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 서울(의존교회) 060512 종말론 1-1
Re..06 서울(의존교회) 060512 종말론 1-1
이름 : 이장우(IP:)
06 서울(의존교회) 종말론 1-1
06. 5. 12 강의 이근호목사
하나님 아버지!
금요일 늦은 밤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옛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그 피가 오늘날도 여전히 저희들을 구원하는 능력임을 알도록 믿도록 조치를 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왜 십자가를 꼭 지셔야 하셨는지 왜 그것만이 다 이루었다고 하심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꼭 품고 가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종말론에 대해서 합니다. 종말론이란 끝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끝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장을 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나 연세가 드신 사람이나 끝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습니다.
자 그림을 하나 그릴 테니 어느 그림이 맞는지 한번 보세요! 여기에 길이 하나 있는데 이 길에 사람이 마구 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지 우리 인간이 헉헉거리며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고 달리고 이 길도 달리는 것입니다. 1번은 길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만 달리고 2번은 길도 사람도 다 달리는 것인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 예 2번이 맞습니다. 끝이 정답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 이 1번과 2번이 다 틀렸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정답이 무엇이냐? 3번이 있는데 3번이 어떤가 하면 우리가 식식거리며 달립니다. 우리의 소망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데 길이 이쪽에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중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각한 종말입니다.
장차 있어야 될 일을 미리 거기에서 원천이 되어서 마중 나오듯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는 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데, 지금 이렇게 된다면 장래에 있는 것이 지금 현재에 도착하였고 그것이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희미하게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얼굴과 얼굴로 보는 그것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천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지금은 희미하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장차 주님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써 놓고 있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이 먼저 확정되어 있기에 지금 우리에게 여러 일들로 조금씩,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헨델과 그레텔이라는 동화를 아십니까? 콩나물 올라가고 하는 그런 동화인데 집을 찾아오려고 돌멩이를 하나씩 던져 놓습니다. 그 돌멩이를 따라오면 어느새 자기 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서서 우리를 따라 오라고 돌멩이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던져진 그 돌멩이를 따라서 돌멩이를 던지신 예수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기 위하여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학생은 지금 몇 살이에요? 13살! 그러면 17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17살이 되어 봐야 그때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을 향하여 4년 동안 걸어갈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는데 17살 때에 전교 1등을 한다는-그럴 가능성이 희박하지만-그런 사건이 있다면 16살, 15살, 14살 때에 하나님이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그 사건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마중을 하고 과거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는 이렇게 본다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는 절대로 시간을 이렇게 보지 않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보기에 그 미래를 어떻게 하는가 하면 두 번째처럼 과거에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현재화되고 그것이 현재에서 더욱 새롭고 순발력 있게 또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또 지난번에 이야기한 돌연변이 속으로 또는 우발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진보 발전해서 점점 더 과거보다 향상된 미래를 이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더 나은 현재로 현재에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간다고 보면 과거를 버릴까요? 안 버릴까요? 안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탑을 높이 쌓을 때에 밑에 것을 빼버리면 와르르 무너지지요! 그러므로 탑을 점점 높이 쌓을수록 밑에 것을 더 단단히 해야 하고 확실히 해야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과거를 점점 더 확실하게 다지려고 하는 것이지 과거를 몽땅 다 버릴 생각은 추호도 안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지게 하시는데, 하나님은 과거를 잊어버려라! 사라지게 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하면 과거를 사라지게 하기는커녕 과거를 더 돈독히 하고 더 강렬하게 하고 더 집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지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과거가 오늘날 나를 만든다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써 보겠습니다. 지금 1번과 2번의 차이는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변화되지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다. 이런 생각인데 이것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놀았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찾아와보면 큰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면 옛날 그 골목이 남아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불도저로 밀어버려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만 변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세상은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다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하지 전에 남자가 당신이 나와 결혼하여 주면 손에 물도 묻히지 않게 공주처럼 살아가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면서 결혼을 한 것입니다.
아내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관심도 없고 친구하고 놀다가 늦게 오고 하니 아내가 남편에게 왜 당신은 결혼 전에 그렇게 말하여 놓고 지금 변하였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나만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도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변하고 사회도 변하기에 서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에 입는 옷을 지금도 입을 수가 있습니까? 어릴 때에 놀던 장난감을 중학생이 되어서도 가지고 놀 수가 있습니까? 마징가 제트 하면서 놀던 것을 장가가서도 할 수 있겠어요! 변하는 것입니다.
왜 변해야 하는가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바보취급을 하기에 그 사회가 어떤 사람을 요구하는가에 적응하면서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어려운 군대, 남들 다 가지면 저도 갔다 왔습니다. 군에서 제일 힘들다고 하는 것이 유격훈련? 아닙니다. 그러면 총검술? 아닙니다. 구보? 아닙니다. 무엇이 제일 힘 드는가 하면 나는 열심히 잠을 자야 하는데 보초를 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런데 보초 시간에 잠을 자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잠자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군대규칙에 의해서 영창에 가는 것입니다. 군에 감옥에 갔다가 오면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자꾸 길어지면 빨리 군에서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못하잖아요! 그래 시키는 대로 하자. 그래서 시키는 대로 보초 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잘했지요!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고 세상에 취직을 하고 보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나오면 사회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 저나 여러분이나 안 됐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느라고 자유를 반납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맛도 못 본 것입니다. 언제 자유를 잠시 맛보는가 하면 백수 될 때에 잠시 맛보고 끝나면 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미래에서 과거로 이렇게 주어지는데 우리 부모가 죄를 짓고부터 사람들 사고방식에는 미래 현재 과거 이것은 영 믿지를 못하겠고, 우리 몸에 딱 맞는,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더 찬란한 미래를 만든다는 이것이 몸에 딱 맞기에 하나님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벌이는 일과 우리가 실제로 몸이 느끼는 일과 안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맞으니 하나님이 힘드시겠습니까? 우리가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힘든 것입니다. 자꾸만 거꾸로 가니까 구역질나고 멀미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미래의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이렇게 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과거에 알던 것과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안 맞는데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나를 죽입니까? 어떻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 현재 미래 식으로 이렇게 가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몸에 딱 달라붙었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시는데 얼마나 엄하신지 숙제를 안 해가면 큰 벌을 내리고 숙제 해 간 사람은 그 다음 숙제도 면제해주고 칭찬도 많이 해주시더라는 것을 알고 숙제를 열심히 하였는데 그 다음날 숙제 검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그래서 선생님 왜 오늘을 숙제 검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선생님께서 오늘은 왠지 검사하기가 싫구나! 왜 안 하십니까? 내 마음이다. 너는 나를 믿으라고 하시, 그러면 내 계획과 맞지 않잖아요! 아니 선생님이 네 계획에 맞출 이유가 없잖아! 선생님이 내일 숙제 검사를 할 거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계획한 것이고 학생인 네가 계획한 것을 이 선생님이 꼭 따라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내하고 같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다면 따질 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내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면, 내가 이 세상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면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있게 되었다면 그냥 생긴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뜻이나 고집을 관철하려고 우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분을 위하여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 고집대로 하면 징계 받고 매 맞고 그래야 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대로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제가 기도합니다. 하는 것이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미래에 이미 확정되어 가지고 미래에 확정되어진 것이 현재로 들어와서 과거로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뜻은 무엇입니까? 과거에 내가 이 만큼 노력했으니 현재에 이만큼 성과를 얻었으니 이것에 따라 내가 미래에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만날 때에 누구의 뜻이 깨어지겠습니까? 우리의 뜻이 깨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신 분이시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그 순간에 아하! 내가 계획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따로 있었구나! 하면서 그때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깨닫게 된다고요? 내 뜻이 깨어질 때! 내 뜻이 성취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취 되지 않았을 때에,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하여 내 뜻이 무너졌을 때에 그 때에 이미 미래에서 만들어진 사건이 나의 과거에서 만들어진 사건을 내려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되는 것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손들고 선지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레미야 1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복중에 생기기도 전에 이미 예정되었기에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성령에 의하여 세례요한은 태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이고,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 같은 경우에 그 가정은 아기를 못 낳는 가정인데 힘센 삼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나실인으로서 희생할 것이라는 임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천사 세분이 찾아와서 장차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자기가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꿈꾸기 위하여 몇 번을 연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꿈을 꾸게 되고 그 꿈대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여러분들도 같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미래의 뜻이 있어서 그 미래가 먼저 확정되고 그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기 위하여 돌멩이 던지듯이 미래에서 던져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거는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만 잊어버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집도 다 사라집니다. 과거가 얼마나 잘 났든, 과거가 얼마나 못 났든, 과거에 성적이 몇 등 이었든, 과거란 것은 이미 다 써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현재의 사건을 주었는데 내일이 되면 오늘의 이 모습은 이미 과거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이 과거로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데 껍데기만 남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는데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쉽게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잘 설명이 안 되니 그림으로 해보겠습니다. 2번과 3번을 같이 그려보겠습니다. 우리가 앞을 향하여 가는데 장차 주님께서 알파와 오매가로 미리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여기에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꽝 하고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돌이 일어나면 누가 깨어집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지는 것이 1번입니다. 이렇게 깨어진 현장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나가 있습니다. 과거에 현재에 나는 이렇게 되겠다는 그것이 깨어지면서 지금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새로운 은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한달 수입이 오백만원 되지 않는 거야? 나는 정말 죽고 싶어! 내가 이래가지고 남자인가? 남들은 다 육백만원 천만 원씩 되는데 나는 왜 예수님도 잘 믿는데 오백만원밖에 안되나! 차라리 죽고 싶다! 이렇게 했는데, 그 사람의 지금 수입이 이백만원이라면, 나는 왜 오백만원이 안돼? 하나님이 뭐하고 계시는 거야! 예수님은 뭐하시는 거야? 그런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나 꽈당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백만원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만든 나였지만, 사건이 부딪히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만들어진 바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려운데! 이것을 듣고 어떤 어린이는 이렇게 말해요! 나는 전에 학급에서 왜 꼴찌일까? 왜 1등을 못할 까? 이렇게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주여! 나는 꼴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겠습니다. 이렇게 또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써먹는 아주 머리가 뛰어난 그 머리로 공부하면 잘 할 텐데 그렇게 써 먹는 아이가 있어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보는 나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나를 끊임없이 나라고 우기면서 자꾸만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만든 나가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전셋집도 없으셨는데, 주위의 잘 사는 사람들이 인간아! 전세방도 없이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하니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인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이야기해서 예수님께서 미래의 소년 코난처럼 미래에서 오셨는데 과거에서 발전을 추구하여 온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게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 사람마다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 다 다르기에, 사람 사람마다 자가의 과거로 구축하여 온 것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르다 보니까 예수님과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너무너무 잘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돈 벌었다면서요! 아이고 잘 되었네! 축복받았다, 그렇게 의사소통이 잘 되는데, 예수님과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경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은 안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는 전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다면 신발은 무슨 돈으로 삽니까? 그러니 안 들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은 이미 하나님의 확정된 뜻을 펼쳐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수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로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종말론을 하면서 로마서 12:19절을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나의 원수라고 해서 내가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수라고 여긴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원수인가 하면 우리를 구원하셔야 될 예수님이 우리의 원수로서 얼쩡거리면서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게 하는 원수를 만약에 내가 갚아버리게 되면 이것은 결국 가룟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예수님을 우리가 살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주위사람들과 나의 과거의 경험과 체험으로 똘똘 뭉쳐진 현재의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미래에 다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품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나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나를 괴롭히면 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타고난 본성이 그런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형제간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그 짧은 순간이나마 원수로 간주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어렸을 때에 집에서 개를 키웠습니다. 개한테 너무너무 잘했습니다. 개도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린데도 느꼈습니다. 어려서부터 무엇을 잘 느꼈습니다. 그렇게 잘해주어도 개 밥그릇을 치워버리니 그렇게 잘해준 나의 손가락을 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개만이 그렇겠습니까? 욕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도 그렇습니다. 잘해줄 때 친구고 잘해줄 때 선생님이고 잘해 줄때 형제고 부모님이지, 만약에 자기를 험담한다든지 자기의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이 확 하고 강아지처럼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선은 제발 넘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넘어오면 나도 못 참습니다. 하는 그것이 경계선이 되어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을 되게 싫어하는데 제발 친구여! 파란색 분홍색이 다 괜찮은데 나에게 올 때는 빨간색은 정말 싫어 그러니 너도 입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빨간색을 입고 오면 그때부터 나는 친구 안 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빨간 색이 무엇입니까? 모든 색은 다 받아들이는데 빨간색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빨간 색이지 않습니까?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분홍색은 뭡니까? 모든 색 중에 다른 색은 다 흡수하고 분홍색만 반사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빨간색을 입고 왔다고 해서 원수로 여기고 나중에 복수한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중에 어떤 인간이든 나의 자유를 건드리면 그것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나는 참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예를 자꾸 들어야 이해가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명한 장군의 이름을 들어보세요! 1)이순신 2)전두환 3)노태우 4)김일성 이렇게 시험이 나온다면 내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죽은 이순신 장군이 정답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내가 맞추었다고 하였는데 그런데 선생님께서 전두환이 정답이라고 하면 이때 살짝 선생님이 원수가 됩니다. 왜 내가 알고 있는 진리에 선생님이 호응을 안 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삼성과 엘지가 야구를 하는데 같은 친구인데 한쪽은 삼성을 응원하고 한쪽은 엘지를 응원하면 나중에 싸우는 것입니다. 아내는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남편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텔레비전 두 대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또 싸웁니다. 더 좋은 텔레비전으로 보려고 또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심판해? 너의 심판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심판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누가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 심판을 받으신 분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왜 심판하실 수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싫어하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건질 자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아담도 원수이도 아담의 새끼들도 원수이기에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너 천국 가! 너도 천국가고! 이렇게 뽑아주실 때에 지옥에 그냥 머물러 있는 자들이 여기에 반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다 같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대적하였던 원수들이기에 일단 다 피고들이며 지옥 가야할 것이 기정사실이기에 그 중에 누구 하나 특별대우를 하여 어이! 너는 내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천국 가! 하면서 뽑아준다고 해서 그 옆의 사람들이 반발하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나는 왜 안 됩니까? 하면서 반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동의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출애굽 때에 유월절이 있었지요! 그때 죽음의 폭격기가 왔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왔을 때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죽음의 사자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웅변을 잘하는지 태권도를 잘하는지 쌍꺼풀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날 때부터 장애인인지 아버지 계시는지 그런 것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문설주에 피가 발렸는가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렸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과거에서 우리가 구축한 것이 있잖아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일절 묻지를 않습니다. 무엇을 구축하였던 그것은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에 종말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자기가 뿌린 씨앗을 회수하는 기간입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냥 본인이 회수하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 잘 때에 제가 붉은 매직으로 여러분의 이마에 점을 딱딱 찍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이제는 천국으로 갑시다하면 사람들이 좋아서 저요! 저요! 할 것입니다.
아니요 안 됩니다. 밤에 주무실 때에 제가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사람만 나옵니다. 하면 그제야 뒤늦게 붉은 매직 구하여 자기 이마에 점을 찍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천국의 엑스레이에 통과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무엇이 되어있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잠잘 때 찍어 놓았기에 너 왜 건방지에 이마에 점이 있어! 나도 몰라 자고 있었는데 찍혀 있는 것을, 그러면 나는 왜 없어? 나도 몰라! 이것을 가지고 칼빈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번 점을 찍어놓았으면-여기서 어린이들은 조금 힘들 텐데- 그 점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에 구별하기에 쉬운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찍어 놓은 점은 어떤 점인가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이런 복음의 내용과 동일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점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매직으로 찍어놓아서 보이는 것이라면, 아 구원 얻었구나! 이렇게 할 텐데 진짜 구원하시는 고백은 하나의 물질적인 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하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라는 식의 복음전파로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무언가 하면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나 중에 미래에 확정이 된 사건이 지금 마중을 나가는데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자고 천국으로 가자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것을 일절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를 마중 나와서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야! 그것은 너희 행함이야! 너의 공로가 쌓이는 것이야! 아무리 헌금 많이 하고 전도하여도 안 되는 거야! 하면서 때려 부술 때에, 맞습니다. 또 내가 내 행함을 드러내었군요! 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마에 찍힌 붉은 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사람들이 이런 사건인 십자가를 다 알고 그것은 기본인데 왜 자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까? 이미 십자가의 사건을 알고 그 후에 내가 얼마나 향상 되었으며 내가 성격이 달라지고 인격이 발전하고 나아진 것을 과거에 비교하여 현재에 더 나아지고 미래에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이 놀라운 나의 결심을 왜 안 알아줍니까? 하고서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 지옥 갈려고 약을 쓰는 사람입니다. 아직 안 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사건만 받았지 십자가 안에서 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수십 년의 성과를 건드리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원수가 되고 자기가 원수라고 분류해놓은 그 속에 예수님과 십자가도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아니라 밖이고 십자가 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십자가 바깥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골라서 또 심판하기 위하여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종말프로그램의 시나리오를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더 보태는 사람, 더 나아졌다느니, 더 훌륭해 졌다느니, 전에 술 마셨는데 이제 술 끊었으니 이만큼 인간성이 좋아졌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미래에 다가오시는 주님이 그 사람에게는 원수가 되겠지요!
두 번째 시간에는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봅시다. 십분 쉽니다.
녹취 060928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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