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광주 강의(060922) 18-1 요한일서 2장강의요한일서

Re..광주 강의(060922) 18-1 요한일서 2장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06. 9. 22) 18-1

요한일서 2장 해 봅시다.
생명이 등장했다는 말은, 지금 이 세계가 죽음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간단하지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없는 세계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생명 되시는 분이 오셔야 이 세상이 죽음인 걸 알지, 생명 되시는 분이 안 오면 우리끼리 유사생명을 조작해 내게 됩니다.

그런데 생명은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구분해 보겠어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음’ 이것이 서로 달라요. 그리고 이것은 뭐냐 하면, ‘죽어 있는 것’과 ‘죽음’이 다릅니다.

현재 우리는 ‘죽음’ 속에 있으면서 ‘죽어 있는 것들’이 되지요.
예수님은 살아 계시면서, 예수님만이 ‘살아 계신 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을 하지 아니하면 --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기를, “목사님, 생명이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지금 살았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목사님 말씀 들으면 성도는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어서 산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맨날 죽어간다고 이야기하니까 헷갈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겁니까, 죽어 있는 겁니까?’ 라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서 답변을 해 달라고 하는데, “우리가”라고 할 때 이미 이것은 우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할 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할 때,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 이외의 모든 사람, ‘우리’가 되든지 ‘너희’가 되든지 그 모두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있다는 이것을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는데 이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참 곤란합니다.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누가 ‘죽었다’고 해도, 그래도 ‘저는 살아 있습니다.’ 라고 우기기 때문에, 정작 생명 되시는 분이 왔을 때, ‘아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는 죽어 있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성경은 뭐냐? 우리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성경은 예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떴다는 말은, 이로 인하여 우리는 자동적으로 생명이 아니고 죽어있는 존재였구나.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이 우리 속에 있고, 죽을 때가 되면 그 죽음의 세력이 우리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그 중간에 -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 죽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아서 지금은 어린 아이지만 나중에 늙어서 죽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죽음 안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있다는 것을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가 또 오기가 있지요. ‘죽으면 죽지 뭐. 죽는 게 무서우냐?’ 이렇게 되는데, 죽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왜 죽어 있느냐 하면, 이게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이게 죄 때문에 죽어 있어요.

여기서 이걸 설명해 드려야하는데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죄가 사람보고 죄를 드러내게 사용하지요. 죄는 우리보다 힘이 세고, 우리는 죄보다 힘이 약해요. 우리가 죄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다루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자기 새끼들을 확산시키는 겁니다. 자기 본질을 우리 인간을 통해서 죄를 이 세상에 퍼뜨리는 그런 일을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우리보다 더 강해서 우리를 통해서 죄가 이 세상에 퍼질 때에 어떻게 퍼지는가 하면, 이게 윤리적으로 퍼집니다. 요게 어려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모습으로 죄가 퍼져요.

윤리적, 도덕적이라고 할 때 이게 두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 반대말은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 첫 번째,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하는 경우나 두 번째,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는 경우나 둘 다 예수님 앞에서의 죄는 아니지요. 예수님 앞에서는 뭘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무조건 죄로 인한 죽음인데, 예수님의 생명을 생각 안 하고 우리 인간들끼리 보면 둘로 나눠집니다. ‘아직 나는 그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착하다.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구분한다는 자체가 윤리, 도덕적 지평이라는 겁니다. 지평.

건물이 있는데, 1층이 있고 그 위에 한층 더 있으면 2층이지요. 1층 102호나 103호나 104호나 공동점이 뭡니까? 모두가 1층에 속했지요. 이것을 1층 지평이라고 합니다. 이해되십니까?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같은 1층에 있으니까 같은 지평에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서 ‘지평’이라는 것은, 못 만났다 뿐이지 시간 지나면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옆집 아저씨 이런 뜻입니다. 같은 동네에 전부터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윤리, 도덕적 지평이라는 것은 1층에 해당되니까 결국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음 속에서 대화가 서로 통하고 사상이 통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뭘로 봤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윤리, 도덕적 지평으로 - 이제 지평이란 말 이해되지요?

그런데 생명은 지평이 달라요. 지평이 다르다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노는 동네가 다른 거예요.

요즘 부산에서 조지 래드를 강의하는데, 부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래드라는 신학자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은데요, 그 문제점이 뭐냐 하면,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1층 역사 지평으로 전환시켜버려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성령을 받게 되면 윤리, 도덕적 사람이 된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 사람은 뭘 영적이라고 보는가 하면, 윤리,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을 영적이라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귀는 뭐냐? 윤리, 도덕적으로 안 살도록 요청하는 게 마귀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마 분명히 철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윤리적, 도덕적 삶이냐?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 혹은 ‘나는 이미 그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다.’라는 이 두 가지의 서로 다툼이죠. 저는 이러한 인식 자체가 노는 동네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은 죄 안에서 윤리, 도덕적 기준으로 봤을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고, 내 안에 얼마나 도덕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선한 것이 남아 있는가를 그냥 측정하고 개발하는 용도의 책일 뿐이지요.

세계적으로 유수한 신학자가 그런 소리 한다는 게, 이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 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저는 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 이야기하기 전에 요 대목을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니까 잘 들어보세요.

미술에 인상주의라는 것이 있어요. 인상주의가 미술 사조에서 뭘 의미하는가 하면, 진짜 밖에 있는 사물이 어떤 모양세냐? 이것이 궁금해서 밖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그리고 싶은 것이 인상주의에서 나오는데, 인상주의는 유명한 마네, 모네, 반 고호 이런 사람들인데, 이들은 화가로서 어떤 성당을 그렸어요. 그런데 아침 9시에 그린 그림과 12시의 그림과 오후 3시의 그림이 다 달라요.

똑같은 지짐에서 똑같은 건물을 그렸는데 다 달라요. 왜냐하면, 진짜 사물에는 빛이 내려와서 빛이 팍팍 튀잖아요. 아침에는 분홍색이다가 오후에는 노란색, 저녁 무렵에는 주홍색으로 바뀌잖아요. 바뀌는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구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진짜 사물의 그 분홍색, 노란색, 주홍색 가운데 어느 것이 성당의 진짜 색깔인가는 모르고 자연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인상, 다른 빛의 색깔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그려요.

인상주의 이전에는 고전주의가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바로크 미술 뭐 이런 것이 있는데, 고전주의는 뭐냐 하면,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을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거예요. 원근법으로. 그럴 때 이것은 사람들에게 현재 실존해 있는 것은 빛이 팍팍 튀는데, 그 빛에 의해서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화가가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그림을 그림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기를 치는가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실제로 그런 냥 사기를 치는 거예요.

이 그림(광주 성경공부 모이는 우인숙 집사님 집 벽에 걸린 그림)이 바로 인상주의입니다. 인상주의가 빛을 그리기 때문에 사물이 뚜렷하지를 않지요. 그지요? 뭔가 흐물흐물하지요. 우리 같으면 분명하고 선명하게 그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일종의 화가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기를 치는 거예요. 자기 생각대로 구조지은 것을 그려놓고는 마치 남들에게는 실제가 그렇습니다. 라고 사기 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도대체 무엇이 실제냐? 무엇이 객관이냐? 무엇이 진짜 주관이냐? 이것을 사람들이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밖에 떠 있는 달이 진짜 있는 달이냐, 아니면 내가 달을 생각하니까 달이 있는 것이냐? 이런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주관이고 객관이고 이런 것은 다 없고,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각이라고 합니다. 느끼는 것.

지각으로 느끼는데, 이 지각을 느낄 때 어디에서 느끼느냐 하면, 이것은 바로 나의 몸, 또
는 살점, 신체 같은 말입니다. 내 신체에서 모든 것을 지각, 느끼는 거예요. 느낄 때 무엇이 주관이고 객관인가 이전에 처음에 느꼈던 지각상태, 무엇이 나고 무엇이 상대방인가를 안 느끼고 처음으로 느꼈던 그것에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란 책에 보면 나옵니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 있는데, 정신은 신체의 안에 있는 부분이고 신체는 정신을 바깥으로 내 품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사물을 볼 때, 이 촛불을 볼 때 눈으로 보잖아요. 볼 때 망막이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손과 발과 온 몸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를 담아서 이 촛불을 내 망막 안에 집어넣어요. 현대 심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초가 있고 여기 사과가 있고 뭐가 있더라도 초를 생각할 때는 사과를 잊어버려요. 그것은 내가 내 안에서 편집을 합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뭔가를 볼 때 자기가 욕구하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 그 순간 다른 것은 잊어버려요. 운전할 때 집에 가스불 껐는가 그것 생각하면 운전 못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거짓말 할 때는, ‘당신이 운전을 왜 그렇게 못했습니까?’ 하면, ‘똑바로 못 봐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온 정신과 육체가 총 동원해서 다 보는 거예요. 눈으로 아무리 봐도 상대방이 안 보입니다. 왜? 집에 가스불 안 끄고 와서.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운동회에 가서 달리기하는 것을 보는데 많은 아이들이 달리지만 자기 아이 밖에 안 보여요. 그런데 운동회 주관하는 선생님의 아내는 애들이 안 보이고 그 운동회를 진행하고 있는 자기 남편만 보여요. 점심시간이 되면 애들은 자기 애를 챙기지만 자기는 남편을 챙기지요.

사람들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다 없어지는 겁니다. 특히 연예할 때 그러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착시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연예할 때는 안 보이던 얼굴 형태가 결혼하고 난 뒤에 이미 빼도 박도 못한 상태에서 그런 약점들이 한 두 가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무를 수도 없고. 그래서 ‘눈이 삣지’ 라고 하는데 눈이 삔게 아니고 마음이 삔 거예요.

그래서 요즘 결혼 중매하는 회사에서는, 오후 몇 시에 만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호감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요. 가을날에 붉은 노을이 질 때 분위기가 끝내주지요. 그 때 오후 5시에 대형 유리벽이 있는 그런 까페에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그 빛 아래서 보면 어떤 남자나 여자도 다 로멘틱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아침 6시 머리까락도 부스스하게 일어날 때 어떤 남자든 낭만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렇지요? 전 목사님은 새벽 4시나 오후 4시나 마찬가지지만(하하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로 어떤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부다 사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조직신학으로 만들 때 이 조직신학이 사기가 되는 거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생명’이 있다면 느끼는 것이지 따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윤리, 도덕은 뭡니까? 이것은 따져야 된다니까. 윤리는 이것을 할까, 말까 하는데, 그런데 그 따지는 것이 아침 6시에 따지는 것과 7시에 따지는 것이 다 달라요.

아까 인상주의 이야기했지요. 자기의 느낌따라 호흡따라 필이 충만할 때 그때따라 전부다 상대방에게 따지고 싶고 나무라고 싶고 때로는 칭찬하고 싶고 이것이 다 달라요. 이게 시간마다 다르고, 본인이 기분 좋은 상태이면 어지간한 것도 넘어가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소한 일 가지고 시비를 걸어서 싸우고 하지요.

그래놓고 내가 뭐 잘못 되었는데? 나는 윤리, 도덕대로 했다고 합니다.
윤리, 도덕은 체계를 잡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변명입니다. 김건모의 [핑계], 이것은 핑계이고 변명입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 자기 행동의 당위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핑계 대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란 말이지요.

자기가 만든 윤리, 도덕을 어제 만들어 놓고 오늘 취소시키네. 상대에 따라서 취소시키고 상대에 따라서 다시 회복시키고.

세 식구 사는 우리같은 가정에서 제 딸 이름이 진주인데, 진주가 약간의 불만이 뭔가 하면, 왜 아빠와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엄마는 왜 달리 대우하는가? 밤 10시 되면 청소년은 네 방에 가서 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나는 11시 까지 있어도 내 방으로 가라고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달리 대우하는 것 아닙니까. 그 때 하는 말이 ‘너는 청소년이거든, 너는 딸이거든’ 이렇게 하지요. 그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동일한 논점에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식구 같으면 동일하게.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서 모순 되느냐 하면, 밥 먹고 난 후에 설거지 할 때는 지가 싹 빠진다고. 왜 빠지냐고 하면 나는 딸이거든. 하면서.

이게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핑계 대는 자기 유리한 쪽으로 전부 재해석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예리한 지적을 했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모든 것이 경제활동에서 나온다.’고. 이것이 뭐냐 하면, 나에게 돈이 된다. 유리하다. 그러면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윤리와 도덕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 바다이야기와 그 일로 뇌물 받은 사람들 뉴스에 나왔지요. 그 사람들이 다 전에 뇌물 받은 사람 집어넣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막상 고위직에 있고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니까 자기가 돈 받아먹는 것은 돈 빌린 거고, 남이 돈 받아먹는 것은 뇌물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오늘날의 윤리, 도덕이란 자기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그런 윤리, 도덕이라고 유명한 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어요.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밑의 하부구조는 경제고, 위의 윤리, 도덕은 상부구조다.

알티세르에 의하면 윤리, 도덕, 경제 전부다 하나의 신급이다.
교회라든지 병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각 패쇠된 집단들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모든 것이 경제의 바탕위에 윤리, 도덕, 종교 이런 상부구조가 올라가 있다고 했는데, 알티세르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따로 되어 있는데, 따로 되어 있으면서 가정, 학교, 병원 여러 가지 단체가 따로 있단 말이지요.

바둑 두는 단체, 낚시하는 단체 등이 다 있더라도 이 안에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이 작용한다? 이것 하나 하나를 신급이라고 합니다. 계급이라고 하는데, 이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전부다 경제다. 그러니까 경제위에 뭐가 있다는 것은 이 안에다가 집어넣은 것이 되요. 그 대표적인 것이 가정 아닙니까. 두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아빠가 돈을 못 번다. 그러면 가정의 위기지요 뭐. 왜? 최종 신급이 뭔데? 돈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돈이 넉넉할 때 이 가정의 윤리, 도덕과 돈이 위기가 왔을 때의 윤리, 도덕이 다르겠지요. 특히 경상도 남자의 경우에는, 우리교회도 그런 사람이 있고 해서 제가 한심스러운데, 남자의 허풍이지요. 그 허풍중 하나가 뭔가 하면, ‘야, 너, 나랑 결혼하면 직장 그만 둬. 내가 너 하나 못 먹여살릴까봐’ 이렇게 큰 소치 쳐놓고 나중에 보면 지는 놀고 있고 아내가 돈 벌고 있고. 이게 뭐냔 말이지요.

나는 남자로서 남자의 책무가 있다는 것이 언제적 이야기인가 하면 경제가 어느 정도 돌아갈 때 그런 허풍은 누가 못 부릴까요.

대구, 경북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대해 잘 아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하데요.
노무현 정권의 문제점이 뭐냐? 분배위주의 정책을 편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일 해놓고 제대로 못 챙겨 받은 사람이 이 노무현 정권 들어서서 없는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그런 정책을 펴는데, 분배 위주로 하니까 어느 사업가가 투자할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열심히 투자해도 분배란 이름으로 세금으로 해서 다 빼앗기니까, 그러니까 뭘 모르는가 하면 계속 생산이 되는 상태에서 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생산이 안 된 상태에서 있는 것 가지고 나누자. 이 소리 누가 못합니까?

아내가 집에서 놀면서 가계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여자보다도 가계부 안 써도 좋으니까 직장 나가서 돈 좀 벌어오라고 요구하는 남자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혼자 벌어서 애들 과외비도 못하니까.

우리 지원이도 앞으로 피아노 배우려면 한달에 한 200만원 들어가요. 남 하는 것 반만 시켜도 200만원 들어가요. 두 살 된 아이한테 과외 시키는데 월 200만원 들어간다니 기가 찰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윤리, 도덕도 결국은 없고, 내 신체가 내 나름대로 살고자하는 것, 이 원리 외에 무슨 원리가 또 있느냐 말이지요. 이 세상 원리가 내 신체가 살고자하는 원리 외에.

그런데 이것이,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안 나타나면 서로서로가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래 이것이 최종 진리다.’ 아무리 교회가 뭐고 병원이고 가도 마지막에는 돈 문제가 최고 큰 문제다. 이렇게 되는데,

생명이 와 버리면, 생명이 왔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생명이 없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죽어 있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내 몸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의 증거다? 죽음이 나를 지금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단 말이지요. 이것을 언제 아는가 하면 생명이 올 때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를 뭐라 하는가 하면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죄이기 때문에 이 안에 따로 어떤 지평, 윤리 도덕적 지평을 갖지 말란 말이지요. 갖지 말아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래, 맞습니다. 나는 돈 없이 못살고, 돈이 전부인줄 아는 죄입니다.’ 이러면 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을 정당화해서 그 다음에 윤리, 도덕으로 나오니까, 아까 윤리, 도덕은 뭐라고 했습니까? 경제적인 뒷받침을 변명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이것은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를 점점 더 죄 아닌 것으로 위장하게 되니까 결국 이 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생명을 공격해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의 죄라는 개념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제가 이번에 [예수 사회] 발간하는데 원고를 4개나 보냈습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안 내지 싶어서, 우선 1호를 내야, 전도지 발간을 위해 회비 작정한 분들이 여러분 돼요. 그런데 지금 책자도 안 나오고 돈 받는다는 것이 뭣하니까 1호를 내는 것이 중요해요. 1호를 발행해 놓고, 이런 내용의 이런 모양새로 전도지가 발행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후원하실 의사가 없습니까? 이렇게 뭔가 손에 쥐고 해야 되는데,

옛날에 했던 것은 벌써 너무 오래 전 일이잖아요. 그래서 [예수 사회]를 새로 발간하는데,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런 방향으로 냅니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첫 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 모인 분들에게 제가 숙제를 드릴게요. 전부 A4 용지 1매 혹은 2매. 우리 이재은씨도 예외가 아닙니다. 얘 키우면서 바쁘고 글 쓸 시간 없다고 핑계 댈 수 있는데,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느끼는 것을 쓰면 되는데, 적어 놓으세요. 아예 안 쓰려고 안 적으시는데, 적어 놓으세요. samp12@hanmail.net
글을 써서 그냥 이 주소로 그대로 보내면 되요. 쉬워요. 종이 프린트 할 필요도 없고.

박기삼씨하고 제가 의논한 것이 목사들의 글 말고 집사님들 평소에 썼던 것, 그리고 사모님 평소에 쓴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가 잘 나왔을 때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데, 인터넷 시대에서 인쇄물이 중요하거든요.

제게 여기 실은 원고 중에 뭘 썼는가 하면, 목사님들이 목회하면서 복음을 외치다가 흔들립니다. 이 흔들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애썼으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해 줄 때, 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확인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복음을 외쳤는데 돈으로 안 돌아오더란 말이지요.

‘돈으로 안 돌아오는 복음적 목회’
그러니까 돈으로 안 돌아왔다는 말은, 내가 지금 복음적 목회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야, 그게 아니야. 진짜 복음적 목회 같으면 돈으로 돌아와야 돼. 그래서 너의 생계도 책임지고 너의 교회도 운영 되는거야!’ 라고 꾸짖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적 목회’라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돌아오는 목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쪽 방향으로 가라고 수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본인이 느끼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외치라고 해서 외쳤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주시니까, 이것은 하나의 채찍인데 ‘네가 복음을 제대로 안 전해서 어려움이 생겼으니 이제부터는 돈으로 돌아오는 목회를 해 봐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목회다.’ 라는 식으로 한번 바꿔볼까? 자꾸 이런 마음이 든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 전에 복음적 목회에서 돈이 안 돌아온 것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 복음도 전하고, 십자가 복음만이 전부가 아니고 뭔가 하나 추가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십자가 복음으로는 구원 받고,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헌금을 듬뿍 하는 이런 행위를 평소에 강조를 안 했고 그동안은 십자가만 주의 일이고 다른 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나중에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 보니까 주의 일을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았다. 십자가만 주의 일이 아니고 더 넓게 봐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넓게 본 게 뭐냐, 평소에 놓친 것. 전도하기, 기도하기, 헌금하기, 서로 돌아보기 이런 것을 그동안 복음 전하기 바쁘다보니 다 빠뜨렸으니까 이것을 추가적으로 집어넣으면 비로소 온전한 이것도 하고 저것도 되는 온전한 비책이 없을까?

그러면 이걸 뭘로 하는가? 이것을 행함으로 하고, 십자가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 받자. 믿음으로 구원 받고, 거룩한 행함을 추가해서 균형 잡힌 신자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참된 목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옳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십자가 복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그 동안의 문제는 헌금 강요를 안 했다는 겁니다.

제가 원고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그럴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 목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란 말이죠. “너의 평소의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방금 제가 말했던 것처럼, 십자가 복음과 함께 헌금을 강요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잘 안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내 목회가 잘 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짜증’이거든요. 짜증은 뭐가 아니다? 기쁨도 아니고 감사도 아니지요. 화딱질 난다는 말 아닙니까.

평소에 목사기 때문에 화를 낼 수 없고, 늘 웃으면서 지내지만 속은 죽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아까 정신과 육체가 내부적으로는 정신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육체라는 것은 내부적인 정신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 육체라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뭘로 본다고 했습니까? 본다는 것은 속에서 편집을 하는 거예요. 편집하는 것은 정신적인 작용이 보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것은 밖에 뚫린 구멍이고, 진짜 보는 것은 --

예를 들어 도둑이 침입했다. 그러면 내가 이 집에서 뭘 훔쳐갈까? 생각합니다. 벽에 걸린 그림이 아름다워도 그림 안 봅니다. 돈 될만한 것 TV를 훔칠까 생각하면 딴 게 안 보이고, 옆에 몽둥이 있는 것도 안 보이고, 주인이 안 자고 있는 것도 모르고 TV에만 정신 팔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본다는 것은 내 정신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의 육체적 행동이라는 것은 속의 정신이 지배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헌금을 강요해야겠다는 말은, 이것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요. 조직신학적이지요. 그런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은 반드시 죽음의 세계에서는 뭐가 된다? 윤리와 도덕 시스템이 되지요.

어떤 느낌이 아니잖아요. 필링이 아니에요.
지금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서 온 몸으로 실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책보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어떻게 목회를 하면 떠났던 돈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결국 주님께서는 그 목사를 이렇게 보는 거예요.
너의 평소에 기쁨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놀라운 환희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저는 복음이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강단에서도 복음만 나와요. 그런데 평소에 그 사람이 돈에 궁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강단에 서서 앞에서 십자가 복음을 백날 핑계대도 그것은 논리적 이성이고, 진짜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돈 좀 내 놓으세요. 교인 여러분! 이 도둑놈들아 이 목사 죽겠다. 돈 좀 도. 교회 안 돌아간다. 돈 좀 내 놓아라. 돈 안 내는 인간은 십자가 모르는 인간이야. 돈 좀 내 놔.” 이것을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안 들키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감사와 기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피로 인하여 저는 이제 죽어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훨훨 독수리처럼 날아서 천당 갈 준비를 하는 그러한 덜렁댐, 좋은 의미에서의 덜렁댐. 복음을 안 그 기쁨. 내 죄가 용서받은 그 환희. 그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사랑의 마음이 없어요. 팔 걷어붙이는 마음이에요. ‘너희들 돈 내 놓을래, 안 내 놓을래. 양심이 있지, 그렇게 복음 듣고도 입 다물고 있어? 정말 너희들 인간 말종이네. 성질 같아서는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목사라서 참는다.’

이 소리는 돈 내 놓으라는 소리보다 더 무섭네요.

주께서는 중심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사람이 자기 죄 용서 받은 것을 알면, 그것도 자기 노력으로가 아니라 예수님 피로 구원 받은 것을 안다면 자기가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도 기억 안 나요. 내가 지금 백수냐, 노가다를 하느냐 그런 것에도 신경 쓸 수 없어요. 너무 좋아서. 그게 몇 초라고 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루에 2초인데, 어떤 사람은 두 달에 2초라.

모든 것이 다 달아나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죽고 싶지 뭐. 당장 죽고 싶고, 생계 걱정할 시간도 나에게는 안 줬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천당 데려가서 몇 년 더 살아서 생계 때문에 걱정하는 그런 것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어요. 주님 만나고 싶고.

그럴 때 그 목사는 빛이 튕기지요. 생명이 그 사람 육체에 튕겨요. 그런데 목사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 순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도 복음의 생명이 교회마다 튀게 한단 말이지요. 그 교회 집회는 오직 사랑밖에 없어요. 짜증이나 원망이 전혀 없고 사랑밖에 없어요.

제가 우리교회에서 많이 느끼지만 우리교회 예배 시작하잖아요. 처음에 묵도, 사도신경하고, 그 다음 교독문하고 그 다음 앉아서 찬송 부르고, 그 다음 광고하고 찬송하고 설교에 들어가는데, 광고시간에 장로님 광고 하지요. ‘이번 달 헌금 마이너스 140만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김을수 집사님도 여기 계시지만 교인들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장로님은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좋은 일만 알리고 그러면 안 되니까. 숙연해지지요. 분위기가. 심각하지요. 전부 다 그 순간에 약 2초 동안 자기반성에 들어가는데, 자기반성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변명과 핑계로 나타나요. 왜? 이 지평은 무슨 지평이냐 하면 1층 지평이니까.

이런 상태에서 제가 본문 읽고 설교를 하려고하니까 얼마나 설교가 어렵겠어요? 왜냐? 한 마디 할 때마다 돈 내라는 소리와 결부될까 싶어서, 결부되기를 지금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 대부분 이렇습니다. 목사님, 마이너스 140만원인데 오늘 설교 좀 잘 하셔서 저는 못 내더라도(이것이 변명이거든요) 다른 사람 은혜 받아서 헌금 좀 해서 다음 주에는 마이너스가 좀 줄게 해 달라. 주여, 제발 목사님 설교 좀 잘 하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게 되니, 이것이 몇 층 지평입니까? 이건 1층 아닙니까. 그런 걱정조차도 1층 지평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나타나게 되면 목사는 여러분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지는 그것은 문제 삼을 것도 안 됩니다. 문제 거리도 안 될 정도로 예수님 복음은 이미 그런 것을 냄새나는 발로 쓱 밀쳐도 상관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살았습니다. 이렇게 설교하다 보면 돈 한 뿐도 내지 마세요. 마이너스 300이든 500이든 갈 때까지 한 번 가 봅시다. 집달리(집행관)가 와서 딱치를 붙여서 우리는 교회당 나가면서 웃으면서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쫓겨 나와서 골목에 모여서 오늘 계시록 말씀 어떤 말씀일까? 궁금해 하는 그것이 교회예요. 왜? 집달리고 뭐가 와도 생명이 튀잖아요. 이 안에 생명이 들어왔으니까 생명이 영으로 왔으면 영적인 사람은 이것이 논리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생명과 교류가 되면 여기서 불꽃이 튑니다. 불꽃이 튀면 그 순간 돈 문제 이런 것은 발에 떼만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되요.

우리 시험 삼아 마이너스 5,000까지 한 번 내려가 볼까? 그것도 참 재미있겠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배당 치워버리고 우리 집에서 모이지 뭐. 그것도 재미있겠네. 할 정도의 자유로움. 이것이 생명이 주는 자유로움입니다. 왜? 우리는 500만원 플러스가 되도 그것은 1층 지평이기 때문에. 애들 노는 소꿉놀이기 때문에.

그런데 목사에게 생명이 와서 빛이 팍팍 튀게 되면, 이 환희를 그대로 말씀을 통해 교인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목사가, 평소에 ‘나는 돈 있어야 내심 기뻐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품고 강단에 섰다면 이것 자체가 사기가 아니고 뭡니까? 완전 사기지요.

지금 요한일서를 쓴 사도요한이 돈을 밝히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왜 돈을 밝힙니까?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라는 것을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해 보겠다고 신경 쓴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의 기쁨의 이유가 복음에서는 멀어졌고, 내가 원하는 교회 하나 소유해서 내가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겠다는 그런 장사꾼, 종교 사업가 본색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되어 있지, 돈 많은 교회 되어서 기뻐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근본적으로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그 생명이 직접 우리 정신 속으로, 우리 영과 만남으로서 직접 생명을 주는데, 인간들은 교회라는 가게 세워서 사람들이 오면 엉덩이에 주사 놓는 식으로 목사가 설교해서 생명이 들어가는 줄 알고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인도하니까 발걸음 세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마태복음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조차도, 네가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성경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5장 봅시다. 6장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여기 지금 영적 세계 말고요 이 밑의 1층 세계, 이것을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세계. 죽음의 세계는 뭘 만든다? 윤리와 도덕을 만들지요. 이것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원인과 결과를 끄집어내서 만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7절을 보면 원인이 이 땅에 없어요. 키가 한 자나 더했는데 그 원인이 없습니다. 참새가 공중을 나는 것이 이 땅에 원인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자꾸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짓을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다. 자꾸만 원인과 결과를 연결 시키려하는데 이것이 억지입니다.

부산에서 강의할 때 했는데, 어떤 사람이 A지점에 있어요.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갈림길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 B지점에 왔습니까?’ 할 때, 답변이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하더라.’ 두 번째, ‘걸어서 왔다.’ 세 번째, ‘산책 하려고’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B라는 지점에 왔다는 결과를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네 번째, ‘A라는 지점을 통과해서 왔다.’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종업원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으니까, 손님 답변이 ‘버스타고 왔는데요.’ 무슨 이런 허무 개그(우스갯소리)가 있냔 말이지요. 그보다 더 심한 허무 개그가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보다 더 심한 개그가 ‘저 곧 갈 거거든요.’

사람은 원인, 결과를 자기 원하는 대로 뽑아서 어떻게든 원인, 결과를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7절은 뭡니까? 원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원인 없이 지금 이 키가 된 거예요. 키 작은 사람한테는 미안합니다만. 원인 없이 이 키가 된 거예요. 발걸음을 세시거든요. 발걸음 세기 위해 발 씻었습니까? 안 씻어도 발걸음 세십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원인을 제발 너의 육체에서, 죽음의 세계에서 원인 찾지 말란 말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원인을 찾겠다는 것은 원인 찾아서 생명의 세계로 한 번 들어가 보려는 쓸데없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건져 주기는 이쪽에서 건졌는데 왜 원인을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니까 벌 받았어. 내가 이렇게 행동하니까 칭찬 받았어.’ 왜 자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느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죄’란 말입니다. 원인을 내게서 찾는 이것을 가지고 죄라는 것입니다. 죄.

의는 무엇입니까? 반대로. 의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의’입니다. 그것은 관계성 ‘칭의’라고 합니다. 주와의 관계 때문에 의롭게 된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요한일서의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겠지요? 너무 겁나서 공부 안 하려고 할지 모르겠는데, 보세요. 제가 설명하기 전에는 그냥 ‘죄’ 그냥 ‘생명’이었잖아요. 이것이 우리 논리가 아니고, 팍팍 튕기는 하나의 빛처럼 비추는, 빛으로 튕기는, 주께서 진짜 살아가 부활하셔서 계신단 말이지요. 앉은뱅이가 나은 것처럼.

실제로 살아 계신 주님이 끊임없이 팍팍 튕기면서 찾아오면, 주님께서 생명으로 찾아 올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니까 새삼스럽게 네가 죄 된 원인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담 때문에 이미 죄인 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내가 죄인 아닌 이유를 찾을 필요 없고, 더 죄인 되기 위한 이유를 새삼스럽게 시도할 필요도 없고, 나를 건져주신 생명이 작용하는 그대로 생명과 부딪치고 불꽃 튀는 삶을 살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오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피곤하신데 한 5분 쉬었다가 합시다.
(2006. 9. 26. 16:45 녹취 마침)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3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2,792 우리교회 [일반] 율법과 성도와의 관계-이준씨의 글 로마서 최고관리자 06-10-04
2,791 묻고답하기 Re..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10-03
2,790 묻고답하기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 최고관리자 06-10-03
2,789 강의 Re..20050705 부산강의-피히테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0-02
2,788 강의 대구 10월 2일 지옥의 하나님 p050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 로마서 최고관리자 06-10-02
2,787 우리교회 Re..전 5 : 10-12 (만 족) 전도서 최고관리자 06-10-01
2,786 우리교회 Re..전 5 : 10-12 (만 족) 전도서 최고관리자 06-10-01
2,785 우리교회 Re..계 6 : 9-11 (다섯번째 인)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10-01
2,784 설교 요한계시록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10-01
2,783 묻고답하기 Re..의화 교리에 대한 문의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9-30
2,782 강의 Re..06 서울(의존교회) 060512 종말론 1-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6-09-28
2,781 강의 Re..광주 강의(060922) 18-2 데살로니가전서 최고관리자 06-09-28
2,780 묻고답하기 설교를 듣고 - 최고관리자 06-09-28
2,779 우리교회 Re..사 20: 1- 3 (선지자의 고난) 이사야 최고관리자 06-09-27
열람 ➜ 강의 Re..광주 강의(060922) 18-1 요한일서 2장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06-09-27
2,777 묻고답하기 Re..입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9-27
2,776 강의 동대구 신우회(철도공사) 9월26일 강의 (수정완) - 최고관리자 06-09-26
2,775 강의 Re..060919 조지 래드 [신약신학]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 [신학] 최고관리자 06-09-26
2,774 묻고답하기 Re..관리자에게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9-25
2,773 묻고답하기 Re..구원의 확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9-25
2,772 묻고답하기 Re..구원의 확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9-25
2,771 우리교회 Re..전 5: 8- 9 (도시의 모습) 전도서 최고관리자 06-09-24
2,770 우리교회 Re..전 5: 8- 9 (도시의 모습) 전도서 최고관리자 06-09-24
2,769 우리교회 Re..계 6 : 1- 2 (일곱 인)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9-24
2,768 설교 요한계시록 6:1-8 [(계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9-2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