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621 부산강의-존 로크와 칸트
Re..20050621 부산강의-존 로크와 칸트
이름 : 한윤범(IP:)
20050621 부산강의-존 로크와 칸트
(강의:이근호 목사)
나부터 시작하면, 그 마태복음에 6장에 나오는 게 염려잖아요. 니가 염려함으로 키가 한 자를 더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이유가, 염려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염려를 발생시키는 그 자아상, 주체상을 왜 네가 쥐고 있느냐 이 말이죠. 산상설교가 거기서 풀려야 됩니다. 산상설교 전체 내용이, 시키는 대로 살라는 문제가 아니고, 지금 자아가 문제인데 인간의 주체가 문제인데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뭐냐 하면, 일단 자아는 자아 거고, 있는 자아가 어떻게 잘 한번 살아보자 하는 거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볼 수 있을까?
예. 그러니까 일단 염려 문제에 딱 들어오니까 생각해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게 염려를 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생각하는 그 자아상이 있는 이상은 지금이 내가 염려를 해야 되는 상황이냐 염려 안 하는 상황이냐를 따지는 그 중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중심이 있는 이상은, 결국 염려해서는 안돼. 라고 염려하는 그 주체는 누구냐 말이죠. 산상설교를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파악을 해 내야 되는데 껍데기만 보고 있다고. 돼지 껍데기 보듯이. 예수님의 껍데기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참새나 공중에 나는 새나 들풀이나 아예 뭐가 빠지느냐 하면, 자아상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내일 불쏘시게 되는 들풀이라도 자아상이 없으니까 염려가 나올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잖아요. 들풀이 보여주는 것은 뭐냐? 주께서 기르시나니. 그걸로 끝나버리잖아요. 기르시는 목적이 뭐냐 하면,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 말이죠. 참새도 마찬가지죠. 창고에 만들지도 들이지도 않아도 주께서 기르시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뭐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움, 주님의 의롭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기르시는 거죠. 거기에는 내가 어떻게 첨가하느냐, 염려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 말이죠. 자리가 없잖아요. 주님의 의라는 것은 참새나 들풀 하고는 상관없어요. 그건 주님의 의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참새, 들풀 위해서 피 흘린 게 아니기 때문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라고 하시면서 염려하지 마라하는 것은 그 나라, 그 의를 증거 하기 위해서지, 어떻게 자기 생존의 염려가 거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 말이죠.
-
그러니까 산상설교는 뭐냐 하면, 인간의 우리의 기본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산상설교 해석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도 바울의 해석을 해야 돼요. 니가 예수 안에서 이미 죽었고. 그렇게 해줘야 산상설교 해석이 되지. 사도 바울이 그냥 없어도 되는 인물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없으면 산상설교 해석이 전혀 안되지요.
울산 어디 가버렸노?
-차가 막혀서. 계동에서 막혀서.
일찍 오시지. 기차 타고 오다보니까 양산에서 김해공항 가는 그 노선이 평소에는, 고가도로 있잖아요. 평소에는 안 막히거든. 보통 막혀도 김해공항부터 막히는데 양산에서부터 막히는 기라.
-오늘 이상하게 그러내. 다른 날보다. 젊은 사람 세 사람 같이 오거든요. 아아, 그래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러니까 오시기 기다려야 돼지요?
-목사님 강의나 계속 하시지요.
녹음 계속되고 있어요. 강의 벌써 시작했어요. 강의는 시간 되면 하고, 오늘 해야 될 것은 기다리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개척교회 해놓고 딱 시작해놓고 후회되지 않느냐 그 문제 이야기하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하느냐 하면, 개척교회 할 때 사람들이 굉장히 주저합니다. 똑바로 말해서 주저하게 되지요. 이게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잖아요. 엄청나게 들어가기 때문에 주저한다고요. 일반인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개척교회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게 하신 이가 내가 아님을 다시금 새롭게 된다 이 말이죠. 시작한 이가. 만약에 기성교회의 부교역자로 그냥 머물러 있으면, 기성교회를 시작한 사람이 있잖아요. 기성교회가 내 것이 아니잖아요. 이미 터줏대감들이 있고, 장로들, 오래된 집사들 있고 거기에 오래된 목사 있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이 시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빼고 싶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놈들아! 하고 빼면 그만 이라니까.
그런데 에이, 인간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욕했던 그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사업을 지금 본인이 시작을 했잖아요. 지는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자기가 자기한테는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이게 얼마나 비겁한 짓이냐 말이죠. 남이 시작한 것은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지가 한 것은 좀 안 되면, 내가 내 보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할 수 없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의 지층, 인생이 무엇이냐, 또 진리가 무엇이냐, 세상이 무엇이냐? 더 깊은 지층에 내려가서 이건 시작하신 분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그러면 마치 내가 기성교회에 가서 부교역자로 내가 싫어하는 일에 그냥 중간에 끼어든 밖에 안 되듯이 당연하게 주님이 시작한 일에 내가 끼어든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면 개척교회라는 것이 자기 소유로서 날아가 버려요. 교회 자체가 내 소유가 안 되고 날아가 버리거든요. 내 마음 내 존재 속에 날아가 버렸으니까 그 개척교회가 짐이 안 되지요. 그리고 그 개척교회에 주님이 계시니까 나로 왜 교역자로 끌어당겼느냐?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 소유를 내 존재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부터가 이제 전에는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다하는 것에 머문다면, 이제는 뭐냐 하면, 내 인생 자체가 아예 나로 인하여 시작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시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하고 그렇게 되게 되면 성경해석이 되지요.
성경해석이 야곱, 이삭, 아까 이야기했지요. 에서, 야곱은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고, 리브가가 계시 받아서 태어난 것처럼. 그렇다면 예레미야나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 모든 것이 자기가 시작한 인생이 아니거든요.
그전까지는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 세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나 자기가 시작한 인생이 아닌데, 우리는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 인생 내가 가꾼다고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 나타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시작한 사람이고, 성경을 보고 있는 나는 내 인생 내가 한번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순수하게 말씀대로 제대로 반듯하게 살아보자. 라고 시작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람과 성경에 접근하는 내 인생이 사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동안 성경해석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다 전부다 엉터리. 전부다 엉터리였어요. 성경해석을.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시작한 인생인데 성경을 보고 있는 나라는 놈은 내 인생 내가 시작하려고 하니까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건방지게 성경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만남을 추진했던 자체가 이거는 성경을 볼 자격도 못되는 놈인데, 성경이 이러니저러니 해석을 해왔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개척교회를 시작해서 완전히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시작한 인생으로 딱 정리를 시켜 놓으니까 그 다음부터 뭐가 보이느냐 하면, 비로소 예레미야하고 이사야하고 대화가 통하네. 이야기가 통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하고 사도 바울하고.
특히 제가 요새 사도행전을 하는데 사도행전을 하면서 무지무지 많은 걸 느끼는 거예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끌려갈 때 사도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비로소 죽음을 느껴요. 죽음이라는 것을. 그전에도 죽음을 많이 느꼈습니다만. 그전부터 죽음을 느꼈죠. 사실은 사울아, 사울아 찾아올 때부터 죽음을 느꼈는데.
죽음을 안 느낄 때는 스데반 돌로 칠 때는 죽음을 안 느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잘한다고 보는데.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부터 죽음을 느끼고 어떤 때는 성에서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음 되지만. 그러나 정말 내가 죽는데도 불구하고 왜 살아있느냐를 길게 보여주는 것은 로마로 가는 그 폭풍이 이는, 태풍 같은 허리케인 같은 폭풍이 이는 바다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그냥 내가 깜빡 죽으면 그만인데 나의 죽음을 통해서 추장들, 낯선 섬의 추장부터 해서 같이 동승하고 있는 죄수들 하고 그 죄수들 수행하는 군인들, 모든 구원이 누구 손에 달렸어요? 사도 바울 자기 손에 달린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들을 각 교회 인도해야 되고, 어이 빨리 힘내라. 음식 먹어. 이제는 사도 바울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을 구원시키는 인도자의 역할 때문에 계속해서 안 죽고 버텨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 사도 바울이 뭘 정리했느냐 하면, 죽는 것이 짱인데 죽는 것이 나한테 제일 이익인데 이노무 목숨이 죽이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지중해 태풍이 불어도 안 죽여요. 사도 바울을. 전에는 왜 안 죽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안 죽이는 줄 알았지요. 나중에 로마 가는 행선을 통해서 보니까 날 사랑해서 안 죽이는 게 아니고, 사실은 사랑하면 죽여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면 죽여서 주와 함께 거해야 되는데, 날 사랑해서 안 죽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정말 죽이는 혜택도 주께서는 안 베풀어주시고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죽음에 담겨 있는 지층들이에요. 죽음에 담겨 있는 홀의 보다 넓은 구석이에요. 전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 날 죽이면 안 됩니다. 하다가 그 다음에는 날 죽여주세요. 하다가 이제는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왜? 복음으로 남을 살리기 위해서.
그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의 죽음에 초청하는 거예요. 참, 이게 어려운데. 사도바울의 죽음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뭘 기억을 해야 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십자가 죽음을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있어야 됩니다. 살아있어서 그들과 무슨 경험을 하느냐 하면, 죽음 경험을 해요. 그전까지는 이 사도 바울과 함께 동참한 사람들은 다 잘났다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께서 죽음에 참여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복음이 없으면 못산다는 걸 느낍니다.
특히 사도행전 16장 16절에 보면, 간수가 난데없는 사건을 만나서 자살을 하죠. 난데없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누구 때문에 사건이 생겼느냐 하면, 얼른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를 살리기 위해서 옥문을 열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눈은 뭐냐 하면, 사도 바울과 실라 때문에 옥문이 열렸는데 그 사건 때문에 간수는 뭘 경험하느냐 하면, 낯선 죽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안 말렸으면 죽었어요. 말리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간수는 그 순간 죽어버리면 지옥 갑니다. 결국 간수 입장에서 볼 때 그동안 간수가 자기가 스스로 버텨온 것은 뭐냐 하면, 죽을만한 사건이 안 터졌기 때문에 버텨왔는데, 지금 죄수들이 달아난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더 이상은 그 사람은 그동안 자기가 살려고 지탱했던 토대가 그것이 어떤 낯선 사건에 의해서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이번에 연천에 사건이 있는데 거기에 중위 있잖아요. 26살 먹은 중위. 그 사람이 전주대 경찰행정학과 졸업해서 ROTC 들어간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평소에 경찰시험 치기 위해서 공부했고. 중위 월급 받은 거 얼마 안 됩니다. 특히 ROTC 연봉 적어서 얼마 안돼. 그것 몽땅 적금해서. 보통 ROTC가 집안이 넉넉하기 않아요.
아들 하나 믿고 대학 보내서 아들 보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적금을 들어서 몽땅 집에 다 보내버렸어요. 10일 후면 제대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러면 그 가족과 ROTC 중위 그 사람의 관계는 뭐냐?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지금까지 사는 이유가 내 힘으로 버텨왔다는 것을 남한테 보여주는 위한 그것이 자기 삶의 기초가 되었지요.
깁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지금 나는 내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나, 장하지요. 라는 그러한 남들이 인정해준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사는 기초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난데없는 사건이 벌어져 버린 거예요. 이건 자기가 원한 사건이 아니에요. 미친 놈, 하나 총질해 버렸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죽었잖아요. 죽으면 그 다음에 촌에 있는 부모들은 무슨 낙으로 삽니까? 적금, 월급 끝나버렸는데. 아들 보상타지만 보상으로 위로가 되겠어요?
결국 이것이 아까 간수 입장이에요. 지금 바깥의 이 사람들, 특히 뭐냐 하면, 그들의 존재의 근거를 봐야 돼요. 그 존재의 근거가 뭐냐 하면, 내가 이처럼 내 힘으로 살려고 버티니까 봐라! 살아 있잖아. 라는 것이 존재의 근거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 복음 전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뭘 주느냐 하면, 놀랍게도 죽음을 줘야 돼요. 그들에게 죽음을 이야기해 줘야 돼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물론 죽음하면 다 도망가 버리지요. 하지만 하나님 백성 같으면 도망 안 가고 걸리는 수가 있어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 속에 끼어들죠.
결국 그 죽음 배경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죽게 하시는 분은 딴 분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거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 자다. 그 말씀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 말씀의 실효성을 보여 줘야 돼요. 그 말씀은 실제로 이루어져야 된다 말이에요.
그 말씀 하나 이루어지기 위해서 세상 모든 사건이 총 사건이 일어났고 그리고 모든 지진이 일어나고 우리가 개척교회하고 하는 모든 사건이, 예수님이 죽었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이 사건 하나 전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여기서 뭘 전해야 하느냐 하면, 이 전체가 결국 뭘 유발하느냐 하면, 로마서를 유발해요. 그 전체 내용이 로마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나중에 사도행전 가면 로마에서 전도하잖아요.
철저하게 하나님은 하나의 빈틈없이 하나의 허술함이 없이 지금도 우리를 이용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게 괜히 발 운동하라고 다리 운동하라고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발걸음 하나 머리카락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이용해요. 한 치의 착오가 없어요. 일말의 착오가 없어요. 하여튼 지독한 분입니다. 하나님 지독한 분입니다. 철저하게 이용해요.
그래서 어제 아침에 설교할 때 인간의 멱살 쥐고 말씀으로써 때린다. 말씀으로 계속 박살내는 계속 때리죠. 결국은 뭘 아느냐 하면, 아아, 하나님은 철저하게 한번도 우리한테 진적도 없고, 항상 모든 것이 예스가 돼요. 예가 되고 노가 안돼요. 모든 것이 항상 예수님의 예스가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이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두 자로 '감사'라 했지요. 그래서 목회자들 모인데 딱 이야기했어요. 목회하면서 감사한다는 것이, 특히 개척교회하면서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나오기 어려운 일이냐 말이죠. 그건 존재가 무너져야 감사가 나와요. 자기 존재의 토대가 자기로부터 주님으로 바뀌어 버려야 감사가 나온다고.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마지막에 감사가 나오는데 지금 뭐 하나 남는가 하면, 어떤 분이 그런 질문했어요. 지옥 가도 감사합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한다 했지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올 사람이 아직 덜 왔지요?
출애굽기 14장 17~18 봅시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보면, 제가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걸 최종, 마지막에 집어넣었는데요. 곧 나옵니다. 출판에 들어갔어요.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18절에 보면,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그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지옥을 왜 만들었느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이 여호와인 줄을 철저하게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어요. 지옥에 가서야 여호와가 여호와 주 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놔야 돼요. 지옥에 있으면서 지옥에서 영광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야, 주님은 대단하다. 어디서요? 지옥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양쪽에 영광을 다 받는 거예요. 천국에서 영광을 받고. 지옥에서 영광을 받고. 비로소 나는 천상천하 신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다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거예요. 지독한 자기 집착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어떤 피조물에게도 빼앗기는데 실패할 분이 아닙니다. 여기는 착오가 없어. 아까 이야기한 절대적인 착오가 없습니다.
지옥 만들어서 영광 받겠다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예수 안 믿는 자기 엄마 지옥 갔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관점이 보세요. 내가 예수 그렇게 전했는데 우리 엄마가 예수 안 믿고 지옥 갔다. 그렇다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감사가 날아가죠. 일단 감사가 날아가죠. 불효했다는 느낌이 들지요.
제가 어제 대구강의하면서 박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셔요. 박 목사님은 개척교회 하시는 분인데 그 사모님하고 둘이서 지금 몇 년째 죽을 맛이에요. 어떤 죽을 맛이냐 하면, 자기 어머니가 연세가 팔십 셋인데 노인질환 완전히 종합병동 돼버렸어요. 심근경색에다가 치매에다가 마비에다가 또 몇 가지 더 있어요.
제가 그렇게 했어요. 호스 빼세요. 이거 뭐, 환자 가지고 지금 농락하는 겁니까? 호스 빼세요. 밥 주지 마세요. 보내세요. 그냥. 하는데 불신 형제들이 그걸 용납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자기가 불효자 되는 것을 못 참습니다. 마지막에 자기가 불효자로 노출되는 것을 참질 못합니다. 자기가 불효자 되면 밤잠을 못 자는 인간들이 불신자들이에요.
우리 어머니를 저런 식으로 고통 가운데서 보낸다는 것이 본인이 못 참아요. 본인이 자기한테 정죄하고 본인이 자기에게 심판해 버립니다. 이 나쁜 놈아. 이 나쁜 놈아. 우리 어머니가 자식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피땀 흘렸는데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부모님이 고통 할 때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노? 마지막 보내실 때 고통 없이 보내야지. 애야, 병원 보내라. 밥이 안 들어가잖아요. 호스 꼽아라. 호스 꼽아서 안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나? 모든 재산을 바쳐서라도 해라.
그런데 왜 목사님 내외가 83세의 노인 똥, 오줌 다 받아내고 병원에 옮기고 하는 힘든 절차를 다 해야 되는가? 목사가 시간이 제일 남아돌거든요. 형제 가운데. 목사기 때문에. 둘 다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했어요. 노골적으로 돈 푼이나 줍디까? 돈은 뭐. 병원비 약간 주고 끝나버려요. 그들은 뭐냐 하면, 걱정해 주는 그것이 불효자에서 효도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전화해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야야, 병원에 자주 가봤나? 저거들은 병원에 안 와요. 오질 않고 병원에 자주 가 봤나? 요새 어머니 미숫가루 좀 잡숫나. 호스에 끼어 들어가나. 그것만 하고 끝나버려요.
그러한 자아 입장에서, 자아가 있을 때 뭐가 생긴다 했어요? 자기 의가 생기지요. 그죠? 자아가 생기면 그런 자아인데 그 어머니가 마지막에 만약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실 때, 자기한테 뭐가 남느냐 하면, 불효한 가운데서 불효했지만 그중에 더욱더 불효한 것이 나에게 그렇게 잘해주고 나를 키우는데 고생했던 그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못 넣어 준데서 오는 자책감. 이것이 결국 뭘 막습니까? 피조물로서 마땅히 돌려야 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제거해 버리죠. 사라지게 만들죠.
그런데 그 사람은, 제가 차 때문에 한 20분 늦었지만 차 막혀서 그렇잖아요. 아까 그 이야기했지만 그 대목 다시 이야기할게요. 중요한 대목인데 다시 한번 이야기할게요.
에서나 야곱이 말씀의 예언에 의해서 태어났거든요. 그럼 시작을 누가 시작한 거냐 하면, 하나님이 시작한 것 아닙니까? 막상 하나님이 시작해놓고 막상 이 땅에 태어나니까 갑자기 모든 사고방식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더라?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없을 때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맞으셨는가? 라는 것은 까마득히 생각을 못하고. 우리 어머니란 존재가 없을 때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 어머니를 만들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 못하고, 내가 태어났고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했는데 우리 어머니가 예수 안 믿고 지옥 갔다. 도대체 나는 불쾌해서 못 살겠다. 진짜 미안스러워서 못 살겠다. 나를 아주 불효자를 만들었구나. 하고 이렇게 하면,
여기 출애굽기 14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지옥이라는 걸 만들어 논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는 지옥 참 잘 만들어놨네.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기 잘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영광 받아야 돼. 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 지옥 만들어 놨는데 그런 하나님의 입장은 생각 안 하고, 자기 엄마 고생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원인이 되게 천하고 되게 착해 보이지요. 지고지순한 착한 효자지요. 그게 그 인간 지옥 가야 됩니다. 왜? 원천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토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이 토대가 아니고, 그 토대에 누가 자리 잡고 있어요?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도 내가 시작한다. 그게 토대가 되어 있는 이상은 개척교회를 하든 뭘 하든 간에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지옥 가봐야 주님께 영광 하는 소리 나오지, 그전까지는 몰라요.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참, 복음의 이름으로 거짓말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굉장히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죠. 복음의 이름으로 복음을 위해서라면 거짓말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 굉장히 다 좋아하는데 복음 때문에 거짓말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시큰둥해져요.
복음을 위해서는 간음할 수 있습니다. 무지무지 기분 좋아하지요. 이게 누구냐? 윌리암 오캄이 이야기했거든요. 복음을 위해서라면 간음 안 할 수 있습니다. 그 말 들으면 그만 시큰둥해져버려요.
복음을 위해서 목회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기분 되게 좋아해요. 돈까스 종업원 해도 되니까. 정당화되니까 좋잖아요. 복음을 위해서 목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기분이 쫙 깔아 앉지요.
복음을 위해서라면 취직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요. 왜? 복음 핑계되고 취직 안 해도 되니까. 복음을 위해서라면 악착같이 나는 돈 한 푼 더 벌어서 복음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한 푼 더 벌고 그걸 통해서 그 돈 가지고 복음 전하겠다. 왜 악착같이 취직할 생각 안합니까? 그게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사람은 복음 위해서, 복음 위해서 하지만 그 자아가 남아 있는 이상은 자기 편하게 살고자하는 핑계거리로 동원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결론이 뭐냐? 복음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걸 반을 깎지 말자 말이죠. 복음을 위해서 악착같이 요새 직업훈련 공짜로 배우죠. 직업훈련, 선반공, 전기공 공짜로 배워서 복음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내가 감내 하겠다. 라는 것까지 할 수 있어야 돼요. 복음을 위해서 놀자. 이것만 좋아하지 말고.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목회하다가 복음을 위해서 안 할 수도 있고, 안 하다가 할 수도 있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지 선이고, 복음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모든지 악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토대 자체가 복음 토대기 때문에 복음 토대에서 솟아나오는 삐져나오는 모든 빛은 다 빛이거든요.
문제는 복음을 위해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의하면,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지 의이고, 복음을 위해서 아니면 모든지 악이 되는 겁니다. 이런 점을 아시고 우리는 뭐든 자유로워 돼요. 진정한 자유가 와야 돼요.
오늘은 칸트 이야기하겠습니다. 20분 강의 빠진 부분은 나중에 강의듣기 보시면 돼요. 지난번에 라이프니츠 이야기하고 오늘 존 로크 이야기하면서 칸트 이야기 들어가는데 몇 페이지냐 하면, 150 페이지입니다. 150페이지부터 157페이지 위까지 오늘 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사실은 진짜 어려운 것은 157페이지부터 어려워요. 157페이지부터 끝까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예고편에 불과해요. 오늘은 진짜 어려운 게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초기관념론 들어가면 어려운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공부를 할 때마다 항상 우리가 먼저 물어야 될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볼 사람이지, 라이프니츠나 칸트 이야기를 우리가 왜 배워야 되고 그걸 관심 두어야 되느냐? 그 따위 인간들 지옥 가도록 놔 둬 버리지 뭐 때문에 신경 쓰느냐? 우린 칸트 그런 것을 몰라도 되잖아. 라는 생각이 항상 들어와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성경공부를 하든, 신학공부를 하든 간에 우리는 뭘 감추고 있습니다. 뭘 감추고 있느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라는 것을 감춘 채 무엇이 진리입니까를 묻고 있는 거예요. 무엇이 진리입니까를 그냥 묻고, 아아, 이게 진리이고 이게 진짜 내용이구나. 알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더 알고 싶어. 나는 성경을 더 알고 싶어. 라는 말 중에 항상 우리가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으로 빼돌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이야기해줘요. 그거는 당연한 걸로 봐주소. 그만 눈감고. 하고 빼돌리고 그 다음에 칸트가 뭐냐, 라이프니츠가 뭐냐? 이렇게 나올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왜 칸트나 라이프니츠를 십자가 복음하고 딱 맞닥뜨려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 너무나도 옳은 말을 해요. 지난 시간 들어봤지요. 옳은 말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하는 이것을 생각 안 하고, 이것은 한 곁에 치워놓고,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좀 더 멋지게 반듯하게 살 것이냐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일단 살아 있는 내가.
이게 어려운데. 살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서는 이것이 죄라는 생각을 칸트나 라이프니츠는 미처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이거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존재에서부터 시작한 존재론이란 말이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157페이지부터 위에 나오는 사람인데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들어봤어요? 쇼펜하우어, 니체 이런 사람들. 쇼펜하우어나 니체 이런 사람들, 그 다음에 들뢰즈라든지 까뮈 이런 사람들은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 존재에서 존재론으로 나오는 이것이 뭔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 왜 문제가 있느냐 하면, 철학역사 3000년 역사 가운데서 전부다 존재에서 존재로 나왔는데 칸트나 라이프니츠라든지 옛날에 플라톤이라든지 아리스토텔레스.
전부다 있는데서 반듯한 있음, 더 깨끗한 있음, 순수한 있음, 착한 있음, 행복한 있음, 이런 것.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행복론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은 행복론이거든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은, 칸트 같은 사람은 아름다움. 모든 것은 아름다움으로 돼야 추하면 안 되고 아름다워야 돼요. 존재하는 것이 아름다워야 돼요.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존 로크 같으면, 오늘 해야 될 존 로크의 경우에는 모든 인간의 기본은 뭐냐 하면, 소유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비록 배가 고파도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소크라테스도 이야기했죠.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도 다 마찬가지에요. 옛날에는 행복론이에요. 전부다, 스토아 철학도 행복. 인간은 행복해야 살맛이 나지,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불행하면 슬프다.
그러면 행복을 어떻게 찾겠느냐? 이 행복론에서 나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복론이고, 그 전에 나온 게 어거스틴인데, 어거스틴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 이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무슨 용도가 됩니까? 내 영혼의 안식과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다 이 말이에요.
그 사람은 결국 아까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도 바울의 폭풍을 모르는 거예요. 사도 바울 때문에 같이 동승했던 죄수들과 간수들이 난데없이 죽음이라는 말이 죽음이지, 죽음의 뜻이 뭡니까? 죽음이란 느낌이 뭐냐, 괴로운 게 뭐냐?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죽고 다시 살면 이거는, 청룡열차와 죽음의 차이가 뭡니까? 청룡열차 휘~익 백 날 타고 결국 땅에 도착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덜 무섭잖아요. 그런데 죽음은 진짜 죽음이에요.
그 죽음을 요새 박주영이가 보여줬잖아요. 지난 나이지리아 전에서. 다 시청 꺼버렸습니다. 끝났다고. 1분 남았는데 1:0인데 끝난 문제 아닙니까? 박주영이 광신도는 봤을 거예요. 과연 광신도는 희망을 얻고 부활을 경험했죠.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하나님이죠. 그리고 박주영이 보려고 하다가 총 맞아 죽은 연천에서 애들. 분명히 축구중계 보다가 죽었다니까. 내 유언비어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이 많아. 자다가 간 게 아니고, 축구 보다가 회식하고 술 먹고 하다가. 내 예상인데 예상이니까 성경 아닙니다.
철학하는 사람이 결국 뭐냐? 일단 살아있다 말이죠. 일단 살아있는데 신이 원하는 인생으로 살자. 이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뭘 섬기겠어요? 일단 살았다 하는 그런 의식이 죄라는 것을 니들이 아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결국 무슨 소리냐? 안 살아야 되는데 안 살아도 되는데 왜 살고 있느냐고 누가 우리한테 물어본 적이 있느냐 말이죠. 내가 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저 안 살아도 되는데 왜 살립니까? 이런 식으로 물어 본 적이 있느냐 말이죠. 그렇게 묻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살려주셨는데 어떻게 반듯하게 살까요? 이 물음을 묻지, 나 지금 반듯하고 안 반듯하고 깨끗하게 살고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라는 식으로 묻지는 않잖아요.
그게 바로 아까 사도행전의 폭풍이야기 그것까지 연관됩니다. 쇼펜하우어 이런 사람들은 약간의 낌새를 챈 거예요. 성령의 역사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살론을 이야기해서 1950, 60대 젊은 엘리트 대학생들 많이 자살했습니다. 30대, 40대도 마찬가지고. 지는 자살 안 하고, 쇼펜하우어는 자살론 썼고. 그 다음에 니체 자살했고, 들뢰즈 자살했고, 그 다음에 까뮈 자살했고, 전부 자살했어요.
왜냐하면 존재에서 존재로 나가는 것이 자기가 유일한 복음이었는데 이게 해답이 없어요. 존재의 해답이 없으면 결국 남는 건 뭡니까? 존재를 파괴함으로써 해답이 있겠지요. 그러면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기 진리를 알아야 되니까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수술하는 거예요. 죽는 거예요. 죽으면 거기서 해답이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자, 존 로크 봅시다. 존 로크는 사람이 왜 사는가 하면, 천부적인 인권으로 산다는 겁니다. 하여튼 말 들어보면 다 맞아요. 틀린 말이 없어요. 우리 공부하면서 여기 나온 사람들이 바보들이 아니에요. 존 로크의 이야기입니다.
존 로크의 이야기는 뭐냐? 인간에게 천부적인 존엄성, 인품, 인격을 준거다. 그러니까 살게 한 것은 뭐라고 보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살게 한 것은 두 자로 이겁니다. 존 로크의 이야기입니다. 살게 한 것은 '권리'에요. 존 로크의 이론에 맞는 사람이 사형제도폐지하자는 사람과 맥락이 같지요.
천부적인 인권인데 하나님이 살게 했는데 니가 왜 건방지게 판사 니가 니 마음대로 죽이느냐? 죄 지었으면 죄 값을 치르도록 해야지 왜 죽이느냐 말이죠. 죽여 버리면 죄 값이 안 치러지잖아. 살려서 깔짝깔짝 괴롭혀야지. 그래야 지가 반성이 되고. 반성이 안 되면, 반성이 안 되서 30년 더 살고 죽으나 지금 죽으나 반성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행여나 백 명 중에서 한 명 반성되면 사형제도폐지한 것이 이익 아니냐? 이게 사형제도폐지해야 된다는 정당성이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산다는 게 권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도 사는 게 권리가 아니죠. 사는 게 축복이죠. 사는 게 선물이잖아요. 선물이라는 건 또 달라고 할 수 없잖아요. 선물 주는 사람보고 또 주세요. 하는 것은 이거는 선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권리를 요구하는 것 아닙니까?
존 로크의 이야기는 사는 게 권리인데 사는 게 권리이기 때문에 더 권리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정당화를 부여해요. 소유의 정당화인데 어떻게 소유하느냐 하면, 노동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많은 소유, 게으른 사람은 적은 소유해서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권리를 많이 누리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려야 될 착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살게 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놈이기 때문에 그 놈은 가난해도 싸다 이 말입니다.
이거요 결론적으로 들으면 낯설게 보이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무지무지하게 기분 좋은 이야기에요. 뭔가 존 로크의 이야기는 소위 품위 있는 체 하면, 거부 반응하지만 품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우리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듯이 유행가 부르듯이 솔직해지자. 이러면 진짜 누구 평생 살면서 솔직하게 이야기한 사람 없는데 존 로크 니가 내 마음에 든다. 바로 그거다 그래. 괜히 품위나 하나님, 종교, 신학 해봐야 그거는 혹시 그 다음에 복 받아서 착한 사람은 복 받을까 싶은데.
사실은 따지면 우리 살아가는 노림수가 뭡니까? 내가 살고 싶다. 그 외에는 다 거짓말이라고 유명한 말을 했지요.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그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있지요. 그가 문 밖에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알고 있어요. 제가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살고 싶다. 그 외에는 다 거짓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딱 깨놓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굽니까? 존 로크이다. 니 왜 살라고 하느냐? 사람이 재미 맛보려고 하는데 살려면 돈이 있어야 골프를 치지요. 돈이 있어야 행글라이더 하지요. 돈 있으면 자기용 비행기해서 남들은 차 막히고 부산 오는데 20분 늦고 이러지만 비행기 타고, 헬리콥터 타고 여기 내리면 금방 오잖아요.
이게 전부다 신의 축복이고 내가 열심히 부자 되려 하는 것도 신께서 허락하신 고유 권리인데 어느 놈이 나한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누가 시비 거느냐? 라고 하는 게 존 로크입니다. 존 로크가 굉장히 이 사람이 인기가 캡이에요. 최고에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도시민들, 그걸 부르주아라고 하는데 도시민들의 재산축적을 이 사람이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켜 준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그 권리를 만약에 나태해서 놓친 놈들은 가난해도 싸고, 탈북자들은 굶어죽어도 싸고, 북한주민은 죽어도 싸고, 될 놈은 되는 것이 그게 신의 축복이다. 이것은 압구정동의 소망교회나 이런 아주 서울에 헌금 많이 나오는 교회 있잖아요. 그런 교회 설교로서는 완전히 최고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이 존 로크라는 것을 모르고 다 뭘 집어넣는다? 성경 구절을 다 집어넣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초반에 이야기했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성경 전체가 뭐냐 하면, 시작을 하나님께서 시작한 걸로 모두 나오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시작을 누가 합니까? 나부터 시작하거든요. 나부터 시작하면서 성경의 그런 것들을 찾아낸다는 자체가 성경해석 전부다 꽝이에요.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요새 ‘출산드라’라 하는 그 사람이 교주 여자가 나타나 하는 말이 '시작은 삐쩍 골았으나 나중에는 비대하리라.' 나오지요. 성경 구절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리라." 그걸 먹습니까? 먹습니까? 하면서 나오잖아요. 그걸 보면서 야, 존재를 찬미하는 거예요. 나의 존재됨을 찬미, 내가 살아있음을 찬미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삶에 대한 긍정이죠.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 존 로크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존 로크가 말하는 신은 어떠냐? 신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개인이 경험상 내가 다듬어가는 것이 신이다. 야, 멋진 말 또 했네. 완전히 로크 오빠! 신이라 하는 것은 남이 이야기해주지 마라 말이죠. 그저 참고로만 이야기해줘라.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성경에서 설교할 때 그것은 백 날 성경 말씀대롭니다. 라고 해봤자 우리는 그렇게 듣지 말고 목사가 한 평생 살면서 누적된 자기 체험담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 교인들이 앉아 있으면, 교인들은 목사 말 들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도 내가 만약에 교인이 17살이다. 열일곱 살 때 어떤 목사 설교 듣는다하면, 17년 간 들었던 자기 인생경험에다가 방금 오늘 아침에 했던 목사 설교가 하나의 참고 파일이 되서 옆에 그냥 갖다 놓는 거죠. 그냥 경험한 거예요. 그러네. 뭐, 그럴 수도 있네. 뭐 그런 하나님일 수도 있겠어. 갖다 놓는 거예요.
하다가 자기가 어려울 때는 그 파일을 열어서 그 목사의 인생에 대해서 다는 모르고 그 말한 것 중에서 감동된 것 있잖아요. 몇 가지 건져서 하나님을 아는데 약간의 플러스알파만 보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18년 지났다면, 이 목사가 40이라면, 40년 경험한 신 따로 있고, 18세 먹은 소년이 경험한 신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이걸 하나로 강제로, 너는 말이야. 18세, 뭘 알아. 어떻게 이렇게 구박을 주고 사람을 힘들게 하느냐 말이죠. 니는 니 하나님, 나는 내 하나님, 하라 이거에요. 이게 사람이 존재하는 권리다 이 말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신세대. 요새 신세대 들으면 완전히 기분 좋을 이야기거든요.
신세대 군인 이렇잖아요.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래? 이렇게 해야 된다. 연대장 대령이 이야기하면, 그거는 대령 니가 그렇게 봐서 그렇고 나는 상병으로써 내 나름대로 지키면 될 것 아니냐? 이번에 순찰 잘 서. 하면, 그거는 중대장 니 생각이고. 나는 순찰 안 서도 된다 싶으면 안 서버리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터넷 시대에 정보가 공유되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에는 중대장만이 알고 있는 그게 있어서 중대장 말 안 들으면 모든 게 실패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런데 그 정보가 대대장에서 중대장, 중대장에서 사병으로 이렇게 명령이 하달하는 식이 아니라 명령도 정보 아닙니까? 지식이잖아요.
그 지식이 다른 곳으로부터 와 버리면 사람이 판단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 판단력으로 자기가 판단해서 중대장의 지시는 하나의 참고자료에 불과한 거죠. 복종해야 될 명령이 아니고, 참고로 할게. 이렇게 한다 말이죠. 이게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서 그래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칸트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존 로크 이야기 잘 들었지요. 존 로크 할 때 뭘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천부인권설. 우리의 사는 것이 권리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사는데 뭐 때문에 사느냐? 존재를 누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했습니까? 소유가 필요하죠. 그러면 소유가 긍정되죠.
여기 151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봅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유재산이란 자신의 필요조건이 되는 한해서만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중세 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갖는 것은 인정하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중세 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 재산은 자기가 갖고 있어도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상당히 은혜롭죠. 사실은 내막은 은혜롭지 않아요.
하나님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가 달라 하면 내놓아야 된다는 교회 거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 뜻이라는 것은 교회를 비껴서 따로 주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내려오게 되어 있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 신부 아닙니까? 신부가 내 놓아라 하면, 그건 주의 뜻입니다. 그래서 신부를 영적 아버지라 하잖아요.
영적 아버지란 말이 어디 나옵니까? 고린도후서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자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의 아버지라 했잖아요. 영의 중매쟁이, 또는 영의 아버지 되잖아요. 사도 바울 같은 계통에 있는 자가 누구냐 하면, 신부잖아요. 신부.
천주교회는 교회가 없어지지 않아요. 교회가 없어지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음부의 권세를 이길 게 없기 때문에.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은 교회에서 뿜어 나옵니다. 교회는 뭐냐 하면, 화산입니다. 화산에는 뭐가 나옵니까? 마그마가 나오지요. 교회는 뭐가 나와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가 없어져버리면 이거는 큰일 나는 소리지요. 천당을 못 가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뭐라 했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맬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 하는 이것을 누구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사도 계열, 사도 계통들에게만 그게 폐쇄적으로 줘요. 아주 특혜를 준 거죠. 특권을 줘서 다른 사람은 못해요. 천국의 열쇠를 누가 갖고 있어야 되느냐? 교황이 갖고 있어야 돼요. 베드로가 갖고 있어야 베드로 후계자가 누구냐? 교황이죠. 로마의 그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당시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하다 싶으면 다 내라 이 말이죠. 만약에 안 내면 어떻게 되느냐? 안 내면 지옥 가는 거예요. 안 내면 지옥 가고, 만약에 선조가 믿음이 없어서 돈을 안 냈을 경우에는 패자부활전이 있는데.
지금 제가 여름수련회 때 제목이 뭐라 했습니까? [은혜와 양심]이잖아요. 양심이라 하면 반드시 뭘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연옥에 대해서 언급해야 돼요. 성경에 나와 있는 '양심'이란 구절에 대해서 다 찾아보고 있고, '연옥'에 대해서 지금 연구를 하고 있는데.
연옥이라는 게 왜 필요하냐? 지금 개신교에서 말은 안하지만 연옥 비슷한 게 막 나오고 있거든요. 연옥이 나올 수밖에 이유가 뭐냐 하면,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후손이 재산을 바치면 그것이 성과가 되어서 선행이 되어서 이미 죽어가는 사람에게 기도가 돼요.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가 됩니다.
지옥 가 있는 자기 부모, 지옥 가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전도하게 되면, 지옥은 후회하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이 어때요? 굉장히 여리겠지요. 와 보니 내가 잘못되었구나.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가 지옥 가서 후회하지요. 후회하기 때문에 후회하는 마음에 복음 들어가면, 그냥 백발백중 다 꽂혀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 빼어오고 안 빼어오고는 후손들에게 달려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일반 서민들한테 희망을 줍니다. 부모한테 복음 못 전해서 부모를 지옥 보냈을 때 계속 응어리가 남아있지요. 자식한테는. 부모를 지옥 보낸 불효자라는 응어리를 이런 연옥설이 있음으로써 뭐가 돼요?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되지요.
편안하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인간이 사는 것은 목적이 뭡니까? 행복. 전부다 철학자가 한 통속이에요. 지금. 마음이 편안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예수님에 영광 돌리기 위해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게 아니고, 지옥에서도 찬송한다는 그것 때문에 오는 게 아니고,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한번 봅시다.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때만 갖는다. 부자는 항상 기꺼이 나누어주고 기꺼이 성체 받을 준비]
성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줘야 그것이 영생을 얻는 터가 된다고, 디모데후서 마지막에 있지요. 니가 선한 일을 함으로써 뭐가 된다? 니가 영생 얻는 터를 삼는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부자들아, 니 돈 아니잖아. 하나님이 준 돈 가지고는 가난한 사람을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만 부자 됨을 내가 정당하다고 인정해 줄게. 교회에서. 탕탕탕.
[부자들이 가진 부와 권력은 신과 전체 사회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신과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부를 관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이었고, 이게 중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이 사도행전 2장에서 나눠주는 이야기나 디모데후서 마지막 대목이나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 이야기할 때 전부다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하죠.
그런데 이런 측면이 뭐가 문제라고요? 또 다 잊어버렸지요. 지금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재산이라는 이 말 자체에 어떤 하자가 보입니까, 어떤 오류가 보입니까? 완벽 그 자체잖아요. 야, 어느 위대한 신학자가 이렇게. 진짜 완벽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아까 강의할 때 했잖아요.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의 문제점이 뭐라고요? 뭘 빠뜨렸다고요?
선을 행하는 나는 안 죽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기본 선으로 간주한다는 말이지요. 나 같이 착한 놈, 살려야지, 누굴 죽이냐 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살고자 하는 이 의지만큼은 제발 핍박하지 말고,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좀 착한 것으로 봐주소! 이것이 깔린 채 그 다음에 어떻게 바르게 반듯하게 살아보자. 하는 것이 항상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부자의 문제점은, 재산을 나눠주는 게 착합니까, 부자 되는 게 착합니까? 묻는 그 질문 자체에 있어요. 부자의 문제점은,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나눠줌과 안 나눠줌과 상관없이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생각 없이 재산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어떻게 재산 관리하면 내가 착한 사람이 될까? 그게 문제에요.
그래서 그 뒤에 봅시다.
[올바르게 사용하지 아니하면 도둑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참, 은혜롭다. 정말.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의 성직자들 대부분은 중세 장원제도의 경제·사회적 관계는 자연의 영원한 질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 설명해야 됩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현재 장원제도 영주가 있고, 신의 뜻에 의해서 농부가 된 사람이 있고, 그보다 더 성질 더러운 놈은 뭐 해야 돼요? 도살자, 백정. 이런 인간들 또는 창기, 이런 인간들은 신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 덜 떨어진 거예요. 이 질서가 어떻다고요? 신의 질서가 고정된 거죠.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뭘 거부한 거예요? 변화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런데 존 로크에 들어오면 변화가 추진됩니다. 하나님은 현재 있는 이 세계를 그냥 중세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변화시켜서 거기서 정지시키고, 거기서 발전시키고, 사실은 더 명확한 용어는 진화시키는 거예요. 나중에 진화론 나와요.
그것이 이제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서 천부적인 인격을 지닌 인간이 되어서 세상을 개혁시키고 변화시키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시키는데서 변화 자체, 이 과정 자체를 뭐로 보느냐? 신의 새로운 역동성 있는 다이내믹한 질서로 보자. 라는 신학이 나옵니다. 그리고 철학이 나와요. 그 철학가 가운데 시발점은 로크가 했지만 그 철학을 정립한 사람이 누구냐? 유명한 칸트에요,
여기 나옵니다만 칸트는 그 동안 신을 찾자는 노력을 무의미한 쓸데없는 짓으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을 찾는 능력이 없다 했습니다. 또 찾고 있네. 이게. 하여튼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이 사람들이 신앙적이고 은혜로워요.
전에 쿠자누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15세기, 중세 최후의 신학자 쿠자누스는 말하기를 신은 무한자다. 신은 어디 있느냐? 유한자와 다른 무한자에 있다. 그리고 이 무한자에 의해서 유한자,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창조된 유한자를 더듬어 보면 무한자와 동질성, 동질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쿠자누스의 신학입니다.
흔히 말하는 신의 형성이 여기 있잖아요. 신에게 있잖아요. 그 형상은 그 형상에 의해서 피조 된 형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 속에서 형상을 찾아내면 돼요. 인간의 형상이 어떤가? 찾아내면 그 형상이나 신이 갖고 있는 형상이나 어떻다? 동질, 같은 질이라고 본 겁니다.
이 동질성이 존 로크에서 깨어지고, 칸트에서 깨어지고 깨어집니다. 어떻게 신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이 같단 말이냐? 인간에게는 무한자, 신을 찾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다. 왜? 칸트의 그 다음 이야기 들어보세요. 왜 그러느냐? 이 세상은 신의 질서를 찾는 게 아니고, 우연으로 창조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과학적 한계로서 잡히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고, 잡히지 않는 것이 신의 법칙이고, 진리이다 이 말이죠.
그전까지는 뭐냐 하면, 인간의 지식을 통해서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하는 것이, 인간의 지식을 통해서 신을 대충 어리 짐작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우연히 창조하신 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간이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펑펑 사건을 발생했단 말이죠.
연천에 총기사건 일어났다면 어느 놈이 잠자겠습니까? 잠 안 자고 버티지. ( ) 아무도 예측 못했잖아. 아무도 예측 못했기 때문에 여덟 명 죽었잖아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다. 그것 아무도 예측 못해요. 예측 했더니만 낫잖아. 하는 게 있지만 확률 상 드물고. 대부분의 일은 아무도 예측 못해요. 지금 쯤 내가 목마를 줄은 예측 못했습니다. 아무도 예측 못해요. 제가 예측 못해요.
칸트 주장은 그겁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하나님 은혜로 있다는 거예요. 참, 미친다. 칸트가 너무 은혜로워. 지금 내가 발걸음을 센다는 것, 머리카락을 센다는 것이 머리카락 조사하면 하나님을 안다는 게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아, 하나님을 도대체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하려고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거예요. 사건, 사건 만들어서 인도하는 거예요. 이게 칸트 주장이라니까.
어떻게 인간이 건방지게 신을 아느냐 말이에요. 신은 모르게 되어 있다. 존 로크는 어떻게 된다고요? 또 잊어버렸죠. 존 로크는 어떻게 된다고요? 신이 남긴 창조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신이 주신 질서를 체험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신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지요. 늘어난 만큼 신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죠. 다만 뭔 하지 마라. 누가 미리 아는 것처럼 우리한테 덤터기로 알려주지는 마라. 그건 니 생각이고, 내 생각은 아니다.
똑같은 이야기.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함이다. 똑같은 문장을 천사한테 나눠줬어요. 불교한테는, 그랬어? 십자가 졌어? 알았어. 이게 불교거든요. 그게 무슨 무의미냐? 천사에게 나눠주면, 똑같은 문장이지만 다 달라요. 왜 다른지 알아요? 존 로크에 의하면, 사람은 백지 상태에 있는데 존 로크는 인간은 백지다. 백지 상태로 있는데 누적된 체험들이 어떤 사람은 풍부하고, 어떤 사람은 빨강색이고 어떤 사람은 파란색, 이래서 그게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표상, 관념이라는 게 경험에서 나오거든요.
존 로크를 경험주의라고 합니다.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신이라는 관념도 경험하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신에 대한 경험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게 마땅한데 그게 뭐가 이상하냐? 그게 당연한 게 아니냐? 중요한 것은 뭐라고요? 존재를 누리면 된다 말이에요. 어떻게 누린다? 돈 벌어서 누리면 돼요. 어떻게 돈 번다? 일하라 말이에요. 일하기 싫은 놈, 먹지도 말라. 일해서 돈 벌어서 누려라. 인생을 즐겨라. 그게 신의 명령이다. 신의 권리에요.
교회에서 돈 많은 사람 장로 되고, 없는 사람 장로 백날해도 소용없고. 사찰이나 그래요. 신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무래도 신과 가까이 있다. 신에 대해서 많이 알기 때문에 복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성화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칸트는 변화를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 변화의 주인공은 누구여야 되겠습니까? 바로 인간. 이게 칸트가 이야기한 거예요. 신은 신대로 영광을 돌리고, 그 다음부터는 손을 떼 버리란 말이죠. 떼어버리고 이젠 할 일은 뭐냐? 신에 대해서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신에 대해서 하면 건방지고.
왜 건방지냐 하면, 김영기 박사라고 내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우리교회 나오는 집사님 딸인데, 그분이 이번에 삼성그룹에서 준 상, 한국이 자랑하는 과학상 받았잖아요. 상금이 나중에 2억 받았대요. 내 옆에 그분의 남편이 있었고 그 옆에 그분이 있어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사람이 한 이야기가 어떤 학생이 하양여중에서 강의할 때 참석했는데 박사님, 앞으로 이 일 끝나고 나면 무슨 일 할 겁니까? 라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런 말 했어요. 지금 내가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실험물리학자인데 지금 학생 질문이 뭐냐 하면, 이 일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무슨 일 할까 하는데, 현재 95% 모른대요. 그러니까 2000년 동안 연구한 것은 우주의 5% 밖에 모른답니다.
이 일하고 난 뒤에 뭘 할 것이냐는 그런 것은 건방진 생각이에요. 평생 다해도 95%는 그대로 있다 말이죠. 그럼 95%는 누구 몫인가? 바로 질문하는 학생들 몫입니다. 라고 답변했어요. 자기 아버지가 자기 딸한테 제 이야기하면서 목사님이 이야기하는데, 니 딸이 하나님을 안 믿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알라고 전도하라고 시켜서 전도해요.
이게 누구 주장이냐 하면, 칸트 주장입니다. 신에 대해서 건방떨지 말고 지금 뭐 조차 모르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내가 누구며, 이 세상은 어떻게 하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그것조차 모르는 주제에 무슨 신이 어떻고 그걸 이야기하느냐? 이게 칸트 생각이에요.
내일 일을 아느냐 이 말이죠. 모르죠. 모르면 내일 일에 대해서 가능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될 거예요.
칸트 철학은 어떤 사람에게 좋으냐? 하면, 성직자에게 좋은 게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무역하고 장사하는 일반 도시민들, 공장 세우고 그 당시 방직공장, 산업혁명이 일어났어요. 칼 라이트라는 사람이 방직기를 만들어서 대량생산이 가능했어요. 열심히 자본 투자하고 돈 빌려서 대출 받아 투자해서 이윤 남겨 이자 갚고 거기서 또 돈 남겨서 또 노동자들 헛간해서 또 공장 세워 이런 사람들에게 칸트는 완전히 구세주에요.
왜냐하면, 자기 하는 일이 뭡니까? 신이 남긴 우연을 차츰차츰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는 것. 이게 신이 주신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에요. 요즘 선교단체에서 하는 것 있잖아요. 사명이 땅 끝까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이게 칸트의 철학에서 멋들어지게 딱 아다리가 된 거죠. 그래서 칸트, 칸트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존 로크하고 칸트하고 차이점이 없네요? 왜 차이점이 없어요. 있어요. 존 로크는, 인간은 백지라 했어요. 텅텅 비어 있는데 경험이 누적되면서 그 경험 때문에 하나님도 알고 성경지식도 알아간다 이렇게 봤는데, 칸트는 인간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는데, 이성은 뭐냐 하면, 신이 주신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이 뭐냐 하면, 무조건적인 명령, 도덕적인 명령이에요. 이건 좀 어렵기 때문에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
이성인데, 이성을 뭐냐 하면, 그전까지의 중세 철학이라든지 그전까지의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 여러분 공부했기 때문에 알겠지요. 다 잊어버렸겠지만 다 안다 하고, 뭐냐 하면,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봤어요. 이성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그 다음에 조금만 참으세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참아야 됩니다.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