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11-14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Re..계 5 : 11-14 ( 경 배 )
이름 : 이근호(IP:)
경배
2006년 9월 17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5:11-14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 나라의 배치가 나옵니다. 겹겹이 둘러 싸여 있는 천사들이 쉬지도 않고 어린 양을 향하여 경배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경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경배의 마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환상입니다.
즉 인간들은 홀로 있을 때 끊임없이 환상과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것, 자신이 갖고 싶은 것,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은 한 시도 잊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너나 할 것없이 숨쉬고 있는 한 내뿜는 숨과 함께 계속 쏟아내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환상들이 깨어지고 현실로 돌아서는 순간은 바로 누구와의 ‘마주침’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만사를 잊고 자기만이 또렷이 부각되는 상황 속으로 숨어 지내고 싶어합니다. 그 누구의 감시나 간섭도 받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시적으로 자신은 최고의 신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현실 세계는 그런 자신을 가만두지 않고 계속적인 ‘마주침’으로 물결칩니다.
예를 들면, 고요한 가운데 홀로 방 안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도 집 주인이 와서는 “총각 방 빼!”라고 고함질러댑니다. 버스를 타도 요금과 행선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도 마주침입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와 대화를 할 수 없이 해야만 합니다. 이것도 마주침입니다. 서로 좋아서 만났더라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는 심정으로 헤어지게 마련입니다.
함께 같은 방에서 쭉 살아왔어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싸늘한 시신이 그 방에서 퇴거시켜야 하는 때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홀로 도만 닦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다보니 모든 것을 잊고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에게 찬양과 경배만 드릴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늘의 보좌를 쳐다보는 자를 도리어 ‘환상쟁이’로 간주합니다.
즉 ‘현실을 똑바로 봐야지 왜 환상을 쫓느냐’고 꾸중합니다. 과연 복잡한 마주침의 연속인 이 땅이 현실인가요 아니면 천군 천사들에 앉아 계신 어린 양의 보좌가 참된 현실인가요?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봐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하늘 나라 현실의 모형으로 그들은 등장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좌의 배치는 그저 하늘 나라에만 있는게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나라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민수기에 들어와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숫자적으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서 살 만한 참된 백성인가 확인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더 많이 버틴 지파들 같으면 숫자가 더 증가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으면 숫자가 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해서 징벌받은 자들의 특징은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왜 이들이 애굽을 이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좋아하는 것은, 애굽의 생활이 몸에 배겨서 더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착각하기를, 장차 천국이 지나온 애굽 나라와 유사한 줄 알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생소하고 다른 나라인데 그것은 환경 문제를 떠나고서라도 그 천국 나라에서 살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애굽 나라 속의 인간들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되고, 애통해야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긍휼을 여기는 자라야 했습니다. 그래야 천국이 저의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은 환경으로 인하여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애굽 나라의 습성이 무너지고 부서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즉 기존의 애굽 나라 사고방식과 천국의 사고방식이 조합시키는 식으로 새 마음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마음 가짐을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은 인도했을까요? 하나님은 ‘언약궤’라는 금으로 표피를 입힌 나무상자로 가지고 그들의 마음바꾸기를 시도하셨습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맹세와 약속이 담깁니다. 그 약속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와 관련된 생명의 법칙이 됩니다.
이 언약궤가 앞으로 나아가면 가로막던 이방민족은 패배하고, 이 언약궤가 멈추면, 이방민족들이 굴복하고 돌아오는 그런 약속의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방민족들이 자랑하는 무기는 갖게 되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죽고, 약속에 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아무런 강한 무기를 갖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악속만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내뿜는 능력이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능력이 되어 계속 승리하는 민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정된 상황이라고 여겨지자 지속적인 믿음은 사라지고 이미 자기 것이라고 여긴 나라만을 쥐고 그것을 그들의 생존을 위해 유지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는 약속이 없는 껍데기만 하나님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엘리야의 같은 경우, 엘리야는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늘에서 불병거와 불만이 내려왔고 이 땅에서 그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해서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죽음을 이긴 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망에 매여 계실 수 없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야 될 분’이리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도들이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긴 생명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생명이란 적어도 생존을 이길 수 있어야 그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생존에 급급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우리 죽을 목숨과 대체시켜 버렸는데 그 예수님의 목숨은 곧 ‘사망에서 이겨버린’ 목숨입니다.
우리 성도가 천국에서 천사들과 연합하여 우리 주님에게 영원토록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총기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것을 ‘피로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피’입니다. 우리의 노고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 분의 피’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자신의 욕망의 환각에 휘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