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7:13-14 (좁은 문)
Re..마 7:13-14 (좁은 문)
이름 : 이근호(IP:)
좁은 문
2003년 4월 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7:13-14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멸망'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멸망'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들 끼리 잘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평소의 우리들의 생각에는 인간이면 모두 다 똑같은 운명의 길을 간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취미상 한 가족 안에서 어떤 이는 불교, 어떤 이는 기독교, 어떤 이는 천주교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 화평에 지장이 안되는 이유는, 그 어떤 종교보다 가족이라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 깨어질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분이 그 가정을 방문에서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종교 차원을 떠나서 그 사람을 단호하게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그 '멸망' 이야기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탄나는 것을 우려해서 말입니다. 즉 그 자기 종교에 대해서 어떤 교리를 펼치는 것은 허용하되 단, '지옥'이라니 혹은 '멸망'이라는 내용은 말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지키겠다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내용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치 코치도 없이 '멸망' 이야기를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께서 이 멸망 이야기를 끄집어 낸 취지도 함께 수용해야만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길'을 아울러 소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생명 길이라고 한다면 창세기 3:24에 맨처음 나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비록 생명나무로 통하지만 인간들이 가서는 아니되는 길로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즉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길로 들어 설 수 없는 것이 현재 인간의 실정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실상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길 없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별로 답답해 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노름꾼들이 둘러앉아 열심히 자기 패에 몰입하고 있을 때, 어떤 외부인이 와서 하는 말이, "여러분, 여러분들이 나가야 될 문은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면, 노름꾼들은 어리둥절하게 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노름에 열중하고 있기에 그런 길이라든지, 문이라든지 그런 것은 관심조차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들 노름꾼들처럼 몰입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나 '문' 이야기를 늘어놓아 봤자 젼혀 관심 밖의 문제일 뿐입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진정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자신들의 노름에 행운이 따르도록 큰 축복을 마구 마구 퍼부어주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길'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행운'과 '축복'이 아쉬운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멸망의 길', '생명의 길'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에서 '피신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을 따기 위한 노름에 몰두하고 있기에 이 장소를 떠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삼을 생각만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 안될 때는, 우선 욕심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내었나?'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욕심을 조정할 마음을 먹습니다. 스스로 욕심을 낮추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장하다는 칭찬과 더불어 신이 내린 축복을 상품으로 받을 궁리를 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욕심이며 어디까지가 욕심 아닌 것이 될까요? 과연 그런 기준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3:5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탐식이며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은 아예 욕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욕심의 땅에서 살다가 욕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셈이 됩니다.
무엇을 해도 땅을 쳐다보고 활동한다면 모든 것이 욕심입니다. 따라서 항상 우상숭배자인 셈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을 찾지마세요. 생명나무로 갈 수 있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제멋대로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먹구구식으로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종족, 어느, 어느 가정이든 나름대로 복과 저주를 받는 비법들은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길도 없으면서 길 대용으로 삼을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교회 봉사를 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 축복과 구원이 주어지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생각 자체가 곧 땅의 것에 관심을 두는 탐심이요 우상숭배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멋있게 살아도 그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와르르 무너질 집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영생을 전달합니까?
구약의 홍해가 갈라지던 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그 때 모세와 함께 있는 히브리인들은 절망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막강한 세계 최고의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홍해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길'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은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과 동일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도, 야고보서 1:15의 말씀처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이것은 곧 절망입니다. 살 길은 전무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공동묘지만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탈출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절망적인 자리에서 분명히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내셨습니다. 홍해에 흐르는 바닷물은 양쪽으로 물러가서 벽이 되어 서 있고 그 한가운데로 커다란 길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절망케 합니다. 성도의 자체적인 힘과 인격과 지혜와 행위의 능력을 총동원해도 그것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노력을 다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저 넘실거리는 홍해바다 뿐입니다. 길은 우리 인간이 힘을 다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요단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홍해바다에서 한 것을 생각해서 아무리 지팡이를 가지고 요단강에 대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절망을 느껴야 합니다. 인간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하고자 하는 방식은 기껏해야 욕심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요단강에는 길이 없습니다. 강물이 범람해서 언덕을 덮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아예 요단강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약궤를 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만 요단강 물은 멈추었습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 한가운데 길에서 돌 12개를 취하여 나중에 기념비까지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발이 요단강을 건너오자 물은 다시 합류해서 다시 언덕을 덮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길이란 없습니다. 찾아봐야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존재의 토대 자체를 쪼개시고 우리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만들어놓고 그 한가운데에서 나타나시므로 그야말로 예수님 그 분 자체가 '영생의 길'임을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 교회 올 때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수다떨고 재미나게 사귀는 재미로 오십니까? 그렇다면 그 기쁨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남에게 내세울 것이 없으면 교회에 발길을 끊는다든지 다른 교회로 옮겨서 자기 존재를 감추어 버리기 일 수 입니다. 진정 우리가 교회에서 얻는 기쁨이란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합니다. 멸망에 대해서 언급하신 그 말씀에 반해서 기뻐하야 하고, 영생에 대해서 언급하신 그 말씀 자체가 좋아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흔히 산이 좋아 산을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아담한 절간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불교에 열심히 심취한 불자들은 그 절에 온 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진정 산이 좋은 사람은 그 절을 잠시 구경하고는 그 절을 떠나서 계속 등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라는 곳에 매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곧 현실 세계임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출렁출렁거려야 합니다. 어디를 찔러도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보고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생명길을 원치 않을까요? 왜 찾는 자가 적을까요? 그것은 기존의 길을 버리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있는데서 모방하고 만들어낸 길은 인간들이 조작해 낸 엉터리 생명길입니다.
진짜 신앙은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 알고서 너무 너무 좋아하는 그 마음을 흉내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교회 생활에 재미를 갖지 마시고 예수님의 말씀에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많은 인기와 많은 힘과 재물을 은근히 원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진정한 기쁨과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을 유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