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6 : 9-11 (다섯번째 인)
Re..계 6 : 9-11 (다섯번째 인)
이름 : 이근호(IP:)
성도의 고난
2006년 10월 1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성경은 ‘일곱 인의 개봉’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그저 자연의 변화 이외에는 별 느낌을 못갖고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지만 이것은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의 조용한 변동일 뿐입니다. 요란스럽지 않는 자연의 큰 움직임과 호들갑떠는 성경, 이 대립되는 소식을 접하고는 우리 인간들은 고요히 성경을 덮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서는 무시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믿는 자의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자녀를 갖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이스마엘이요 다른 한 사람은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식 중, 이스마엘을 거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생산을 믿은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혈육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딴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이 출생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자이지 결코 아브라함의 혈육적 능력의 소산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증거’를 가진 증거자로서 부각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찾아들었기에 이삭이라는 이런 자식을 낳게 되었음을 증거해야만 하는 증거자인 것입니다.
그런 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에게 말씀이 찾아듭니다. 마리아가 결코 임신을 원했던 자가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원치 않는 임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말합니다. “그저 말씀대로 하옵소서” 이로서 마리아는 ‘말씀의 증거를 가진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천사의 4종 세트가 온 사방을 휘젖고 다니면서 공중 폭격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육적인 인간들이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에 마냥 아름답지 만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합니다. 즉 충분하게 안심놓고 기댈 수 있는 세계가 이 자연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자연을 부수는 천사들이 활개치는 세계입니다.
그 와중에서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임해서 그 능력으로 말씀의 증거자된 구원자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천사 4종 세트는 인간이 마음 속에 쳐놓은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 경계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는 자신을 도와줄 숱한 착한 사람들이 대기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인 것처럼 여깁니다. 왕자나 공주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처럼 경계 안에서는 그렇게들 상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들게 되면 그 경계는 단호히 무시당합니다.
더 이상 경계를 칠 필요가 없이 아예 하나님 소유의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위 그때부터 영적인 사람이 된 겁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마태복음 5:29-30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신체 일부가 날아가 버린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과 팔자가 나쁜 쪽으로 바뀐 것이 아님을 알고 여유만만한 자가 영적인 사람입니다. 비록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어차피 자신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일하고 있음이 현실이라면 그런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큰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실정을 알리시는 수단이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입으로 외운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라는 분이 어떤 사태를 만들어내는 가를 본격적으로 발산시키는 중심지 역할하게 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32-34에 보면,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 충실하는 것이 자기 딴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지만 실상, 그 속에서도 인간들이 육적인 요소가 비난 받지 않은채 듬뿍 들어가 있는 겁니다. 결혼 생활로 인해 세상 염려로 마음이 이리저리 조개지고 갈라져서 제대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육신적 생활이란 이 사회에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부터 하여금 인간들의 능력으로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는 생명을 이미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생명이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힘을 못이겨내고 질질 끌려가는 생명이 있는 반면에, 죽음에서 튀쳐나온 생명이 있습니다. 죽음마저 붙잡아 놓을 수 없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생명이, 성도에게는 ‘증거’라는 이름으로 다 담겨 있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을 무딥니까? 에스겔 37장에 보면, 죽음의 해결 계곡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재빨리 건장한 군대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을 그 필름이 너무나 천천히 가니 그 생명의 위대함이 졸지에 다 보여지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이런 죽음조차 이긴 생명의 위력이 말씀을 통해서 발생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옛 운명이 새 운명으로 교체되고 있음을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의 입을 틀어막고 심판아래 두게 함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슨 노선에서 나옵니까? ‘율법 외의 한 의’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달성하는 화목제물로 인하여 생명이 주어집니다. 바로 이러한 교체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인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약동함을 날마다 느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몸이 이왕 우리 몸이 되지 않았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