연옥을 왜 집어넣었느냐 하면, 지금 개신교가 유사 연옥설 다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를 내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 연옥에 있는 자기 친척이나 꼭 아는 사람. 자기 애인이나 자기 아들이나 꼭 자기 엄마나 다른 사람은 안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데 네 가지만 하면 연옥에서 빨리 빼낼 수가 있어요.
네 가지가 뭐냐 하면, 성당 미사 드리는 것. 그 다음에 중요한 게 있어요. 보시, 불교에서 보시하지요. 이게 뭐냐? 헌금이에요. 그 다음에 금식. 그 다음에 통보라 해서 대도. 이 대도가 개신교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중보기도에요.
왜 갑자기 십여 년 전부터 중보기도 생겼는지 압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 되서 그래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까 소비자 입맛에 맞추어야 돼요.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돼요.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로 승부를 건 겁니다. 중보기도 하니까 교인들이 비로소 교회에 나오는 보람을 느끼고 속이 시원해요. 왜냐하면, 불효자 되기 싫거든요. 나만 예수 믿고 천당 가면 좋은데, 그러면 3대손 할아버지, 4대손 우리 할아버지, 그 사람 지옥 가 있는데 어떻게 할 수 없느냐?
산 자가 죽은 자를, 감사합니다. 서경수 목사님, 연옥 안 가겠다. 이렇게 연옥의 행위를 미리 앞당겨서 고생하기 위해서 비 맞으니까. 결국 비 맞는다 하는 것은 연옥을 앞당겨서 하는 거예요. 앞당겨서 착한 일 하면, 연옥에 가는 기간이 짧아지잖아요. 그걸 가지고 계산한다 하는데, 양적으로 회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부 정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여담입니다만 우리나라 유명한 김영임 씨가 불렀던 창 가운데 회심곡 있지요. 회심곡 1절 말고 3절, 4절 다 들어봤습니까? 전 어릴 때 3절, 4절다 들었습니다. 거기 보면 1절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부모한테 효도하라고 나옵니다. 3절, 4절, 5절에 가면 뭐가 나오는 줄 압니까? 염라대왕의 인도함을 받아서 문하나 열 때마다 어떤 혹독한 고문 받는가? 다 나옵니다. 그게 동양식 연옥이에요.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죽은 자가 그 효과를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산 자가 그냥 되도 안는 산 자, 농땡이 신자 같으면 기도발이 적어요. 그런데 이게 희성식 하거든요. 성당에서. 희성식이 뭐냐 하면, 기도발이 괜찮은 성자들의 그룹에 집어넣어요. 성 베드로요 성 안나 나오지요. 이 성자들은 이거는 보통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서, 성자 중에 최고의 성자가 누구냐 하면, 성모 마리아입니다. 어디가도 여자가 요새 대장질하는데. 마리아의 기도는 죽은 4대손, 100년 죽었던 자기 엄마도 천당 보냅니다. 그러니 성당에 나올 맛이 나거든요.
또 뭐라고요? 보시. 보시라 하는 게 뭐냐? 기부죠. 보시를 하기 위해서 재산을 자식한테 주지 말고 그것을 성당에 갖다 바쳐버리면 성당에서 보시한 사람의 명단을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죽은 자에게 효과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리스트에 올려버립니다. 쉰들러 리스트 정도는 아니지만 하여튼 리스트에 올려버려요. 그러면 그 리스트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인터넷 해서 죽은 연옥에까지 갑니다. 연옥에서 지금 사무원들이 인터넷에서 받습니다. 리스트를 찾습니다. 연옥의 몇 째 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 불 속에 있는 사람을 빼내어서 보직이 괜찮은 보직으로 옮겨요.
이것 때문에 십 세기부터 13 세기까지 거대한 성당, 200년, 300년 성당 건축 다 했습니다. 뭐, 면죄부 그것 해서 돈 되지도 않아. 이런 연옥설부터 해서 거대한 성당들을 국가 국왕들의 프로젝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경쟁적으로.
그리고 성당을 크게 지으면 이것은 구약의 역대기, 열왕기상에 나오는 것처럼 남쪽에 있는 유다나라 성전보다도 북쪽에 있는 벧엘 신당이 더 나으면 사람들은 어디에 안 갈 가능성이 많아요? 남쪽에 안 가고 북쪽에 있는 벧엘 신전에다가 거대한 8월 15일, 광복일날 거대한 속죄일을 벌이잖아요.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으로 안 갈 수가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미래까지 보장받으려 하는 AIG, 달랑달랑. 생명보험에 넣듯이 미래에 자기를 보장받으려는 인간들의 자기 보존 본능이죠. 자기 보존 본능은 바로 이러한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기 보존 본능은 자아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영원성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걸 옛날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영혼불멸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특징은 그 밑바닥에는 영혼불멸설이 있고, 영혼불멸설을 가능하게 하는 그 기법, 기술이 뭐냐 하면, 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문화인류학과이라든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비교종교학과, 그 사람들이 연구하는 주로 테마가 뭐냐? 주제가 뭐냐 하면, 어느 종족에서는 조상 숭배를 할 때 무슨 기법을 사용해서 조상 숭배를 했느냐? 하는 게 나옵니다. 그 나오는데 아프리카나 아프리카 오지 같은데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뭘 사용하느냐 하면, 놀랍게도 충격이에요. 뭘 사용하느냐 하면, 조상의 피와 조상의 살점을 먹습니다. 아, 놀라운 거죠. 전혀 안 놀라네. 나 혼자 놀라네. 전 세계의 미개한 종족들에 아직도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적인 본성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문명의 때가 아직 묻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그대로 남아있다 말이죠.
어제 딥 임팩트했지요. 혜성에다가 쏘았잖아요. 쏜 이유가 혜성은 우주가 태양계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 그 성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자꾸 돌아다니기 때문에. 한군데 있으면 늙는데, 자꾸 돌아다니니까 맨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유지하기 때문에 그 성분을 알기 위해서 한 것처럼, 오지의 아프리카나 미개한 인도네시아나 그런 종족의 미개한 종족들의 종교 영역에 보면,
태초에 인간들이 처음에 소규모 몇몇 안 되는 소규모 집단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상상력을 갖고 있느냐, 이미지를 갖고 있느냐가 밝혀졌습니다. 그건 뭐냐? 통고. 통고란 말을 기독교에서는 잘 안 쓰지요. 들어봤습니까? 통고. 또는 통개. 하여튼 이렇게 저쪽 세계와 저승과 이승이 서로 교통하는 것.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게 히브리서 11장인가. 히브리서 잠깐 한번 봅시다. 지금 좀 산만해도 참으세요. 산만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 가지를 다 끄집어내기 때문에.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보면, 12장 22절부터 23절. 제가 읽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을 신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보면 이미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은 한 곳에 모여 있고, 그 모여 있는 곳을 뭐라고 부르냐 하면, 교회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 교회라 하는 것이 처음 나와요. 보통 교회는 어디 있다고 봅니까? 이 지상에 있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는 지상에 있다고 교회를 안 보고, 어디를 교회로 봅니까? 지상에 있는 것은 그냥 진짜 교회의 하나의 그림자고 흔적이고 자국에 불과하고. 타이어 지나간 뒤에 자국은 남지만 타이어는 없잖아요. 그 현장에 없잖아요. 타이어는 저기 가 있잖아요. 그런데 타이어 지나간 타이어 발자국 남잖아요.
그러면 이 땅의 교회는 뭐냐? 그냥 발자국이라. 타이어 자국. 뭔가 있었어. 있었다 말이야. 하고 그냥 뭔가 있었다는 흔적만 보여주는. 그것만 보여주고 진짜 교회는 실상 어디가 있느냐 하면, 저기 있다면 꼬리고. 몸체를 찾아보니까 어디 가 있어요? 하늘에 몸체가 있는 거예요. 그게 교회에요. 그게 장자들의 총회. 그러니까 대한예수교 합동 측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죠. 장자교단하고 상관없는 거죠. 장자들의 총회다 말이죠.
이러한 유사한 아이디어가 그러한 아주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토속, 소규모. 대규모 같으면 물이 들어서 안 돼요. 대규모가 되면 국가가 되고, 현대 행정법이 들어와서 그 다음부터는 미신타파해서 다 날아가 버립니다. 새마을운동 해서 옛날 잠재되어 있던 모든 종교적인 상상력이 다 없어져요. 미신타파해서 무당들 없어지고. 그러니까 그건 안 되고. 숫자가 적을 때는 아직도 전통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숫자가 많아지면 질서 때문에 행정력이 강화되어서 전체가 다 깨져버리고.
그래서 소규모, 소규모를 찾다보니까 찾는데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아버지의 시체와 피를 먹습니다. 피를 먹고 아버지를 이제 화장해서 보내버려요. 보내버리면, 지금 이 몸도 아버지, 어머니가 주신 몸이고, 그 몸에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이라고 준다는 게 뭐냐 하면, 아버지의 신체적인 피와 살을 먹었으니까 이로써 자식은 영원히 죽어도 누구와 만납니까? 죽어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만나서 한 가족을 이루니, 죽어서 한 가족을 이룬다면 죽음 자체가 별 의미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미가 없다면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단 말이죠.
참, 사람들 머리 좋죠. 내가 죽는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이미 죽었던 사람과 결속력을 다짐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죽음이 주신 공포, 거기서 해방되는 거예요. 죽음의 공포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자연의 우발성이죠. 갑자기 사냥 나갔는데 사냥하다 다 죽었다든지. 코끼리 다 죽었다든지. 갑자기 태풍이 불어서 집 다 날아간다 할 때 그 토인들은 뭘 느낍니까? 이제 죽었구나. 이제 죽었구나. 느끼죠.
그러니까 죽음을 느낀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이거는 불행이잖아요. 불행이니까 인간의 본능상, 인간의 본성상 동물처럼 불행에 닥칠 때는 그걸 피하고 싶지요. 그 피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죽음 자체를 눈 감고 아옹하는 식으로 죽음 자체를 종교적인 힘으로, 신적인 힘으로, 영적인 힘으로 무당이 와서 무당질함으로써 이걸 완전히 벗어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병을 뭐로 보느냐 하면, 공포에서 온다고 봤습니다. 그 공포가, 왜 공포가 오느냐 하면, 공포라 하는 것은 미지, 모르는 것 때문에 사람이 공포가 오고, 그 공포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갑자기 애가 실실 아프다든지 실실 헛소리한다든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미지의 세계가 정체가 뭐냐? 뜯어보니까 미지 속에는 죽었던 유령들이 빨리 제자리 가야 할 텐데 이게 무슨 한이 맺혀서 자꾸 떠도는 거예요.
떠돌 때 토마스 아퀴나스 그전에 있는 신학자, 알베르투스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죽은 자리, 연옥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자기가 살던 곳이 연옥이라는 겁니다. 현재 이 동네가 무슨 동이죠? 좌천동이죠. 좌천동에서 어제 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 할머니가 유령이 저기 오는 거예요. 그래서 가면 되는데 이게 한이 맺힐 때는 아직 할 일이 있을 때는 안 가거든요.
안 가니까 그것이 미지가 안 가니까 사람은 그걸 다룰 수가 없으니까 죽은 영을 다룰 수 없으니까 그 다음은 실실 앓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자꾸 난데없이 뭔가 퍽퍽 일 때는 본인의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의욕을 잃어버리니까 점점 더 기괴한 상상력을 동원하니까 아프잖아요.
그때는 무당이 가서 어이, 귀신아, 빨리 이제 가거라. 뭐라고? 뭐, 잡채를 안 해 줬다고? 잡채 줘라. 귀신 잡채 먹고 싶다고 해. 잡채 주고, 맛있지? 맛있다. 가거라! 사실 잡채, 지가 먹으면서. 사실 지가 무당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 줘야 위로가 되니까.
부흥사들이 왜 자꾸 떠드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그 메시아의 모습을 자기가 대행해서 보여줘야 그들이 부흥회에 참석한 카타르시가 다 되는 겁니다. 눈동자는 휑해서 뚱뚱한 자들은 가라. 삐쩍 마른 자들은 이리오라. 이게 눈동자 보면, 흉내 내거든요. 모유 뭐, 이렇게. 다 보면 이게 상상했던 우리가 기대했던 바를 그것을 대신함으로써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소하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유대감이 연대감이 형성되고 유대감이 끊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로서 위로를 받겠다는 겁니다. 이 모든 연옥설이나 이 모든 것이 모든 장치가 결국은 존재의 영원함인데.
여기서 이제 오늘 본 강의입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입니다. 서론 하다가 많이 갔는데. 피히테는 말하기를 지금까지 자아에다가 영혼설을 부여해서 이거는 신성이죠. 신성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라고요? 이걸 영혼이라 했죠. 왜 영혼입니까?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생겨 먹었으면 전부다 뭐가 있다? 신성이 있고, 그 신성이 영원하기 때문에 영혼이 영원하기 때문에 사람은 안 죽고 살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다. 라는 희망을 갖는 거예요. 그러나 피히테는 말하기를 자아가 어디 있느냐?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아 다음에 비자아, 대립자아. 자아 다음에 대립자아. 어렵지요. 비자아. 어렵습니다. 용어 자체가.
나가 있을 때 나 아닌 타인이 아니고 타자가 아니고. 나 아닌 또 다른 나. 나를 상상하는 거예요. 나가 일단 설정될 때부터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또 내 바깥에 세워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죠. 진짜 나는 여기 있고 그 다음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머리 속에 상상해서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상상한 나를 향하여 그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행동에 나섭니다.
교회이야기해 볼까요. 자, 내가 교회에 왔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강대상에 목사님이 설교하십니다. 뚱뚱한 자들은, 아니 비쩍 마른 사람들은 가라 해쌓고. 부흥사 가운 입고 설교하고 있는데 여기 분명히 자아가 있죠. 나가 있죠. 입을 벌리면서 콧방귀 픽픽 뀌면서 설교를 한다 말이죠. 설교를 듣는 걸 보니까 여기에 이런 인간이 되어야 됩니다. 고 어떤 자아상을 내세우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자아상이니까 이런 내 자아를 목사님 원하는 자아로 바꾸는데 여기에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여기에 행동이 따른다 말이죠. 행동이 따라서 자아가 될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이 행동을 하게 되면 이런 자아가 이미 되리라. 그러면 이미 이런 자아가 거기다가 중복해서 덮쳐버립니다. 야, 어렵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여기 목사님이 이야기한 성도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하니까 우리 생각에는 아, 앞으론 저렇게 될 거야. 라고 생각하죠. 그게 인간의 자아가 아니란 말이죠. 그게 아니고, 마치 이미 된 양 여긴다 말이죠. 나는 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행동이 나와야 된다. 이렇게 본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칸트는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피히테가 말하기를. 이런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의 똑똑한 자들아, 다 내 앞으로 와라. 왜? 너희들은 내가 생각한 이걸 모르느냐? 인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모르느냐 말이죠.
자, 그럼 여기 자아상이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예수를 본받아야지. 그렇게 생각해서 본받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라면 이런 행동 나올 걸. 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를 바라보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게 인간의 자아라 이 말입니다. 기존의 우리의 모든 자아상이 깨지지요.
다시 정리합시다. 고함친다고 믿을 건 아니지만. 기존의 자아상은 뭐냐 하면, 내가 자아가 여기 있고 내가 되고 싶은 자아가 저기 있는데 아직도 그만큼 비어 있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면 접근해 나가겠다. 하는 것이 기존의 칸트까지 인간의 자아상이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실제로 자아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따지고 보면 그게 아니고 이미 내가 그 사람이라고 된 양 여기면서 행동하면 노출되 나가는 것이 이게 자아라는 겁니다. 자아가 자아를 속이는 거예요. 날마다. 며칠 동안 매일같이. 몇 시간동안? 매 순간마다. 매 순간마다 자아가 자기를 속여요. 성경에 보면 스스로 속는다 하죠.
사실은 이런 감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감을 잡았어요. 옛날의 중세 철학자도 연구 맨 날 생각하니까 감을 잡았는데 그들은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페르소나. 인격. 인격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면. 모든 인간은 가면을 덮어쓰는 거예요. 가면을 덮어쓰는데 피히테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과 가면을 주장하는 사람의 차이가 뭐냐? 사람은 가면을 썼다고 되어 있잖아요.
피히테는 그게 아니고 가면이 곧 본인이란 말이죠. 가면이 따로 있고 자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곧 가면이란 말이죠. 그럼 실체는 어디 있나? 실체는 본인이 모르지, 뭐.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합니까? 실체는 본인이 몰라요. 계속 가면만 바꿔 쓰는 거예요. 이 사람 말 들으면 저거 되고 싶고.
부산일보의 경제란에 보면, 부동산 재테크 이렇게 하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 13억 돈, 대출 받아서 집 사놨다가 집값 날아가서. 요새 은행에서 싼 대출 해주는 걸 뭐라 하느냐 하면, 모기지. 모기지 이자 갚는 게 부담이 되더라. 따라서 그렇게 하지 말고, 두 채 사서 한 채 오를 때 한 채 팔면, 한 채 팔고 이쪽 은행이자 갚으면 됩니다. 라고 그렇게 났어요. 꼭 투자할 때는 신도시 주변에 투자하세요. 재테크 방법이 나왔거든요. 그걸 누가 봅니까? 자아가 보잖아요. 자아가 볼 때 내가 그렇게 되어야지 하고 보는 게 아니고, 이미 집이 두 채 있다 생각하고 행동에 나선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기존까지는 어떻게 봅니까? 아이고, 내 집도 없는데 무슨 두 채냐 노력해 볼게. 하는 게 아니고 그걸 보는 순간부터 되던 안 되던 간에 이미 두 채라고 생각하고 두 채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상상을 펴서 이걸 팔까 말까 혼자 하다가, 다시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면 은행대출 받아서 일가족 자살함. 이렇게 나오면, 아아, 나 그거 안 해. 라고 다른 가면을 쓰는데 가면을 쓴다는 말은 실체는 따로 있는데 가면을 쓴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피히테는 그게 아니고, 가면 자체가 자아의 본 모습이란 거예요.
이제부터 피히테가 보는 하나님. 신학. 지금까지는 자아론이잖아요. 자아론. 피히테 이전은 신이 있다면 신이 있다는 존재부터 시작해요. 신이 있고 내가 있다. 하는 자아상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칸트도 마찬가지고. 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만약에 신이 없다면 내가 없는 거예요. 이게 칸트까지의 신학이었고 철학이었습니다.
피히테는 그게 아니에요. 피히테는 자아를 그러니까 여기 신이 있고 내가 있다 했는데 이 나라는 것이 피히테가 봐서는 이게 문제 있다 했지요. 왜냐하면, 내가 자아가 있다 했는데 자아가 있다 할 때 이 자아는 늘 바뀌는 자아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는 말 자체도 있음이 아니고, 자아 자체가 뭐로 본다 했습니까? 자아 자체가 행위. 이걸 어려운 말로 사행이라 하는데, 이건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설명 안 하겠습니다.
그냥 자아라 하는 것은 행동하는 뭔가 있으면 그게 자아다 말이죠. 어어, 저 사람 달리네. 하면 그게 자아인 거예요. 말아톤 보면 애 뛰잖아요. 이 예가 적당하네. 말아톤 영화 보면 정박아가 뛰죠. 그런데 말아톤 정박아, 그 애가 안 뛰고 천천히 걷는다든지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그 애가 말아톤 주인공인지 몰라요. 그 애는 늘 뛰어야 돼. 가수가 노래할 때는 가수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가수가 노래 안하고 사업하면 그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 아닌 느낌이 들어요.
정준하라 하는 개그맨이 요새 개그맨 안 하고 탤런트 하면, 누구 정준하 보고 탤런트라 하겠습니까? 아직 여전히 개그맨이라 하죠. 한때 이미지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목사 되서 돈가스 집해도 역시 목사님하지, 어이, 지금 어디 배달하나 이러질 못한다 말이죠. 한번 사모는 영원한 사모지, 목사 그만 둬도 사모되듯이.
피히테는 그건 다 거짓말이란 거예요. 옛날 것 가지고 써먹지 말란 말이죠. 지금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지, 이외에 다른 말은 있을 수가 없다. 도대체 다른 진리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피히테로서는 하나님이 어디 실리느냐 하면, 자아에 실리게 됩니다. 그러면 신은, 이건 거짓말이죠.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신을 믿는 자아만 있죠. 그 자아도 행동에 따라서 달리 느껴지는 신이 있죠. 열 살 때 하나님하고, 열일곱 살 때 하나님하고, 서른 살 때 하나님하고 팔십 넘어 하나님하고 다르잖아요. 스무 살 때 예수하고, 사십 살 때 믿은 예수하고, 오십 다섯 살 때 예수하고 다 다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히테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자아만 있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아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예 없다는 거예요. 별이 없어요. 피히테는 별이란 게 없어요. 뭐냐? 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만 있어요. 그러면 별에 가보면, 별 가서 뒤져봐야 별은 없어요. 별에 가서 딛는 자아만 있어요. 이런 철학이 얼마나 진실 된지.
만약에 여러분, 별에 갔는데 자기 예상한대로 별이 마음에 안 들 때 너무 우울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내가 생각한 그 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별에 합당한 새로운 자아만 만들면 되니까.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별이 폭발했다. 폭발해도 괜찮아요. 한때 별이 있다고 믿었던 자아만 있으면 되니까.
자아가 영원하다. 자아는 영원하지 않아요. 다만 자아가 영원하다고 믿는 자아만 있을 뿐이에요.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은 없어요. 예수님 있다고 믿는 자아만 있을 뿐이에요. 자아는 영원하지 않지요. 자아가 영원하다고 믿는 자아만 있을 뿐이니까 자아는 영원하지 않아요. 이게 피히테입니다. 이걸 피히테는 절대자아라고 합니다.
이게 오늘날 젊은 애들한테 딱 맞는 철학입니다. 사랑한다. 우리 결혼하자.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 보니까 사랑이 식어졌다.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 게 뭐 있어요. 젊은 애들은 겁이 없어요. 사랑했던 그때 자아를 찾아가면 됩니다.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사귀서 헤어지면 그만 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결혼할 때부터 행복한 사랑받는 나를 위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 안받는 나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는 나가 용납 안하면 그만 아닙니까? 지금 난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내가 남편한테 사랑 못 받는다. 그러면 헤어지고 나를 사랑해주는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그만 이라. 이게 무슨 하자, 이 이론에 무슨 하자가 있느냔 말이죠.
젊은 애들 따집니다. 사람이 결혼했으면 이혼하지 말고 진득하니 살아야 되지 그 집 귀신이 되어야지 왜 자꾸 이혼을 생각하느냐? 젊은 애들이 이렇게 따집니다. 결혼할 때 내가 시집 귀신이 된다. 라고 생각했던 자아가 있었어요. 나는 결혼하면 시집 귀신 되는 자아가 있었는데 막상 시집가 보니까 이 자아는 그때 스물아홉 살, 여덟 살 때 결혼 당시의 자아고, 지금의 자아는 지금의 자료를 분석해서 이걸 모아 모아서 새롭게 정립한 자아뿐이란 말이죠.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옛날 형성된 자아상에 내가 어째 목맬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맞잖아요. 이 말 맞잖아요.
덥습니까? 문 좀 닫을까요? 시끄러워서.
하여튼 내가 지금 목이 아프다.
교인이 와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스물아홉 살 때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었을 때 내가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좋은 직장을 주실 것이라는 그런 예측을 하지요. 그런데 서른 살 때까지도 교회 다녔는데 취직자리 안 나왔습니다. 실망했지요. 그러면 교회를 안 나옵니까? 아니요. 교회 다닙니다. 왜 교회 다니는 이유가 스물아홉 살 때 희망을 버리면 그만 이에요. 지금 서른 살 때 갖고 있던 새로운 희망을 그걸 주워 모아서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면 되거든요.
그러면 교회 좀 다니고 난 뒤에 실망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실망을 일년에 너댓 번씩 합니다. 예수님한테. 실망해도 교회 가는 이유가, 예수님 말씀대로 될 수도 있잖아. 믿는 게 아니고, 가능성을 내다보는 거예요. 기대를 거는 것이지, 예수를 믿지는 않아요. 안 믿고 행여나 그럴 가능성을 있을 거라고 그런 희망을 갖고 그냥 계속 죽치고 되풀이해서 한번 믿어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교회에 99.9%에요. 대부분 믿음이 없어요. 믿게 되면 혹시 언젠가는 아다리 하나 되는 그런 기대인 거예요.
지금 예수 믿고 목숨 바친다 하는 것은 그건 판돈에다 자기 목을 다 거는 거니까 그런 무모한 짓은 위험한 짓은 안 하지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잖아요. 그건 사도 바울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하면 안 되죠. 몽땅 걸진 않고 다만 발 이렇게 했다가 또 실망하면 기도해 보고 안 되면 발 빼버리면 그만이고. 또 새로운 기도제목 만들어서 발 담가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뎅 넣다가 안 팔리면, 오뎅 빼버리고 다른 오뎅 넣으면 된다 말이죠.
진짜 믿는 자는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없는데, 가짜로 믿는 자는 죽을 때 되면 벌써 발 빼버립니다.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죽으려고 교회 다니나. 발 빼버리고 다시 좀 여유 있다 싶으면 발 넣습니다. 그냥 한번 믿어보는 거예요. 믿음은 없어요. 그래서 믿고자 시도, 츄라이 해보는 거예요. 그냥 시도해 보는 것이지 믿음은 없어요. 그러다 급하다 싶으면 쑥 빼버리면 그만이니까.
이게 바로 우리가 피히테 보고, 피히테, 뭐, 별도 없고 자기만 있다고 남도 없고 지 밖에 없다고. 저런 미친놈이. 하고 욕을 했지만 막상 가만히 상황을 보니까 결국 피히테 말이 맞아요. 절대자아. 이 세상에는 예수고, 하나님이고, 천당이고, 지옥이고 간에 결국은 나, 절대자아, 나 좋으라고 배치된 하나의 비품들이죠. 캐비닛 있고 테이블 있고 하듯이.
중심에는 내가 있는 거예요.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삼위일체고 나를 위한 성경이지, 나를 위한 교회고 그렇지, 어디 미쳤다고 예수한테 목 땁니까? 죽어버리면 나만 손해이게. 이러한 현대적인 사고방식이 이미 피히테부터 나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내가 이야기할 것은, 그러면 피히테가 하나님을 안 믿느냐? 천만의 말씀. 여러분, 하나님을 안 믿게 된다는 그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인 게 뭐냐 하면, 그게 피히테와 스피노자가 정리한 거예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무식이 폭로될까 싶어서 미리 허세를 부리는 것이 하나님 없다는 것이고, 사실은 하나님이 있다는 거죠.
하나님이 왜 있느냐 하면, 자아부터 시작합시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 이 자아는 어디서 나왔느냐? 이 자아는 어디서 나왔느냐? 그걸 알기 위해서 아까 비자아와 대립자아. 대립자아라면 반대라 하는데 그냥 비자아. 교재에 있는 것은 비자아.
계속해서 나가 아닌 것을 찾아서 그것을 또다시 나로 거기다가 이전시키는. 자꾸 여기다가 자리를 이동시키고 여기 자아가 되고 또 비자아가 되는 이렇게 해서 자아가 되는. 이렇게 해서 할 때 이게 행위가 되죠. 그러니까 행동 자체가 계속 자아에서 비자아, 비자아에서 자아가 되는데. 이런 행동을 하게 하는 이런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원본적인 자아가 있다. 그 자아를 절대자아라 해요.
절대자아는 이거는 사람들이 몰라요. 모르지만 정신 바짝 차리세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절대자아는 자아가 몰라요. 모르지만 자아가 현재 자꾸 움직이잖아요. 자꾸 새로운 비자아를 찾아서 자아 만들고 또 욕심 차려서 만들잖아요. 이렇게 움직인다는 말은, 이렇게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움직이지 않는 뭐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단 말이죠. 그 말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진짜 머리 좋은 사람입니다.
뭔가 자꾸 움직인단 말이에요. 이게 야고보서 1장에 나와요. 야고보서 1장에 보면, 그림자의 특징이 뭡니까? 내가 여기 가면 그림자 여기 있다가 여기 가면 여기 움직이죠. 그림자가 뭡니까? 자꾸 움직이잖아요.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해시계의 그림자가 뺑뺑이 돌지요. 아침에 있다가 오후 됐다가 저녁때면 사라지잖아요.
야고보서 1장에서 인간은 육은 움직이는 회전하는 뭐라 했습니까? 그림자에 불과하다. 야고보서에서 그림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림자를 바라보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림자를 낳게 하는 본체는 이 지상에 없고 하늘에 있다 하는 겁니다.
하늘에 있으니까 위로부터 은사를 내려 봐야지 자꾸 움직이는 이거 따라 가고, 돈 따라 가고, 여자 따라 가고, 남자 따라 가고, 맨 날 아파트 새로 넓히고, 맨 날 분주하게 새로운 비자아와 자아와 비자아와 난 저 사람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박세리 좋아하다 못 하니까 나는 박주영 좋아하고. 이것도 못 하니까 또 뭐 하다가. 박주영이 골 못 넣으니까 박지성이 또 좋아하고. 애들 하는 것처럼 자꾸 이런 거예요.
헤르만 헤세의 시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곧장 실증내서 다른 장난감을 찾거든요. 서유석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장난감을 갖고서 그곳을 바라보며~ 하는 노래 있어요. 옛날 노래인데 포크송에. 이게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시거든요. 인간은 하나의 전부다 장난감이에요.
교회도 장난감이고, 교회에서 노는 건 장난감 놀이, 교회놀이. 전부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전부다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한 장난감으로서 신성한 자극이 되는 장난감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한다는 것은 뭔가 자꾸 움직인다고 변화된다는 이 말은 변하지 않는 절대자아가 있다. 이 절대자아를 누가 만들었느냐? 이것을 가지고 피히테는 바로 신이 만들었다.
그러면 피히테가 신이 이런 절대자아를 만들었다는 것이 그럼 그게 우리한테 뭐가 중요하다 말이냐? 이렇게 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성경이 없어요. 하나님의 계시 필요 없어요. 교회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 그러냐? 피히테는 말하기를 성경이고, 교회고, 종교고, 기독교고 다 없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이 자체가 바로 신의 작용이다.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피히테가 이렇게 할 때 욕 얻어먹었지요. 피히테 이런 주장하니까 많은 교회에서 욕을 했습니다. 막 비난했는데 누가 싫어하겠어요? 성직자들이 싫어하겠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좋아하지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무슨 기도를 해도 신께서는 그걸 다 용납해 주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게 뭡니까? 자아가 새로운 비자아를 발견했다는 말 아닙니까? 발견해서 이 비자아된 입장에서 자아를 향하여 자꾸 이 비자아처럼 되라고 촉구하거든요.
어렵게 할 것 없이 쉽게 합시다. 지금 집이 한 채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산일보의 아까 부동산 재테크 봤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 두 채 주시면 한 채 팔아서 남는 이익이 한 천만 원 됩니다. 십일조 백만 원 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다 말이죠. 기도가 뭡니까? 현재 있는 것은 기도 안 해요. 현재 없는 것, 결핍을 가지고 기도하잖아요. 현재 나한테 없는 걸 기도하잖아요. 없는 걸 더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기도할 입장의 그 자아는 뭐냐? 이미 집 두 채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기도가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에 있잖아요. 니가 믿음이 없이 기도하면 백날해도 소용없다고. 그러니까 그 믿음이 그 믿음이 아닌데. 하늘의 뜻이 박혀 있는 게 기도인데. 사람들은 야고보서 1장을 보고, 맞아. 믿음으로 하면 된다. 이것 가지고 십 년간 밀어붙였는데.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지금 이해가 잘 안되는 게 자아에서 비자아, 다시 말해서 내가 되고 싶은데서 내가 행동이 여기서 나온다고 보는데. 피히테는 그게 아니고 이미 되었다고 여기고 행동에서 거꾸로 자아한테 행동을 퍼붓는다 이 말이죠.
너는 마, 행동을 똑바로 해. 행동 이렇게 하니까 집 두 채 안 생기잖아. 이제부터 두 채 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니가 행동하면 복을 안 줘서 집 두 채 안 생기지. 맨 날 집 없이 돌아다닌다고, 그러니까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래야 집이 두 채 생기지.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아는 이 자아가 아니고, 이미 집이 두 채 있다고 가정했을 때만 나오는 기도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런 기도가 무엇의 작용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무슨 작용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주신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기도 자체가. 그러니까 교회에서 뭘 해도 괜찮지요.
주여, 지난밤에 돼지 일곱 마리 낳았는데 일곱 마리 다 죽었습니다. 이번엔 돼지 일곱 마리 안 죽게 하옵소서. 이거는 무슨 뜻입니까? 이미 돼지 일곱 마리 이미 가졌다고 상상할 때 그 다음부터 기도가 되는 거예요. 기도하면, 맞아. 그때 참, 십일조를 안 냈구나. 십일조를 냈으면 일곱 마리 안 죽었을 텐데. 십일조를 내야하겠구나. 그 다음부터 십일조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돼지 일곱 마리 생겼다고 생각하고 그걸 얻기 위해서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그것도 목사가 와서 기복신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뜻대로 하지 말라 하면, 교인이 개뿔로. 개코로. 당신처럼 기복신앙 안 해서 작년에 돈 얼마나 벌었다고? 돈 한 푼 못 벌었거든. 목사 말 들어서 돈 하나도 못 벌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하시고, 나는 교회 와서 내 원하는 대로 하고. 그런데 우연히 7월 5일 부산강의 들어보니 이것도 신의 작용이라는 거예요. 피히테에 의하면.
잘 들어보세요. 피히테는 이겁니다. 목사한테 하는 이야기가. 피히테가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아가 있지?
목사는, 응응응.
그러면 자아가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서 재구성해 나가지?
응. 그렇지.
그러면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절대자아가 있지?
응. 있지.
그 절대자아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이게 있지? 피조물이니까.
응.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아에서 절대자아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가만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총으로 역사하지?
응.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돼지 일곱 마리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실제적으로 맞잖아. 하면,
응. 맞아.
그러면 너는 그걸 위해서 기도해 주면 그만이잖아. 뭐가 문제야. 문제 될 게 뭐가 있냐? 문제 될 게 뭐가 있어요. 이걸 어려운 말로 내 안에 신이 계신다는 이게 피히테의 신론입니다. 나의 존재함 자체가 신의 작품이다. 이게 피히테의 존재함이다. 아주 은혜롭게 이야기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이제 우리가 피히테를 공부할 필요가 있죠. 피히테가 오기 전 그전까지는 뭐라고요? 존재가 있고 존재가 착해야 착한 행동 나오고, 존재가 나쁘면 나쁜 행동 나온다 하잖아요. 피히테는 말하기를 나쁜 행동 없다는 거예요. 얼마나 낙관적입니까? 나쁜 행동 없다는 겁니다. 모든 나쁜 행동이든 좋은 행동이든 모든 것은 내 속에 있는 신의 작용이라고 보는 겁니다.
야, 이게 복음이 준 자유가 뭐 겠느냐? 예수 믿고 뭐든지 해도 된다는 그 말을 이보다 실감나게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이게 제일 실감나죠. 예수 믿고 뭐든지 해도 다 됩니다. 하나님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나 피히테 이야기나 동일하죠.
이런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이미 어릴 때부터, 기독교 분위기 뭔 줄 알아요? 그냥 교회 가고 이 정도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세례 주고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 다 시킵니다. 왜냐하면 성만찬 참석 못한, 또 한 마디 해야겠네. 성만찬에 세례 받고 죽지 못한 어린아이들 어디 가느냐? 림프스. 우리말로 하면 림보. 림보에 가는데 거기는 어린아이들이 가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제왕절개 수술하다가 의사가 잘못해서 죽은 애들. 이런 애들은 죽어서 어디 가느냐? 림보에 가는데 아이들이 림보에 가요. 그들은 왜 천당 못 가느냐? 부모의 원죄 때문에. 원죄교리 때문에 림보라는 게 있어야 돼요.
림보 따로 있고 예수님 오기 전에 있었던 죽은 아브라함과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이 있어요. 그건 조상 림보가 따로 있어요. 림보 따로 있고, 연옥 따로 있고, 천국 따로 있고, 지옥 따로 있고. 참, 주문 받으려면 식당주인 바쁘다.
원죄 때문에 그 애들은 거기서 그 원죄를 하나님 불로써 정화시키고 난 뒤에 가는데. 이런 림보에 안 가는 애들은 어떤 애들이냐 하면, 부모 잘 만나서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은 애들은 바로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
그런데 유아세례 주려하는 게 11시인데, 10시 반에 죽은 아이는 어디 가느냐? 그때는 역시 림보에 가요. 왜? 물을 안 묻혔거든요. 물 적시지 않았거든요. 물을 안 적셨거든요. 그러면 예배 11시에 했는데 세례식이 11시 15분에 하는데 14분에 지진이 일어나서 죽었다. 그때 역시 물 뿌림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 뿌리려고 하는데 그때 감전되어서 죽었다. 그때도 림보에 가요. 왜? 물을 안 뿌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그 당시 유럽에 피히테 당시 유럽에 모든 시민들과 모든 국민들이 어디에 꽉 매여 있습니까? 교회 없이는 천당도 없고, 성직자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이 꽉 배겨있는 상태에서 피히테가 이런 신학과 이런 철학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맞아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요새 시대가 아닙니다. 맞아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특히 피히테의 철학에 대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동안 가면 따로 있고 본체 따로 있어서 가면을 남을 위선적인 자기의 가면을 바꾼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이것이 아니고, 본체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 가면은 맞는데 가면 떼 내면 내 살점도 같이 떼 내고 내 자체가 소실되어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가면이 나고, 내가 곧 가면이고. 나는 하나의 가면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라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자아고. 이 자아는 매일 비자아를 찾아서 자기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찾아 헤매지만 그 헤매게 하는 자아는 절대자아를 못 벗어나고.
절대자아. 교재 보면, 이 자아는 한계성이 있고, 절대자아는 한계성이 없어요. 절대 한계성이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절대자아를 통해서 자아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피히테의 주장에 의하면, 거리에서 사람과 사람이 악수할 때 가면과 가면이 악수하는 거예요. 그리고 열일곱 살 때, 스물 살 때, 오십 살 때 세월이 달라질수록 각기 형편에 맞는 가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유명한 여성, 강의하는 사람 있어요. 이름 잊어버렸는데. TV도 많이 나오는데. '행복하소~서'하는 애 있잖아요. 그 사람이 어릴 때 그렇게 부잣집에 살았답니다. 그래서 부잣집에 사니까 자아가 부잣집 공주지요. 그러니까 행동하는 게 뭡니까? 공주에 걸 맞는 행동 나왔지요. 그리고 그러다 시집 왔는데 사업하다 망해 버렸어요. 완전히 외판원으로 나갔지요. 화장품 외판원에서 모든 외판, 직업 할 수 있는 것, 벌건 다 벌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자식 낳았으니까.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